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없는 삶

조회 수 9883 추천 수 172 2006.01.14 00:41:18
목적 없는 삶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마 25:37-39).

몇 년 전 대구 YMCA에서 <인문학적 성서읽기> 공부 중에
어떤 회원이 이 본문에 대해서 이렇게 코멘트 한 게 기억난다.
마지막 심판에서 의인으로 판정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자신이 선한 일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은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그 이외에도 몇몇 회원들이 몇 가지 생각을 제시한 것 같은데,
위의 내용만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 내용이 아마 나에게 매우 인상 깊었던 것 같다.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기독교 신앙에는
<목적>이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작용한다.
몇 년 동안 릭 워렌의 저서 <목적이 이끄는 삶>이
베스트셀러 자리를 놓치지 않은 것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모르긴 해도 그 책으로 40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한 교회가 많을 것이다.
그 책이 왜 그렇게 인기를 끌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여기서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목사의 입장에서도 실용적인 구석이 있었을 것이고,
신자들에게도 역시 뭔가 매력적인 요소가 있었을 것이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복음찬송도 역시
이런 시대적 조류와 무관하지 않다.
자신의 존재론적 근거가 확실하기 않은 시대에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실과
어떤 목적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자들에게 어필했다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목적>과 <사랑>이라는 게
과연 옳은가, 기독교적인가 하는 점에서는 문제가 적지 않다.

우리는 우리 삶의 목표를 알고 있나?
아니 알 수 있을까?
기독교적인 대충의 대답은 누구나 제시할 수 있다.
가장 전형적인 대답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도 하나의 대답이다.
이런 대답들의 근거를 성서에서 찾을 수도 있고,
신학자들의 진술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진술들은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
나름으로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것이지
우리 삶에 무조건 전가의 보도로 행사될 수는 없다.
내가 보기에 우리는 아직
우리 삶의 목적을 정확하게 모른다.
목사가 그렇게 말하는 건 지혜로운 게 아니니까 조금 말을 바꾸자.
삶의 목적을 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이다.
왜 그런가?
그걸 우리가 모르니까 무의하다는 말이다.
선천성 시각장애인을 보고
누구의 죄 때문인가, 하는 제자들의 질문 앞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대답을 하셨다.
그리고 그를 치료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 개념에 대해서 언급하려면
책 한권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삶의 고난, 부조리, 악의 현실을 직면하고,
그것과 싸우셨을 뿐이다.
예수님의 삶이 보여준 하나님의 영광을 추상화하거나
낭만적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그는 적나라한 이 세상과 인간과 삶을 보셨다.
그걸 해석하기보다는 그것과 투쟁했다.
그의 투쟁이 곧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었으며
이런 점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의 삶, 그의 운명을 바로 하나님 나라와 일치시켰다.
우리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리는 장애인들의 삶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하면 안 된다.
예수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내 기억으로 요한복음이 증언하고 있는 그 언급을
예수님의 친언으로 확증하기는 좀 문제가 적지 않다.
(내 생각이 잘못되었으면 나중에 교정해야겠다.)
설령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철이 든 사람이 아니니까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일치된 사람이 아니니까 말이다.
이 세상의 삶은 어떤 <목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깊이와 두께가 있다.
목적이 없다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일까?
지금 나는 이런 문제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세상, 인간, 역사, 생명을 어떤 <목적>이라는 범주에 넣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을까?
사랑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 속에서
이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다.
물론 서로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 살자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무엇이 사랑인지 우리가 모른다는 게 그것이다.
설교의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사랑하세요.
사랑을 나누세요.
이런 말이 얼마나 공소한지는
세상살이를 조금만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우리에게 사랑의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말한다면
지금 우리는 사랑을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아직 사랑이 무엇이지,
사랑이 누구인지,
사랑이 인격인지,
에너지인지 잘 모른다.
사람들은 막연하게 서로 좋아하거나
자기 생각대로 위해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우리가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하려면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하는데,
우리는 자녀들을 잘 모른다.
우리가 북한을 도와주는 것이 사랑일까?
교회에서 고아원을 찾아가는 게 사랑일까?
그게 사랑이 아닐 개연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만한 분들은 알 것이다.

