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하도 예배당들이 본질에서 벗어나니까,
의식있는 평신도들이 전임사역자가 없는 교회를 생각하게 됩니다.
수 년간 고민을 하다가 다비아를 만나 무식함을 깨닫고 접었습니다만,
이 일은 지금도 많은 분들이 고뇌를 하는 현재진행형입니다.
*平信徒라는 말은 계급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기피하는 단어이지만 편의상 사용했습니다.
의식있는 평신도들이 전임사역자가 없는 교회를 생각하게 됩니다.
수 년간 고민을 하다가 다비아를 만나 무식함을 깨닫고 접었습니다만,
이 일은 지금도 많은 분들이 고뇌를 하는 현재진행형입니다.
*平信徒라는 말은 계급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기피하는 단어이지만 편의상 사용했습니다.
2007.02.28 14:23:37
교회들이 모인 곳. 건물을 일컫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예배처소를 짓고 현판을 붙이길 "**예배당"이라 했습니다.
'교회' 그리고 '예배당'은 국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의 문제입니다. ^^
옛날에는 예배처소를 짓고 현판을 붙이길 "**예배당"이라 했습니다.
'교회' 그리고 '예배당'은 국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의 문제입니다. ^^
2007.02.28 16:00:09
저는, 다른 회원님들께서 논의에 참여하시고 나서 입을 열려고 했습니다만,
(자꾸 주제넘게 나서는 게 뭣해서요)
구도자님께서 저를 거명하셨기에 할 수 없이^^;
우물가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교회'는 신학 및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구도자님께서 지적하신 바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성령으로 하나된,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의 공동체이고,
예배당, 또는 성당은,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개개 단위로 모여 예배 및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제 소견에,
두 형제자매님의 말씀 모두 옳습니다.
우리가 늘 신앙고백하는 교회의 네 가지 특징은,
1) 하나이고, 2) 거룩하고, 3) 보편되며, 4)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 이 네 가지입니다.
(* 사도신경과 더불어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신경은 반드시 암송, 숙지해야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핵심, 정통 교리니까요)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유하고,
이 성령과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교제한다는
(성도의 교제, 통공 - 깊은 신학적, 신앙적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개신교회는 이 신앙고백에 대해 별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공시성과,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사도로부터 이어받은 통시성에 놓여 있는 공동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위에서 상기시켜드린 교회의 네 가지 특성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대단히 밀접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됩니다.
하나하나 따로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지요. 특징은 네 가지로 갈라 놓았지만,
설명은 하나로 뭉뚱그려 해야 될 정도입니다.
올바르고 순전한 그리스도교는 이래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또는, 현재의 제도권 교회가 틀린 길을 가고 있다고 판단하여,
평신도만의 교회, 또는 반성직자, 무교회주의 등의 운동을 일으킨 예는
역사상 많았으며, 지금도 그러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중세 때의 발도파, 종교개혁 당시의 천년왕국, 농민운동,
퀘이커, 우리나라에도 현대에 들어와 생기고 있는 평신도만의 교회공동체,
그런데, 제 생각은,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를 전공하지 않은 평신도만의의 공동체로는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성직자 권위주의를 말씀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어찌 되었건, 평신도는 전공하지 않은 비전문가이니까요.
그리고, 평신도에게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제도라고 할 수 있는, 성사(성례전)의 집행권이 없습니다.
물론, 위급할 경우에 평신도도 세례를 줄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사제나 목사가 평신도에게 권한을 위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평신도는 성찬을 집례할 수도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만약 어떤 분이 제게,
"사제나 목사에게 그런 권한을 누가 줬느냐?"고 항의하신다면,
저는, "그럼, 예수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세우라고 언제 명령했냐?"고 반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평신도만의 교회는,
같은 생각 아래 모인 사람들의 분파적 공동체, 즉,
교회의 단일성과 보편성에서 벗어난 모임이 될 가능성이 크고,
(평신도에게 설교권은 있다고 보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분파적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을 온전히 계승하지 못할 수도 있고,
여기서 나아가, 발전적 변화가 아닌 엉뚱한 왜곡 현상이 벌어질 수 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말씀과 성사(성례전) 가운데,
(한국 개신교회는 성사(성례전) 및 그것의 중요성에 대하여 무지하기 짝이 없으며,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큰 문제입니다)
특히 성사(성례전)가 아예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사목/목회자가 교회의 중심이라는 말씀은 절대 아닙니다.
도리어, 위에서 말씀드린 교회의 네 가지 특성에서 우리는,
사목/목회자가 교회의 중심 내지 '오너'라는 관념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전통, 나아가 성서와도 반대되는, 오류임을 알게 됩니다.
