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28() 10:30~15:00, 목포 지역 목사 공부 모임 <목회자 성서학당>

설교와 목사구원

 

 

설교를 전업으로 삼은 사람은 그 설교 행위에서 구원을 경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존재 근거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존재 근거를 상실한 채 설교자로 산다면 그는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라기보다는 복음을 판매해서 먹고사는 직업인인 셈이다. 그런 직업인으로서 살아도 성실하고 정직하며 회중들을 향한 사랑이 일정 정도 있다면 나름 보람있게 살아갈 수는 있으나 구원에 이르지는 못한다. 이 두 역할은 분명히 구분된다. 설교자가 설교 행위를 자기 존재의 근거로 삼는지, 아니면 삶의 도구로 삼는지를 말이다. 비유적으로, 홈쇼핑에서 완판을 꿈꾸는 쇼호스트는 상품을 파는 데서만 자기를 확인한다. 그는 상품에 대한 확신이 없어도 상품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면 자기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하는 것이다. 청중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주 민감할 수밖에 없다. 설교자는 도예가에 가깝다. 흙을 고르는 일부터 시작해서 가마에 굽기까지 전 과정에 자신의 영혼을 쏟아붓는다.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작품은 깨버린다. 교회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실제 역할이 쇼호스트이면서도 도예가 흉내를 낸다는 사실이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격이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1:8)리얼리티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가 될 수 있겠는가. 나 자신을 향한 반성이다.

설교 행위를 자기의 구원 문제와 연결해서 사는 설교자와 그렇지 못한 설교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조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전자에 속한 설교자는 설교자로서의 연륜이 늘어나면서 하나님 경험이 더 깊어지는 반면에 후자에 속한 사람은 제자리걸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제자리걸음으로 설교자의 영혼이 충만해질 수 없으니까 좋은 뜻으로건, 얄팍한 술수로건 한눈을 팔게 된다. 청중을 설득하려고 알게 모르게 대중심리를 이용하고, 나설 데 나서지 말아야 할 데 다 나선다. 총회장 자리를 놓고 이전투구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으려고 애쓴다. 성공한 목회자로 이름을 남기고 싶어서 늘 그럴듯한 포즈를 취한다. 겉으로야 화려하게 보이나 속으로는 피곤한 인생이다.

 

하나님 경험

작년 연말에 내로라하는 목사들이 국회 정문 앞에서 차별금지법 반대 1인 시위릴레이를 이어나갔다. 여러 명 중에서 이찬수 목사가 눈에 띄었다. 초대형 교회 목회자로서 비교적 개혁적인 목사로 이름이 알려진 이 목사가 그런 퍼포먼스를 펼쳤다는 사실은 예상외였다. 차별금지법이 역차별을 불러온다고 확신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대형 교회 목사들의 강력한 권유를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인지, 몇 년 전 본인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동성애 건으로 인해서 벌어진 해프닝을 의식한 것인지, 또는 퀴어(성소수자)신학을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반대한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초대형 교회 목사로서 구설에 한 번도 오르지 않았으며, 목회와 설교와 교단 정치에서 가장 모범적인 목사로 정평이 난 사람이기에 자신의 언행이 한국교회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사실을 진작 알았을 텐데도 그런 (내가 보기에) 경솔한 행동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의 영성과 신학과 신앙이 그런 정도의 수준이라는 사실 외에 나는 다른 답을 찾지 못했다. 졸저 목사구원(2020)에서 언급한 이 목사에 관한 내 느낌이 ‘1인 시위에 대한 전조였을까. 그 대목을 인용하겠다.

 

