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의 <레퀴엠>

조회 수 1395 추천 수 0 2021.10.31 20:42:23

베르디의 <레퀴엠>

 

내가 오래 보관하고 있는 디브이디의 하나는 영국 음반회사 EMI가 주세페 베르디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서 제작한 <레퀴엠>(Messa da Requiem)이다. 2001125일 베를린필하모니 연주 실황을 녹화한 것이다. 베를린필 교향악단과 스웨덴 라디오 합창단, 그리고 네 명의 독창자가 연주자로 나온다. 지휘자는 그 유명한 클라우디오 아바도다.

베르디의 <레퀴엠>은 전체가 7곡으로 구성된다. 1“Requiem et Kyrie”(영원한 안식과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뜻)로 시작해서 7“Libera me”(나를 구원하소서)로 끝난다. 나에게는 소프라노와 합창단이 부르는 제7곡이 특히 인상 깊었다. 소프라노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루마니아 태생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Angela Gheorghiu)가 노래했다. 벌써 20년이 지나서 그런지 당시 모습과 비교하면 요즘 모습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크게 변했다. 7곡 중간 조금 못 미치는 부분에는 2곡 첫 합창곡인 진노의 날”(Dies irae)이 다시 나온다. 강렬한 불협화음의 선율이 높은음에서 낮은음으로 급격하게 내려온다. 마치 하늘에게 번개와 천둥과 화산재가 쏟아지는 느낌이다. 마지막 심판을 이보다 더 실감 나게 표현하는 선율도 없으리라. 우리는 모두 그 순간을 통과해야 한다. 용기와 위로가 필요하다.

이 곡은 합창단과 소프라노가 저음으로 깔리는 금관악기 소리를 배경음으로 리베라 메를 반복하면서 끝난다. 피아니시시모(아주 여리게), 그리고 라르고(매우 느리게) 악상으로 말이다. 한 인간이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과 같다. 지난날 인생살이에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세상을 떠날 때는 모든 격정이 사라진다. 오직 한 가지 사실에만 영혼을 집중해야 한다. “나를 구원하소서.” 이런 집중력이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살아있는 동안 창조주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에 구도 정진의 태도로 집중해야만 한다. 그 순간에 교회 걱정, 나라 걱정, 자식 걱정에 사로잡힌다면 불행한 영혼이 아니겠는가.

지휘자 아바도는 84분간의 연주를 (악보 없이 지휘하는 방식으로) 끝내고 정지 화면처럼 30초간 고통스러우면서도 희열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든 연주자도 숨을 죽였고, 청중들도 침묵을 지켰다. 보기에 따라서 어색한 적막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단순히 강렬한 여운을 남기려는 몸짓이 아니었다. 노래로 듣는 <요한계시록>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가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오려는 준비가 아니겠는가. 그가 위암 수술을 마치고 건강을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때라서 이 곡이 그에게 더 절절했는지도 모른다. 1933년생인 아바도는 그 뒤로도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2014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족: 설교자의 역할은 <레퀴엠> 지휘자가 아닐는지.


*위 글은 <월간 목회> 11월호에 실렸다. 여기 "진노의 날" 부분만 링크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up0t2ZDfX7E



[레벨:29]모모

2021.11.01 02:14:01

목사님,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 <레퀴엠>84분 전곡이 나오는 영상이 혹시 유튜브에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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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21.11.01 17:36:11

전곡 영상은 없습니다. 대신 마지막 곡을 들어보세요.

소프라노 게오르규의 노래와 합창과 심포니가 어울리는 곡입니다.

여기에 레퀴엠 전체가 압축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https://youtu.be/9Vm_uIKVHQ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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