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강 녹취록 - 제9장 부활(3)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4730 추천 수 0 2009.06.20 07:59:53

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36강 -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3)

안녕하세요?

오늘 공부가 36강이군요. 시간 참 빨리 흐릅니다. 작년 9월 첫주인가 아니면 8월 마지막주인가 그 어간에 시작했는데요. 오늘이 6월 9일이니까 많이 갔습니다. 36번째 입니다. 지금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저희들이 듣고 있습니다. 참 어려운 문제죠.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핵심적이면서도 종종 까먹는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그게 참 신앙의 아이러니라고 할까요? 아니면 우리 기독교인들의 무사려한 모습이라고 할까요? 여하튼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별로 평소에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그 문제가 여기 놓여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마 이해하셨을 겁니다. 보통 우리들은 신앙 생활을 할때 교회의 업무, 거기서 주어지는 어떠한 신앙생활의 메카니즘, 여기에만 몰두해요. 예배를 어떻게 드리고 빠지지 말아야 되고 헌금을 어떻게 드리고 교회 조직안에 우리가 어떻게 활동해야 하고 뭐 그런 거 등등 그런 것들입니다. 실질적으로 부활문제를 신앙의 중심에 놓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우리가 늘 신앙의 본질에 집중하면서 살아가기는 쉽지 않는 거거든요. 어떤 영적 긴장감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 거를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좀 그런 것을 내려놓아야 되는거죠. 루즈한 어떤 형태가 필요하기는 합니다. 늘 긴장할 수는 없을테니까요. 그러한 상태에서는 그냥 교회에서 주어지는 구조, 질서 그 안에 그냥 머물러 있는거죠. 그리고 우리들의 종교적 호기심, 그런 것들에 우리 마음을 쏟게 됩니다. 즐겁게 찬양부르고 열심히 기도하고 또 응답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확신을 갖게 되구요. 교회를 부흥시키면서 즐겁기도 하구요. 신자들끼리 만나서 재미있게 보내기도 하구요. 그러한 재미도 있어요.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때문이라도 우리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문제, 이거를 시시때때로 되돌아봐야 되고 그쪽으로 돌아가야 되는거예요. 이거는 억지로라도 그렇게 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억지로 라고 하는 말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강요해서 싫은데 억지로 주입하다시피하는 그런 차원은 아니구요. 보통 retreat이라고 하는 것 있죠. 퇴소회같은 거요. 수련회라고 할 수 있죠. 일상적인 신앙생활하다가 어떤때에 특별한 계기로 집중적인 어떤 신앙 훈련을 받는 그러한 것들 처럼요. 우리가 부활문제는 주기적으로 돌아가서 살펴보아야 하죠. 이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토대이기 때문이기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걸 공부하고 있어요. 이게 보통 때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의 주제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두번에 걸쳐서 이야기했죠. 요 부활문제는 여러번에서

앞에서 한 이야기의 핵심문제는 변형,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변형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대교의 묵시문학에 토대를 둔 것이구요. 그게 갑자기 어디서 확 내려온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문제는 그러니까 두가지 흐름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어요. 두가지 사건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현현에 대한 경험이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된 게 아니냐 생각할 수 있을거예요. 예수 부활하신 것 경험한 것, 그게 부활 신앙의 모든 것 아니냐 생각할 수 있는데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활이 유대교의 묵시문학에 토대를 두고 있는 거예요. 그런 뿌리가 또 있는 거죠. 거 참 미묘하군요. 제가 설명하기가 쉽지 않는데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들이 초기에 예수 부활을 경험했죠. 그러나 그 자체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거는 일반 모든 사람들에게도 똑 같이 드러난 어떤 죽은 자가 다시 살았다고 하는 문제와 전혀 다른 문제예요.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났던 특별한 생명 경험이었거든요. 그들도 사실 경험이 무엇인지는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한 경험이 유대교의 묵시문학에 뿌리를 둔 죽은자의 보편적 부활이라고 하는 그런 것하고 연관되면 초기 기독교안에 분명한 부활신앙으로 자리를 잡게 된거죠. 이러한 부활 신앙의 핵심은 생명의 변형에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책을 다시 들어가보겠습니다. 177쪽 중간 패러그래프입니다.