최근에 유튜브를 통해서 분당에 있는 모 교회 목사의 설교를 접했다. 그의 인격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설교였다. 많은 이들에게 감동적으로 들렸을 그런 설교가 나에게는 작위적으로 보였다. 가끔 듣는 거는 괜찮겠지만 매 주일 그런 설교를 듣는다면 그 교회의 예배 참석을 기꺼이 사양할 것이다. 성경의 깊고 신비로우며 놀라운 세계가 펼쳐지는 게 아니라 가장 건전하고 모범적이며 존경받을만한 삶의 표준들만 나열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부동산 투기를 하지만 우리는 하지 않는다든가, 세상 사람들은 원수 갚는 방식으로 살지만 우리는 오히려 사랑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등등, 모범이 될 만한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강조였다. 때에 따라서는 성 소수자에 대한 비판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설교 자체를 여기서 더는 언급하지 않겠다. 청교도적인 설교와 목회로 교회를 크게 키웠으니 나름으로 한국교회에 공헌한 것이다. 설교에 이어지는 퍼포먼스가 꺼림칙했다. 그는 설교에 이어지는 대목에서 신자들에게 결단을 촉구했다. 한쪽에서는 전문 찬양사역자들이 감성을 자극하는 찬송을 이끌었고, 목사는 찬송가의 가사를 크게 부르짖듯이 외쳤다. 이런 분위기에서 신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격스러운 듯이 은혜를 받는 모양을 취했다. 이런 장면에서 매 주일 설교를 통해서 신자들의 삶을 변화시켜야겠다는 목사의 절박한 심정이 읽히기는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설교에 대한 불안감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였다. 자신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설교에 이어서 경배와 찬양유의 퍼포먼스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비유적으로, 어느 지휘자가 KBS 교향악단과 함께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하면서 청중들의 반응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두 손을 위로 올려서 리듬에 맞춰 흔들도록 유도한다면 그는 자신의 음악 경험과 해석에 자신이 없는 것이다. 연주만 충실하게 실행되면 청중들은 그것 자체로 감동하게 되어있다. 은혜를 반드시 끼쳐야 하고, 신자들로서는 은혜를 반드시 받아야겠다는 강박감이 목사와 청중들을 유아적인 종교행태에 떨어지게 한다. 그런 방식이라 하더라도 은혜만 받으면 됐지 무슨 문제냐고 반문을 할지 모르겠다. 그건 은혜처럼 보일 뿐 사실은 감상적인 나르시시즘의 한 심리 현상이다. 그런 방식의 예배에서 일정한 심리적 힐링은 가능하겠으나 기독교 영성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일은 요원하다.

 

하나님 경험이 평생에 걸쳐서 수행의 차원에서 심화해야 할 근원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일반 그리스도인도 그렇겠으나 설교자는 더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 설교자에게 나타나는 그런 태도야말로 창조적이고 살아있는 설교에 이르는 첩경이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가 직접 만나거나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에 한번 경험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가까이 가는 게 최선이라는 말이다. 신학과 설교만이 아니라 세상만사가 다 그렇다. 자연과학의 본질은 아는 영역이 늘어날수록 모르는 영역이 더 늘어날 뿐이다. 현대의학은 사람의 몸에 관해서 많은 사실을 밝혔으나 이로 인해서 모르는 게 더 늘어났다. 의학은 병을 줄이라는 게 아니라 병의 가짓수를 더 늘린다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 경험도 깊어질수록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만 확인되는 것이다. 그걸 눈치챈 설교자는 하나님 경험을 화두로 삼고 구도 정진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서 동시에 그 하나님이 더 깊고 더 넓은 존재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시원적이고 종말론적이면서 언어 너머의 현묘한 대상과 마주하는 경험이다. 그런 경험이 성경을 해석하는 설교 행위에서 주어지기에 즐겁게 그 길을 갈 뿐이다. ‘구원을 이루라.’라는 바울의 경구가 설교 행위에도 들어맞는다. 구원을 이루는 과정이 없다면 설교처럼 지루한 작업도 없으리라.

간혹 설교가 부담된다는 말을 듣는다. 설교 횟수가 너무 많아서 시간이 부족하다는 뜻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설교 자체가 피곤하다는 말이라면 동의하기 어렵다. 테니스를 즐기는 목사는 테니스장에 나가는 일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 문제는 설교 행위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느냐에, 그리고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달려 있다. 내가 너무 원론적으로 말하는지 모르겠으나 설교 준비와 실행에서 자신의 하나님 경험이 깊어진다면 다른 그 어떤 일보다 즐거운 일이 설교다. 그런 경험이 없으니까 종교적인 잔소리꾼이나 아첨꾼이 되거나, 요즘 표현으로 점잖은 꼰대가 된다. 영혼이 비참해지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도 청중들에게 압도적인 설교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설교자들이 있긴 하다. 그런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확보되지 않은 설교자가 그런 흉내를 내다보면 청중들에게 너나 잘해.’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그럴 바에야 자기가 하나님을 얼마나 모르는지를 드러내는 게 속이 편하다. 정직하면 비참해지지는 않는다.