물론, 우물가님의 문제의식은 저도 잘 알고, 공감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해결은,
신학(지식 및 영성적 통찰력으로서의 신학)과 인간에의 깊은 통찰을 갖춘,
실력 탄탄한 사목/목회자를 양성하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한국 개신교회의 신학적 준거 틀을 바로 세우며,
교회 및 교파의 난립을 막는 데서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평신도들이,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 그리스도교사(교회사),
신학과 영성 등에 대하여
적어도 교양 수준의 쉬우면서, 그러나 합리적이고 수준높은 지식들을 가질 수 있도록
신학자들도, 사목/목회자들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평신도들이 그러한 자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목사의 설교에 은혜받아야 하며, 목사는 주님의 종이니 순종하라는 것은,
분파적 개교회주의이지, 교회에 관한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의 실천이 아닙니다.
평신도들을 비롯한 교회의 구성원들이 개교회주의를 혁파하고 넘어서야,
진정,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이 지향하는 올바른 교회상이 구현될 것입니다.
문제가 심각하고, 더 이상 참고 방치하기 힘들 정도로 위기상황이라 하더라도,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과, 우리의 신앙에 따라,
(신앙고백의 교회 항목을, 한국 개신교회는 너무나 간과하고 있습니다.
아예, 그런 항목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말입니다)
신중하게 가야 된다는 것이지요.
(자꾸 주제넘게 나서는 게 뭣해서요)
구도자님께서 저를 거명하셨기에 할 수 없이^^;
우물가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교회'는 신학 및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구도자님께서 지적하신 바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성령으로 하나된,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의 공동체이고,
예배당, 또는 성당은,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개개 단위로 모여 예배 및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제 소견에,
두 형제자매님의 말씀 모두 옳습니다.
우리가 늘 신앙고백하는 교회의 네 가지 특징은,
1) 하나이고, 2) 거룩하고, 3) 보편되며, 4)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 이 네 가지입니다.
(* 사도신경과 더불어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신경은 반드시 암송, 숙지해야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핵심, 정통 교리니까요)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유하고,
이 성령과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교제한다는
(성도의 교제, 통공 - 깊은 신학적, 신앙적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개신교회는 이 신앙고백에 대해 별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공시성과,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사도로부터 이어받은 통시성에 놓여 있는 공동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위에서 상기시켜드린 교회의 네 가지 특성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대단히 밀접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됩니다.
하나하나 따로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지요. 특징은 네 가지로 갈라 놓았지만,
설명은 하나로 뭉뚱그려 해야 될 정도입니다.
올바르고 순전한 그리스도교는 이래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또는, 현재의 제도권 교회가 틀린 길을 가고 있다고 판단하여,
평신도만의 교회, 또는 반성직자, 무교회주의 등의 운동을 일으킨 예는
역사상 많았으며, 지금도 그러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중세 때의 발도파, 종교개혁 당시의 천년왕국, 농민운동,
퀘이커, 우리나라에도 현대에 들어와 생기고 있는 평신도만의 교회공동체,
그런데, 제 생각은,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를 전공하지 않은 평신도만의의 공동체로는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성직자 권위주의를 말씀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어찌 되었건, 평신도는 전공하지 않은 비전문가이니까요.
그리고, 평신도에게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제도라고 할 수 있는, 성사(성례전)의 집행권이 없습니다.
물론, 위급할 경우에 평신도도 세례를 줄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사제나 목사가 평신도에게 권한을 위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평신도는 성찬을 집례할 수도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만약 어떤 분이 제게,
"사제나 목사에게 그런 권한을 누가 줬느냐?"고 항의하신다면,
저는, "그럼, 예수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세우라고 언제 명령했냐?"고 반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평신도만의 교회는,
같은 생각 아래 모인 사람들의 분파적 공동체, 즉,
교회의 단일성과 보편성에서 벗어난 모임이 될 가능성이 크고,
(평신도에게 설교권은 있다고 보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분파적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을 온전히 계승하지 못할 수도 있고,
여기서 나아가, 발전적 변화가 아닌 엉뚱한 왜곡 현상이 벌어질 수 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말씀과 성사(성례전) 가운데,
(한국 개신교회는 성사(성례전) 및 그것의 중요성에 대하여 무지하기 짝이 없으며,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큰 문제입니다)
특히 성사(성례전)가 아예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사목/목회자가 교회의 중심이라는 말씀은 절대 아닙니다.
