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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관해서

성령강림절 조회 수 17219 추천 수 124 2007.09.30 15: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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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누가복음 16:1-13 
mms://wm-001.cafe24.com/dbia/070930.mp3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관해서
2007.09.30. 눅 16:1-13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찜찜해 보일 정도로 이상하게 들립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이 세상에서 어리석다는 말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개의치 말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오늘 이야기는 완전히 반대되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주인을 속인 불의한 청지기를 본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체 본문의 구성도 일관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 비상시를 대비하라고 하면서 동시에 작은 일에 충실해야 큰일에도 충실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우리는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서학자들도 이 구절을 신약성서에서 해석하기가 가장 어려운 대목 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소위 ‘난해구절’입니다. 오늘 우리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본문 안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어떤 부자와 청지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비유를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청지기 한 사람을 두었는데...” 이 부자는 부재지주입니다. 부재지주는 모든 행정적인 일을 청지기에게 일임하고, 청지기가 지주와 똑같은 권위로 땅을 관리했습니다. 지주는 일 년에 한두 번이나, 또는 한 번도 오지 않을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지주는 청지기가 자신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나쁜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제 지주는 이 청지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결정해야만 합니다. 이런 결정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나쁜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그게 과연 얼마나 확실한 것인지를 더 알아봐야 하구요,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더 좋은 청지기를 구할 수 없다면 함부로 해고할 수도 없습니다. 성서는 이에 관해서 별로 자세한 언급 없이 지주가 청지기를 해고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합니다.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청지기는 사정이 아주 딱하게 되었습니다. 실직자는 우선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게 급선무입니다. 그렇지만 나쁜 소문으로 해고당한 청지기를 다른 부자가 불러줄 리가 없습니다. 자기의 전공을 살릴 수 없다면 이제 막노동을 해야만 합니다. 본문에 보면 “땅을 파자니 힘이 없다.”는 하소연이 나옵니다. 청지기 생활을 너무 오래 한 탓인지, 아니면 나이가 이미 늙은 탓인지 이 청지기는 막노동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방법은 빌어먹는 것이지만 이 청지기는 창피해서 그 일만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청지기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자기가 청지기 자리에서 물러날 때 자신을 맞아줄 사람을 미리 만들어 놓겠다는 것입니다. 주인에게 빚진 사람을 불러들였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기름 백말을 빚졌습니다. 청지기는 그 사람에게 계약문서에 오십 말로 바꿔 적게 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밀 백 섬을 빚졌습니다. 문서에 팔십 섬으로 바꿔 적게 했습니다. 주인을 속인 겁니다. 그런데 청지기의 이런 행동을 보고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했다고 합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 때문에 해고당한 청지기가 또 다시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는데 주인은 그를 칭찬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예수님은 이 비유 끝에 다음과 같이 결론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8b절) 이런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결국 우리도 세상에서 손해 일절 보지 않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잔머리를 얄팍하게 굴리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간혹 기독교인들 중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못 살아서 되느냐, 믿는 집 아이들이 믿지 않는 집 아이들보다 공부를 못해서 되겠느냐, 하는 생각이 제법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도록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설교도 많습니다.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드릴 때 “머리가 될 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게 해 달라.”는 주문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저의 두 딸이 공부도 잘하고 인간관계도 원만하면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곧 그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기는 합니다. 여러분들도 비슷하게 생각한 생각으로 사시겠지요.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사는 게 성경말씀대로 사는 것인지 늘 진지하게 자기를 성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우리도 이 세상의 이기적인 요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지 모릅니다. 자기의 안전을 위해서 주인에게 손해를 끼친 청지기를 칭찬하는 본문을 근거로 자신의 그런 삶을 합리화할 수도 있을 겁니다.