 

설교자의 내공

설교자도 사람인데 어떻게 설교를 하나님 경험에 근거하여 늘 즐겁게 수행할 수 있느냐, 하는 반론이 가능하다.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이라고 말이다. 시인을 향해서 시인도 사람인데 어떻게 시를 계속 쓸 수 있냐, 하고 묻는 거와 같다. ‘시가 내게 왔다.’라는 경험이 있는 시인은 누가 시를 쓰라 말라 하지 않아도 시를 즐겁게 쓴다. 그게 바로 자기 구원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에게도 시어가 졸지에 사라지는 경험도 한다. 삶과 시 행위가 지루하기도 하고, 무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삶에 실제적인 도움을 거기서 얻지 못하기에 고통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정신을 놓치지 않는다면 그는 다시 시 쓰기의 즐거움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시마(詩魔)가 오기를 기다린다. 문제는 그가 실제로 시인이냐, 사이비냐 하는 데에 달려 있다. 설교자도 성경 본문을 단순히 종교 정보로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 행위를 가리키는, 일종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알면 그는 손가락의 단조로움에 떨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달을 향해서 한 걸음씩 나아갈 것이다. 손가락은 단순해서 조금 지나면 시들해질 수 있으나 달은 아득해서 그걸 보는 사람의 영적 경지에 따라서 늘 새롭게 경험된다. 꽃도 보는 사람의 눈높이에 따라서 다르게 경험되듯이 말이다. 선승 불교 전통에서는 세상을 한 송이 꽃이라고 여긴다. 설교자의 내공이 깊고 넓고 높아져야만 창조적인 설교가, 즐거운 설교가 가능하다. 설교자의 내공이 깊어지는 첫걸음은 성경의 세계에 관한 궁금증이다. 설교자가 먼저 궁금하게 여겨야 청중들도 그 세계에 눈을 돌린다. 성경 본문에서 두 군데만 예로 들겠다.

첫째, 바울은 고후 4:6절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라고 썼다. 얼마나 궁금한 진술인가? 이 문장에서 우리는 얼굴이라는 메타포의 실체를 들여다봐야 한다. 겉모양의 얼굴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것은 다 안다. 얼굴은 예수의 실존과 운명과 인격 전체를 아우르는 단어다. 그는 우리와 똑같이 인간으로 사셨다. 희로애락을 경험했고 인식론적 한계도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부패를 목격하고 분노했다. 더 복잡한 개념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온 세상에 충만하다. 그 영광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이고 구원이고 영생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곧 그의 영광이다. 모세의 호렙산과 시내 산 경험이, 예수의 변화 산 경험이 영광과 연결된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창조 사건은 곧 영광스러운 일이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라는 인격체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가? 교리적으로는 부활 경험이다. 부활에서만 우리는 온전한 생명, 변화된 생명, 창조의 완성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다. 죽음이 극복된 사건이 부활이다. 그렇다면 부활은 죽음이라는 한계선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창조와 그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이라는 한계선을 뛰어넘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느끼고 설명할 수 있어야만 설교는 가능하다. 그런 깊이가 없는 설교는 웃으면 복이 와요.’ 수준인 약장수의 선전술이기에 사람의 영혼에 울림을 줄 수 없다. ‘아는 빛은 우리의 인식론에 관한 문제다. 우리가 노력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은혜로 알 수 있기에 아는 빛을 비추셨다.’라고 표현했다. 궁극적인 일은 자기가 배워서 획득하는 게 아니라 선물로만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불립문자가 여기에 해당한다. 공부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정보 획득에만 머물면 공부는 궁극적인 데에 이르지 못한다. 인식이 은혜이기에 교회의 예배 전통은 성령이여 오소서.’(Veni Sancte Spiritus/ Veni Creator Spiritus)라는 찬송을 쉬지 않았다. 오늘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거나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구호는 외치지만 그것의 실체에는 관심도 없고,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래서 즐거운 교회 생활에 치중한다. 그 이유는 설교자들이 그리스도교 신앙 내용(도그마)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교자나 회중이나 모두 구원에 대한 갈망이 없다는 증거다.