도리어, 위에서 말씀드린 교회의 네 가지 특성에서 우리는,
사목/목회자가 교회의 중심 내지 '오너'라는 관념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전통, 나아가 성서와도 반대되는, 오류임을 알게 됩니다.
물론, 우물가님의 문제의식은 저도 잘 알고, 공감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해결은,
신학(지식 및 영성적 통찰력으로서의 신학)과 인간에의 깊은 통찰을 갖춘,
실력 탄탄한 사목/목회자를 양성하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한국 개신교회의 신학적 준거 틀을 바로 세우며,
교회 및 교파의 난립을 막는 데서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평신도들이,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 그리스도교사(교회사),
신학과 영성 등에 대하여
적어도 교양 수준의 쉬우면서, 그러나 합리적이고 수준높은 지식들을 가질 수 있도록
신학자들도, 사목/목회자들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평신도들이 그러한 자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목사의 설교에 은혜받아야 하며, 목사는 주님의 종이니 순종하라는 것은,
분파적 개교회주의이지, 교회에 관한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의 실천이 아닙니다.
평신도들을 비롯한 교회의 구성원들이 개교회주의를 혁파하고 넘어서야,
진정,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이 지향하는 올바른 교회상이 구현될 것입니다.
문제가 심각하고, 더 이상 참고 방치하기 힘들 정도로 위기상황이라 하더라도,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과, 우리의 신앙에 따라,
(신앙고백의 교회 항목을, 한국 개신교회는 너무나 간과하고 있습니다.
아예, 그런 항목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말입니다)
신중하게 가야 된다는 것이지요.
2007.02.28 16:40:35
평신도라는 말 자체가 없는 검니다.
교회를 이루는 것이 주님이 머리시고 각 지체가
말씀전하는 자로 또 교사로 섬기는 자로 또 봉사받는 자로
은사의 남김과 부족이 없는 것이 교회일 것입니다.
자본의 질서,민주적인 질서,소위 영적 카리스마...
그런 것으로 이루어진 교회모임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것이 평신도 교회라고 봅니다.
민주적인 또 성경적인? 교회법이 굉장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게 평신도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를 이루는 것이 주님이 머리시고 각 지체가
말씀전하는 자로 또 교사로 섬기는 자로 또 봉사받는 자로
은사의 남김과 부족이 없는 것이 교회일 것입니다.
자본의 질서,민주적인 질서,소위 영적 카리스마...
그런 것으로 이루어진 교회모임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것이 평신도 교회라고 봅니다.
민주적인 또 성경적인? 교회법이 굉장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게 평신도 교회의 모습입니다.
2007.02.28 18:27:47
성직자 있는 교회가 좋으면 그리로 나가고,
성직자없는 교회가 좋으면 그리로 나가고 그럼 되지 않나요?
그리고 내가 왜 이런 교회에 참여하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정리되어있으면
신앙생활에 문제없지 않나요?
나도 목사지만, 새길교회처럼, 수평적관계중심의 교회에 나가고 싶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지금도 고민입니다.
목회자가 있지만, 전통적 권위를 벗어나서 목회자가 돕는 역할만을 할 수 있는 교회를 꿈꾸면서...
그런데요, 어려운 것은 지금 교인들이(몇 명안되지만) 제 뜻을 이해 못해요..
아니, 나에게 전통적 목회자의 자리에 더 굳건히 있기를 바래요.
그래서 여러종류의 교회가 있는게 더 맞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도 다 다른데, 각자에게 맞는 것을 찾아 다니도록..
평신도(어쩔수없이 사용하는 용어)교회에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좋은 일 아닌가요?
단지, 그런 교회에서도 성직자 역할이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나오기도 한다는 것은 들었어요.
그렇다고, 성직자 형태의 교회로 회귀한다는 것은 아니고
어쩌면, 진짜 미래적인(적절한 용어는 아닌데) 교회의 형태가 나올수도 있겠죠.
저는 평신도교회의 발전에 관심이 많습니다.
성직자없는 교회가 좋으면 그리로 나가고 그럼 되지 않나요?
그리고 내가 왜 이런 교회에 참여하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정리되어있으면
신앙생활에 문제없지 않나요?
나도 목사지만, 새길교회처럼, 수평적관계중심의 교회에 나가고 싶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지금도 고민입니다.
목회자가 있지만, 전통적 권위를 벗어나서 목회자가 돕는 역할만을 할 수 있는 교회를 꿈꾸면서...
그런데요, 어려운 것은 지금 교인들이(몇 명안되지만) 제 뜻을 이해 못해요..
아니, 나에게 전통적 목회자의 자리에 더 굳건히 있기를 바래요.
