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7:11-17, 죽음과 삶의 갈림길

조회 수 10468 추천 수 0 2009.07.31 21:56:11
 

1996.3.3. 

죽음과 삶의 갈림길

눅7:11-17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나라에 안에서 터진 대형사고는 참으로 끔찍했습니다. 바다, 하늘, 철도, 지상 가릴 것 없이 도처에서 수십 명으로 부터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들이었습니다. 마침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선 다음에 연이어 터졌기 때문에 호사가들은 대통령에 대한 이런 저런 말들을 해댔습니다만, 그런 대형 사고가 특정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터졌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게 인재였든 천재였든 지난 수년, 혹은 수십 년 도안 쌓이고 쌓인 우리의 안전불감증과 대충 얼버무리기식 가치관의 누적이 이제 드러나는 사건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구 상인동 지하철 가스폭발, 서울성수 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가 가져온 사회적 파급효과는 엄청났습니다. 다시 돌아보고 싶지도 않은 사건들이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사고 뒤에는 항상 비극의 주인공과 행운의 주인공들이 나타납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살아납니다. 삼풍 백화점 경우만 하더라도 백화점에서 만날 약속을 했지만 교통체증으로 늦게 당도하는 바람에 사고를 면한 이도 있고, 이미 볼 일을 끝내고 나왔다가 무슨 생각이 들어 다시 들어갔다가 사고를 만나 유명을 달리한 이도 있습니다. 지난 93년도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 사고 때도 그 비행기를 타기 위해 예약을 했다가 취소한 이들과, 그 취소된 자리를 대신 얻어탄 이들의 운명이 정반대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 개인에게 죽는다는 것과 산다는 게 가장 엄청난 사건입니다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별로 차이가 없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과 산다는 것의 차이가 종이 한장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빈발하고 있는 교통사고만 하더라도 1,2초 차이로 사람이 죽거나 살게 됩니다. 아주 짧은 순간의 차이에 따라 땅속에 묻히기도 하고 멀쩡히 살아 움직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운명이, 그리고 우리의 삶과 죽음이 이렇게 무심한 역사의 세력 앞에 무방비의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는 건 유일회적이며 처절할 정도로 소중한 우리의 인생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비극적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희극적이기도 합니다. 여하튼 인간은 자신이 의식하든, 그렇지 못하든 끊임 없이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바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걸 절대진리로 확신해 버린다면 아무리 우리가 종교적 형식에 젖어있다고 하더라도 그만큼 하나님으로 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인간은 삶의 영역에서만 무언가를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제한받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 본문 가운데서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 놓여 있던 한 젊은이, 그리고 그 젊은이의 주변에 있던 여러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2천년 전 그들이 경험했던 죽음과 삶의 갈림길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자신을 따르는 여러 사람들과 같이 갈릴리 호수 부근의 가버나움에서 하룻 길 쯤 되는 나인성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성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 성문에서 나오는 장례꾼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요즘도 흔히 볼 수 있는대로 상여를 앞세우고 뒤따라 오는 슬픔에 가득차 있는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장례모습은 어떤 경우라도 안타까운 일일텐데 이번 경우는 더욱 그랬습니다. 죽은 이는 한 젊은이었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남편을 잃고 이루다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하며 키운 외동 아들이 죽었으니 이 여자의 아픔이 어떠하리란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넋을 잃고 망연자실 상여 뒷자락을 붙들고 흐느적 거리며 뒤를 따라오는 어머니, 앞으로 이 여자가 아들 없이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치마자락에 눈물을 훔쳐내는 나낙네들, 이들 일행이 졸지에 죽은 젊은이를 무덤에 묻기 위해 성을 빠져나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우리들 처럼 과부를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장례일행의 발걸음을 멈취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독자 어머니에게 울지 말라 하시고,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시기를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어 관속에 누웠던 과부의 외아들이 일어나 앉아 둘러선 사람들과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엉청난 일을 보고 두려워 하면서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데, 이스라엘의 북쪽인 갈릴리 지역에서 일어난 이 사건이 남쪽 유다와 사방에 두루 퍼지게 됐다고 누가는 그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나인성에서 미끌어지듯 빠져나와 묘지를 향해 가는 이 장례행렬은 인간이 죽음 앞에 드러날 있다는 걸 회화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실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부인 어머니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던 이 청년이 불치병에 걸려 투병하다가 죽었는지, 아니면 갑자기 사고를 당해 죽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청년의 죽음과 이 죽음과 관련된 이들의 슬픔은 인간이 어떤 인생의 길을 가고 있는지 웅변적으로 지적해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죽어 관속에 누워있는 청년만이 아니라 이 청년을 묻으러 가는 그 모든 장례행렬은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한결 같이 죽음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이런 끔찍스러운 죽음의 과정에서 자유한 이들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이런 절대적 사실을 종종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누구를 묻으러 가면서도 여전히 죽음과는 상관이 없듯 살아갑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쉬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가스실로 보내던 친위대 장교들이 자기 아들과 딸의 연주솜씨를 자랑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 처럼 우리는 아무리 처절하고 심각하더라도 그저 모든 일들을 일상적인 것으로만 생각해 버리고 맙니다. 우리 모두가 아주 빠르게, 혹은 약간 천천히 갈 뿐이지 결국 모두 가야하는 죽음의 길과 무관한듯이 살아갑니다. 