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강 녹취록 - 제9장 부활 (5)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5369 추천 수 0 2009.07.01 09:29:54

안녕하세요?


오늘 38강입니다. 지금 우리가 판넨베르크가 설명하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 본 이야기는 마지막 문장을 일단 좀 보는게 낫겠군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의 일상적 현실성은 현실성에 대한 비밀이 벗겨진 상(像)보다는 훨씬 다층적인 것으로 인정되고 있지 않은가?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 예수님의 부활은 결국은 생명의 현실성과 직결되는데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그러한 현실성 안에서만 모든 현실성을 놓고 말하면 곤란하다는 거죠. 일반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의 현실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그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 이런 것들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거는 맞는 이야기인데요. 그렇지만 그러한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성으로 다 담아내지 못하는 그러한 현실성의 가능성들을 다 없다고 하면 곤란하다는 거죠. 역사적으로 일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우리가 실험실에서 반복하는 어떤 자연과학적 논리의 잣대로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이 세상의 모든 현실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들과 아무 상관없이 무조건 초월적으로 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는 아닌거죠. 예 그런 것을 전제하고 오늘 우리들이 이야기를 더 따라갈 텐데요. 조금더 구체적으로 자연과학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제가 갖고 있는 책 145쪽입니다. 네 본문을 보겠습니다.

그러한 종류의 가능성들을 고려하는 역사가에게는 자연과학과 갈등관계에 빠질지 모른다는 항변이 종종 제기된다. 여기서 이러한 종류의 가능성들을 고려한다는 것은 우리가 실증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한 그런 것들에 머물지 않고 인류역사 전체가, 인류역사 뿐 아니라 우주역사 전체가 끝났을때 해명이 가능한 궁극적인 현실성이 있다고 하는 거죠. 그러한 가능성을 고려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비록 여기서 자연과학적 그러한 방식으로 완전한 그리고 완료된 그러한 해명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더 근원적인 현실성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보는 거죠. 이게 말을 좀 학문적으로 설명해서 그런데 일반적인 신앙적인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확실하게 부활하셨다. 그게 왜 역사적인 사건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왜 역사적이냐 하는 것을 지금 설명하고 있는거예요. 우리는 보통 역사적이라고 할때 신문기자들이 현장에 가서 사진 촬영하고 사실 그대로 전하는 이야기들, 혹은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어떤 것들을 반복해서 검증해내는 어떤 것들을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그렇지만 신학적인 차원에서 역사적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역사적이라고 하는 것들, 총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 역사적이라고 하는 것은 부분적인 어떤 실증적 사건과 사실들을 이야기하는 거지만 신학적인 차원에서 역사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부분적인 것들의 총체 그런 모든 것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분명한 현실성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는 어떤 정치 세계사적인 사건의 흐름이라든지 자연과학의 역사를 통해 드러난 과학적 진실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여전히 이 역사의 신비는 우리들 손에 완전히 잡힌 것은 아니거구요. 자연과학도 여전히 모든 것의 비밀들을 다 드러내지 않는 것은 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닿지 않은 더 근원적인 현실성들이 우리의 삶, 우리의 역사, 우리의 세계를 견인해 나가고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보는 역사가를 이야기하는 거죠. 이렇게 오늘 본문이 그러한 역사가를 이야기하는 거죠. 이렇게 이야기하면 자연과학과 충돌하는게 아니냐 그러한 반론이 제기 된다고 하는 겁니다. 마치 창조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진화론자들하고 충돌하는 것하고 비슷하게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판넨베르크는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나가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항변을 자연과학자들에게서는 아주 드물게, 물리학자들에게서는 최소한으로, 그리고 신학자나 역사가들에게서는 자주 듣게 된다.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이 세계의 현실성을 열어놓는 그러한 관점들이 자연과학과 충돌할지 모른다고 하는 이러한 항변을 자연과학자들에서는 드물게 듣는다. 자연과학자들은 그런 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리학자들에게는, 최소한으로 오히려 신학자들이나 역사가들에게는 자주 듣게 된다. 충돌하는 것, 그거 문제다 그러한 거죠. 오히려 신학자들에게나 역사가들에게는 충돌로 보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는 자연과학의 교의학적 입장이 항상 광범위하게 입력되어 있다. 이 입장이 그들에게 거의 필요하지 않은데도 말이다. 네 무슨 뜻인지 전달이 되었죠? 이 현실성을 개방적으로 보는 것과 자연과학이 충돌한다고 하는 입장을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고정관념으로 들어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고 하면요. 자연과학의 교의학적 입장, 자연과학이 절대불변의 진리다 그러한 생각이죠. 교의학적 입장이라고 그랬는데 그렇게 설명하면 되겠습니다. 하나의 독단으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언젠가 제가 말씀 드렸는지 모르지만 물이 위에서 밑으로 흐른다 이거는 절대적인 진리이긴 하지 않습니까? 자연과학으로 밑으로 흐른다. 중력때문에 밑으로 내려온다. 그게 지구에서 옳은 이야기죠. 그런데 그게 지구를 떠나게 되면 그것은 옳은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경험하고 있는 자연과학적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범주안에서만 가능한 것이지 그 범주를 넘게되면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이거거든요. 그리고 중력이라고 하는 것이 이 지구의 범주안에 있는 가장 기초적 물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력만으로 모든 것을 다 설명하기에는 이 세상의 현실이 더 신비로운거죠. 네. 여기서 자연과학의 교의학적 입장을 너무 그런 것만을 기준으로 이 세상의 현실성이 훨씬 심층적이고 다층적이고 신비하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우스운 모습이다는 것이죠. 그 다음요.