어쨌든지 예수는 부활을 변형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이미 예수님이 부활에 대한 말씀을 하셨거든요. 부활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기도 하구요. 예수님 당신 자신이 그것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 중도 결국 변형이라고 하는거죠. 계속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2장25절에서 예수는 부활 후의 삶을 믿지 않는 사두개파 사람들의 질문에 답한다.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그들은 하늘의 천사 처럼 될 것이며, 장가도 안가고 시집도 안갈 것이라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마가복음 12장 25절에 나와있는데요. 장가도 시집도 안간 천사처럼 된다. 그러한 생명은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하고 완전히 다른거죠. 그 이유가 무언지는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천국-천국은 곧 부활생명의 세계인데요- 천국을 이 땅에서 경험하는 최고가 연장되는 쯤으로 생각합니다. 복지가 완전히 보장된 나라쯤으로 생각하죠. 잘못이예요. 지금 우리가 여기서 누리고 있는 경험하고 있는 이러한 생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생명으로 변화되는 겁니다. 요런 것들을 막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실질적으로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천사처럼 된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그러한 천사들의 생명을 완전하게 이해를 못하는데요. 오늘 우리들의 삶과 전혀 다르다고 하는 것은 분명하죠. 우리들의 한계는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러한 것들로만 우리는 지금 기쁨 희열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이것과 전혀 질적으로 다른 생명을 통한 기쁨, 평화 이런 것들을 생각하기 힘들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장가가는 것 좋아하잖아요. 시집가는 것 좋아하잖아요. 그리고 아파트 평수 넓게 늘리는 것을 좋아하죠. 그리고 사회에서 출세하고 말이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것, 그런 것들로만 우리는 기쁨을 주로 느낍니다. 잘 사는 나라, 복지가 잘 되는 나라 이러한 것들에 대한 희망이 많이 있죠. 그러한 것들하고 전혀 질적으로 다른 생명의 방식으로 우리가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요? 천사와 같은 삶인데 말이죠. 우리가 그런 생명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상대적인 것들인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바로 전에 말한 대로 출세하고 소유를 많이 늘리고 이름을 떨치고 하는 이러한 방식의 삶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되는 거죠. 참된 생명에는 그런 것으로 도달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겁니다. 어거스틴이 한 유명한 말이 거기에 해당하는 거죠. “하나님안에서 안식을 얻기 전까지는 이세상의 어떠한 것에도 안식을 얻지 못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영적인 상태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부활의 생명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디딤돌이 되는거예요. 이 땅에서의 삶이 그러니까요.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고 허무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예요. 일종의 허무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예요. 여기서 우리가 숨을 쉬고 일용할 양식을 만족하구요. 참다운 사람들과의 친교를 나누구요. 그러한 삶, 그러한 생명, 우리가 여기서 누리는 소박하다면 소박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삶까지 무의미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다 지나가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고 무상하기 때문에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여기에 부활생명이 개입해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들리시나요? 그렇지 않죠? 제가 또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진도를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변형된 삶이 바로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초기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부활경험의 핵심이고 그것은 이미 예수님의 말씀에 들어있다고 하는 겁니다.