내 말에 기분이 나쁘거나
생각이 혼란스러운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부정하면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냐, 하고 말이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그 생각 자체를 버리는 게 가장 좋다.
사랑하겠다거나, 사랑받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게 가장 현명하다.
이런 걸 ‘마음 비운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그런 생각이 좀 정리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마태복음이 그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닐는지.
자기가 이 세상에 살면서
무슨 선한 일을 했는지 조차 의식하지 않는 상태 말이다.
하늘나라에 가서도 상급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상태 말이다.
<목적 없는 삶>을 산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구원받지 않을까?

profile

[레벨:4]이상훈

2006.01.14 03:54:40

이번 말씀주제는 좀 어렵네요..^^;;

[레벨:20]신완식

2006.01.14 08:50:57

언젠가 읽은 책에서 발견한 '도상의 나그네'라는 표현이 생각이 나는군요. 그런데 왜 나그네로 못 살고 자꾸 집착하게 되는지요. '공감'이 갑니다.

[레벨:1]정세웅

2006.01.14 09:59:11

깊은 말씀이네요... 제가 있는 교회에서도 '목적인 이끄는 삶'이 절대적인 찬사를 받고 있죠. 그래서 그런지 '목적'이 분명히 보이는 것 이외에는 불성실이 판을 칩니다(목사가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비전을 제시하라는 아직은 제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는 말들이 심심찮게 중요한 화두가 되기도 하고요. 정목사님의 말씀을 이해하겠는데, 이들의 말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곤란스럽습니다. ^.^

[레벨:7]강석훈

2006.01.14 12:50:13

삶의 덧없음, 혼란스러움, 고통 혹은 재미없음 앞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그저 갈구할 뿐인 나의 한계가
스승을 지도자를 이념을 신앙을 찾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진지한 추구일 수도 있지만, 손쉬운 도피인 듯도 하구요.
하지만 겸손히 주님 지으신 세상과 나를 바라보며,
그 신비를 묵상하면, 잡다한 나의 생각이나 의지 감정에 집착하는 것보다
훨씬 풍요로운 감사를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중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요. ^^

[레벨:0]soewoojung

2006.01.14 22:16:23

정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불교의 무애가 떠오릅니다. 참 의미있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레벨:7]우익지

2006.01.15 14:40:12

속회같은 소그룹 모임에서 "목적이 이끄는 삶"을 매주 한장씩 토론하고 공부했습니다. 새벽기도로 다루기에는 좀 생각해 볼 것들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정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신앙의 도구화에 대한 많이 수긍이 됩니다. 그러나 저 같은 평신도에게는 이렇게 과연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할 기회도 주기 때문에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기가 있는 이유는 독자가 자기 생각과 유사하여 공명되는 현상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책에서 말하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았을 가능성도 있는 것 같습니다. 토론할 것이 너무 많아서, 그냥 속회공과 보다는 훨씬 좋은 책이다 생각했습니다.

[레벨:0]김진원

2006.01.16 21:16:38

자신이 선한일을 했다는것 자체를 잊은 사람들..?
그렇게 말씀하신 분은 조금 죄송한 말씀이지만 본문 자체를 잘못 이해하셨군요.
선한일한것을 잊은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언제 우리가 그런일을 했습니까?'
라고 물은것입니다. 즉 ' "예수님께" 우리는 그런일을 한적이 없는데..'라는 의미지요
이 본문을 선한일한것을 잊은것으로 해석하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번 글은 이해하기가 힘들군요..^-^;

비슬산

2006.01.18 11:24:02

to..
어쩌면 우리는 허상만 보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겉만 보고 속을 단정하는 우를 범하지요

세상에 정형화된 말과 글
심지어 삶조차도 그러하다면 산다는게 의미가 있을까요?
그런게 더 가식적인게 아닐까요?
대중들에게 보여줄 삶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건 아니시지요?