그래서 여러종류의 교회가 있는게 더 맞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도 다 다른데, 각자에게 맞는 것을 찾아 다니도록..
평신도(어쩔수없이 사용하는 용어)교회에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좋은 일 아닌가요?
단지, 그런 교회에서도 성직자 역할이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나오기도 한다는 것은 들었어요.
그렇다고, 성직자 형태의 교회로 회귀한다는 것은 아니고
어쩌면, 진짜 미래적인(적절한 용어는 아닌데) 교회의 형태가 나올수도 있겠죠.
저는 평신도교회의 발전에 관심이 많습니다.
2007.03.02 10:53:23
목회자가 없는 교회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말씀의 선포에 대한 부분에 관하여서는 조금 정리를 해야 할 듯 합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은혜의 방편으로 허락해 주신 말씀과 성례와 기도에 관한 부분입니다.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은혜의 방편으로 기도를 인정하기에 기도를 포함시켰습니다만, 기도를 제외하더라도 말씀과 성례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성도들끼리 모든 것을 해결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말씀이라고 하면 세가지로 요약되어집니다. 먼저 기록된 말씀(성경),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선포된 말씀이 그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가 요구되어지는 말씀의 선포는 공적예배의 요소입니다. 또한 성례를 담당하는 것도 목회자의 몫입니다. 물론 성경의 빌립집사가 세례를 주었던 것을 근거로 성도들이 세례를 주어도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이것은 직제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하지 않은 문자적 해석에서 오해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목회자의 역할은 교회에서 분명하게 요구되어집니다.
목회자들의 문제로 인하여 상처받은 사람들이 교회의 올바른 정체성을 위해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은 결국 또 하나의 문제를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 입니다. 따라서 공동의 섬김성이 나타나도록 예배를 회복하고, 목회자와 성도들간의 역할에 있어서 수평적이면서도, 상보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이 모두에게 요구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목회자들을 모두 똑같은 사람들로 오해하여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다면 결코 우리들도 평가에서 호평을 받지는 못할 듯 합니다.
주저 없이 너무 말을 많이했네요. 이해바랍니다.
목회자들의 문제로 인하여 상처받은 사람들이 교회의 올바른 정체성을 위해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은 결국 또 하나의 문제를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 입니다. 따라서 공동의 섬김성이 나타나도록 예배를 회복하고, 목회자와 성도들간의 역할에 있어서 수평적이면서도, 상보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이 모두에게 요구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목회자들을 모두 똑같은 사람들로 오해하여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다면 결코 우리들도 평가에서 호평을 받지는 못할 듯 합니다.
주저 없이 너무 말을 많이했네요. 이해바랍니다.
2007.03.02 14:07:04
짝지님 말씀에 덧붙이자면,
개역성서에 '집사'로 번역된 직제는,
본래, 평신도 직제가 아니라, '부제'입니다.
즉, 주교-사제-부제의 3품 성직 가운데 하나라는 거지요.
(*덧붙이자면, 개역성서의 '목사'라 번역된 부분도, 엄밀히는 오역입니다.
당시에는 '목사'라는 직제 자체가 없었습니다.
'사제'와 '목사'는 성격이 다른 직제이고,
초대교회부터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전 그리스도교가
이 3품 직제의 성직 체계를 공유했습니다)
부제에게는 세례를 베풀고, 예배 때 복음서를 읽을 권한,
(제1독서, 2독서는 소품직인 독서직이 맡았었습니다)
그리고 설교권이 있습니다.
이것을, 종교개혁자들이 평신도 직제로 돌린 것일 뿐입니다.
천주교의 경우, 평신도가 세례를 줄 수는 있습니다.
(다른 교파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적어도 한국의 개신교파들 가운데에는 이렇게 하는 데가 없지 싶습니다)
죽기 직전의 사람 등, 위급한 상황에서 '대세'를 베풀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사제가 권한을 위임했기에 가능한 '대세'입니다.
개신교의 보편사제직론은, 모든 신자가 직능에까지 동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되,
사도 바오로가 말하듯, 각자의 전문 직분이 있지요.
교회 내의 평등성과 민주성의 회복은, 정말 필요합니다만,
전문성 또한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보편사제직론이 남용, 와전되어,
반성직자, 특히 반신학자주의,
(특히 개신교 근본주의가 이같은 정서를 강하게 띤다고 봅니다)
역으로, 목회자의 전문성 저하 등으로 이어진다면,
더 큰 문제를 불러오게 되리라 짐작합니다.
