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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생명의 길

성령강림절 조회 수 11683 추천 수 183 2007.06.24 14:16:45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070624.mp3 
성경본문 : 갈라디아서 2:15-21 
mms://wm-001.cafe24.com/dbia/070624.mp32007.06.24. 갈 2:15-21
참된 생명의 길

오늘 기독교 종파는 로마가톨릭, 동방정교회, 프로테스탄트, 이렇게 크게 셋으로 구분됩니다. 프로테스탄트 안에서도 여러 교파가 있습니다. 루터교, 장로교, 구세군, 성공회, 감리교, 성결교 등, 아주 복잡하게 세분화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처음에는 하나의 기독교였다가 이렇게 갈라졌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2천 년 전 교회가 처음 시작할 당시에도 유대 기독교, 디아스포라 기독교, 이방 기독교, 이렇게 크게 셋으로 나뉘었습니다. 유대 기독교는 주로 팔레스틴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로 구성된 공동체인데, 유대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디아스포라 기독교는 주로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으로 구성된 공동체인데, 유대교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방 기독교는 비유대인들로 구성된 공동체인데, 유대교와 분명한 선을 긋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의 세 종파보다도 초기의 세 공동체 사이의 차이가 더 크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설명을 이상하게 생각하실 겁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모두 예수님을 믿는다면 별로 다를 게 없는데, 뭐가 다르냐고 말입니다. 물론 그들이 모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만 유대교와의 관계에서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특히 예루살렘을 본거지로 삼는 유대기독교와 안디옥을 본거지로 삼는 이방기독교는 서로 좁혀질 수 없을 정도로 큰 알력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 속사정이 갈라디아서 1,2장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소위 안디옥 사건이 그 배경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작은 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차츰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이방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에 관한 논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율법을 여전히 지키고 있던 유대기독교들 앞에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는 율법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도들이 그렇게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모든 유대기독교인들의 동의를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크고 작은 불평이 튀어나왔습니다. 예루살렘의 율법주의자들은 이방 기독교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요구를 꾸준히 펼쳤습니다.
이런 와중에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이방인도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사람입니다. 그는 안디옥에서 이방기독교인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서슴없이 밥도 같이 먹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의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그 자리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강조하는 할례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두려워서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유대기독교인들도 이방인 신자들과 밥을 안 먹은 체하며 물러났고, 심지어 바나바까지도 그렇게 가식적인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갈 2:11-14) 바울은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비판했습니다. “유대인이면서 유대인같이 살지 않고 이방인같이 사는 당신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갈 2:14)
도대체 유대기독교와 이방기독교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기에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밥을 먹다가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했으며, 바울은 공개석상에서 그에게 면박을 주었을까요? 이런 문제는 2천 년 전 그 당시에만 해당되지 오늘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나 오늘 우리에게나 똑같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설명합니다. 바울은 유대 기독교의 영향권에 들었던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아주 명백한 목소리로 자신이 왜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 지도자들과 신앙적으로 투쟁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는 중입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세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바울의 관심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16절에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그것을 말합니다. 개역성서와 루터성서는 그것을 ‘의로워지는 것’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의로워진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신앙적 용어는 오늘 현대인들에게 별로 절실하게 다가가지 않을 겁니다. 지금 열심히 돈 벌어서 가족들과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지 의로워진다는 게 뭐 중요하냐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시대 사람들이 의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의로움에서만 사람이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의라는 단어를 평화로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에게 평화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거나 사회적인 지위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삶의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여러분이 잘 알 것입니다.
성서말씀에 참여한 사람들은 바로 그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평화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만 주어진다고 말입니다. 평화는 우리가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의로움은 우리가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나 지성이 그것을 우리에게 줄 수 없습니다. 심지어 미모와 건강도 우리에게 평화를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성서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찾으며, 믿을 수 있을까요? 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기고 싶어도 그분들이 없다면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보이는 율법을 섬겼습니다. 그 율법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율법을 토라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대로 십계명은 토라의 엑기스입니다. 이 십계명을 기초로 해서 많은 종교적 규범이 발전했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신명기까지에 이르는 모세오경, 그 이외에도 온갖 종류의 성문법과 불문법들이 그것입니다. 우리와 비교하자면 헌법을 위시해서 여러 종류의 법전과 조례 및 시행세칙 등이 모두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평생 그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그걸 잘 지키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고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죄인입니다. 요즘 우리도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을 모범시민이라고 하고,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범죄인으로 취급해서 감옥에 가두기도 합니다.
이렇게 율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 살던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전통입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말을 들었고 평생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들로서는 아주 당연한 생각입니다. 이렇게 바꿔놓고 생각해보세요.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여전히 대한민국의 법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할례파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자기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기독인들에게까지 강요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주장을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만이 아니라 로마서에서도 똑같이 그런 주장을 했습니다. 그는 용기가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 지도자들은 막강한 교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를 중심으로 열두 제자들이 모두 유대기독교의 핵심 멤버였습니다. 그들에게 잘못 보이면 신상에 해로웠을 겁니다. 그래도 그는 겁 없이 그들과 전혀 다른 목소리를 냈습니다. 16a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는 길이 율법을 지키는 데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뒤로 비슷한 말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바울의 이 주장을 너무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2천 년 전 그 당시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나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기독교는 이런 중요한 복음을 지켜내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바울의 주장은 그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유일한 길로 생각하던 그 당시 사람들이 바울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힘들었을는지 상상해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십일조 헌금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며, 따라서 십일조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지금이나 2천 년 전이나 사람들은 무언가 가시적인 성과가 있어야만 그것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율법을 지키는 것은 분명히 눈에 보이는 성과입니다. 일주일에 서너 번 금식하고, 철야기도하고, 구제하는 일들은 누가 보이게도 그럴듯해 보입니다. 일반적인 삶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과를 많이 올리는 사람을 우리는 추켜세웁니다. 바울은 그런 것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게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렇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겉으로 보이는 업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업적을 포기할 때만 믿음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러나 단지 아는 것과 실제로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종교적인 업적, 세속적인 업적주의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곧 그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가장 처참하고 저주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에 집착하면서 어떻게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인가요?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이 땅에서 누릴 생명을 연장하는 것에만 모든 마음을 쏟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전혀 다른 생명의 완성인 부활을 믿는다는 말인가요?