누가복음 20장36절은, 이거는 마가복음 12장 25절 병행구예요. 누가복음은 보충해서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죽지 않을 것이다."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죽는 것으로 끝나는 거죠. 한계가 있다는 거죠. 이러한 것들이 변형된다고 하는 것은 이 땅에 생명을 가장 분명하게 결정짓는 죽음을 넘어서는, 혹은 그러한 것들이 극복되는 그러한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 나가겠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각각의 모든 경우에 전통적 암시로 표현되고 있는 "천사와 같다."라는 말은 이땅에 있는 인간에 비해 완전히 새로운 실존 방식에 대한 것이다. 요거를 꼭 기억하십시오. ‘완전히 새로운 실존 방식’ 그런 쪽으로 생각이 빨리 확장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런 것들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기독교 영성안으로 들어가기가 참 힘이 들어요. 완전히 새로운 실존방식, 이거 여러분들이 조금이라도 가깝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기 위해서 이렇게 비유적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지금과 같은 이러한 방식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바위로 변화된다고 하면 어떨까요? 바위.. 전혀 다른 실존방식이죠. 우리는 바위를 굉장히 답답하게 생각하겠죠. 한 자리에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는 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취미생활도 없고 정말 무미건조하게 거기에 있는 바위덩어리,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거를 일단 극복해야 되요.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러한 삶, 이러한 방식, 이런 것에 고착되어 버리는 거예요.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 방식으로만 절대화하는 거죠. 그걸 넘어서야 되는 겁니다. 네. 완전히 새로운 실존방식에 대한 것이다. 천사라고 하는 것이죠.

이는 바울이 '영적인 몸'이라고 말할 때 보여준 관점과 비슷하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예수도 철저하게 유대신학의 분명한 전통에서 보는 대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에 담겨있는 생명형식의 표상을 따랐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도 신학의 전통에서 본 대로 변형이라고 하는 그러한 부활 표상에 따랐다고 하는겁니다.

묵시문학 문서에서 그 골격이 잡혀 있는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희망이 형성됨으로써 바울은 일찍이 예수의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난 일이 없었던, 반면에 자신에게 나타난, q바울에게 나타난 그런 특별한 사건이야말로 부활신앙에서 볼 수 있는 현실성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좀 애매하긴하죠. 이해가 잘 안되실 것 같네요.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난 일이 없었던 특별한 사건. 바울에게만 나타났던 바울의 부활경험, 예수님의 부활현현의 경험과는 제자들의 (경험과) 다른 거지요. 그게 어떻게 다른가는 너무 전문적인 것이라서 좀 설명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요 뒤에 내용이 나올 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요런 점은 짚고 넘어갈 수 있겠군요. 이 제자들의 부활 경험은 빈 무덤, 핵심이구요. 그리고 복음서에 나와 있는대로, 빈무덤도 복음서에 나와있는 이야기구요.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이라든지, 또 제자들이 모여있을때 문을 닫아두었지만 예수님이 그자리에 함께했다는 그러한 사건, 그때에 도마가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 도마가 있는 자리에서 나타나셨다. 그러한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경험이라고 하는 것, 그거는 이러한 제자들이 경험하고는 다릅니다. 물론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다메섹도상에서의 부활경험은 그러한 제자들의 경험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사실적인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죠. 사도행전은 바울이 직접 쓴 이야기가 아니구요. 바울이 죽은 다음에 세월이 많이 흐르고 이 바울이 세운 그 공동체의 한 후대의 제자가 이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초기의 가장 중요한 공동체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변증하려고 쓴 것이지요. 이야기가 복잡해지요. 거기까지 나가면 힘들어지니까 그만 두고요. 사도행전에 있는 그러한 이야기보다도 바울의 직접 진술이 중요하거든요. 사도행전에 묘사되어 있는 바울하고 바울이 직접 쓴 편지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은 여러가지 모습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거는 여러분들이 아실분들은 아실거예요. 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경험도 사도행전과 바울의 직접 편지, 고린도전서 15장, 그 외에도 다른데 부분적으로 있죠. 그런 것하고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의 이 예수님 부활 경험은 제자들의 경험하고는 훨씬더 유대의 묵시문학적인 전통에 근거한 죽은자들의 일반적인 보편적인 부활 이런 것하고 연관되어 있다. 그 두가지 부활 경험, 바울과 일반제자들 사이의 경험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부분들은 제가 더 이상 말씀드리기 힘들겠군요. 제가 말씀드리려다 보니까 아 요부분으로도 연구를 하면 굉장히 중요한 어떤 것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한 연구 논문들이 있는지는 내가 잘 모릅니다. 아마 있을 거라고 예상이 되는데 있다고 하더라도 또 어차피 연구될 부분들이 있을 테니까요. 그 정도 하고 넘어가죠. 그 문장에 대한 설명은 바로 그겁니다.