둘째, 마가복음은 놀랍게도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경험을(15:34) 하셨다고 전한다.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듯한 진술이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스데반처럼 하늘나라의 환상에 대해서 말씀하지 못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정말 궁금한 말씀이다. 이런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를 실질적인 것으로(real) 이해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 투 데우)를 선포하는 일에서부터 자신의 사역을 시작했다. 그의 병 고침이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의 논쟁, 각종 가르침과 비유도 일체가 하나님 나라와 연동된다. 그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지 염려하지 말라고, 그건 이방인들의 염려라고,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외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승리가 담보된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 처형이라니, 어처구니없는 운명이 그에게 닥친 것이다. 비유적으로, 진실하고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에게서 철저히 배신당한 심정이다. 한국교회 강단에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속죄론에 한정해서 다뤄진다. 우리 죄를 용서하고 죽음에 건져내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다고 말이다. 물론 그걸 연상하게 하는 표현이 복음서와 서신에 나오긴 한다. 그런 속죄론은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긴 사유의 과정을 거쳐서 나온 공식이지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된 이야기는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전적인 믿음과 버림받았다는 절망 사이에 놓인 심연을 설교자는 들여다봐야 한다. 그럴 때 인간과 그 역사에서 벌어지는 모순을 볼 수 있고, 그 안에서 하나님 신앙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었던 사람은 어느 순간에 그 믿음이 잘못된 것일지 모른다는 불안과 충격에 휩싸일 것이며, 그런 과정을 거친 후에만 참된 신앙으로 들어갈 것이다. 욥의 예를 봐도 그렇다.

위 두 구절만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구절이 궁극적인 어떤 사태와 연결되어 있다. 처음 구절인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11)라는 문장과 마지막 구절인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2:21)이라는 구절도 마찬가지다. 태초와 빅뱅의 관계, 이 세상(차안)과 저세상(피안)의 관계, 무로부터의 창조와 진화의 관계 등등이 다 여기에 관련된다. , 예수, 은혜, 아멘. 아주 짤막한 이 단어에도 66권 성서 전체와 인류 역사 전체가 여러 갈래로 연결된다. 그걸 어느 정도 알고 느끼고 보는 사람은 창조적인 설교자가 될 수 있다. 거꾸로 성서 전체와 인류 역사 전체에 관한 공부가 깊지 않다면 설교 행위 자체가 불가능하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친절한 성경 교사가 될 수는 있겠지만!

 

해석학적 요청

설교자의 눈높이가 깊어지고 넓어지고 높아지는 길은 무엇인가? 여기에 왕도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해석학 훈련이 최선이다. 신대원 공부는 총체적으로 해석학 훈련이다. 성서신학, 교회사, 윤리학, 조직신학에 관련한 커리큘럼은 성경을 정확하게 깊이 있게 해석하려는 기초 준비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유럽 철학과 깊은 관련이 있기에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 공부도 빼놓을 수 없다. 각각 분과가 다 중요하기는 하나 설교와 연관해서만 본다면 조직신학이 가장 중요하다. 조직신학의 토대는 <사도신경>이다. 창조주를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리고 성령을 믿는다. 창조부터 시작하여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과 영원한 생명까지 이르는 그리스도교의 도그마다. 참고로 졸역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한들출판사)과 그 책을 강독한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 강독(대구성서아카데미)이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체계를 총체적으로 알아야 그리스도교 신앙의 부분을 다루는 성경 본문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부분과 전체의 변증법적 순환이라는 해석학의 원리가 여기에 해당한다.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해석의 차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평신도들을 위한 성경공부와 약간의 전문적인 지식이 포함된 성경 주석에 머무는 경향이 강하다. 성경공부(bible study)는 일명 큐티로 자리를 잡았다. 성경 본문을 단순하게 검토한 뒤에 실생활에 적용하는 공부다. 실용주의적 설교인 셈이다. 이런 방식으로도 성실하게 성경을 인도할 수는 있다. 거기다가 설교자의 인격이 뒷받침되고 언어 감각이 있으면 나름 유명 설교자로 인정받을 것이다. 주석(exegesis) 설교는 통칭 본문 설교라고 한다. 성서신학의 도움으로 설교의 내용을 풍성하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흔한 예로 사랑에 대한 헬라어 세 가지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주석과 큐티가 조화를 이룬 설교가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환영받는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를 도식적으로 말한다면, 주석과 큐티의 종합은 아무리 선해도 율법적인 설교이고, 해석학적인 설교는 복음적인 설교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당시 사람들이 못 보던 세상을 꿈꾸었으며, 예수는 당시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하늘나라를 선포했다. 요한계시록이 바라보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주석과 큐티의 종합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 안으로 들어가야만 세상과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소위 탕자의 비유를 보자.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이 비유에서 큰아들의 잘못을 지적할 줄은 알지만, 작은아들이 어떻게 구원에 이른지는 모른다.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둘째가 자기 잘못을 인정했다는 사실은 핵심이 아니다. 그가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경험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큰아들처럼 모범적인 인간은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수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하나님을 선포했다. 그가 인식하고 경험한 하나님은 아바 아버지인 분이다.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존재다. 우리를 감시하는 잔소리꾼이 아니라 우리를 감싸주는 아버지나 어머니이다. 우리를 기다리는 분이다. 이런 시각이 열린다면 우리가 어떻게 다른 이를 혐오할 수 있겠는가. 더 나아가서 자기의 불행한 운명을 한탄할 것인가. 어떤 경우에도 그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랑이 가득하고 우리는 받아주는 분인데 말이다. 설교자들이 이런 하나님을 선포하긴 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늘 회개하라는 조건을 붙인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돌아서는 것 자체가 회개인데, 무얼 더 회개하라는 것인가? 욥의 친구들이 욥을 대하는 태도다. 복음의 폭발적인 능력을 놓치고 다시 율법으로 옮긴 것이다. 한국교회 지도자급 인사들에게 종종 나타나는 타종교와 공산주의와 동성애자들을 향한 혐오는 복음서에 묘사된 바리새인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최소한 상식적인 설교자라고 한다면 다른 이들을 배척하지 않고 혐오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을 실질적으로 경험하기는 쉽지 않다. 사랑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사전적인 의미로 사랑을 아무리 외쳐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교회 나오는 청중들은 철저하게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태어날 때부터 몸에 익혔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하나님 경험을 그런 방식으로 찾는다. 그런 기복신앙에 길들 사람들에게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라는 말씀은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는다. 그들을 어떻게 가난의 영성, 또는 가난의 신비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지가 설교자에게 주어진 숙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복음을 설교할 수 없다. 복음이 자칫 값싼 은혜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나는 시인들에게서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때가 있다. 여기 함민복 시인의 사과를 먹으며라는 시가 있다.