청지기의 행동
이 본문은 난해구절이래서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2천년 당시에는 당연했던 상거래 관습들이 이 이야기 안에 들어오기도 했고, 누가복음 공동체만의 어떤 특별한 신앙적인 문제가 개입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이 본문을 기록한 누가가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주인을 속인 청지기를 칭찬할 수밖에 없는 그들만의 어떤 속사정이 있는 건 아닐는지요. 오늘 우리는 이런 모든 문제를 자세하게 풀어낼 수는 없습니다. 문제가 복잡할수록 원칙대로, 또는 단순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오늘 본문을 원칙대로, 단순하게 보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깊이 있게 읽어야겠지요.  
계약문서를 새로 작성한 청지기의 행동에서 어떤 윤리적 기준을 찾으려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윤리적인 기준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신앙적인 원칙을 제공합니다. 문서를 위조한 것은 분명히 비윤리적인 행동이지만 그게 본문의 핵심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조금 따지고 들어가면 그의 문서위조는 범죄행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당시는 지주와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래의 이자가 통상 50-100%나 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고리대금이지요. 그건 유대교의 율법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죄입니다. 청지기는 그 당시에 관행처럼 시행된 과도한 이자를 제자리로 돌린 것뿐입니다. 주인에게 이익이 줄어든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으로 불법은 아닙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청지기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청지기 자리를 쫓겨나게 될 경우에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은 이들이 자기를 맞아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청지기는 자기의 형편에서 최선으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이게 왜 중요한지는 9절 이하에 나오는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에서 다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설명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니 잘 들어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비유와 설명에서 이 이야기에 대한 묘사가 약간 다릅니다. 겉으로는 약간이지만 실제로는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비유에서 청지기는 단순히 사람들이 자기를 집으로 맞아줄 것만을 기대했지만, 이 설명에서는 영원한 집으로 맞아준다고 했습니다. 단순한 집은 일상이지만 영원한 집은 종교적 차원입니다. 재물에 관한 설명에서도 역시 이런 차이가 드러납니다. 청지기는 세속적인 재물을 이용해서 자기의 미래를 준비했는데, 예수님은 여기에 덧붙여 참된 재물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루터 성서번역을 따르면 이 두 재물이 극과 극으로 대립되어 있습니다. 세속적인 재물은 “불의한 맘몬”(ungerechte Mammon)으로, 참된 재물은 “진정한 것”(das wahre Gut)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처세술을 말씀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관해서 말씀하는 겁니다. 청지기가 모든 걸 잃었을 때에 자기를 맞아줄 사람에게 최선을 다 한 것처럼 제자들도 모든 걸 잃었을 때에 받아주실 분에게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청지기가 청지기 자리를 잃는 것은 곧 제자들이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죽음에서 우리는 모든 걸 잃습니다. 우리가 평생 동안 노력한 모든 대상이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는 이름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 우리를 영원한 집으로 맞아줄 분은 오직 그분밖에 없습니다.
죽음 이후가 뭐 그리 중요하냐, 살아있을 때 멋지게 사는 게 중요하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 원하신다면 그렇게 멋지게 살아보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냉정하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청지기가 청지기 자리를 곧 놓아야하듯이 우리도 우리의 삶 자체를 곧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제외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우리가 곧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세요. 젊음과 건강은 우리가 이 세상을 멋지게 사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지만 그게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는 생각이 조금만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외모지상주의가 판을 치고 있지만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도 알 만한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여잡고 있는 그런 것들이 우리를 영원한 집으로 맞아주지 못합니다. 그런 것에 모든 걸 걸어두는 사람은 결국 훨씬 큰 절망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래서 성서는 자기집중, 자기연민, 업적주의를 죄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참된 생명을 파괴하는 근본적인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재물
최소한 기독교 신앙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분들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저의 설명에 동의하실 겁니다. 그러나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거나(9절) 세속의 재물에 충실해야 한다는 구절(11절)은 동의하기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제가 앞에서 루터 번역을 인용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재물을 불의한 맘몬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재물은 맘몬이고, 맘몬은 불의합니다. 재물이 사람보다 높이 평가되는 세상이 어떻게 불의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지나가야 할 재물이 군주처럼 받들림 받는 세상이 어떻게 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악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은 재물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재물은 소비될 대상이지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재물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씀은 곧 재물을 재물로 다루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나가야할 재물을 영원한 힘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재물을 충실하게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이 재물은 단지 돈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건강과 외모도 역시 영원한 게 아니라 지나가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세요. 그것 자체가 악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돈도 그것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삶에 잠시 머물면서 수단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들이 목적으로 둔갑되었다는 사실이 심각한 거지요. 성서는 그런 것을 가리켜 우상숭배이며, 바알숭배이고, 맘모니즘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것들은 제 위치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오늘 비유에서 가리키고 있듯이 우리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우리를 영접할 친구, 즉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된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현재 우리의 삶은 부자에게 해고통지를 받은 청지기처럼 온전히 거기에 투자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된 관계에 집중한다는 말은 우리가 자주 들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여러분들은 예배를 잘 드리고, 성경을 잘 읽고,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 경건한 생활은 아주 소중하지만 신앙의 목표는 아닙니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훨씬 중요한 것을 아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삶의 결과이며, 태도입니다. 근원적으로 훨씬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잃는 바로 그 순간에 집중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의 청지기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세상에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를 지켜주거나 맞아주지 못할 바로 그 순간에 관한 생각이 우리 안에 가득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당연히 그 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모든 영혼을 기울이게 마련입니다. 그런 자세로 예배도 드리고 사람과의 관계도 맺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이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걸 잃게 될 순간을 실질적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의 소유가 비교적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좀 모자라면 가족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취미생활도 있습니다. 나름으로 이 세상에서 즐거운 일들을 마련해놓고 있습니다. 그게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얻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릴 그 순간을 우리가 준비하고 있나요? 우리의 영혼을 바로 그 순간으로 채우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영성이 풍요로워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그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셨습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13절)고 말입니다. 여기서 재물을 단순히 돈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취하려는 모든 열망을 가리킵니다. 그런 열망의 노예가 된 사람은 모든 것을 잃게 될 순간에 우리를 맞아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며,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열망을 멋진 삶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성서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 온전히 집중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리를 놓아야 할 오늘 본문의 청지기와 같습니다. 그는 자기가 모든 걸 잃을 때 맞아줄 친구에게 온 영혼을 기울였습니다. 그 친구인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십니다. 그분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 이외에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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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돌파구