신앙은 거룩한 도박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자기의 전체 존재를 거는 결단입니다. 속된 표현으로 믿음은 거룩한 도박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까지 포함한 전제 삶을 판돈으로 거는 거룩한 도박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기는 선택이며 결단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21b절을 보십시오. “만일 사람이 율법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일이 될 것입니다.” 바울이 분명하게 말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면, 또는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일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믿음도 헛일이 되고 맙니다. 도박은 잘 하면 대박이지만 잘못하면 깡통입니다.
바울의 신앙적 싸움은 배수진을 친 형국입니다. 적당하게 타협할 수 있는 그 지점을 넘어섰습니다. 그는 율법주의, 할례주의와 끝장토론을 벌이는 중입니다. 도대체 누가 헛된 것을 따르는 사람들일까요? 누가 하나님의 은총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 사람일까요? 21a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바울이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게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겠지요.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는 것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율법적으로 조금 실패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업적이 없어도 문제가 안 됩니다. 아니 사람은 그런 것으로 완전한 성공을 거둘 수 없습니다. 율법주의, 업적주의는 오히려 생명을 파괴합니다. 율법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궁극적인 생명으로 불러내셨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사람은 그 어떤 인간적 노력으로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태양이 뜨면 손전등이 필요 없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룩한 배팅을 한 사람들입니다. 참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이미 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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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수우

June 24, 2007
*.9.88.50

오늘은 설교 가 읽고 싶어서 듣지 않고 읽었습니다.
솜 뭉치에 물이 스며드는 것 처럼 조금씩 영혼을 적시고....
산방에 가랑비가 내리는 평온한 주일밤 _아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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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푸른적토마

June 24, 2007
*.84.242.178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갈급한 영혼에 단비와 같은 말씀 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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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流水不爭先

June 25, 2007
*.173.40.129

말씀을 못알아 듣는것은 아닌데
여전히 가슴은 답답합니다.
빌립과 니고데모처럼
십자가와 어울리는 삶을 살면 이 문제가 해결될까요
하여튼 목사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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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5, 2007
*.181.51.23

씽크바이블 님,
답답하다는 말의 내용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사람은 기본적으로 그것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을 거울로만 보는 존재인 사람이 어떻게 그걸 뛰어넘겠어요.
그런 답답한 마음까지 모두 예수에게 걸어두는 게 신앙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은 것의 실증이라고 하지요?
아직 은폐되어 있는 생명의 실체가
예수에게 드러났다는 사실에 우리의 운명을 거는 겁니다.
위의 대글로만 한 마디 드린다면
씽크바이블 님의 답답한 속내는 신앙적인 차원이 아니라
심리적인 차원처럼 보이는군요.
제가 잘못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좋은 한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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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솔나무

June 25, 2007
*.179.6.78

목사님,
이 생명의 길을 조금이라고 온전히 걸어갈 수 있도록 귀한 말씀을 허락해주시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복음이 들려져스 주님과 평화를, 교회와 평화가 이루어지길...
양들의 필요를 채우시기에 생명을 던지신 그 분을 신앙함이 고백되어지길...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참된 생명에 참여 할 하나님의 은총이 이미 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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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살군

June 25, 2007
*.214.91.246

생명의 말씀에 한주간 살아갈 힘을 얻고갑니다.