따라서 바울은 일단 죽은 자의 부활 가능성을 예수부활의 전제라고 확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고전 15:16). 요런 구절을 통해서 본다고 하더라도 바울의 부활경험은 묵시문학이 이야기하고 있는 부활표상과 연관된다게 밝혀지죠. 해석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예수부활 사건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보편적인 기대로 돌아간다. 그것은 그저 그런 기대만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연결된 이들에게도 그들이 미래에 예수에게서 이미 나타난 이런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증한다. 여기에 근거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기독교인들이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는 점을 진술한 이후로 특별히 기독교적인 부활 희망에 대한 생각을 계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란 원래 가까운 미래에 기대되었던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체된 상태에서 죽은 자들을 가리킨다(살전 4:13 이하). 유대교적인 부활 기대는 모든 이의 부활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유별난 구원에 대한 기대가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난 보편적 사건인거죠. 특별한, 누구에게만 일어난 그런 것과는 달랐다고 하는겁니다.

이 기대는 한편으로 구원의 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심판의 길이었다. 그러나 부활이 구원의 현실성으로 작용하는 경우에 이것은 모든 이들에게 약속된 것이 아니라 오직 의로운 사람에게만 약속된 것이다. 보편적인 부활이되 그러나 의로운 사람에게 약속된 것. 누가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의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항상 남아 있었다. 유대교이 부활 사상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것이 바울에게 영향을 끼쳤어요.

유대 전승에서는 이 질문이 율법적 관점에서 해석되었다면,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가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준거로 작용했다. 예수가 준거죠. 유대교와 기독교인들에서 구원받는, 부활생명에 참여할 기준이 달랐다고 하는 것이죠. 유대교적 전승에서는 율법,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

예수의 부활은 신앙을 통해서 예수와 연결되어 있는 이들에게 이미 예수에게 발생한 생명- 부활 생명이죠-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이때 바울이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부활에 대한 기대는 이미 구원에 대한 희망이 된다. 특별히 부활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이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한 자와의 일치에서 그 기초를 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기대가 진리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이 전제는 이미 예수 부활의 사신에 기초하고 있다. 예수 부활의 사신, 사신은 복음선포, 복음 그러한 뜻입니다. 요 부분, 보충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기는 한데. 자세하게 하기는 힘들겠어요.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이렇게 예수 부활에서 구원의 희망을 분명하게 가졌지만, 거기에 두었지만 동시에 묵시문학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죽은자에 대한 부활, 죽은자의 부활에 대한 기대, 이것도 옳다고 하는 사실, 이거를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하는 거죠. 그게 무슨 의미냐. 그런 것들이 왜 중요하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앞서 제가 언급한대로 초기 기독교인들의 예수부활 경험이 단순히 예수님의 부활현현의 경험으로 끝나지 않고 유대교의 묵시문학적인, 부활 표상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예수님부활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이 믿고 따라서 확신을 가졌다. 우리도 다 그렇게 산다. 그렇게만 머물고 말잖아요. 그런식으로 생각이 끊나고 말잖아요. 그게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거죠. 그게 뭐가 중요하냐? 중요합니다.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묵시문학의 보편적인,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라고 하는 이 부활 표상이 계속 기독교의 부활 표상하고 연결된다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잖아요. 역사의 문제인거예요.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역사의 맥락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곧 변형된 생명이라고 하는 사실도 역사를 통해서 계속 변증되어야 될 문제인거죠.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변형된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 이전에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그 부활에 대한 그들의 경험에 근거해서 우리가 계속 유지하고 붙들고 있는, 부활 신앙과 깊숙이 연관되고 그 부활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될 문제입니다. 사명이라고 할 수 있죠. 오늘 어떻게 이 변형된 생명 부활 이런 것들이 역사안에서 해명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계속해야 되는 것입니다. 네 139쪽 맨위에 새롭게 시작하는 패러그래프입니다.