October 01, 2007
*.105.34.150

속이 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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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7]paul

October 01, 2007
*.32.252.113

같은 누가복음 19:11-26에 보면 주인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은화 10냥을 맏기고 돌아와서 이득을 남기지 않은 하인을 꾸짖습니다. 저는 이 청지기 이야기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을 했습니다. 주인은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고 청지기는 저희를 뜻하는 것이겠지요. 주님께서 저희에게 달란트를 맡기실 때에는 그 달란트로 가난한 -- 물질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 사람을 도와 주라는 것이겠지요. 청지기가 정직하지 못했다는 것은 바로 주님의 물질로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 데만 급급했다는 것 아닐까요? 주인은 도리어 청지기가 처음부터 빚진 사람들에게 착복을 하지 말고 나누어 주기를 바란것 아닐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물질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꼐서는 이 물질을 잘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만족을 위해서만이 아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일에 -- 가난한 사람을 돕는일을 포함하여 -- 사용하시기를 바라시겠지요.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부채를 탕감해 줄 권리가 없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것이니.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그들의 부채를 탕감해 주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여기서 빚은 죄인지도 모르지요. 우리는 그들의 죄를 사하여 줄 권리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권리가 있으시니까. 그런데 주님의 권리이지만 우리가 그들이 지은 죄를 사하여 준다면 주님께서는 도리어 기뻐하지 않으실까요? 그것이 물질이건 죄이건 주인(주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에게 주님의 물질 또는 영을 나누어 주기를 바라시는 것은 아닐까요? 단지 저의 소견이었습니다. 제가 이해을 잘 못하고 있었다면 목사님께서 부디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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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임마누엘

October 01, 2007
*.67.140.207

목사님 오늘의 설교말씀을 다 듣고 난 다음에
질문이 하나생겼습니다.