브룬너의 주장대로 인간의 인격이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활동성이기에
예수처럼 나의 전 인격을 그분앞에 응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기가 참 힘든것같습니다.

자꾸만 나의 의지가 다른곳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가 많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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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9]愚農

June 26, 2007
*.239.233.179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룩한 배팅을 한 사람들입니다".
깊이를 더해주는 말씀에 늘 감사합니다
두리뭉실 베드로와 깐깐한 바울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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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6, 2007
*.181.51.23

덕송 님,
'두리뭉실 베드로와 깐깐한 바울'의 모습이 눈에 선하시다니,
맞습니다.
그들의 영성이 바로 우리 기독교의 원조이며,
그런 역사를 안에서 기독교가 지금까지 살아왔지요.
앞으로도 그렇게 진도가 나갈 겁니다.
제2, 제3의 바울이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 출현했지요.
물론 베드로는 베드로 나름으로 기독교 역사에 공헌한 것도 있지요.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역사적으로 감당해야 할 몫이 있겠지요.
그런 게 건강한 기독교 영성을 위한 밑거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profile

[레벨:0]밤나무

June 26, 2007
*.122.54.251

안녕하세요?
오래전부터 눈팅만하다가 가입한 대구사는 밤나무 입니다.
그동안 영적인 갈등을 해소해 주시고
믿음의 폭을 넓혀가도록 도움을 주신데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의 말씀을 접하고
오늘의 교회 안에서, 교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근본적인 갈등이
율법과 복음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생활하고 있는가에 많이 달려있는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그당시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오늘과 같이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 편안해짐은
나쁜 마음일까요?

거울로 보는 믿음의 생활이 더러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세밀한 움직이심 때문에
여전히 감사하며 엎어져도 코가 깨어져도 그길로 가기로...
언젠가는 얼굴을 맞대고 볼 그날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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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이성원

June 27, 2007
*.157.17.209

유대교인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보이는 율법을 지켰다는 표현이 신선하게 다가 옵니다.
신앙의 끊임없는 고민은 하나님이 결국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것, 정확하게 믿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사실상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대신 고민(?)은 별로 없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에 반해서 복음을 믿고 살며 그 복음을 통해 참된 생명을 누리려는 기독교 신자들은 어떤 면에서 더욱 모호하게 신앙생활을 할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마다 성향 따라 체험 따라 각각 다른... 그래서 이단, 삼단..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가장 값싼 은혜로 만족하는 신자도 나오며 또 고급한 은혜를 추구하기 위해 애쓰는 신자도 나오고... 이것이 개신교만이 누리는, 하나님이 주신 다양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모호함의 은혜라고나 할까요...
profile

작은자

June 28, 2007
*.7.13.142

귀한말씀 찬찬히 잘읽었습니다.
가슴에 맺혓던것이 둘리고 안개가 겉힙니다
좀더 많은 영혼들에게 이 복음이 들려지기를 소망합니다

듣지를 못해서 죽어가는 뭇영혼들을
어찌해야 하오리까...
감사합니다
profile

작은자

June 28, 2007
*.7.13.142

수정이 안돼서...둘리고...이해바랍니다^^;
profile

[레벨:8]流水不爭先

June 28, 2007
*.173.40.129

15년간 교회생활을 해오며
이곳에서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전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면서 감사한 삶을 살고 있읍니다

목사님 말씀을 대하는 요즈음 더욱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어지지만
목사님 말씀처럼 하나님의 존재형식, 하나님의 존재양태, 존재방식과 저의 유한성을 생각하며
조급한 마음에 답답함이 밀려오는가 봅니다.

거두절미하고 목사님 저의 답답함의 근원은
대구에 계신 목사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과 같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불확신입니다.
정확히 표현하여 희미함입니다.
목사님 글을 대하노라면 뭔가 있기는 있는것 같은데
목사님의 말씀 듣고 또 들으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바라겠읍니다.

