2020.3.2.월
아침.
담당의사가
물을 마셔도 된다고 한다.
그런데 물 한모금을 넘기는데 한참이 걸린다. 혀가 잘 안돌아가서다.
저녁부터 멀건 미음이 나왔다. 투여되던 영양제의 양이 반으로 줄다.
내가 오렌지를 까서 먹으니 남편이 껍질을 달라고 해서 냄새를 맡는다.
맛보고 싶은 욕구를 애써 참으며.
향긋한 오렌지 향기만으로도 무척 황홀해 한다.
"빨리 나아요. 집에 가면 맛있는거 많이 해줄께."
정말 먹을 수만 있다면 인스턴트 식품이든 정크 푸드든 다 허락하고 싶은 심정이다.
남편의 부어오른 얼굴이 넉넉한 부처님 상을 넘어 이제는 특수분장한 코미디언 같이 우습다.
남편이 그 퉁퉁 부은 얼굴로 코믹한 표정을 짓는다. 또 시작이다.
32년 전,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그런 기묘한 표정으로 날 어처구니 없게 하더니만.
남편의 표정 개그에 우리는 키득거렸다. 수술자리가 터질까봐 걱정하면서.
이 기막힌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고... 밖에는 봄도 오고 있다.
점심.
어제 사촌동생들에 이어 오늘은
양평의 사촌올케가 음식을 해서 오빠랑 같이 왔다.
갓지은 밥에 우럭강된장, 양배추쌈, 나박김치, 각종나물에 김, 고구마.
게다가 치약치솔셋트에 마스크까지.
오목조목 필요한 것들을 참 정성스럽게도 챙겨왔다. 언니도 편도가 안좋은 상태인데...
그러고 보니 나는 주변에 은혜만 입고 사는 것 같다.
진안의 이웃 옆집아주머니는 상사화까지 심어 주셨다.
우리사정을 모르고 선희언니가 가져온 꽃모종인데
보라와 닭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도 모자라
뜰에 상사화모종을 가지런히 심어놓고 사진을 보내왔다. 보라사진과 함께.
이곳은 아무 걱정말고 치료 잘 받고 오라며
이런 고마움들을 어찌 다 갚을까...!
저녁.
남편이
밤중에 식은땀을 흘려 베개와 시트까지 흠뻑 젖다.
환자복을 갈아입히고 베게와 침대시트를 갈아야 했다.
자는 걸 지켜보니 또 무호흡증이다. 모르긴 해도 30초 가까이 숨을 안쉬는 것 같다.
저렇게 숨을 안쉬어도 되나...노심초사. 그 때마다 흔들어 깨울 수도 없고..
호흡을 지켜보다가 휴대폰으로 남편의 병을 찾아보았다.
그동안 애써 찾아보지 않던 병을 슬그머니 검색한다.
흑색종(Melanoma) .
멜라닌색소가 생성되는 피부의 기저층에서 돌연변이가 일어나 생기는 악성암으로
암 중에서도 위험한 것으로 판명된다.....
피부의 어디에든 생길 수 있고 내장기관에 생기면 평균8개월 생존이고
신영복 교수는 이 암세포가 폐의 피부에 생겼는데 진단 후
1년 남짓 살고 가셨다.
식욕마저 달아난다.
이제껏 만난 세 의사의 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처음 진단한 A병원의 이빈후과 의사, 그 다음으로 만난 피부암 전문의,
그리고 이 병원에 와서 남편을 수술한 B교수까지 이구동성으로 일치된 의견이다.
아...
사람의 믿음이란 얼마나 취약한지....
어제의 희망도 희미해지는 것 같고..어둔 구름이 내리 깔린다.
신앙으로 시한부 암을 이겨낸 주변의 분들은 강한 신념으로 확신을 준다.
그건 의사의 통계일 뿐이다
하나님은 그 너머에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라고...
믿음을 가지고 흔들리지 말라고...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확신일 뿐. 확고한
내 것이 되진 못한다.
의학적 데이터와 보이지 않는 믿음 사이에서 솔직히 어느 쪽으로도 설 수가 없다.
비관도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상황.
앞을 멀리보면 더 힘들어진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오리무중이고
그걸 앞당겨 생각하는 건 하나도 도움이 안된다.
매 순간 오늘만을 사는 수 밖에.
웃겨 님이 마지막에 남긴 말처럼 "매 순간 오늘만을 사는 수"를
저도 아주 실질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야겠습니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과거의 짐에 눌리고, 허망한 미래의 꿈에 들뜰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기 '순간'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총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서 누려야겠습니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그 힘으로 완쾌되어 함께 웃으며 병상일기를 읽는 날이 속히 오기를 손 모웁니다.
언젠가 울 교회 목사님께서도 예배기도 중어려운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지요.
웃겨님이 자기 남은 생명을 반으로 줄이고 그걸 남편에게 주시라고 기도 했다는 글을 읽는 순간,
속으로 엄청 뜨금하면서도 부러웠어요~
평생 자칭 자유로운 영혼으로, 넘치는 자존감으로 우주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며 천방지축 (?) 살아온 남편, 이제야 60을 넘어 철이 들었는지 매사에 감사를 입에 달고 사는데..
자주 죽음에 대해 얘기하면
나는 '내가 나중에 가야 모든 주변이 편할걸..'
남편은 ' 아니야 내가 나중에 가야지 , 세상 물정 전혀 모르는 네가 혼자 어찌 살어' 걱정이 된다나~
며칠 전 남편에게 슬쩍 웃겨님 기도를 얘기하며
'난 그런 기도 못한다, 기대하지마~ 정말 웃겨님 대단해!' 했더니
남편 왈
하나님은 그런 기도 안들어 주셔! 혹시라도 웃겨님 남편이 먼저 가면, 웃겨님 남편이 사랑했고 사랑받았던 주변 사람을, 남편 사랑하듯이 사랑하며 살면 되는거야~ 너도 그렇게 살아야되! 너는 아마 그렇게 살거야! 하더군요..
칫!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모든 때를 아름답다고 하신 주님!
웃겨님의 아픔의 일기에서 빛을 보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