자연과학은 주어진 것에 대한 법칙을 확정하고 묘사하고자 한다. 자연과학은 무엇이 원래 주어진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무엇이 아닌지를 판결하지는 않는다. 정확한 표현이죠. 결국은 사건에 대해서 무엇이 고려될 수 있는지, 그리고 되어야만 하는지 찾아내고자 한다. 미래의 지평은 자연과학에 의해서는 결코 결정되지 않는다. 그렇죠. 지금까지 온 것들에 대한 보편타당한 규칙성들을 찾아가는 작업이니까요. 미래는 자연과학에 의해서 결정되거나 규정될 수 없는거죠.

과거를 참작해서 현재에 알려진 자연법칙으로부터 지구와 우주의 전역사가 추론되어야 하며, 이러한 추론은 정당하고 경험적인 근거를 통해서 강화되거나 부정된다. 그러나 역으로 이러한 방법만으로는 어떤 다른 숨겨진 개개 사건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그 무엇이 실행될 수 없다. 과거에 있던 여러가지 법칙들을 통해서 오늘의 그러한 세계를 이해하고 추론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죠.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 은폐된 어떤 사건,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찾아 낼 수가 없다는 것이죠.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 높았다면 혹은 조금 낮았다면 역사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그러한 것들을 자연과학적으로 사회과학적으로 결정지을 수 없는거죠. 유럽의 역사가 우리들이 생각하고 분석한 그러한 이유들로서 다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수많은 우연한 원인들이 기기묘묘하게 연결되어 있는거죠. 그러한 모든 가능성들을, 그러니까 어떤 사건이나 역사에 숨어 있는 그러한 것들을 사람이 다 어떻게 파악해 낼 수 있겠습니까? 본문을 보겠습니다.

이전에 충분히 확증된 가설이 반대에 봉착하게 된다면 여기서 결국 믿고 있는 것에 대한 의혹이 일어난다. 이것은 전승된 주장을 역사적으로 연구함으로써만 결정될 수 있는 문제다. 그 어떤 하나의 개체 사건이 그 이외에도 타당한 자연법칙을 깨뜨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이것은 말하자면 자연법칙의 개념을, 그것의 보편성을 제거하게 될 것이다. 이것 보다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사실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즉 잘 알려진 자연법칙의 효능에 관계없이 개개의 경우에 더불어 발생하는 미지의 요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낯설어 보이는 사건이 실제로 발생한다고 말이다. 네 그렇죠. 좀 복잡한 문제인데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물론 이에 근거해서 볼 때 그 주장된 사건은 그 이외의 진행과 닮아 가면 갈수록 훨씬 무게가 떨어진다. 따라서 매우 짧은 순간이 통과된 후에 얻게 될 신체의 소생은 그럴 개연성이 거의 없다 하겠다. 금방 죽었다 산다 이런 개연성은 거의 없다고 하는 거죠. 그건 자연과학의 보편적 진리에 위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짧은 순간에 일어나는 그러한 생물학적인 물리학적인 그러한 현상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생물학적이고 물리학적인 근거들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부활의 경우에는 단 한 번도 그런 종류의 판단을 위한 거점이 주어지지 않았다. 자연과학적으로 실험이 불가능한 이야기란 거죠.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그 목표가 인간적 경험에서는 절대 가능하지 않은 영역에서 메타포로서만, 혹은 경험적으로 아직 완전히 상환될 수도 제어될 수도 없는 다른 형식의 언어로서만 언급될 수 있는 어떤 한 사건이 주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네. 아직까지 이러한 문제들이 자연과학적으로 물리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검증하고 반복할 수 있는 그러한 것 너머에 있다고 하는 거죠. 메타포의 형식으로 그리고 우리의 경험안에 상환될 수 없는 것으로 주장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만약에 이 사람에게도 저 사람에게도 모든 사람들에게 막 나타났다 이렇게 되면 그건 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그건 정말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마술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러나 성서가 보도하고 있는 이 부활은 그러한 방식이 아니죠. 예수를 추종하던 사람들에게만 경험된 어떤 생명 사건인거죠. 그 다음요.