장마가 오시는데 건강하시기를
profile

[레벨:3]Jordan

June 29, 2007
*.239.202.122

사실 정목사님의 솔직함은 인정하지만, 설교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는 눈과 해석이 좀 달라서요. 그래도 이 말씀은 제게도 강한 impact를 주는 군요.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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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부활절 믿음은 가능한가? [30] 2007-05-06 13816
215 부활절 다비타 쿰! [11] 2007-04-29 12216
214 부활절 저 분은 주님이십니다! [8] 2007-04-22 10783
213 부활절 구름 타고 오십니다! [10] 2007-04-15 11586
212 부활절 평화의 복음, 부활의 능력 [4] 2007-04-08 12927
211 사순절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자! [8] 2007-04-01 11885
210 사순절 마리아의 나드 향유 [11] 2007-03-25 17620
209 사순절 만나가 멎는 날 [11] 2007-03-18 12488
208 사순절 영적 긴장감 [18] 2007-03-11 14350
207 사순절 실패의 길을 가자! [9] 2007-03-04 13510
206 사순절 떠돌이 아람인의 후손 [15] 2007-02-25 12562
205 주현절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2] 2007-02-18 12454
204 주현절 죽은 자의 부활과 오늘의 삶 (고전 15:12-19) [37] 2007-02-11 16055
203 주현절 시몬의 하나님 경험 [21] 2007-02-04 13000
202 주현절 예레미야의 소명 [11] 2007-01-28 15791
201 주현절 카리스마의 영적 원리 [5] 2007-01-21 16394
200 주현절 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 [20] 2007-01-14 19284
199 주현절 그리스도의 비밀, 교회의 비밀 [5] 2007-01-07 15754
198 성탄절 솔깃한 말, 터무니없는 말 [7] 2006-12-31 13030
197 대림절 두 여자의 만남 [1] 2006-12-24 14708
196 대림절 그 날이 오면... [4] 2006-12-17 14287
195 대림절 영광과 찬양의 삶이란? [3] 2006-12-10 14672
194 대림절 “사람의 아들”이 온다. [2] 2006-12-03 14911
193 대림절 새로운 세상이 온다! [2] 2006-11-26 15318
192 기타 야훼 찬양! (욜 2:21-27) [3] 2006-11-19 13451
191 기타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희망 [2] 2006-11-12 15835
190 기타 욥의 하나님 경험 [6] [1] 2006-11-05 14798
189 기타 율법의 길, 복음의 길 [1] 2006-10-29 13838
188 기타 창조계를 벗삼기 [3] [2] 2006-10-22 11644
187 기타 신앙적 일상과 재림신앙 [2] 2006-10-15 17635
186 기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2] [2] 2006-10-08 19721
185 기타 고난 받는 그리스도 [2] [2] 2006-10-01 15304
184 기타 사람 차별 마시오! [1] [2] 2006-09-24 20032
183 기타 창조 영성 [4] [2] 2006-09-17 15221
182 기타 성만찬 공동체 [2] [1] 2006-09-10 23209
181 기타 예배로서의 삶 [5] [1] 2006-09-03 19465
180 기타 다윗의 통곡 [1] 2006-08-27 21883
179 기타 하늘생명의 밥 [1] 2006-08-20 18014
178 기타 예언의 성취 2006-08-13 16198
177 기타 다윗왕조의 존재근거 [1] 2006-08-06 19354
176 기타 현재의 고난, 7월30일 2006-07-30 16528
175 기타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 2006-07-16 16995
174 기타 거룩한 두려움, 7월9일 2006-07-09 13597
173 기타 생명이 죽음을 삼키다, 7월2일 2006-07-02 18992
172 기타 민중의 소리와 하나님의 통치 [2] 2006-06-25 10705
171 기타 마음의 장애를 넘어 [4] 2006-06-18 14599
170 기타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2006-06-11 13866
169 기타 마른 뼈와 야훼의 영 [1] 2006-06-04 15296
168 기타 사랑의 계명과 기쁨 [1] 2006-05-21 13756
167 기타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1] 2006-05-14 11751
166 기타 가족의 그리스도론적 정체성, 5월7일 [2] 2006-05-07 12180
165 기타 하나님의 자녀, 4월30일 [1] 2006-04-30 13341
164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10001
163 기타 살아계신 주님 [5] 2006-04-16 13163
162 기타 숨어있는 평화의 왕 [7] 2006-04-09 10537
161 기타 영원한 구원의 근원 2006-04-02 12829
160 기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4] 2006-03-26 11734
159 기타 예루살렘 성전과 예수의 부활 [4] 2006-03-19 15767
158 기타 믿음의 실체 [6] 2006-03-12 13266
157 기타 해방과 자유 [2] 2006-03-05 13350
156 기타 그리스도의 얼굴의 빛 [5] 2006-02-26 11264
155 기타 새로움의 원천, 2월19일 [2] 2006-02-19 12325
154 기타 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 2월12일 [3] 2006-02-12 13121
153 기타 사도 바울의 자유 [2] 2006-02-05 13688
152 기타 예언 전통 앞에서, 1월19일 2006-01-29 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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