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위대한 목회자이신 사도바울은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소아시아 각처를 전도하면서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가르치는 와중에 질병에 걸려 고생하면서도 성도들의 헌금에 의존하지 않고 생계를 유지하며 전도활동을 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한국교회 대부분의 목사들은 세속적인 직업을 가지지 않고 더군다나 한번도 직업을 경험하지 못하고 바로 목사란 성직의 직업을 평생직장으로 생각하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목사를 하나님의 성직임을 강조하여 목사는 일반 직업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만 전심전력으로 연구하고 설교해야하는 사람이 돈 버는 직업을 가져서는 안 되고 교회와 성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현대사회의 특성인 전문성, 기능성, 분업적인 사회시스템과 경제시스템을 보면 일리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에서 제시하는 목회의 원형은 나 몰라라 하지는 말자입니다. 다른 것은 성경대로 하자고 그토록 강조하면서 왜 사도바울의 목회모범은 따르지 않는지 의문이 갑니다. 모두가 아전인수의 달인인 것 같습니다. 사실 대부분 목사들은 세상의 직업이 없습니다. 그저 목회활동을 하며 생계를 유지합니다. 신학교 다닐 때 부터 세상의 직업을 갖지 못하고 목회를 시작한 목사들은 세상물정과 돈벌이의 어려움과 고충은 모릅니다. 개중에는 세상직업을 가지고 살다가 중간에 소명감으로 목사가 된 분들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성도들의 삶과 고충을 알기 때문에 목회급여에 신경 쓰지 않고 교회 살림살이를 검소하고 절약하는 애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물정과 철모르는 목사는 교회 돈을 자기 돈인 냥 마음대로 청구하여 쓴다고 합니다.

이런 목사님도 있다고 합니다. 스스로 일을 하시며 장애인과 고아를 돌보며 목회를 한다고 합니다. 물론 성도들의 헌금도 있지만 예산의 상당부분은 스스로 노동을 통해 번 돈으로 섬긴다고 합니다. 이렇게 몸으로 섬기는 모습이 진짜 사도바울의 후배이자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목회를 하시는 게 아닐까요? 왜 한국교회의 목사들은 일하기 싫어할까요? 스님들은 스스로 텃밭을 가꾸며 농사짓고 , 일일 삼가식(하루에 세집이상 구걸하지 말아라는 계율임, 땡 중은 이 계율을 어기고 있음)으로 살아가고, 성당의 신부님도 가끔 주말농장에서 농사를 짓는데 왜 유독 기독교 목사들만 일하기 싫어할까요? 땀 흘려 일하는 것을 천하게 생각하여 나라를 망하게 한 조선시대의 유교적, 양반의 옷을 입은 영향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사도바울은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모범적인 목회원형을 실천하신 하나님의 진정한 종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한다는 명분으로 어떠한 호사스런 대우나 대가를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한국교회의 부흥사들과 브랜드목사들은 이런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해외유학 ,박사학위 소유의 목사라는 상위계층의 신분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은 이방종교의 관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들의 모습을 본받아야만 복음전도자의 신분적 권위와 존경을 받을 것이고 추락한 목사의 신뢰도가 되살아 날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옷을 찢어가면서 까지 안타까운 질책은 이스라엘 백성들(루스드라 사람들)의 잘못된 신앙의식구조를 안타까워하며, 잘못된 복음이해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질책은 인간의 능력에 촛점을 맞추기 보다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능력임을 알아라는 절규이고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죄인중의 괴수로 고뇌하고 삶으로 실천하는 이런 겸손한 행위가 사도바울이야 말로 이 세상 복음역사에 우뚝 선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목회원형을 회복하는 영젹 쇄신 운동이 일어나야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 진정한 교회로 환골탈태가 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한국교회안의 성도들은 바나바와 바울을 신으로 섬기려 했던 루스드라 사람들과 같은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은사를 자신의 목회성공과 사리사욕의 목적에 이용하는 현상들을 보게 됩니다. 한국교회 안에서는 인간이 만든 많은 목회성공철학과 신학, 경영학적, 마케팅의 테크닉으로 포장한 실용적 복음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과 동등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많은 목회성공, 대형교회 성장의 영적성취의 열매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그 열매를 독차지 하고 자식에게 까지 세습하고 있습니다. 그런 목사들은 거짓 목사입니다.

