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으로 본 성서 - 상징계, 실재계, 그리고 하나님



1. 무력상태
언젠가 동물의 왕국에서 갓 태어난 새끼 캥거루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엄마 캥거루의 젖이 있는 주머니까지 기어 올라가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동물의 새끼들은 배고픔을 비교적 ‘스스로’ 해결합니다. 반면, 인간의 아기는 유감스럽게도 스스로 배고픔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캥거루처럼 엄마 젖을 먹으로 기어갈 수도, 스스로 먹이를 찾아 먹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 아기는 ‘무력 상태’인 것입니다. 대체로 아기는 엄마가 젖을 먹임으로써 배고픔을 해결합니다. 괴테의 어떤 시처럼 “어머니는 나를 두 번 살리는” 것입니다.



2. 큰타자와 상징계

아기가 울어댈 때 어머니들은 “아유 얘가 또 배가 고프구나.”라는 말을 합니다. 어머니들은 아기가 배고플 때 울어댄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때 갓난아기의 울음은 “배가 고파요.”라는 언어와 같습니다. 즉 무력상태의 아이는 언어로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두 가지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언어 체계이고 다른 하나는 수신자의 자리입니다. 한국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한국어 문법과 체계가 우선 필요하듯이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언어 체계가 이미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어는 수신자의 자리가 있다는 전제 하에 말하여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혼잣말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또는 ‘빈 공간’이라는 수신자의 자리가 전제된 채로 말하여지기 때문입니다. 아기의 경우에는 대체로 아기에게 젖을 주는 ‘어머니’가 그 자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 자리는 주체가 절대화되는 자리입니다. 라캉은 이 자리를 <큰타자>라고 부르며 그것이 이미 주체 밖에 존재하는 상징적 체계, 즉 상징계로 연결시킵니다. 따라서 인간 주체가 <말하는 주체>인 한, 주체는 <큰타자>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상징계를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주체로 거듭납니다. 멜라닌 클라인의 <딕Dick>의 사례(딕은 멜라닌클라인이 유도한 상징화 놀이를 통해 모든것에 무심하던 기존의 모습에서 벗어납니다.)나 프로이트의 <Fort - da놀이> 사례(아기가 실패를 굴리고 실패가 되돌아오는 것으로 어머니의 외출을 상징화하면서 실재 어머니에서 느끼던 향락을 실패놀이의 또다른 향락으로 대체합니다.)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큰타자>는 빈자리일 뿐이니 주체는 무(無)로부터 나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실재계

실재계는 말과 동시에 언어 바깥으로 추방되는 것입니다. 즉 말은 사물의 살해를 전제합니다. 노자에서 도가 도라고 말해지는 순간 도가 아니라는 말도 그와 같은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도라는 말에는 도의 살해가, 어머니라는 말 속에는 실재 어머니의 살해가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내가 너의 이름을 불렀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말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합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렀을 때, 너는 나에게 주검으로 다가왔다.”(빅터 프랭클)

실재계는 언어 바깥으로 영원히 떨어져나간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언어로는 도저히 표상하기 불가능한(impossible) 것입니다. 말로 그것을 표현하는 한, 우리는 그것이 실제인지 거짓인지, 허구인지 사실인지, 심리 밖에 있는지 안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확정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서는 실재계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재계의 존재를 추측 추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실재계는 상징계가 파괴되어 구멍이 생겼을 때 그 자리를 메우러 옵니다. 이것이 정신병으로 실재계가 환상과 죽음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정신병자들의 환상과 망상은 실재계의 도래와 관계가 있습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실재계는 환상과 향락을 통해서만 재현할 수 있습니다.


4. 실재계와 하나님
기독교의 하나님은 실재계이면서 상징계 자체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인 호렙 산에 올라갔을 때, 덤불 숲 한 가운데서 여호와의 천사가 불꽃에 휩싸인 채 나타납니다. 모세는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그 주위를 둘러보려고 합니다. 그 때 야훼가 말합니다. <가까이 오지 마라. 신발을 벗어라. 네가 있는 곳은 신성한 땅이다.> 모세는 그 소리를 듣고 얼굴을 가립니다. 하나님을 응시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야훼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인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라는 소명을 내립니다. 모세는 야훼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이 나를 보냈다면 사람들이 나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야훼가 모세에게 대답합니다. “나는 있는 자이다.”그리고 다음과 같이 반복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서 말해라. <나는 있다>가 나를 당신들에게 보냈다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두 가지 사실을 도출해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의 두려움과 불안의 대상이라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사물처럼> <있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라캉의 실재계의 정의와, 실재계가 도래할 때에 주체가 느끼는 공포 -정확히 말하면 <Unheimliche섬뜩함>- 와 일치합니다. 라캉은 실재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실재계는 특히 주체를 기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에 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와 동일한 것이고, …(《에크리》,388)


하나님은 속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 그것 저것으라고 할 때 <것>으로 존재합니다. 그것이 <자기 존재와 동일자로 존재한다>는 말의 뜻입니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 그것은 즉자적 존재를 연상시킵니다. 왜냐하면 다 알다시피, 즉자적 존재는 사물의 존재 양태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그냥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5. 상징계와 하나님
다른 한편, 하나님이 상징계 자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성서의 구절 -<요한복음> 1장 1절-이 있습니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in principio erat verbum)말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말은 곧 하나님이었다.” 말과 하나님을 등가로 놓고 있는 세 번째 구절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상징계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라캉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라캉은 라틴어의 <Verbum>에 대한 번역어로 <Verbe>나 빠롤<Parole>을 포기하고 랑가쥬<Langage>를 선택합니다. “태초에 랑가쥬(언어)가 있었다.” <Verbe>와 <Langage>의 거리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종교계에 엄청난 파문을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Verbe(말)>는 그것 밖에 있는 화자, 즉 하나님을 가정하고 있는데 반해, <Langage(언어)>는 <Verbe>를 떠받치고 있는 보편적 체계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화자(즉 하나님)이전에, 화자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기 대문입니다. 화자는 언어에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화자는 언어에 의한 효과로 탄생할 뿐 아니라, 언어 문법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언어가 화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라캉은 계속해서 희랍어로 된 원전에서 그에 해당하는 말은 <Logos>였음을 강조하면서 <Langage>로 번역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랑가쥬는 아마 파롤 이전에 있었다. 심지어 그것은 천지창조의 ‘신의 의지’ 이전에 있었다. 랑가쥬가 있은 연후에 신은 파롤을 사용해서 ‘빛이 있어라’라고 말한다.(《에크리》)

그에 따라, 이제 하나님은 성서의 화자도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최초의 말이 전제될 때의 화자는 하나님이지만, 언어 자체로서의 하나님은 말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추상적인 문법 체계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입을 가진 다른 인간적인 화자에 의해 말해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말하는 존재라면, 성서도 불경처럼 <如是我聞(나는 이렇게 들었다)>으로 시작해야 화자의 진정성이 인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라캉의 번역에 따라, 하나님은 <존재>가 아니라, 추상적 체계 또는 법(언어학적으로 말하면 문법) 자체입니다. 따라서 라캉에 따르면 <태초에 말이 있었다>를 <태초에 언어(또는 상징계)가 있었다>로 재번역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이 곧 하나님이었다>가 아니라, <언어(또는 상징계)는 곧 하나님이었다>로 바꾸어야 합니다.


 

 

 

참고 : 임진수. 정신분석 세미나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