본문중에서 불의한 청지기의 행동을 주인이 칭찬했다고 나오는데..
그렇다면 이 주인은 왜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것일까요..
불의한 청지기의 행동이 자신의 앞날에 대한 대비라는 점에서는 현명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주인에게 득을 끼치는 것이 없는데 굳이 그것을 주인이 칭찬할 것 까지 있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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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1, 2007
*.181.51.23

임마누엘 님,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이유에 대해서
내가 설명하지 않았던가요?
그렇군요.
설교 시간에 모든 걸 다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간접적으로는 설명이 되었을 텐데요.
예수님의 비유는 '비유'일 뿐입니다.
무엇을 전하기 위해서 창작한 이야기에요.
그게 순전한 창작일 경우도 있고,
패러디일 경우도 있고,
개작일 경우도 있고,
다양합니다.
아마 예수님의 경우에는 창작일 경우가 많겠지요.
이런 비유를 읽는 방법은
하나의 사실에 집중하는 겁니다.
청지기가 불의한가 아닌가 하는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
설교에도 짚었지만 그가 무조건 불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약삭빨랐던 건 분명하지요.
모든 걸 잃게 될 날을 준비한 겁니다.
이 비유는 이 한 가지 사실에 집중합니다.
이 청지기 비유는 그걸 말하는 것이지
불의한 행위도 괜찮은가, 하는 것이 아니에요.


바울 님,
좋은 말씀을 주셨군요.
제가 거기에 더 붙일 말은 없습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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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spark

October 01, 2007
*.16.79.126

예수님의 비유를 읽는 방법이 "하나의 사실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하신 설명이 제게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여태까지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이상의 교훈을 찾아 내려고 애썼고, 그러다가 모순적인 상황에 이르게 되어서 당황했었던 생각이 납니다.
위에서 설명하신 예수님의 비유를 읽는 방법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든 비유에 적용되는지 궁금합니다. 아니면 예외도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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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October 01, 2007
*.254.104.12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말씀의 깊이 속으로 잔잔히 빠져들어가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야훼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는 하바꾹의 고백이 우리에겐 결코 쉽지 않지만, 우리 신앙의 궁극은 그래야할 것입니다... 좋은 말씀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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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가을소풍

October 02, 2007
*.155.134.136

임마누엘님,
농담삼아 말씀드리자면
청지기를 내보내며 주인이 이렇게 말했을 것 같아요.
'고것 참... 고얀 놈이긴 하지만 지 앞가림 하나는 확실한 녀석이군.
어딜 가도 처자식 굶겨 죽이진 않겠어...'
뭐 이정도면 나름대로 칭찬 아닐까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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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임마누엘

October 02, 2007
*.67.140.207

정목사님의 답변..
새겨듣겠습니다^^

가을소풍님의 말씀을 들으니...
정말 공감가는 해석인데요~^^
갑자기 계속 품고 있던 의문이..풀리는듯..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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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7]paul