앞서 말한 바울의 모습은 복음을 빌미로 어떠한 위장도, 가식도, 거만도, 영광도, 철저히 부정한 인간적인 모습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복음전도자의 참된 모습을 실천하신 분이었습니다. 바울은 신으로 떠받들고 섬기려는 무리를 향해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면서 결코 신이 아님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속된 말로 그냥 가만히 있으면 50점은 따고 들어가는데 바울은 자원해서 0점을 받았습니다. 우리로서는 결코 흉내내지 못하는 바울의 위대한 복음의 고백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은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빌미로 어떤 영광과 댓가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모델이었습니다. 복음전도자의 대선배이신 바울의 고백이 이러할진대 자본주의 사회의 편한 세상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명분으로 성도들로부터 섬김을 받으려는 한국교회의 목사들은 대오각성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언제부터인지 교회는 피라밋 모양의 구조를 가지게 되어서 그 정점에 목사들이 서 있고 모든 교인들은 그 정점에 있는 목사를 중심으로 해서 교회를 이루는 형태로 변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풍조는 복음주의자들에게도 심각한 유혹이 되었습니다. 일단 목사라는 호칭을 사용하면 권위가 따라오고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목사라는 호칭은 그래서 기독교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이며 필수적인 직함이 됩니다. 장로보다는목사란 호칭이 더 상위의 개념으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집사는 목사의 발가락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지요. 그런 냉소적인 반응을 경험하고 나면 목사라는 달란트의 변질정도가 심각함을 깨닫게 됩니다.

거짓 목사들은 대개 목사의 신비한 권위(?)를 연출하기 위하여 온갖 인간적 노력을 다합니다. 제스춰는 물론이고 발음, 억양, 부흥사 특유의 쉰듯한 저음의 약장사 목소리(거룩한 목소리로 착각)는 가증된 목소리입니다. 기도원에서는 거짓목사가 되기 위한 이런저런 정보도 많이 접하게 됩니다. 따라서 방언을 하고 환상과 계시를 본 경험도 조작 간증하여야 하고 혹은 치유능력이 있다고, 투시하는 영안을 가졌다고 하여 나는 평신도들인 당신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신분적 우월감을 강조하면서 교인들에게 신비감을 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목회테크닉으로 해서 숫자가 많아진 교회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교회가 아니라 인간이 경영하는 교회 즉 장사하는 교회로 만들어 버리는 성황당과 같은 조직이 되어 버립니다. 아니면 사교단체와 같이 조직으로 움직이는 체계화된 교회가 되어버리고 말지요.

작은 교회에 다니면 여러 가지로 보이지 않는 부담이 많지만 큰 교회로 가면 이미 웅장한 예배당 건물에 유명한 목사가 있고, 각종 조직과 프로그램들이 있어서 그저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어느 한 곳에 몸을 내맡기기만 하면 저절로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승진시스템에 따라 집사, 장로, 권사가 되어 그 속에서 일종의 조직생활에 익숙해 지는 것이지요. 그것이 신앙생활인지 조직생활인지 잘 모르지만 대형 교회를 다니면 어느 정도 부담 없고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주니 만족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의 마음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보다는 보다 브랜드목사의 메시지와 브랜드교회라는 경제적 비교우위의 충족과 스타 동일시 현상의 충족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목사가 너무도 많습니다. 왜 그리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은 자신이 선택하시는데 그와는 반대로 인간 스스로가 종이 되겠다고 일방적으로 자원한 결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사가 희소한가 봅니다. 마태복음에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도 말고 지도자로 칭함을 받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선생은 하나이고, 우리는 다 형제이고, 우리 지도자는 한분 오직 예수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교회제도를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선생이나 목사, 지도자의 직무가 생태적, 은사적, 청지기로서의 하나님 심부름을 하자는 것입니다. 즉 군림하거나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복음이 선포되어지고 행동하자는 것입니다.

진정한 권위는 내가 주장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은사와 삶을 통한 인격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권위가 없으니까 제도나 복장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권위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세태입니다. 권위를 강요하는 것은 권위주의가 되어버립니다. 제사장으로 군림하는 목회는 대부분 독재의 옷을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도들간의 정보통제와 표적설교로 사상과 생각을 통제하려하고 사적인 감정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한심한 목회현장입니다. 유치원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미성숙한 영적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교사인 목사가 항상 유치원 교사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다시금 사도바울의 고백을 반추하여야 할 때입니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교회를 운영해서는 안 됩니다. 자본주의 세계관에서 높이 평가되는 액세서리들이 신앙의 모습을 구현 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복음은 아무 것도 내세울만한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귀중한 택한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우리가 자랑할 것은 구원과 은사를 선물로 주신 예수그리스도뿐 입니다. 허지만 세상 사람들은 교회는 출세하고 돈이 있어야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착각을 하게한 책임은 교회가 원인 제공한 것임을 알고 석고대죄 하여야 할 일입니다. 특히 대형교회와 개그, 탈선부흥사, 빗나간 브랜드목사들이 그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