자연과학은 예수부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결정할 수 있는 궁극적인 법정이 될 수 없다. 자연과학 만능주의적 입장은 오늘날 지배적인 현실성 이해가 고전 물리학이 말하는 세계상을 통해서, 특별히 자연법칙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통해서 결정적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거듭해서 강력하게 제기된다.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은 그 양식을 통해서 자연의 현실성을 빠짐없이 진술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일정한 전망 하에서만, 제가 그것을 앞에서는 범주라고 이야기 했어요. 즉 법칙이라는 전망 하에서만 진술될 뿐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그 어떤 테두리안에서만 그거는 타당한 이야기가 되는거죠. 이거는 물리학적으로도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들을 모든 것을 규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법정, 증거로 말하는 것은 학문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는 이야기입니다. 전혀 다른 세계이해를 위한 패러다임이 필요한데 기독교적인 입장이 그 하나라고 하는 것이고 훨씬 설득력이 있다고 하는 말이죠. 그게 뭘까요?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사건의 우연성에 대한 전망을 고려하는 현실성 모델을 찾아볼 수 없다. 우연성, 사건의 우연성에 대한 전망을 고려하는 현실성 모델을 찾아볼 수 없다. 현실성 모델, 현실성 리얼리티를 이해하는 패러다임 모델인데요. 우연성이라고 하는 전망에서 현실성을 파악해 보려는 그러한 모델인거죠.

이러한 모델은 우연성에 대한 전망을 자연의 법칙성, 그리고 생명, 인간, 자연과학의 역사성과 묶어낼 수 있고, 더구나 자연과학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비교될 수 있는 보편성을 요청할 수 있다. 이로써 자연과학의 보편화된, 그리고 단순화된 결과를 교의학적인 입장에서 현실성의 기본서술로서 받아들이며, 또한 모든 사건의 동형식화에 대한 표상을 창출해내려는 경향은 당연하다. 이것이 자연과학이 나아가는 길이죠. 동형식화라는 말 좀 어렵죠. 동형식화에 대한 표상, 똑같은 것들이 점점 시간이 가면서 일정한 규칙을 이룬다고 하는 겁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라고 하는 것도 일종의 동형식화거든요. 물론 아프리카는 좀 다르지만 거기는 또 다른 방식으로 계절의 동형식화가 이루어지고 있고요. 아침에 태양이 떠서 지구가 자전함으로 저녁에 태양이 떨어진다는 하는 이러한 것들이 물리학적인 동형식화구요. 사람이 결혼해서 이야기를 낳는다고 하는 그것도 그 방식으로 후손을 번식한다고 하는 모든 생명체가 행하고 있는 자손번식의 동형식화입니다. 그런 것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거하고 우연성 전망하고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런 것들을 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진도 나가보죠.