거의 모든 일들을 충동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대응하면서 그런 게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요즘과 같은 풍요와 소비의 시절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보다 많은 소유와 소비적 패턴으로 삶을 생각하는 오늘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아예 생각 조차 하기 싫은 현실이 되어 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결국 죽음과 상관 없는 존재들 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벌어지는 죽음을 일상으로 보면서도 우리는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 것 처럼 자기 자신을 속이는 데 매우 익숙해 져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무의식적 삶의 양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죽음의 길이 우리 앞에 항상 놓여 있다는 준엄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죽음과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가 마냥 즉흥적으로 살아간다면 그건 신앙적인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세계가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 이유는, 혹은 못하는 이유는, 위에서 말한대로 소유와 소비를 삶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모르기 때문에 죽음도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흡사 북한에 있는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자유세계를 모르면서 자신들의 세계가 지상천국이라고 믿는 것과 진배 없습니다. 진정한 생명을 알 때만 오늘 인간이 어떤 죽음의 길을 가는 지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남보다 잘 먹고, 잘 살아야만 한다는 그런 목표가 아니라 참된 생명의 내용을 알아야만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야말로 생명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4:6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 처럼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리스도인들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이라 함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만 참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는 누가 더 많이 소유하고,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가, 하는 점에서 인생을 생각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인, 즉 낮은 자리에 앉으려는 겸손한 마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질 때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다시 귀를 기울여 봅시다. 나인성을 빠져나오는 장례행렬은 거침 없이 묘지 까지 행진해서 가차 없이 과부의 독자를 땅 속에 묻을 예정이었습니다. 견디기 힘든 슬픔이었지만 아무도 그 예정된 길을 바꿔 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우리가 내용을 본 것 처럼 예수님은 그 행렬을 멈추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이 있자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한 이 젊은이가 관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젊은이는 죽음의 길로 가는 길목에서 예수님을 만나 다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생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서는 게 바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며 원형입니다. 흔히 “죄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던 우리를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해 주신 주님”이라고 기도하듯이 죽음과 생명의 갈림길에서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건 교리문답의 차원에 머무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는 죽음의 길에 서 있을 때가 많으며, 생명의 길로 이끌림을 받을 때도 많습니다. 그런 경험들의 축적으로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져 갑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간혹 우리는 인생이 짜증스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하는 일 마다 뒤틀리고, 만나는 사람 마다 기분을 상하게 만듭니다. 때로는 아이들이 귀찮아지기도 하고 웬지 우울해집니다. 무얼 해도 마음이 좋아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불안해 합니다. 이런 삶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고, 우리 주변에도 많습니다. 그걸 억지로 잊어보려고 값비싼 물건을 사보기도 하며, 소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애를 써 봅니다만 약간 좋아질 때도 있읍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해결되는 것만도 아닙니다. 이런 삶은 좋은 집에 살거나 맛난 음식을 먹고 살아고 역시 죽음의 길에 놓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디 이런 문제만입니까? 실제로 사업이 망하거나 자녀들이 말썽을 부리거나, 혹은 남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하면서 인생의 쓴맛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럴 때 마다 사람들은 신경이 예민해 지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거나, 그러다가 정신이상이 되고 심지어는 자살하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파렴치한 행위를 하게도 됩니다. 요즘 신경성 질환이 많다는 사실은 옛날에 비해 엄청나게 잘살게 되었다고 해도 역시 인간이 당하는 시련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걸 반증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길입니다. 이런 절망과 좌절과 불안, 그리고 시련과 상처 가운데 있다가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똑같은 형편인데도 기뻐할 줄 알고, 똑같은 사람인데도 사랑할 줄 아게 됩니다. 이리저리 약삭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혹은 비굴하게 살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불평불판으로 가득차 있다가 어느 순간에 예수님의 위로에 감동되어 교회의 덕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선 삶의 모습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사는 동안 계속적으로 죽음과 삶의 갈림길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는 이런 사실 마저도 의식하지 못하고 조건반사적으로, 충동적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인성 앞의 장례행렬을 보면서 우리도 역시 이런 길에 들어설 때가 많음을 깨닫게 됩니다. 영원한 죽음의 순간에 나인성 과부의 독자를 살려내신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그렇게 다가오십니다. 관에 손을 대고 말씀하셨듯이 그가 우리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에게 모든 걸 맡겨보십시요. 그러면 여러분은 죄와 죽음이 아니라 용서와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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