 

사과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 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먹는다/사과를 더 푸르게 하던 장맛비를 먹는다/ 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는다./ 사과나무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는다./ 사과나무에서 울던 새소리를 먹는다/ 사과나무 잎새를 먹는다/ 사과나무 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는다/ 사과에 수액을 공급하던 사과나무 가지를 먹는다/ 사과를 지탱해 온 사과나무 뿌리를 먹는다/ 사과의 씨앗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흙을 붙잡고 있는 지구의 중력을 먹는다/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 (부분적으로 발췌)

 

사과를 우주론적 차원에서 먹을 수 있다면 그는 삶의 다른 조건으로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선한 능력이 우리의 삶 전체를 바쳐준다. 여기 위암 수술을 한 집사가 있다고 하자. 혹은 장애 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부 집사가 있다. 그들이 자기 신세를 한탄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처럼 더 건강하고 더 부자로 살지 못하는지, 왜 인생이 이렇게 꼬이는지 모르겠다면 우는 소리를 낼 수 있다. 거꾸로 여전히 겨울철 햇살을 받으며, 일용할 양식이 있고, 겨울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할 수 있다면 그런 불평과 불만은 자리를 잃는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경구도 그렇다. 가난하기에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다. 재태크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나는 여기서 가난 미학을 예찬하려는 게 아니다. 가난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의 영혼과 비슷하다. 신대원 커리큘럼에 시 읽기가 들어가는 게 어떨는지. 아래는 곽재구 시인의 시집 꽃으로 엮은 방패수국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몬순에 꽃이 피네/ 꽃에서 비 냄새 나네/ 수국/ 수국/ 어떤 글자들은 인간의 혀를 떠나서도/ 홀로 보랏빛으로 빛나네// 몬순에 꽃이 피네/ 꽃에서 엄마 냄새 나네/ 아지사이/ 아지사이/ 열일곱 우리 엄마/수국에 입 맞추네

 

이 짧은 시에 시인의 세계 경험이 녹아 있다. 꽃에서 그는 비 냄새를 맡는다. 객관적인 현상이 아니나 이것 또한 분명한 경험이다. 같은 시집 뒤편에 실린 시인의 산문에서 곽재구 시인은 처녀 시절 어머니가 수국 곁에서 흑백사진을 찍었다고 말한다. 그런 사진을 본 것이리라. 이런 시적인 감수성 없이 우리가 어찌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읽고 제대로 해석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지난 212일 설교 양자택일”(30:15~20)에서 모세가 40년 미디안 광야 생활 마지막 단락에서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고 모압 평지에서 종적도 없이 사라진 사건을 다음과 같이 추정했다.

