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8

예수님을 먹다

기타 조회 수 12782 추천 수 32 2004.07.02 16:19:53
성경본문 : 요한복음 6:52-59 
예수님을 먹다
요 6:52-59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오해
요한복음 6장은 요한복음이 어떤 점에서 공관복음서, 즉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다른가에 대한
전형적인 예입니다. 요한복음 6:1-15에 등장하는 소위 ‘오병이어’ 사건을 공관복음서도 거의 비슷
한 구조와 무게로 보도하고 있지만 요한복음만 그것의 심층적 의미를 부연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고도 남
은 부스러기가 열 두 광주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과연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오늘

설교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이런 현상을 경험한 그곳의 군중들은 예수님
을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그 군중들의 행동은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날도 인간의 먹는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낼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군중들은 그를 당장이라도 대
통령으로, 아니 종신 지도자로 삼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 낌새를 알아채시고 예수님은 산으로 피하
셨습니다(요 6:15). 아마 예수님은 산에서 혼자 깊은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자신을 오해하는 군
중들을 어떻게 바른 인식으로 끌어내는가 하는 문제를 말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기들의 흥미와 욕망에 따라서 예수님을 이해하고, 일종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군중들의 습성은 지금이나 그때나 매한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의 기독교 신
앙도 이런 갈등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천착하기보다는 인간의 욕구
에 부응하는 것에 치우쳐 있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기복적인 요소는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심지어는 사회 봉사에 관련된 일들도 역시 그 심층에는 인간의 욕망이 꽈리를 틀고 있습
니다. 물론 인간이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 빵을 먹고 돈을 써야하기 때문에 신앙이 아무리 절대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부분을 무시할 수 없긴 합니다만, 우리의 경우에 신앙의
본질은 단지 ‘구색 맞추기’ 정도에 머물고 오히려 물질적 욕망이나 자기 성취가 신앙의 중심을 차지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적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런 방식을 통한다고 하더라도 교회만 부흥하
면 모든 게 용납되는 한국 교회의 풍토가 훨씬 큰 문제입니다.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패
러다임이 변화될 때까지 이런 추세는 지속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예수님이 군중을 피해 산으
로 올라가셨듯이 그런 물결로부터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부정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을 확보해내기 위해서 세속주의적 물결을 잠시 피하는 것뿐입
니다. 그 이후에 시간이 되면 다시 현장으로 내려와야 할 것입니다.

