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 화
아침 6시 15분
일찌감치 환자들을 치료실로 불러 놓고는 늘 치료해주던 젊은 여자 수련의가 없다..
보조하는 수련의가 연락을 취하고 기다리는 환자들의 눈치를 살핀다.
15분 쯤 기다리니 여자 수련의가 급하게 나타난다.
늦잠을 잤나보다. 한참 잠이 쏟아질 나이에 ...고생이 많다.
어떤 환자 분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 괜히 공부를 잘해 갖구 참 힘들게 사네요."
맞는 말이다. 공부를 좀 안했으면 이렇게 새벽잠을 설칠 일은 없었을텐데.
아침을 먹는데 미음과 음료수가 한 쪽 코구멍으로 나온다.
뭔가 잘못된 거 같다. 다른 쪽 코구멍에서는 풀피리 소리가 나고...
'참 가지가지 하는구나...'
남편이 어처구니가 없는지 중얼거린다.
그런 남편을 보며 머리 속에 엉뚱한 그림이 그려진다.
우리에게 어린 손자가 있다면 짖꿎은 남편은 이런 장난을 칠 것이다.
" 너 이런 거 할 수 있어? 할아버지는 입으로 먹으면 코로 나온다. 볼래?"
그러면 손자는 말간 눈으로 아주 신기하다는 듯 그 광경을 바라보겠지...
이 얘기를 하며 남편과 킥킥거렸다.
오후.
담당의사 회진.
수술부위의 실밥을 뽑다. 피부에 절개자국과 바늘자국이 남는다.
그 위에 망사같은 테이프를 붙여준다. 2 주 후에 떼어낼 거라며.
가슴에 달린 진물 주머니 2개도 제거하다.
미음이 코로 나온다니 의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뚫렸나? " 하고는 입천정을 들여다보더니
"그런거 같지는 않은데..." 한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먹어도 되는지 걱정되는데
그는 성의없게 미음을 먹어도 된다고 말한다.
의사의 태도에 약간 기분이 상한다.
환자에겐 절박한 현상인데 의사는 늘 겪는 일상인 거다.
하기야 많은 환자들을 대하는데 어떻게 한결같이 성의를 보일 수 있을까마는,
그들이 보이는 태도에 마음이 상할 때가 많다.
밤.
여전히 진통으로 잠을 못 자는데 의사는 진통제를 늘려주지 않는다..
간호사에 의하면 이 의사는 진통제 양을 적게 쓰는 것으로 알려졌단다.
그게 장기적으로 환자에게 좋기 떄문이란다.
3월 4일 수
진물 주머니 1개 뺌. 이제 마지막 하나만 남았다.
진물이 그만큼 줄었다는 뜻이고 상처가 그만큼 아물고 있다는 얘기다.
오후 회진 때
결국 담당의사가 입천장이 뚫렸다는 걸 확인..
어제는 괜찮다더니만... 그곳을 콜라겐인가 하는 걸로 봉해준다.
3월5일 목
어제 입천정에 붙여 놓은 물질이 떨어져서 결국 실로 몇 바늘 꿰메다.
마취도 없이..
다시 금식. 그나마 먹던 미음도 금식이다.
꿰메 놓은 입천정이 터질까 봐 살어름을 걷는 기분인데
남편은 호두볶음을 하나 집어서 토끼처럼
앞니로 갉아 먹는다.
3월 7일 토
아침.
얼굴의 붓기가 미세하게 빠졌다.
붓기가 빠졌다고 하니 남편이 농담을 한다.
'음, 내가 그 쪽에 쫌 소질이 있나 봐."
아침식사로 미음, 단백질 음료, 흰 우유 200ml, 물김치 조금 나왔다.
식사 후에 군고구마 3분의 1개를 우유에 으깨어 주었다..
조금이라도 더 먹이고 싶은데 안 먹겠단다.
평소에 그렇게도 잘 먹는 남편의 식성을 제어했는데 이젠 반대가 됬다.
왜 아픈 사람 앞에서는 관대해지는 걸까.
어릴 때 아프면 엄마는 한없이 부드러워지셨다.
" 아가.... 월매나 아프냐.. 이것 좀 먹어봐라."
평소 때는 사주지도 않던 맛있는 것도 사다주시고.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잘 먹을 때는 안 주고
꼭 아파서 먹을 수 없을 때 맛있는 걸 사주는지, 이상했다.
남편을 간호하며 그런 엄마의 심정이 된다
진통 없이 잠을 푹 자게 해주고 싶고,
몸을 씻겨서 상쾌한 기분을 갖게 해주고 싶고
하루 빨리 회복되어 맛있는 걸 먹이고 싶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얼마든지 귀찮아도 좋다.
이기적인 나의 어디에 이런 사랑이 숨어있었던 걸까.
나도 몰랐던 나의 새로운 발견이다.
막혔던 사랑의 샘에 퐁! 하고 작은 구멍 하나가 뚫린 느낌이랄까..이것도 참 신비한 경험이다.
그러고보니 하느님은 우리 안에 누구에게나 다 사랑을 심어주신 것 같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걸 꺼내 쓰는 훈련이 되지 않아서 모르고 있을 뿐.
어떤 기회를 만나면 저절로 그 안에 고여있던 사랑의 샘이 퐁 터져나오는 게 아닐까.
두 분이 어딘가 밀월여행이라도 가신 듯한 분위기군요.
병상일기를 통해서 삶의 온기가 전달된다는 게 신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