 

지금 모세의 설교를 듣는 이스라엘 백성은 곧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동시에 유혹의 땅입니다. 재미있는 일들이 많은 땅입니다. 그곳 토착 젊은이들은 성적으로도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들을 보는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바알을 섬기게 됩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의 유혹을 받아서 망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의 미래를 미리 내다본 것일까요? 그 꼴 보기 싫어서 늙었다는 핑계로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져서 아무도 그의 무덤을 찾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이런 추정이 성서신학의 관점에서 옳은지 아닌지는 나도 모른다. 성경 텍스트의 고유한 길을 우리가 고유한 시각으로 해석해야만 그 세계가 살아있는 말씀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뿐이다. 곽재구도 위 시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수국/ 수국/ 어떤 글자들은 인간의 혀를 떠나서도/ 홀로 보랏빛으로 빛나네성경이라는 문자가 홀로 보랏빛으로 빛나는 그런 경지가 우리 눈에 들어오면 설교자로서 살맛이 나지 않을는지.

 

겨울 나그네

이왕 시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만 더 읽어보자. 슈베르트가 빌헬름 뮬러의 연작시()에 감동하여 곡을 붙인 연가곡이 <겨울 나그네>(Winterreise). 전체가 스물네 곡으로 되어있는데, 첫 번 곡이 잘 자요”(Gute Nacht)이고, 마지막 곡이 거리의 악사”(Der Leiermann). 노랫말은 이렇다.

 

마을 변두리에 라이엘 악사가 홀로 서서/ 추위에 언 손으로 쉬지 않고 라이엘을 돌리네.

얼음 위에서 발을 동동거리는데,/ 그의 작은 접시는 비었네.// 그의 연주를 듣는 사람도 없고, 그를 돌아보는 사람도 없는데/ 개들만 모여들어 노인을 향해 짖어대네./ 그러나 그는 애써 못 본 척하면서/ 계속해서 라이엘을 돌리네.// 이상한 노인이여, 내가 당신과 함께 노래 부를까요?/ 내 노랫소리에 맞춰 라이엘을 켜주시겠어요?

 

라이엘은 원통을 돌려서 소리를 내는 독일 토속 악기다. 이 장면이 그림처럼 떠오를 것이다. 혼자다. 날씨가 추운데 누가 거리에 나설 것이며, 누가 대수롭지 않은 라이엘 연주를 듣고 접시에 돈을 놓겠나. 이 악사는 노인이다. 거리 연주 자체를 즐기는 사람인지, 밥벌이 때문인지는 시가 말하지 않는다. 돈 접시가 비어있다는 게 강조된 걸 보면 밥벌이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저녁 끼니를 걱정해야 한다. 관객은 없고 돈 접시는 비어있고, 동네 개들만 짖어댄다. 황량한 풍경이다. 그래도 이 노인 악사는 라이엘을 계속 연주한다.

목사의 한평생이 라이엘을 연주하는 노인과 같은 게 아닐는지. 목사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은 이런 운명에 떨어진다. 실제로 옆에 어느 정도 필요한 돈이 있고, 친구도 있고, 가족이 있다 해도 모든 인간은 빈 접시 앞에서 연주하는 이 라이엘 악사처럼 가난하다. 이건 메타포가 아니라 실재(reality).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근원적인 가난과 고독을 벗어날 수 없다. 그걸 눈치채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특히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선다는 게 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손이 시린 날 황량한 거리에서 홀로 라이엘을 연주하는 이 늙은 악사의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누가 듣든지 않든지 상관없이, 그리고 접시에 돈이 놓이든지 않는지 상관없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수도승처럼 홀로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에 화자가 등장한다. “내 노랫소리에 맞춰 라이엘을 켜주시겠어요?” 노인은 라이엘을 돌려 반주를 넣고, 사랑과 이별과 온갖 희로애락을 거쳐 온 나그네는 그 반주에 맞춰서 노래를 부른다. 누가 위로했고, 누가 위로를 받았을까. 여전히 돈 접시는 비어있고, 사람들은 안 보이고, 개만 짖는다. 그게 이 두 사람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함께 노래를 부를 수만 있다면.

