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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사랑에  대하여 - 사랑에 봉사하라 


“각하,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주기 위해 유령이 무덤에서 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햄릿》 제 1막 5장


예수의 가르침, 사랑
남자친구와 헤어져야 하는지, 누구에게 투표를 해야 하는지, 이혼을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절대적인 성경적 기준이나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한 문제들은 대개 각자의 신앙에 의거한 양심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풀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각자의 해답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기독교에는 무조건적으로 참이며 절대적으로 성경적인 <실천적>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성경적’입니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명확해서 ‘이것을 말해주기 위해 유령이 무덤에서 나올 필요조차’ 없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는 사랑의 전도사였습니다. 그는 창녀, 간음한 여자 등 당시에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취급당한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성경이 기독교인에게 요구하는 생활의 기준이요, 도덕적 기준입니다.

 

 

율법의 진정한 뜻

복음서에서 예수는 율법의 진정한 뜻이 사랑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하고 말한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마태복음 5:43~45)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있다.”

예수에게 율법은 사랑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예수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사랑의 법에 따라 새롭게 해석됩니다. 그 이유는 율법을 더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율법의 진정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모세의 책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 이외의 것을 고집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은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모세의 의도인 사랑을 놓쳐버린 논쟁은 결국 유익하지 않은 언쟁에 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비유하자면 사랑은 헌법과도 같습니다. 헌법 아래의 법들이 사랑을 방해한다면 명백한 위헌입니다. 이럴 경우, 그 법은 사랑의 법에 따라 새롭게 씌어져야 합니다. 즉 율법은 사랑에 봉사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실수
바리새인들은 구약성경의 율법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귀신같이 지켰습니다. 옷 입는 것이나 먹는 것까지 하나하나 신경 쓸 정도로 율법과 규범에 매우 엄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치명적인 실수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적용하는데 집중하는 바람에 율법의 진정한 정신인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서에는 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를 보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를 보려고,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마가복음 3:2~6)

안식일에 예수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기 위해 헤롯 당원들과 함께 모의합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반면 예수는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을 문자 그대로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분명 ‘사람을 고치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랑의 실천에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 즉 사랑이 없음을 탄식합니다. 이 차이는 바리새인과 예수가 동일한 율법을 서로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바리새인 :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고치는 것도 하나의 일이므로  해서는 안 된다.
예수 : 사람도 안식일에 쉬어야 하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안식일이 없다. 안식일도 사람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아무런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계명은 잘 지켰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사랑의 계명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이에 대해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킨 꼴이라고 말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마태복음 23:23~24)

 

현대판 바리새인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바리새인의 실수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늘 날에도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그대로 적용한 나머지,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규범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동준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적용한 책《말씀대로 살면 인생이 즐겁다》에서 기독교인들이 실생활에서 다음과 같은 규범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음행을 밥 먹듯 저지르는 사람과 교제를 피하십시오. 음담패설 하는 사람도 피하십시오. 전염되어 나까지 화를 입게 됩니다.”
->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고린도전서 5:11)

“세상적인 잡담을 할 목적으로는 이웃집에 자주 가지 마십시오. 나중에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게 됩니다.”
->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잠언   25:17)

“만나면 세상적인 자랑만 해서 당신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사람은 얼마간 만나지 말고 피하십시오. 그게 좋습니다.”
->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고린도전서5:11)

 

이 책은 고린도전서와 잠언 말씀을 인용하며 말씀 그대로 행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음담패설 하는 사람과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사람을 피하고, 세상적인(?) 잡담을 하러 이웃집에 놀러 가지도 말라고 합니다. 아마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백이숙제처럼 산으로 틀어박히거나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집안에만 있어야 할 것이며, 사람들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할 대상입니다. 사랑해야할 대상에게 다가가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규범들은 사랑에 봉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사랑의 실천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어떠한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계명을 문자 그대로 지키기 위해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피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율법이 된 예수님의 말씀
문자주의로 인해 규범이 만들어지고 사랑이 뒷전으로 가버리는 사례는 예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사람을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이고,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음이라고 말하자,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 사람들은 다음 두 가지의 법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것은 죄이다.”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지 말라. 그것은 죄이다.”

그리고 이 법을 지키기 위해 울타리를 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규범이 추가됩니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음욕을 품게 하지 말라.”

그래서 교회에서는 여자들에게 짧은 치마나 살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교회에 오는 것을 자제시킵니다. 남자들로 하여금 음욕을 품게 해 죄를 짓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기독교인은 유대인보다 지켜야 할 것이 많아졌습니다. 십계명뿐만 아니라 추가된 법들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의 십계명>                                <추가된 법>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음욕을 품지 말라
……                                                       음욕을 품게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이웃집을 탐내지 말라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고자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음욕을 품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물론 이러한 노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 규범들로 인해 율법주의로 빠질 위험이 크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율법주의로 빠진 사람들은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자기가 미워하거나 미워할만한 사람을 피하고, 음욕을 품지 않기 위해 이성을 피합니다. 교회에서도 죄를 짓느니 차라리 그게 낫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교회 사람들하고만 친하게 지내게 됩니다. 교회 밖의 인간관계는 피상적일 뿐입니다. 그리고는 “내가 드디어 세상의 때를 벗었구나. 조금은 신실해 졌구나.”라는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이 죄 짓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이기적인 방법일 뿐입니다. 결국 이들은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음욕을 품지 말라”는 하루살이는 걸러냈지만 “사랑하라”는 낙타는 삼켜버린 꼴이 된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사랑마저도 수많은 법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사랑을 하기 위해 율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법을 지키기 위해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이 율법조항의 하나로 전락해 버렸을 때, 그 사랑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며 더 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법전이 된 성경
성경은 법전이 아닙니다. 법이 필요했다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 법전을 떨어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이유는 세상에 법이 필요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 필요한 것은 법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자신의 사랑을 먼저 보여주고, 사람들이 그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은 모든 것의 으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1~13)

2005년 한국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가 지켜야 할 규율을 엄격하게 강조하는지의 여부를 물어본 결과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은 무려 40%에 가까웠습니다. 25.8%의 불교에 비해 매우 높은 비율입니다. 이 조사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도 모르게 율법주의에 빠졌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미 많은 기독교인들이 문자 그대로 해석된 법을 그대로 지키며, 다른 사람에게도 그 법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법을 지키지 못할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그 죄책감으로 인해 스스로를 자책하며 형벌을 가하기도 합니다. 거칠게 말해 율법의 감옥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은 이미 법전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하랑> http://blog.naver.com/jaharang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