이 동형식화는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나 의외의 것에 대한 어떤 공간도 허락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된다는 것이죠. 그렇지만 이런 자연과학의 만능주의적 입장을 피하는 것은 가능하며 또한 진지하게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그것이 우연성에 대한 전망을 고려하는 현실성의 모델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연성이라고 하는 것은 진화론에서도 그거 있지 않습니까? 다 진화의 원칙, 원리에 따라서 생물이 앞으로 나가고 있는데 그 진화의 원칙을 벗어나는 일들이 일어나잖아요. 돌연변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진화론에서 더 중요한 것은 돌연변이일지 몰라요. 요즘 세계적으로 신종인플루엔자 때문에 세계 보건당국이 긴장하고 있는데요. 그런 것들이 돌연변이이구요. 동형식화를 벗어나는 우연성 개념인거죠. 지금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다가 왜 갑자기 우연성 이야기를 하느냐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연관되는 이야기입니다. 우연성에 대한 현실성에 대한 이해거든요. 그러니까 동형식화, 혹은 자연과학의 만능주의적 입장, 이런 것에 머물러 있는 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받아들여지기 힘든 문제가 되는거죠.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은 이 부활, 이거도 그렇고 다른 것도 다 마찬가지지만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부활이니까요 이 부활을 이야기할 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부활하셨다 이런 말로만은 설득력을 갖출 수 없는 겁니다. 이 세계 이해가 어떤 것에 따라서 이것의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고 닫힐 수도 있는 겁니다. 무조건 우리가 개인의 믿음만 강조하면 된다는 식의 이것은 기독교 역사의 특징인 변증적인 차원에서도 옳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가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자연과학의 만능주의적 입장, 동형식화의 절대화 이런 것을 넘어서는 우연성에 근거한 새로운 현실성, 모델, 이런 것들은 역사가에게 다음것을 의미한다. 역사가는 과거를 판단할 때 원래부터 통상적이고 파악될만한 사물의 과정에 상응하는 그런 가능성들만을 인정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이미 알려진 그런 것만을 인정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죠. 역사가는 전승된 그 어떤 것도 점검받지 않은 채로 취급해서는 결코 안 된다. 네 여기서 역사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역사학자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거는 신학자도 그렇고 물리학자도 그렇고 모든 이들이 다 역사학자라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지난날에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 현상들 이런 것들을 근거로 해서 오늘의 인간과 세계를 분석하고 앞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작업이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난날에 알고 있었던 모든 사건들의 흐름들, 원리들을 무조건 알려진 것으로만 보면 좀 곤란하다고 하는 거죠. 거기에 다른 원인들이 들어갈 수도 있는거죠. 미처 몰랐을 뿐이지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는거죠.

그런데 이와는 달리 다시 살아나게 될 죽은 자에 대한 이야기를 의심하는 기준은 무엇보다도 유별나 보인다. 이러한 주장들은 고대문학에서 별로 특별한 것은 아니다. 표상적 형식에서 동일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표상적 형식. 생각하는 어떠한 틀들을 이야기합니다. 죽은자의 부활에 대한 생각이 여러 다른 형식으로 나타난 거죠. 동양과 서양, 바벨론, 페르시아 이런 등등에서 이집트, 잉카문명에서는 없었겠어요. 그러한 것들이 표상이 좀 다르다고 하더라도 성서 이외에서도 발견된다. 성서에만 죽은 자의 부활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이러한 종류의 보도는 전설적인 특색을 매우 두드러지게 보인다. 따라서 원시 기독교의 전승들이 전설적 출현의 어떤 흔적을, 혹은 최소한 전설적 형태를 담고 있는지 연구해 보아야만 한다. 그런 역사적 연구들은 필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전설적 요소들 말입니다. 더 나아가 부활한 자가 현현했을 때 아주 분명한 정신 병리학적인 의미의 환각을 암시하는 흔적이 이 보도에 들어있는지 물어야 된다. 그러한 지평도 지금 많이 있는 것을 전제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신화다라든지, 예를 들자면 그러한 기독교의 허구들을 비판하는 이야기들인 거죠. 그러한 쪽의 비판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의 역사적 부활이라기 보다도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가졌던 열망들이 다시 나타난 거다. 심리적이고 정신병리학적인 환각, 이런 것들이 신약성서에 있는 예수에 대한 보도에 들어있는지 그걸 살피는 것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러한 질문은 분명히 숙고될 만하다. 그렇지만 역사가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반적인 사건의 규칙을 통해서는 완전하게 설명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발생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입장을 보여야만 한다. 중요한 지적이죠. 우리가 너무 세상을 단조롭게 보고 있을때는 이러한 관점을 가질 수가 없어요. 이걸 복음서에 나와있는 이야기들을 조금 두고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근거해서 죄인들, 세리들을 수준 이하의 사람으로 단정해 놓았잖아요. 고정된 시각이죠. 예수님은 개방적인 자세로 그들을 대했단 말입니다. 그런거죠. 그런 것을 전제하고 본다면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보다도 더 다른 일들이 있다고 하는 사실, 그걸 닫아두면 곤란하다는 거죠. 역사결정론적인 차원에서 세계를 보면 곤란하다는 거죠.