목사의 설교 행위는 성악가의 노래 행위와 비슷하다.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똑같다. 성악가가 우선 악보를 정확하게 읽어야 하는 것처럼 설교자 역시 성서텍스트를 정확하게 읽고 이해한다. 정확하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시각으로 더 깊이 이해하고 해석해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설교 준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이것, 즉 성서텍스트의 세계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일이다.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거리의 악사가 가리키는 세계도 그걸 대하는 성악가와 반주자의 수준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표현되듯이 성서텍스트가 가리키는 세계도 설교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차원으로 표현된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가 성서텍스트의 깊이에 관한 생각 없이 청중들에게만 치우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마치 성악가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에 대한 음악적 깊이에는 관심이 없고 청중들을 감동하게 하는 일에만 마음을 두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포퓰리즘은 대중 가수들에게나 어울린다. 설교자에게 청중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청중들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 그 은혜에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청중들의 호응 현상에만 매달리면 설교자의 영혼은 메말라간다. 영혼이 메마른 설교자는 시간이 갈수록 청중들에게 더 의존하게 된다. 악순환이다. 결국에는 설교자도 죽고 청중들도 죽는다. (‘겨울 나그네대목은 졸고 성서는 텍스트다에서 인용)

도그마의 깊이로!

설교자가 모두 시인이 되거나 예술가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다른 전통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그 완성과 존재의 신비를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그게 그리스도교 교리 안에 녹아 있다. 그 중심으로 들어간다면 시, 문학, 예술, 인문학 등등이 말하는 삶의 현실성(reality of life)을 더 분명하게 느낄 것이다. 문학보다 더 깊게, 예술보다 더 뜨겁게, 인문학보다 더 ‘real’하게 거기에 다가갈 수 있다. 문제는 성경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따라서 해석할 능력을 잃었다는 데에 있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열병을 앓고 난 뒤에 검술 실력을 모두 잃은 칼잡이와 같다. 그런 능력을 잃지 않으려면 꾸준하게 신학책을 읽고 생각을 심화해야 한다.

최근에 나는 몰트만의 책 두 권을 강독한 동영상을 유튜브 <정용섭> 채널에 올렸다. 하나는 절망의 끝에 숨어 있는 새로운 시작(Im Ende- der Anfang, 2003)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영생을 믿는다(Auferstanden in das ewige Leben, 2020)이다. 이 두 책의 키워드는 영생이다. 사도신경 마지막 문장이 바로 나는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이다. 신약성경 전체가 제시하는 구원도 영생이다. 요한복음은 이런 부분에서 두드러진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 26) 죽음과 영생과 오늘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한 생각이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설교하기 어렵다. 설교야 하겠으나 복음 언저리에서 머뭇거리지 그 중심에 들어가서 설교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두 권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겠다. 이런 게 책 읽기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 설교가 풍성해질 것이다.

 

1) 영생의 자리는 지구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표현에서 영원한은 끝없이(endless) 무한하다는 뜻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에서 영원하다(eternal)는 뜻이다. 단순히 무한한 생명이라면 참된 안식과 기쁨 충만함이 아니라 오히려 지루하다. 노쇠한 상태에서 죽지 않는 운명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예수의 부활은 끝없이 이어지는 생명이 아니라 변화된 생명이듯이 영생은 곧 새로운 생명이다. 몰트만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기도에서 볼 수 있듯이 영생이 우주 공간 어디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지구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린 곳이며, 그가 죽은 이들로부터 부활한 곳이다. 재림 신앙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다시 이곳으로 오신다고 했다. 죽음 이후에 우리가 우주 공간에서 영생을 얻는 게 아니라 이곳 지구에서 영생을 얻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45억 년 후에 지구가 붉은 거성이 된 태양에게 잡아먹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구도 끝이 있다. 그런 문제는 우리의 신학적 사유의 범주를 뛰어넘는다. 우리는 빅뱅 이전의 정체를 모르며, 또한 우주 마지막 이후도 모른다. 시간과 공간으로 작동하는 이 세상 안에서 생각해야 하고 그 너머까지는 섣불리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 그 너머의 차원은 우리가 기다릴 뿐이다. 성경과 그리스도교 신학의 가르침 안에서 우리는 영생이 지구에서 일어날 하나님의 절대적인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절대적인 생명이 무엇인지는 아래의 설명에서 간접적으로 주어질 것이다.

 

2) 영생은 죽음 직후에 즉시 발생한다.