지식이든 경험이든 삶과 유리된, 치열한 고민없는 기계적인 표현들에 더 환호하는 우리가 아닌가 합니다

[레벨:0]이맹영

2006.02.04 11:54:07

사랑, 실천적 방법론과 인위적인 것이 아닌 沒我一體적인 일상의 습관이 아닐까요?
즉, 天人合一(요10:30)의 삶이 살리는 살림이라 봅니다.
이는 주절거리는 율법사(신학자)나 자기위주의 성경해석자였던 제사장과 레위인과는 거리가 멀고
좋은 인간성(신령한 성품)을 가졌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아닐까요(눅10:25~37).
그러므로 예수님은 힘을 근거로한 로마세력보다 성전과 말씀을 빌미로 무위도식하는 이들의 근거지를 까부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이 지금 이 땅에 오신다면 한국교회와 우리는 까부숴질 대상이 아닐지?

[레벨:2]김민호

2006.07.07 02:44:39

YMCA의 어떤 회원분의 코멘트는 참 멋지군요.
그리고 그에 근거한 정용섭 목사님의 문제제기도 참 좋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그렇듯이 이번에도 정 목사님의 문제해결엔 동의할 수는 없네요.
물론 정 목사님의 견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한도 內에서 말입니다. ㅎㅎ

참고로 YMCA 회원분의 코멘트와 관련하여 내가 동의하는 견해를 소개합니다.

-------------------------------------------------------------

너(=신참악마 스크루테이프)의 환자(=크리스천)에 대한 지난번 너의 설명 중에서 가장 경악할 점은, 그의 최초의 귀의를 특정지었던 것은 확고부동한 그의 결심들이었으나 지금은 그가 그러한 결심들을 단 하나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듣자하니, 끊임없이 미덕을 행하겠노라는 푸짐한 약속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삶에 대한 '은총'을 부여받을 기대조차 하지 않으며, 오로지 매일, 그리고 매시간 다가오는 유혹에 맞설 소량의 양식만을 기대하고 있다니! 이것은 지극히 불길한 징조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한 가지밖에 없다. 너의 환자는 겸손해졌다. 그의 주의가 이러한 사실에 끌리도록 유도했느냐?

모든 미덕은 일단 어느 한 인간이 자기가 그러한 미덕의 소유자라고 의식하게 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그것들이 별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데, 미덕 중에서도 특히 겸손의 미덕은 더욱 그러하다.

- C.S.Lewis,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中 14번째 편지 中 -

[레벨:6]유희탁

2006.08.02 17:50:30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레벨:23]브니엘남

2007.02.11 23:56:15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말은 문제가 있는 제목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목적이 이끄는 삶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롬 8:14)이어야 하니까? 그와 반대로 목적 없는 삶도 듣기에 따라서 마찬 가지인 것 같다. 마치 불교 색채의 말인 것 같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솔리 데오 글로리아) 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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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2008.02.26 17:52:33

참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 참 잘했어 라고 생각하는 것 한두가지 우리모두 가지고 있다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전 이거 하나 잘 한것 같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 주님께서 우스시지 않을까요! 재미 있을거란 생각이 드는데..