예수 부활의 사신에 대한 신뢰성 문제는 죽은 자가 부활하리라는 기대에 대한 일반적 질문에 달려 있다. 요런 문장도 제가 바로 설명한 것과 연장됩니다. 문장만 따로 떼어놓고 생각한다면 조금 까다롭기는 하죠. 예수 부활의 복음 선포, 이것이 정말 믿을 만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16절에서 이야기 했듯이요. 죽은 자가 부활한다고 하는 그 기대, 묵시문학적 기대예요. 이것에 대한 질문에 달려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에 달려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기독교의 부활절 전승을 역사적으로 판단하도록 한다. 죽은 자가 죽은 상태로 머물러 있고, 죽음이 완전한 마지막이며, 또한 죽음으로부터 깨어나는 것과 같은 그 무엇이 (어떠한 의미에서도 역시) 일어나지 않거나 한 번도 일어날 수 없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면-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다. 꽝이다.- 이런 것이 확실하다면 예수부활에 대한 기독교 사신이 진리론적인 점에서 매우 강한 편견에 빠지게 된다. 근거가 취약해진다고 하는 거죠. 따라서 부활에 대한 증거를 보다 정확하게 하려는 노력은 전체적인 차원에서 판단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더 이상 개인들에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다. 내가 부활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요런 차원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역사적인 문제라는 거죠.

역사가에게 주어진 의무와 중요한 과업이 바로 이런 노력에 놓여있다. 역사가는 신학자라고 할 수 있구요. 역사안에서 일어나는 기독교의 신앙과 이 세계와를 연결시켜서 해명하는 역할을 해야 되니까요. 모든 인간이 미래에 얻게 될 부활이나 혹은 의로운 자들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기대가 의미심장하게 다루어질 경우에만, - 아까 제시한 방법과 조금 다른 뜻이라는 것도 되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하는 그러한 전제가 아니라, 자연과학이 만약에 그걸 전제하게 된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걸 인정할 수 밖에 없다면 더 이상 우리는 기독교 부활신앙이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없게 되겠는데 그게 아니라 미래에 얻게 될 부활, 의로운 자들의 죽음으로부터 부활할 것이라고 하는 그러한 기대가 정말 의미심장하게 말할 만하게 정말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진지하게 이야기할 만한 경우에 그런 경우에만, 또한 그 부활이 인간, 단어들이 좀 그렇죠. 쭉 쭉 나가면 좋겠는데요. 그래도요. 조금 설명을 하는겁니다. 부활이 인간 현실성의 현대적 이해, 우리가 현실이라고 하는 리얼리티라고 하는 것을 오늘 현대에서 어떻게 이해하느냐 그런 거하고 연관된 속에서 부활이 생각될 수 있는 경우에만, 두 가지 방법, 어떤 조건절로 나오죠. 이걸 하나로 묶게 되면 미래에 얻게 될 부활 생명 이런 것들이 진지하게 논의될 수 있는 경우에만 기독교의 부활절 사신이 보도하고 있는 그러한 사건의 가능성이 실제로 진지하게 다루어질 수 있다. 이건 사도바울이 2천년전에 짚은 문제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이건 끝나는 문제인거죠.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는 거죠. 이미 유대교 부활, 묵시문학적 사상에서 나온 것이구요. 오늘의 자연과학에서도 그러한 논의의 가능성을 우리가 찾아야 되는 것이죠. 그런 전제가 없으면 우리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부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독단에 빠질 수가 있구요. 역사적인 것이 아닌 그러한 편견에 머물 수 있다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충분한, 그리고 진지한, 그리고 의미심장한 논의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네 계속 텍스트를 보겠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원래부터 폐쇄되어 있지 않은 하나의 가능성을 의식하는 토대에서만 예수의 부활에 대한 질문은 역사적으로 진지하게 다루어질 수 있다. 하나의 가능성을 전제할때만. 그게 뭐냐. 다음과 같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사상은 오늘날 잘 알려진 인간의 현실성에 대한 요소, 그리고 인간의 자명성에 놓인 조건에서 볼 때 완전히 이질적인 성격을 지니는가? 아니면 그러한 사상은 인간상황의 구성적 조건들과 의미심장한 관계에 기초하고 있는가? 두가지가 대립된 질문이죠. 이러한 어느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부활신앙, 부활경험, 이런 것이 어떤 토대를 확보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결정된다고 하는 거죠. 이거는 계속 반복해서 하는 이야기인데요.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사상은 인간 실존의 육체성이라는 관점으로 아주 강하게 각인된 오늘의 인간론적 통찰에 기초해서 볼 때 인간 상황을 이전 시대보다도 훨씬 진지하게 인간의 자기이해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동기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사상이 갖는 이러한 적극적인 중요성은 물론 비유적이고 메타포적인 성격 가운데서만 확실하다는 조건에서 인정되고 주장될 수 있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사상을 모든 인간의 경험이 닿을 수 없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초자연적 앎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활사건을 인간 경험의 연관에 끼어있는 일종의 이물질로 여기게 된다. 설명이 필요할까요? 필요하지 않을까요? 마지막 문장만 조금 보겠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사상을 모든 인간의 경험이 닿을 수 없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초자연적 앎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는 사람, 완전히 단절된 초자연적인 그러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활사건을 우리에게 불편한 이물질적인 거로 여기게 된다는 거죠. 마치 마술같이 생각하는거죠. 물론 이거는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거죠. 이런 잘못된 이해가 사실 일반 평신도에게 만연해 있을걸요. 그냥 마술가가 죽은 사람 살리 듯이 살아난다. 이런 식으로만 하니까요.