몰트만은 아내를 먼저 잃으면서 죽음 문제를 훨씬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이 마지막 심판을 거치고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문제는 죽은 직후에 영생에 이르는지, 아니면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최후의 심판이 일어나면 영생을 얻는지에 관한 생각의 차이이다. 두 가지 가능성이 다 열려 있다. 우리의 목회 현장에서 보면 장례예식 때 보통 이렇게 말한다. 여기 고인은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 품에 안겼으니 함께 만날 그 순간을 기다리면서 희망을 잃지 말라고 말이다. 바울은 죽은 자들의 운명을 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한다. 훗날 마지막 날에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죽은 자들은 잠에서 깨어나서 마지막 생명 심판을 받는다. 이전에 몰트만은 바울의 생각을 지지했었다. 죽음과 영생 사이에 일정한 간격이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제 생각이 달라졌다. 이 땅에서의 죽음과 마지막 심판 사이에 있는 그 시간은 마지막 순간이 오면 무너진다. 그 마지막에 우리가 참여할 변화된 생명을 얻으면 죽음 이후의 시간은 없어진다는 뜻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시간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균일하게 흐른다는 생각 말이다. 영생 사건에서는 창조와 종말이 하나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시간이 현재다. 하나님 나라와 종말은 아직오지 않았으나 동시에 이미시작했다는 신학 개념과도 연결된다. 현대 물리학도 시간이 상대적이고 말하고, 다층우주까지 말한다. 이런 신학을 설교자가 교인들에게 얼마나 알아듣게 설명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여기서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설교자가 우선 그리스도교 교리인 도그마의 심층으로 들어가야만 창조적인 설교가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런 창조적인 설교의 흐름에 들어가야만 설교자는 설교를 자기 구원의 차원에서 구도적으로 수행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 훈련

실제 설교 준비에서 글쓰기 훈련은 빼놓을 수 없다. 데이비드 고든은 우리 목사님은 왜 설교를 못 할까라는 책에서 북미 대륙에서 활동하는 설교자 중에서 최소한 알아들을 수 있는 설교를 하는 목사들이 30% 미만이었다고 짚었다. 그 이유는 인터넷의 짧은 문장에 익숙한 젊은 설교자들이 논리적인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라고 한다. 논리적인 글을 쓰지 못한다는 말은 곧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신대원 과정에서 그런 훈련을 충분히 받는 게 좋으나 목회 현장에 나와서도 그런 훈련을 이어가야 한다.

원고 설교를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최소한 주일 공동예배 때의 설교만이라도 완전히 원고 설교를 하는 것이다. 한편의 설교 원고는 200자 원고지 35매 내외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일이 쉬운 게 아니다. 말은 표정과 억양 등으로 보충할 수 있으나 원고(문자)는 글로만 생각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설교에서 문어체로 설교하는 게 바람직하지는 않다. 구어체와 문어체를 적절하게 맞춰서 설교하면 된다. 이런 문제는 각자가 교회 형편에 따라서, 그리고 자신의 은사에 따라서 처리하면 된다.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자신의 설교 내용을 다른 시청각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 오직 글로 완성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나의 설교 과정

1) 월간 기획 2) 주보 작성 3) 초안 잡기 4) 원고 쓰기

5) 교정 과정 6) 설교 실행 7) 설교 복기

 

참고- 월간 예배 자료 준비

20232

성서일과

설교제목

찬송가

4

주현 후 5

11

58:1~9a

112:1~9

고전 2:1~12

5:13~20

천국 윤리

41 내 영혼아 주 찬양하여라(1,2,4)

459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288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12

주현 후 6

12

30:15~20

119:1~8

고전 3:1~9

5:21~37

양자택일

64 기뻐하며 경배하세(1,2,3)

국악 찬송30 성도여 다같이 할렐루야

357 주 믿는 사람 일어나

19

예수 변모 주일

13

24:12~18

2:1~12

벧후 1:16~21

17:1~9

예수는 빛이다

73 내 눈을 들어 두루 살피니(1,2,3)

베델의 노래76 오 예수님 내 맘에

482 참 즐거운 노래를(1,3)

26

사순절 1

14

2:15~17,

3:1~7

32:1~11

5:12~19

4:1~11

생명 왕권

39 주 은혜 받으려

국악 찬송45 주는 나의 목자

346 주 예수 우리 구하려

 

수행으로서의 설교 행위

글 첫머리에 설교자는 설교 행위로 구원을 경험해야 한다고 썼다. 거친 표현으로 설교 행위에 목숨을 건다는 뜻이고, 신학적인 표현으로 설교 행위에서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하나님 경험은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한 여기서 완성되지 않는다. 아니 완성은 되나 완료되지는 않는다. 여기서 최선은 설교를 수행으로 삼는 것이다. 수행은 매 순간에 이어진다. 그 순간이 복되다. Carpe diem coram 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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