특히 인간 현존의 어떤 독특한 현실성에 대한 질문이 오직 종말론적 像들 가운데서만 잠정적으로 답변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는 이는 이 현실성이 그에 의해 연구된 사건에서도 역시 관찰될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 다음 패러그래프입니다. 중간 패러그래프예요.

신약성서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상이한 전승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그중에 한 가지만을 취사선택해서 설명할 수는 없다. 대신 현재까지 진행된 연구 상황을 요약해보도록 하자. 예수부활에 대한 전승은 의심의 여지없이 전설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하게 전설형태를 보이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히려 이 부활전승은 그 판단이 궁극적으로 논쟁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전제에 반대하고 있다. 특히 부활 현현보도나 혹은 예수의 빈무덤에 대한 전승을 언급할 때 분명하다. 더욱이 지금까지 부활한 자의 현현을 환각으로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무너졌다. 어떻게 무너졌는지 그런 것들은 더 성서를 역사비평적 차원에서 공부를 해야될 부분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만두겠습니다. 그건 더 전문적인거구요.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역사, 성서비평적 차원에서 환각으로 보려고 하는 식은 무너졌다고 하는 것, 그거는 판넨베르크 입장을 받아들이고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도 거기에 대해서 동의하구요.

이에 대한 근거는 전무하거나 빈약하다. 환각으로 보는 근거는 빈약하다. 이러한 상태에서 과연 어떤 사건이 예수에게 일어난 부활 전승의 토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은 물론 가능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기독교의 근원을 이해할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기독교의 출현에 대해 질문하고자한다면, 다시 말해서 기독교 일 세대들이 무엇을 믿었는가라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초기 역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들을 오늘의 관점에서 질문해야한다면 부활절 문제에 직면해야만 한다.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이 부활절에 관한 문제점을 해결해보려고 시도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예수 부활의 원시 기독교 전승에 대한 모든 비판적 시각을 거친 다음에 얻게 되는 종말론적 희망의 언어를 통해서 이 사건이 진술된다면 이러한 진술은 이를 부정하려는 모든 주장을 가장 명쾌하게 극복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판단은 확실하게 지지받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판단에 대한 반론이 제기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실질적 진실은 이에 대한 모든 논의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결정된 게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이야기들이 명쾌하고 진행되고 있기는 있지만 그냥 이해하기는 쉽지는 않죠. 요기까지에 요점은 이겁니다. 신약성서에서 보도하고 있는 예수 부활의 이야기가 전설적인 형태를 부분적으로 띠고 있지만 사실적으로 환각으로 보는 입장은 옳지 않다. 그것은 학문적으로도 자리가 없다고 하는 거죠. 그렇지만 우리는 그 부활절문제를 그러한 방식으로 일단락 시키면 곤란하고 오늘 여기서 초기기독교 신자들이 예수님의 부활현현에 대해서 새로운 생명현실성에 도달했듯이 오늘의 삶에서 우리도 생명현실성에 도달해야 되고 이를 위해서 여전히 부활절문제는 질문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자연과학적 사실이나 신문보도에 나오는 역사적 사건처럼 그렇게 완료된 사건이 아니라 그런 것으로는 반복가능한, 동형식화된 종류인거죠.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안에서 반복될 수 없었던, 그래서 우리가 그 어떤 경험으로도 상대화할 수 없는 유일회적인 하나님의 생명사건이기 때문에그렇습니다. 그거를 질문을 닫아두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생명현실성의 차원으로 받아들이고 논쟁을 계속해야되는 겁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며 또 그렇게 될 수 없다고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예수부활 사건이 더 이상 논쟁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 이미 결정되어 버린 사실적 역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런 역사적 판단과 논쟁을 필요로 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실제로 예수부활의 사실성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부활체험은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들의 부활신앙에 터해 있는 오늘의 기독교는 끊임없이 진리와 현실성과 계시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 말하자면 부활사실에 대한 진리론적 해석 작업이다. 이를 통해 개방된 미래와 역사 가운데서 진리론적 근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은 종말에 발생하게 될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이 선취된 사건이다. 오늘의 기독교 신학은 이를 역사적으로 논증해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원시 기독교 전승을 세밀하게 검토하게 되면 예수가 부활했다는 주장이 정당화될 수 있다. 이럴 경우에 앞서 언급한대로 예수부활에 관한 명제는 항상 역사적 요청을 함축하게 된다. 역사적 요청이라고 하는 말이 역사적이란 말이 역사적이라고 하는 말이 반복되고 있는데요. 판넨베르크가 이 단어를 쓰는 것에 대한 이유를, 근거들을 알아야 이러한 문장들을 정확하게 따라갈 수 있어요. 네. 고 문제는 여기서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그 단어가 나올 때마다 조금씩 특별한 의미가 있다 설명하고 또 일반적으로 역사라고 하는 것이 말하는 가리키는 어떤 것들을 조금이라도 염두에 둔다면 개념이 나중에 들어올 겁니다. 그러니까 아까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마술처럼 죽었다 산 사람처럼 보도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거는 1세기 초기 기독교인들의 생명의 새로운 현실성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특별한 경험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역사안에서 경험되었고 이해된 거거든요. 그들로만 끝난것만 아니라 역사 2천년이라고 하는 간극을 두고 있죠. 우리와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러한 질문을 해야된다. 역사적 요청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이 명제가 어떤 분명한 과거의 사건을 주장하고 또한 이러한 주장으로 역사적인 후속질문과 검증에 자신을 내맡기기 때문이다. 이 명제는, 예수 부활에 대한 명제요. 이러한 검증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역사적 명제라는 특징을 가질 수 있다. 실제적인 것에 대한 최종적이며 명명백백한 결정은 물론 이런 데 묶여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으로 판단해야할 경우에 예수의 부활 이외에서는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는 주장은 특별한 기준에서 생각할 때 논쟁적인 문제로 남게 된다. 그 이유는 그 주장이 현실성 이해에 대한 근본적 질문에 매우 다층적으로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지적입니다. 예수 부활이라고 하는 주장은 현실성 이해에 대한 근본적 질문에 다층적으로 개입되어 있다. 현실성이라고 하는 단어, 역사적이라고 하는 것들, 우연성이라고 하는 것, 동형식화 많은 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용어들이 나오죠.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이러한 글들을 따라가기가 좀 어렵습니다. 인내심을 갖고 좀 해보십시오.