October 02, 2007
*.32.252.113

정용섭 목사님. 제 글처럼 아무 알맹이 없는 글에도 하나하나 코멘트를 주시는 목사님의 세심한 배려 감사드립니다. 제 소개를 못 드렸군요. 신문에서 이곳 싸이트에 관한 글을 읽고 성경을 읽다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으면 여기와서 검색을 하곤 하지요. 기분이 울적할때도 여기와서 글을 읽으면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저 같이 말씀에 대한 지식과 용어가 짧은 사람은 많은 글이 이해가 안갈 때도 있지만요. 항상 유익한 기대하며 목사님의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부디 주님안에서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 정진하시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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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사순절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자! [8] 2007-04-01 11860
210 사순절 마리아의 나드 향유 [11] 2007-03-25 17595
209 사순절 만나가 멎는 날 [11] 2007-03-18 12459
208 사순절 영적 긴장감 [18] 2007-03-11 14320
207 사순절 실패의 길을 가자! [9] 2007-03-04 13485
206 사순절 떠돌이 아람인의 후손 [15] 2007-02-25 12524
205 주현절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2] 2007-02-18 12434
204 주현절 죽은 자의 부활과 오늘의 삶 (고전 15:12-19) [37] 2007-02-11 15963
203 주현절 시몬의 하나님 경험 [21] 2007-02-04 12967
202 주현절 예레미야의 소명 [11] 2007-01-28 15769
201 주현절 카리스마의 영적 원리 [5] 2007-01-21 16365
200 주현절 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 [20] 2007-01-14 19245
199 주현절 그리스도의 비밀, 교회의 비밀 [5] 2007-01-07 15719
198 성탄절 솔깃한 말, 터무니없는 말 [7] 2006-12-31 12942
197 대림절 두 여자의 만남 [1] 2006-12-24 14404
196 대림절 그 날이 오면... [4] 2006-12-17 13941
195 대림절 영광과 찬양의 삶이란? [3] 2006-12-10 14264
194 대림절 “사람의 아들”이 온다. [2] 2006-12-03 14638
193 대림절 새로운 세상이 온다! [2] 2006-11-26 15011
192 기타 야훼 찬양! (욜 2:21-27) [3] 2006-11-19 13309
191 기타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희망 [2] 2006-11-12 15686
190 기타 욥의 하나님 경험 [6] [1] 2006-11-05 14682
189 기타 율법의 길, 복음의 길 [1] 2006-10-29 13716
188 기타 창조계를 벗삼기 [3] [2] 2006-10-22 11520
187 기타 신앙적 일상과 재림신앙 [2] 2006-10-15 17502
186 기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2] [2] 2006-10-08 19603
185 기타 고난 받는 그리스도 [2] [2] 2006-10-01 15179
184 기타 사람 차별 마시오! [1] [2] 2006-09-24 19906
183 기타 창조 영성 [4] [2] 2006-09-17 15094
182 기타 성만찬 공동체 [2] [1] 2006-09-10 22983
181 기타 예배로서의 삶 [5] [1] 2006-09-03 19333
180 기타 다윗의 통곡 [1] 2006-08-27 21769
179 기타 하늘생명의 밥 [1] 2006-08-20 17895
178 기타 예언의 성취 2006-08-13 16122
177 기타 다윗왕조의 존재근거 [1] 2006-08-06 19234
176 기타 현재의 고난, 7월30일 2006-07-30 16436
175 기타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 2006-07-16 16881
174 기타 거룩한 두려움, 7월9일 2006-07-09 13524
173 기타 생명이 죽음을 삼키다, 7월2일 2006-07-02 18868
172 기타 민중의 소리와 하나님의 통치 [2] 2006-06-25 10620
171 기타 마음의 장애를 넘어 [4] 2006-06-18 14525
170 기타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2006-06-11 13772
169 기타 마른 뼈와 야훼의 영 [1] 2006-06-04 15207
168 기타 사랑의 계명과 기쁨 [1] 2006-05-21 13678
167 기타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1] 2006-05-14 11679
166 기타 가족의 그리스도론적 정체성, 5월7일 [2] 2006-05-07 12097
165 기타 하나님의 자녀, 4월30일 [1] 2006-04-30 13225
164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9911
163 기타 살아계신 주님 [5] 2006-04-16 13057
162 기타 숨어있는 평화의 왕 [7] 2006-04-09 10435
161 기타 영원한 구원의 근원 2006-04-02 12746
160 기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4] 2006-03-26 11645
159 기타 예루살렘 성전과 예수의 부활 [4] 2006-03-19 15691
158 기타 믿음의 실체 [6] 2006-03-12 13202
157 기타 해방과 자유 [2] 2006-03-05 13290
156 기타 그리스도의 얼굴의 빛 [5] 2006-02-26 11180
155 기타 새로움의 원천, 2월19일 [2] 2006-02-19 12263
154 기타 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 2월12일 [3] 2006-02-12 13060
153 기타 사도 바울의 자유 [2] 2006-02-05 13625
152 기타 예언 전통 앞에서, 1월19일 2006-01-29 11039
151 기타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1월22일 [2] 2006-01-22 14794
150 기타 믿음의 토대, 1월15일 [3] [1] 2006-01-15 10703
149 기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1] 2006-01-08 1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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