생명의 살
이 일이 벌어진 다음날 예수님은 다시 군중들을 만났습니다(22절). 요한은 22절부터 예수님과
군중들과의 담론을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주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군중들의 반론이 제기되는 형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논지는 이렇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다시 찾아온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관심이기보다는 배불리 먹은 빵 때문이오. 그러나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썩어 없어질 이
런 빵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는 하늘의 빵을 얻으려고 애쓰시오. 그러자 군중들이 이
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34절).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됩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
지 않을 것이다.”(35).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못마땅했습니다. 웅성거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
다.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니 말이 되는가?”(42). 그들이 그렇게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단지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
을 뿐입니다. 아니면 좀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예언자로 알았겠지요.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
의 빵이라니, 아무리 좋게 생각하고 싶어도 말이 안 되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
게 더 심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
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51).
이 말씀이 있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첫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유대인들은 서로 이
렇게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
”(52).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고대 어떤 밀의종교 집단은 직접 사
람의 살을 나누어 먹었을지 모릅니다. 아프리카 어느 원시 종족들도 죽은 조상의 살을 먹음으로써
조상들의 혼을 물려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이런
일은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행위였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 곧 자기 살이라는 예수님
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들이 몰랐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떻게 살을 먹는다는 것인가에 대한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대답하
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53절 이하의 말씀을 읽으면 그것이 곧 성만찬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54). 아마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성만찬 전승
이 결합되어 오늘의 본문이 형성된 것 같습니다. 비록 시기적으로 다른 사건과 전승들이 결합되기
는 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실체적 진실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시행되던 성만찬 요소가 예수님의 이런 말씀에 담겨 있으며, 또한 성만찬 의식 속에 생명의 양식이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진리는 시간의 차이를 뛰어넘어 소통됨으로써
생명의 세계를 열어 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생명의 지평에 대한 인식
이제 우리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
님과 생명의 관계를 아직 인식하지 못했기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했으며, 결국 십
자가에 처형당하도록 몰아세웠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못마
땅하게 생각하고 이런저런 말로 트집을 잡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하나님이 자신들의 생명을
보장해준다는 가장 확실한 역사적 증거는 광야의 만나 사건이었습니다. 아무런 호구지책에 대한 대
비 없이 애굽을 탈출한 이들 유대인들에게 당장 생명을 이어갈 먹거리 문제는 절박했습니다. 그때
야훼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허락하셨고, 적당하게 마실 물도 허락하셨습니다. 특히
만나는 야훼 하나님을 신뢰할만한 가장 대표적인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5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 간 그런 빵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인식할 수 없었던 한계는 바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그런 삶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살은 양이
나 소처럼 우리의 실제적인 먹거리에 불과합니다. 이런 먹거리는 아무리 맛있게 먹어도 결국 우리
는 죽습니다. 영원한 생명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늘 생명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역시 2천년 전 예수님과 논쟁하고 있던 유대인 군중들보다 별
로 낫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의 흐름이 전반적으로 그렇습니다.
낮은 단계의 생명만을 절대화하는 이런 추세는 옛날에 비해서 오늘이 훨씬 강한 것 같습니다. 생존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먹고살기 위해 모든 힘을 돈 버는 일에 쏟는 것은 그런 대로 이해가 갑
니다만 그런 생존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돈 버는 일에만 눈에 불을 키는 것
은 참으로 보기에 민망합니다. 노무현 정권 1년을 평가하는 설문조사와 시사토론이 최근에 자주 벌
어졌는데, 대개는 경제문제에 대한 아쉬움이 제일 많았습니다. 우리가 잘먹고 잘사는 것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대학도 역시 대학의 발전, 그것도 거의 외형적
발전만을 절대적인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시대정신은 우리만이 아니라 이 세계
전체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흐름을 바꾸기가 간단치 않기는 합니다만 우리의 경우에는 그
강도가 너무 심하다는 점에서 반성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이런 수준에서만 생각하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영원한 생명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약간 건강하게 살거나 약간 좋은 식사
를 하거나 약간 세련된 방식으로 살아갈 수는 있을 겁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보다 나은 빵을 확보하
기 위해서 ‘만인을 향한 만인의 투쟁’에 휩싸일지도 모릅니다. 흡사 그렇게 잘 사는 미국이 석유 확
보를 위해 이라크를 침략하듯이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런 국력과 군사력만 있다면 오래 전 우
리 조상 고구려의 땅이었다고 생각하는 만주를 강제로 빼앗으려고 욕심을 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
면 그런 방식으로라도 질 좋은 빵을 확보하는 것을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생명 안에서
예수님은 그런 오해 때문에 자기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군중들을 피해서 산으로 오르셨다가 다
시 내려오셔서 영원한 생명의 비밀에 대해서 그들과 담론을 나누고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라고 말입니다(54). 예
수님의 이 말씀은 옳습니까? 옳다면 무슨 근거에서 옳습니까? 기독교의 토대는 바로 이 한 가지의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명제의 타당성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기독교 공동체는 이 사실을 증명하는 데 모든 힘을 경주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증명하기에 앞
서서 자신이 명증하게 인식하고 신뢰하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일단 성서가 말
하는 생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선 56절과 57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
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
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오늘 설교 제목처럼 예수님을 먹어
야 우리가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밥과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
은 생명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표현이 경박하기는 합니다
만 그것은 곧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얻으려면 생명과 연결되
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경험이 예수님에게 먼저 있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아버
지의 힘으로 사는” 게 무엇인지 경험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인류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
과 하나 되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됨으
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며 따라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힘으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 영원한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초월적인 하나님은 우
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지평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 그리고 그 육체 안에서
불안과 모순과 한계를 안고 사는 인간이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과 직접 만날 수는 없습니다. 성서는

그래서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하나 되신 예수님의 힘으로 이제 우리
도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증거
지금 당신의 설명에 무슨 근거가 있는가, 하고 질문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하
나님과 하나 되었다는 증거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구원
을 선포한 사이비 예언자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박태선이나 문선명 씨 같은 이
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 이외에도 자신을 구원자로 내세우는 교주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예수
님의 일방적인 자기 해명만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궁극적인 문제는 증명의 차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단계에서는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바르게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길일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에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증거를 대라고 요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만 예수님은 그들이 인정할만한 증거
를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단 한 번뿐이었던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결정적인 증거는 종말에 가서야 완전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
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런 논리도 없이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 전체와 기독교의 역사에서 계시의 사건들, 그리고 우주론적 역사 전체가 밝혀주고 있는 진리
사건들을 열린 마음으로 전망할 수 있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자연과
학의 세계도 그렇습니다만 그 어떤 증거라는 것도 절대적인 것이 못되기 때문에 증거 만능주의는
또 하나의 독단에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창조과학회에 속하는 사람들이 구약성서의 모든 현상을
과학적 증거로 증명하려는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일도 벌어질 테니까 말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예
수님의 말씀에 대한 전반적인 신뢰가 우리에게 있는가에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무엇이 예수님의
말씀인가에 대해서는 늘 예민하게 역사 비평적으로 분석해야 합니다.