예수 부활에 대한 이러한 계속적인 논쟁이 기독교인들을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기독교인은 그 문제에 대해서 한두 번 놀란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궁극적 미래가 예수에게 나타난 새로운 생명을 분명히 하나님의 새로운 인간성에 담겨있는 보편적 현실성이라고 한다면 무언가 다른 어떤 것을 기대해야만 한다는 말인가? 예수의 부활이 모든 여타의 인간적 현실성과 동형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편입되어야 할 모든 보편적 경험지평은 우선 만물의 종말론적 성취를 통해서 기초된다. 이로써 기독교는 신앙에 관한 기본적 언급이 세계와 서로 논쟁을 벌여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네 그렇죠.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의 부활이 하나님의 종말론적 생명 사건의 앞당김이거든요. 그 사이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부활과 종말에 일어나게 될 완성된 생명사이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유대적인 차원에서 오늘 우리의 세계 경험안으로 일치시키고 그것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세계 경험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세계 경험, 이 세계경험에는 모든 것이 들어있어요. 생물학, 물리학, 사회과학, 인간상 모든 것들이요. 그러나 이 세상의 지금 말한 모든 것들을 포함한, 그러한 세상 경험 그런 것들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안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란 말입니다. 거기에 긴장이 있는거죠. 우리가 지금해야 될 일은 우리의 세상 경험으로, 앞서 판넨베르크의 표현을 그대로 빌린다면 환원될 수 없는 예수님의 부활이 이 세계 만물을 규정할 수 있는 보편적 근거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타당한 근거들을 제시하는 겁니다. 좀 어려운 작업이죠. 네.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에도 우리가 여기에 놓쳐서는 안되고 그 길을 가야되는 거구요. 2천년동안 그러한 길을 왔구요. 그런 점에서 세계는 논쟁을 벌여나가야 된다고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하는 거죠. 오늘의 과학, 물리학, 사회과학이 말하고 있는 그 현실에 대한 해명들과 선한 투쟁, 논쟁을 통해서 예수 부활이 말하는 전혀 새로운 생명의 현실성의 타당성을 찾아야 되는 거죠. 이미 물론 우리는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인 질문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현재 계속 우리는 논쟁하고 질문하고 화두로 삼아야 되는거죠.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부정되거나 그 기초가 붕괴되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죠. 기독교를 믿을만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그런 논증이 전혀 시도되지 않는다면, 믿을만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는 논증이라는 것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무조건 믿는 것은 아니거든요. 타당성이 있어야 믿을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 부활의 타당성을 무조건 믿으라고 해서는 안된느 것은 아니겠습니까? 새로운 현실성 모델, 이런 것들이 열려야 이 부활의 현현에 타당성이 생기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 것이 시도되지 않는다면 예수가 부활했다는 주장은 무책임한 주관주의나 맹목적 권위에 근거한 신앙을 주장하는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렇죠. 두가지 단어가 또 나왔네요. 무책임한 주관주의, 믿습니다. 주관적인 판단. 맹목적인 권위 이런 것들이요. 기독교 신앙이 이런 것에 머물러 있어야 되겠는가 이것 참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거죠.