그게 아니라 메타포적인 특징 가운데서만 이 부활은 자기를 이해해가는 인간 상황의 표현으로 파악될 수 있다. 메타포적인 특징, 은유적인 것이죠. 직접적으로 뭐다라고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러나 정확하게, 정확하다는 표현은 맞지 않구요. 메타포적이라는 말을 이해를 하셔야 하는데요. 그거는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 쯤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그러한 방식으로 밖에 말할 수 없는 변형된 생명의 실체가 곧 부활이라고 하는 거죠.

우리는 우선적으로 우리의 현존재에 대한 궁극적 질문을- 지금 현재 익숙해 있는 이런 것에 대한 상식적인 질문, 살아있고 숨쉬고 그리고 죽음을 의식하고 있는 모든 질문들을 그림과 메타포 형식에서 인식하게 되며, 또한 어떠한 그림으로 우리가 우리 생명의 의미나 무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지 그 길을 찾아가는 문제가 결코 쓸데없는 일은 아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고 해서-메타포가 비유적인거니까요- 말하는 자에게 현실성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성, 아주 알짜배기, 리얼리티, 드리트리카이 그걸 이야기합니다. 비유적이라고 해서 그 현실성이 중요하지 않다고 아니라고 하는 말입니다. 오히려 부활의 그 낯섦 때문에 일단 비유적 언급을 통해서 거론할 수밖에 없는 그 현실성이 중요하다. 그 다음쪽 패러그래프입니다. 140쪽 중간입니다.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에게 속한 특징은 고유한 죽음의 불가피성을 안다는 점이다. 그와 똑같이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은 자기 현존의 한계를 넘어 인간 운명의 완성에 대해서 드러나게 질문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간의 운명은 개인적 생명에서 기껏해야 단편적으로 이루어질 뿐인 그것이다. 이 한계를 알아야만 그 운명을 뛰어넘을 수 있다. 이런 앎이 없이는 그것이 전혀 성취될 수 없다. 물론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항상 머릿속으로만 성취될 뿐인데,-실제적으로는 안되는거죠- 이러한 방법으로는 목표도 없고 불안정한 광신 밖에는 아무 것도 나올 게 없다는 판단으로 인해서 많은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의 완성에 대한 질문이 없이는 죽음의 차안에 속한 생명-지금 현재 세계를 차안이라고 하죠. 그 다음세계를 피안이라고 하죠. 차안과 피안 여기에 속한 생명도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죽음의 완성에 대한 것을 질문하지 않는 한 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의미도 상실하게 된다. 이에 반해서 죽음을 뛰어넘는 희망의 불빛 가운데서 우리의 지상적 삶은-차안에서의 삶이죠- 보다 거대한, 그러나 여전히 비밀 가운데서 은폐된 전체의 단편으로 제시된다. 음. 중요한 문장이군요. 죽음을 뛰어넘는 희망의 불빛 가운데서는 죽은 자들의 일반 보편적인 부활이죠. 그러한 희망이죠. 그러한 희망의 불빛이죠. 거기서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의 삶은 비밀 가득한 가운데서 은폐방식으로 개입된 생명 전체의 부분으로, 단편으로 제시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죽음의 피안에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즉 우리의 현재적 경험에 숨겨져 있는 현실성의 차원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희망이죠. 기대이죠. 지금 모르고 있죠. 그렇지만 인간은 자신의 인간적 운명을 확인하기 위한 표상을 획득하려고 거듭해서 시도했다. 이 표상은 우리 생명의 유한성에서 결코 그 완성될 수 없는 그것이다. 그러한 표상의 하나가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에 있는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묵시문학적 부활이 초기 기독교에서 새로운 생명의 현실성을 얻게 된거죠. 