개역성서에 '집사'로 번역된 직제는,
본래, 평신도 직제가 아니라, '부제'입니다.
즉, 주교-사제-부제의 3품 성직 가운데 하나라는 거지요.
(*덧붙이자면, 개역성서의 '목사'라 번역된 부분도, 엄밀히는 오역입니다.
당시에는 '목사'라는 직제 자체가 없었습니다.
'사제'와 '목사'는 성격이 다른 직제이고,
초대교회부터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전 그리스도교가
이 3품 직제의 성직 체계를 공유했습니다)
부제에게는 세례를 베풀고, 예배 때 복음서를 읽을 권한,
(제1독서, 2독서는 소품직인 독서직이 맡았었습니다)
그리고 설교권이 있습니다.
이것을, 종교개혁자들이 평신도 직제로 돌린 것일 뿐입니다.
천주교의 경우, 평신도가 세례를 줄 수는 있습니다.
(다른 교파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적어도 한국의 개신교파들 가운데에는 이렇게 하는 데가 없지 싶습니다)
죽기 직전의 사람 등, 위급한 상황에서 '대세'를 베풀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사제가 권한을 위임했기에 가능한 '대세'입니다.
개신교의 보편사제직론은, 모든 신자가 직능에까지 동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되,
사도 바오로가 말하듯, 각자의 전문 직분이 있지요.
교회 내의 평등성과 민주성의 회복은, 정말 필요합니다만,
전문성 또한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보편사제직론이 남용, 와전되어,
반성직자, 특히 반신학자주의,
(특히 개신교 근본주의가 이같은 정서를 강하게 띤다고 봅니다)
역으로, 목회자의 전문성 저하 등으로 이어진다면,
더 큰 문제를 불러오게 되리라 짐작합니다.
2007.03.06 03:24:57
전문 사역자가 있건 없건 간에 "평신도"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것은,
교회 내에서 누가 설교를 하느냐 누가 목회를 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이란 것이 과연 "목사", "성직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냐 하는 물음이라 생각합니다.
흔히들 소명을 받은 이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고
이 "하나님의 일"이 곧 직업적인 목사가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폴 스티븐스의 책을 무척 좋아하는데,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를 통해 "평신도"의 교회 내에서의 역할을 이야기하는데 머물지 않고
평신도가 살아가는 삶에서의 영성의 문제, 소명의 문제를 파고들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신도 교회라면, 모이는 모든 평신도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로서,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께 삶으로 예배드리는 제사장으로서,
매주 모임 때마다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듯 파송하는 모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중의 각자의 삶의 모습과 영역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주일 예배에 얼마나 빠지지 않고 잘 나오는가,
교회 행사에 얼마나 열심인가를 기준으로 성도의 영성을 판단하는 교회,
각자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아니라 교회 내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가 더 중요한 교회,
이러한 교회라면 비록 전문 목회자가 없고 평신도들이 돌아가면서 설교한다 해도
평신도 교회라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참된 "평신도 영성"을 회복하는 교회가 진정한 평신도 교회일 것이며,
이러한 교회가 한국 교회내에 많아지기를 소망합니다.
교회 내에서 누가 설교를 하느냐 누가 목회를 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이란 것이 과연 "목사", "성직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냐 하는 물음이라 생각합니다.
흔히들 소명을 받은 이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고
이 "하나님의 일"이 곧 직업적인 목사가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폴 스티븐스의 책을 무척 좋아하는데,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를 통해 "평신도"의 교회 내에서의 역할을 이야기하는데 머물지 않고
평신도가 살아가는 삶에서의 영성의 문제, 소명의 문제를 파고들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신도 교회라면, 모이는 모든 평신도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로서,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께 삶으로 예배드리는 제사장으로서,
매주 모임 때마다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듯 파송하는 모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중의 각자의 삶의 모습과 영역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주일 예배에 얼마나 빠지지 않고 잘 나오는가,
교회 행사에 얼마나 열심인가를 기준으로 성도의 영성을 판단하는 교회,
각자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아니라 교회 내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가 더 중요한 교회,
이러한 교회라면 비록 전문 목회자가 없고 평신도들이 돌아가면서 설교한다 해도
평신도 교회라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참된 "평신도 영성"을 회복하는 교회가 진정한 평신도 교회일 것이며,
이러한 교회가 한국 교회내에 많아지기를 소망합니다.
예배당이란 표현보다는 교회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우물가님의 글 중에서 교회라는 말을 써야 할 자리에
예배당이라고 사용하는 것을 몇 번 본 것 같아서 드리는 말입니다.
맞나요? 무명재님? (국문학을 전공하셨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