[레벨:0]Pathfinder

2008.03.08 13:11:24

왜 사십니까? 목적도 모르면서
무슨 선한 일을 했는지도 의식하지 않은 상태처럼 보이는 성경 본문은 겸손이나 마음을 비움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참된 주님에 대한 사랑이 이웃을 향한 사랑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대한 무지에 불과합니다.
마음을 비운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는 것이 좋다? <목적>이라는 범주에 넣지 마라?
늘 정목사님의 글을 읽으면, 무엇인가를 초월한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뉘앙스로 다른 책이나 사상이나 생각을 부정하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인간이 어떤 것도 범주에 넣지 않고, 마음을 비우는 것은 가능한가요? 이미 <목적>이라는 범주에 넣지 말라는 말 자체가 자신의 범주를 가지고 다른 범주를 비판하고 있는 겪이네요. 마치 규범과 원칙을 부정하는 프로이트의 자연주의적 사고에 기반한 글쓰기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늘 그런 글쓰기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은 뭔가 남들과 다르고, 더 아는 것 같고, 더 깨달은 초자아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죠. 그러나 그런 글쓰기는 자칫 "인간의 생동력을 잘라 없애고, 사회적 제한들의 총체적 체계에 대한 혐오감을 양산하며 정신적 노이로제 상태를 야기합니다(폴틸리히)." 뉴스엔죠이에도 긍정의 힘을 비판하는 댓글들을 보면서, 편협한 사고에 물든 몇몇 댓글들에 한숨이 나왔는데, 참 이 글도 뭔가 고상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도사처럼 텅빈마음으로 살아가라고 하는 것 같네요. 다른 것이 완벽하지 않으니 너무 거기에 빠지지 말라고 말은 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렇다고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또 아닌...참 아이러니네요. 완벽하게 또는 온전히 알 수 없다면, 생각도 주장도 하지 말아야 되나요? 사랑을 완전히 모르면 사랑할 수도 없나요? 예수님께서는 결국 우리가 알 수도 없는 그 사랑을 그렇게 실천하라고, 모범을 보이신 거군요. 진리는 언제나 그렇게 모호한 것일까요? 너무 부정적인 시각으로 비판을 위한 비판과 같은 에너지 소모는 이제 그만 합시다. 선한 일은 의식하지 못한 채로 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선한 일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고, 구체적인 사람일수록 더 선한 일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겠지요. 인생의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이라는 범주를 떠나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오류로부터의 초월이나 진리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방황이자 무지에 불과합니다. 왜 사십니까? 목적도 모르면서... 기독교 영성은 비우기만 하는 영성이 아니라 비운 후에 진리로 채우는 영성이 아닐까요? 진리는 신비롭게 숨겨져 있기 위해 존재하는 보화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지고, 캐내어지기를 기다리는 보화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3.08 23:25:44

pathfinder 님,
주신 말씀을 잘 새기겠어요.
나도 내 길을 잘 갈 터이니
pathfinder 님도 그 길을 잘 가소서.
좋은 주일!

[레벨:2]지니

2008.06.19 07:06:58

그냥 지나가다.... 저도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야지 하다가는.... 가끔씩 과연 그 목적이 주님이 내게 명하신 목적인 것인가 아니면, 나의 욕심을 선한 목적인양 포장한채, 욕심을 채우는 삶을 추구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목사님 글이 큰 위로가 됩니다.

[레벨:18]은나라

2018.01.23 22:43:10

해마다 읽어보는 글인데.. 이번에는 다릅니다.
그동안은 이해가 안되고 그랬는데..
이번엔 조금 알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배워왔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독교인들은 살아야 한다고 그래서 그렇게 살려고 몸부림치며 살아왔는데.. 그동안의 수십년을 돌아보면 글쎄요..
목사님 말씀대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살아온 삶이 잘살아 온것인지? 못살은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하나님 은총이었다는 것은 분명하구요.
오늘 내가 살아야 할 삶은..
목적없는 삶을 살아야 옳을것 같습니다.
왜냐면 내가 내삶을 완성하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완성하실테니.. 그분께 의존하며 사는것이 우리를 있게한 그분의 뜻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10년도 더된 글인데.. 정말 생명력 넘치는 글들입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8.01.24 21:11:43

은나라 님처럼 열심히 지난 글을 찾아서 읽는 분도 없을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의 모든 삶을 은총으로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바람직한 영적 현상입니다.

추운 날씨에 모든 가족들이 평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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