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카오스에서 질서 구하기
사람들은 카오스를 두려워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카오스 상태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두려운 카오스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것이 실오라기처럼 가늘고 짧은 것이라도 강박적으로 질서를 찾는다. 언제 어떻게 변화할 지 모르는 기후의 질서를 찾고자 하는 일기예보, 그리고 단서 없이 혼란스러울 뿐인 살인사건의 질서를 잡아가는 탐정소설도 그와 같은 맥락에 있다. 우리는 내일 비가 오고 모레는 맑을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듣고는 안심하며 셜록홈즈가 미궁의 사건을 해결했을 때 후련함을 느낀다. 카오스에서 어떻게든 질서를 구했을 때 비로소 안식하는 것이다.
 
2. 무속의 두 가지 축 '예언', 그리고 '개인주의'
사람들이 미아리의 처녀보살을 찾는 이유 역시 기본적으로 카오스 상태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점집을 찾는 사람들의 불안감과 두려움은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적, 또는 가족주의적이다. 사람들이 점집을 찾는 이유는 세계 평화나 환경 문제 때문이 아니라 <나와 내 가족이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주로 "내가 시험에 합격할까요?", "결혼은 언제하는 것이 좋을까요?", "내 아들이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까요?" 따위를 물어본다.
 
이후의 과정은 잘 알려져 있다. 용한 처녀보살은 "내년엔 돈 좀 벌거야", "내년에는 남자가 없을꺼야", "올해 ~~때문에 시험에 합격하기 어려울 거야"라며 그 사람의 미래를 단호히 예언한다. 긍정적인 예언에는 한없이 안식하지만 부정적인 예언에는 고개를 떨군 이들은 결국 프로이트같은 정신분석가도 울고 갈 진지하면서도 기나 긴 상담(?) 끝에 부적을 사면서 비로소 질서를 잡았다는 듯 스스로 안식한다. 이와 같이 예언과 개인주의는 무속을 뒷받침하고 있는 두 가지 축이다.
 
3. 용한 점쟁이 미네르바
그런데 무속은 미아리 점집을 찾는 사람들에게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최근에 구속된(구속 자체가 넌센스지만) 미네르바가 유명해진 가장 큰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그의 예언자적 능력 때문이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경제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미네르바는 카오스 상태의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의 미래를 단호하게 <예언>했고 꽤 정확히 적중했다. 당시 다음 아고라 경제방에는 미네르바의 '용함'에 열광하며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 등의 경제활동을 할 때 미네르바의 말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 사람들에게 미네르바는 용한 점쟁이와 다름 없었다.
 
4. 무속 대통령
조금 더 과거로 돌아가 2008년 대선은 용한 점쟁이를 믿고 선택하는 과정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대선 후보들에게 "내년에는 나와 가족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요?"를 질문했고 이러한 욕구를 일찌감치 깨달은 눈치빠른 이명박은 "날 찍으면 잘 먹고 잘 살게 될거야"라고 말했다. 매년 7퍼센트의 경제 성장과 4만불의 국민 소득, 그리고 세계 7대 경제대국이라는 747공약은 공약이라기보다는 사실 예언에 가까운 것이었다. 결국 용할것만 같은 이명박의 말을 그대로 믿은 순진한 사람들은 이명박을 선택했고 지금은 그를 선택하지 않은 무고한 사람들과 함께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명박이라는 부적은 효험이 없었던 것이다.
 
5. 무속 교육
우리나라의 교육 역시 예언과 개인주의라는 무속의 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다음과 같이 예언한다. "좋은 대학을 들어가지 못하면 잘먹고 잘살기 어려울 거야" 이 예언을 믿어 의심치 않는 학부모들은 오직 미래의 자신의 아이들을 잘먹고 잘살게 하기 위해 좋은 대학을 보내는데 전념한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카오스상태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에 이 상태에서 벗어나 안심하기 위해 비싼 과외비와 학원비를 지불한다. 사교육은 질서를 잡아주는 부적에 다름아닌 것이다.
 
6. 무속 기독교
일요일이 되면 수많은 교회의 목사들은 다음과 같이 예언한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 "십일조를 내면 물질을 되돌려 받는다" 이 말을 철석같이 믿는 '믿음 좋은' 수많은 교인들은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예배당을 찾고는 다음과 같이 간절히 기도한다. "내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게 해 주세요", "내 남편이 올해는 잘  풀릴 수 있도록 해주세요" 샤먼의 자리에 처녀보살 대신 예수가 이름만 바꿔치기해서 들어가 있는 것이다.
 
7. 무속과 천민 자본주의
예언과 개인주의라는 무속적 속성은 "나는 잘먹고 잘살자"는 천민 자본주의와 찰떡궁합을 자랑한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무속적 속성이 천민 자본주의를 가속화시켰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따른 심각한 부작용들이 생겼다. 그 중 주목할만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의식의 결여'이다. '나 위주의 복'을 바라는 개인주의가 강화되면서 이웃과 정을 나눈 사람의 훈훈한 이야기는 뉴스거리가 되어버렸고 자기희생을 담보로 한 건강한 공동체 의식을 가진 사람은 바보취급을 받는 세상이 되었다.
 
둘째, '정신문화의 부재' 이다.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것 이외의 다른 정신적 가치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어야 하므로 그 외의 가치들은 중요하지 않거나 필요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셋째, '합리성의 부재'이다. 천민 자본주의는 무속과 결합하면서 합리성을 말살시키고 있는데 대표적인 경우로 이명박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이명박은 무속적 예언으로 천민 자본주의적 가치를 보장하면서 사람들의 합리성을 말살시켰다.
 
8. 저지전략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무속은 미아리 점집에만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 사회의 저변을 형성하면서 심각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즉, 우리사회는 무속 공화국인 것이다. 따라서 미아리 점집들은 우리사회가 무속적임을 감추고 은폐하기 위한 전략적 장치일 뿐이다. 보드리야르의 말을 빌리면 이것은 '저지전략'으로 미아리 점집들은 우리사회가 무속적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거기에 따로 있다'.
 
9. <무녀도>
고등학생 시절 김동리의 <무녀도>를 배웠었다. 그 때 학교에서는 소설이 근대와 더불어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무속이 결국 패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가르쳤었다. 그런데 그 소설을 다시 가만히 살펴보면 무속과 기독교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소설의 기독교 역시 여전히 무속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소설은 무속의 패배를 노래하고 있지 않다. 단지 무속의 자리에 이름만 바꾸어서 기독교가 들어와 앉았을 뿐인 것이다. 오늘 날 우리 사회 역시 각기 다른 이름으로 무속의 자리에 앉은 것들이 무속이 아닌 체 위장하고 있다. 이 위장술을 벗겨내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사회가 조금 더 건강해지기 위한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