일상에 깃든 생명의 능력
오늘의 본문 말씀 앞에서 선 우리가 천착해야 할 질문은 과연 내가 예수님 안에서 살고 예수님
이 내 안에서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상투적인 질문인 것처럼 생각되시죠? 약간 다르게 질
문해 봅시다. 나는 과연 생명 안에서 살고 생명이 내 안에서 살고 있나요? 실제로 우리의 일상에 생
명의 능력이 샘솟듯이 솟아나고 있나요? 우리의 질문을 좀더 발전시켜 봅시다.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생명의 능력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 즉 성령이기 때문에 아무도 한 두 마디
로 규정해버릴 수 없습니다. 그 생명의 능력은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활동함으로써 우
리의 일상을 평화와 기쁨과 희망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비누방울처럼 순간적으로 허무
하게 이 세상을 살다가 사라지지만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한다는 약속을 기억나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먹고 배불러야 할 생명 자체이십니다. 이런 의
미에서 우리의 삶에서 예수를 먹는 일, 즉 예수님과 하나 되는 일보다 더 긴급하고 소중한 일은 없
습니다. <2004.2.22>
  1. [2006/09/10] 성만찬 공동체 by 정용섭 (22989, 57) *2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54
148 기타 행복한 삶과 신앙, 1월1일 [1] 2006-01-01 12747
147 기타 오시는 구원의 하나님, 12월25일 [1] 2005-12-25 11342
146 기타 영혼의 노래, 12월18일 [1] 2005-12-18 11356
145 기타 역사의 영성을 향해!, 12월11일 [1] 2005-12-11 9307
144 기타 새 하늘과 새 땅 12월4일 [1] 2005-12-04 10441
143 기타 종말의 현재, 11월27일 [1] 2005-11-27 9688
142 기타 풍요로움의 근거, 11월20일 [4] 2005-11-20 12477
141 기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11월13일 2005-11-13 11546
140 기타 그 날과 그 시간, 11월6일 2005-11-06 14012
139 기타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 10월30일 [2] 2005-10-30 12600
138 기타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10월23일 [6] 2005-10-23 11788
137 기타 카이사르의 것과 하나님의 것, 10월16일 [1] 2005-10-16 16885
136 기타 금송아지와 야훼의 노, 10월9일 2005-10-09 11441
135 기타 높은 곳에서의 부르심, 10월2일 2005-10-02 11246
134 기타 경건주의의 함정, 9월25일 [1] 2005-09-25 11555
133 기타 만나의 영적 의미, 9월18일 [6] 2005-09-18 14782
132 기타 최후심판과 오늘, 9월11일 [3] [2] 2005-09-12 9785
131 기타 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1] 2005-09-04 10251
130 기타 모세의 하나님 경험, 8월29일 [8] [2] 2005-08-28 10953
129 기타 카리스마 공동체, 8월21일 [1] 2005-08-21 10165
128 기타 희망의 눈, 2005. 8.15. [1] [1] 2005-08-14 10433
127 기타 요셉의 침묵, 8월7일 [1] 2005-08-07 10415
126 기타 바울의 역사인식, 7월31일 [3] 2005-07-31 8946
125 기타 하늘나라와 일상, 7월24일 [2] 2005-07-24 11454
124 기타 야곱의 두려움, 7월17일 [4] 2005-07-17 10362
123 기타 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2] 2005-07-10 10295
122 기타 삶과 행위, 7월3일 2005-07-04 10632
121 기타 평화의 은총, 6월26일 [1] 2005-06-26 11050
120 기타 죄로부터의 해방, 6월19일 [2] 2005-06-20 11176
119 기타 일꾼을 위한 기도, 6월12일 [3] [2] 2005-06-13 11923
118 기타 약속과 순종의 상호성, 6월5일 [1] [2] 2005-06-05 10676
117 기타 '법'을 넘어서, 5월29일 [2] 2005-05-29 9602
116 기타 삼위일체의 신앙, 5월22일 [2] [2] 2005-05-22 10066
115 기타 영에 속한 사람, 5월15일 [3] 2005-05-17 10637
114 기타 가족공동체를 넘어서, 5월8일 [2] 2005-05-08 10164
113 기타 생존과 번성의 토대, 5월1일 [4] 2005-05-01 10289
112 기타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신가? 4월24일 2005-04-24 10429
111 기타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2] [2] 2005-04-18 9870
110 부활절 희망은 기다림이다 (벧전 1:13-21) 2005-04-10 12640
109 기타 부활의 증인 공동체, 4월3일 [1] 2005-04-04 9924
108 기타 부활을 증거하는 여인 [1] 2005-03-27 8758
107 기타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 3월20일 [1] 2005-03-20 8833
106 기타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 3월13일 [1] 2005-03-13 10051
105 기타 야훼가 말씀하시는 통로, 3월6일 [1] 2005-03-07 9184
104 기타 나는 야훼다, 2월27일 [1] 2005-02-27 8920
103 기타 영은 바람이다, 2월20일 [2] 2005-02-20 8921
102 기타 자유의 길, 분열의 길, 2월13일 2005-02-13 8385
101 기타 환상와 현실, 2월6일 [1] [2] 2005-02-07 9032
100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0969
99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499
98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2921
97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357
96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547
95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520
94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402
93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800
92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047
91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332
90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8928
89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268
88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127
87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186
86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544
85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071
84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125
83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184
82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125
81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823
80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8988
79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328
78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322
77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309
76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627
75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757
74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420
73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177
72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544
71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454
70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172
69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328
68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286
67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571
66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430
65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648
64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8836
63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267
62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9893
61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394
60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9956
59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1977
58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397
57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322
56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290
55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059
54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674
53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183
»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2782
51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468
50 기타 구름 타고 오십니다. 2004-07-02 11324
49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214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