이렇게 취약한 기초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실질, 리얼리티예요. 실질이 온전할 수 없다. 오히려 예수가 부활했다는 주장 안에 이미 결정되어 있는 역사적 요구는 불편부당한 검증이 실행되는 경우에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현실성과의 관계에서도 역시 지지받을 수 있다. 중요한 지적입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성과의 관계에서도 이 예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요구에 우리가 철저할 수 있다면 예수 부활 보도와 그 신앙이 지지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쪽으로 우리가 얼마나 깊이 들어가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겠죠.

마지막 문장입니다. 오늘 강의의 마지막일뿐만 아니라 부활 전체 단락의 마지막이군요. 하나님의 종말론적 미래와 지금의 이 세상 사이에 놓인 간극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 우리의 現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리라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全시대에 걸쳐 성육신 신앙으로 이 사실을 주장했다. 네 마지막 문장이 어떻습니까? 확실하게 들어오시나요? 다시한번 읽겠습니다. 번역이 매끄럽게 되지 않은 것 같아요. 번역이 참 중요한데요. 언어라는 것이 토씨 하나로 의미가 많이 달라지거든요. 특별히 외국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어렵습니다. 의미 전달이 70-80% 하면 잘 하는거구요. 오히려 왜곡시킬 수도 있고 오히려 번역이 아니라 반역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언어가 가지고 있는 작은 뉘앙스들을 번역을 통해서 살려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이예요.

하나님의 종말론적 미래와 지금의 이 세상 사이에 놓인 간극은, 간극이라고 하는 것은 아시죠. 우리가 아직 부활세계에 들어가지 못한거죠. 하나님의 종말론적 미래는 부활이 현실이 되는 때이기 때문에요. 지금은 아직 거기에 가지 못한 세계라서 그 사이에서 틈이 있습니다. 간극은 비록 우리가 아직 부활을 명명백백하게 완료된 어떠한 현실로 이해하거나 경험하지 못했다고 하는 건데 그렇다고 하더라도요. 예수의 부활 사건이 우리의 現세상에서, 지금 여기 차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리라는 것,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일어났다고 하는 것을, 예수에게서 일어났으니까요. 그런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어떤 때 그렇게된다는 거예요. 부활에 대한 역사적 검증을 우리가 철저하게 한다면 아직 부활세계에 완전히 들어가지 못한 이 현실에서 우리가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 부활 사건이 오늘 이 현재의 역사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결국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에 대한 강조로 결론을 맺어지네요. 새로운 현실성 모델이 필요하다. 그런 쪽으로 우리가 끊임없이 들어가야 되고 기독교는 全시대에 걸쳐 성육신 신앙, incarnation 신앙으로 이 사실을 주장했다. 신이 인간이 되었다. 육체를 입었다 구체화되었다. 초월이 역사안에 내재되었다고 하는 성육신 신앙으로 이 사실을 주장했다. 성육신 신앙도 그냥 단순한 교리, 신자들을 확보하기 위한 교리가 아니라 현실성 이해에서 나온 세계관이기도 합니다. 초월과 역사의 일치라는 거죠. 고맙습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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