예수의 부활 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인거죠. 여전히 기대와 희망이고 표상에 머물렀던 유대인들의 부활 사상이 초기기독교에서 선취된 생명으로 현실성을 확보하게 된거죠. 무슨 말이냐. 조금 모순적이다 이렇게 생각하실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묵시문학이 그러한 부활 생명에 대한 표상이라고 한다면 기독교의 부활경험도 역시 그러한 표상 아니냐 무슨 차이가 있느냐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설명하기가 쉽지 않네요. 그건 제가 준비도 하지 못했구요. 제가 강의를 하다보니까 생각이 나서 여러분들을 대신해서 질문을 하는 것뿐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요 챕터,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사가 끝날 즈음이 되면 대답이 주어질 거라고 보기는 합니다. 그때까지 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루어 둘까요? 아니면 지금에라도 제가 준비없이 간단하게 대답을 찾아 볼까요? 그 질문이 좀 정확하게 나온가요? 강의하면서 떠오른 질문을 드린건데요. 질문이 정확한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부활표상이라고 이야기할때 자칫하면 실질적인 것 하나 없이 그냥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게 된게 아니냐 그런 생각이야 어디든지 많이 있는게 아니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거든요. 부활 표상만 하더라도 페르시아에 그러한 설화이었을 수도 있을거구요. 이러한 부분들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아요. 구약의 많은 부분들이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구요. 신약성서와 초기 기독교 신학, 교부들의 신학도 로마 헬라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성서와 초기기독교 신앙이 주변에 있는 다른 종교나 철학 사상, 그런 것하고 그렇게 크게 다를게 뭐가 있느냐 그렇게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네. 고 문제는 여기까지만 하죠. 네가 이거를 더 설명을 하려면 할 수 있는데 더 복잡해지니까요. 간략하게 윤곽만 이야기하면요. 이런 점에서 지금 설명된 그러한 점에서 기독교는 주변의 다른 사상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 이 기독교가 다른 사상 종교가 이야기하고 있는 진리의 근거들을 오롯이 확보하고 있는 독보적인 신앙체계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꾸준히 우리는 변증이 되고 논쟁해야 되겠죠. 그것은 종말까지 계속되어야 될 문제입니다. 우리만 옳다 딱 옳다 주변과 대화하지 않고 입 다물고 큰 소리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늘 주변세계와 열린 자세로 대해왔기 때문에 그것을 해야 되구요. 그걸 전제하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가, 종말론적인 통치가 은폐의 방식으로 현재했다고 하는 이 사실을 우리는 믿고 시작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우리는 연역적인 거죠. 그 신앙, 하나님의 계시, 예수에게 임한 하나님의 구원계시, 이 것들을 우리가 기독교 전승에 따라서, 사도적인 전승에 따라서 우리가 믿고서 시작하는 거죠. 그런점에서 연역적인거죠. 그러나 이것이 참된 진리라고 하는 것을 변증하기 위해서는 다른 주변의 철학, 종교 사상들과 치열한 논쟁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점에서 귀납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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