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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세례에 대한 질문

주현절 조회 수 13885 추천 수 3 2009.01.13 23: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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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도행전 19:1-7 
성령과 세례에 대한 질문
(행 19:1-7)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9:1-7절에는 네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차례대로 거명하면, 아볼로, 바울, 요한, 예수입니다. 실제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은 바울과 익명의 기독교인들입니다. 1절의 보도에 따르면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는데, 7절에 따르면 그 숫자가 그 제자들의 숫자가 열두 명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시작이 특이합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라고 합니다.(행 19:1a) 이 이야기를 기록한 누가는 이야기 중심에 아볼로가 등장하지 않는데 무슨 이유에서 이런 구절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걸까요?
아볼로는 바로 앞 구절인 행 18:24-28절에 나옵니다. 그는 아프리카 북쪽 해안 도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입니다. 그 당시 알렉산드리아 학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적인 전통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볼로는 말을 잘 하고 성경에도 능통했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일찌감치 믿고 중요한 설교자요 신학자요 선교사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에베소에 와서도 말씀을 전했는데, 안타깝게도 요한의 세례만을 알고 있었습니다.(행 18:25)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에게 복음의 진수를 정확하게 전했습니다. 아볼로는 에베소를 떠나 바다를 건너 유럽 지역으로 갔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바울의 에베소 체류를 보도하면서 아볼로를 거론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고 말씀을 전하던 아볼로의 가르침이 여전히 에베소 지역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려는 것입니다. 그 아볼로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서 바울과 대화를 나눈 열두 명의 제자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으냐?” 이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이들의 대답입니다. “요한의 세례니라.” 바울은 이들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을 뿐입니다. 그는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을 믿으라고 선포했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열두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바울의 세례 안수를 받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으며, 그 증거가 방언과 예언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일반적입니다. 세례는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받아야 하는구나, 그리고 세례를 받으면 성령이 임하게 되고, 방언과 예언을 하게 되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자신과 연결시키게 되면, 무언가 불안감도 없지 않을 겁니다. 나는 세례를 받기는 받았지만 성령을 받은 증거가 없다는 불안감 말입니다. 방언과 예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거꾸로 방언이나 예언을 하는 사람들은 이게 바로 성령을 받은 증거구나 하고 뭔가 뿌듯할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방언과 예언은 핵심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성령의 임재를 그런 방식으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건 그 시대의 특징이기도 하고, 한계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임재 자체입니다. 성령 경험이며,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임재는 아직은 미숙한, 그래서 신학적 논란이 백가쟁명 식으로 표출되던 초기 기독교가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도 이런 논쟁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와 바울의 이방 기독교 사이에 치열한 신학 논쟁이 전개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지금의 팔레스틴과 이스라엘에서 벌어지는 전쟁처럼 ‘제로, 섬’ 게임과 같았습니다. 이 양자 사이에 타협점은 없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가 아니라 토라와 할례를 함께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옳다는 사실을 성령의 임재로 증명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갈 3:2,3절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성령의 임재가 관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제자들에게 당신들이 성령을 받았는가, 하고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똑같은 기독교인들이었지만 에베소 제자들은 바울이 복음 진리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성령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가 사용한 문장을 잘 봐야 합니다. 이 제자들은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말한 게 아니라 성령에 대해서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뒤이어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임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이들이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누가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은 이미 창조 사건 때부터 이 세상의 모든 생명 사건에 개입하는 영이었습니다. 자신이 성령에 대해서 전해 듣지 못했다는 것과 받지 않았다는 말은 다릅니다. 성령을 잘 모르면서도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정식으로 음악대학교에 다니지 않더라도 음악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실정이 이런데도 지금 갈라디아서와 마찬가지로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서도 바울이 성령을 받았느냐 하고 다져묻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음 투쟁
초기 기독교는 지금 여러분이 예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형편에 처해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투쟁에 참여한 것입니다. 아직 누가 승자인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것에 대한 흔적이 앞에서 언급한 갈라디아서만이 아니라 고린도서에도 나옵니다. 고린도교회에 심한 분쟁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 파, 또는 아볼로 파, 게바 파, 심지어 그리스도 파라고 자처했습니다.(고전 1:12) 이들이 각각 당시에 경쟁적이었다는 말입니다. 이중의 한 사람이 바로 아볼로입니다.
아볼로는 당대의 뛰어난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한 파를 형성했습니다. 그 뿌리는 세례 요한에게 이어집니다. 바울이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하고 물었을 때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볼로는 바로 이 요한의 세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핵심으로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모두가 개혁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불을 토하듯이 혁명적 변화를 외친 요한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에게 요한은 바로 메시아처럼 보였을 겁니다. 아볼로를 통해서 요한 신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지금 바울을 통해서 예수의 복음을 이어받은 사람들과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경쟁은 지난 2천년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서도 일어납니다. 자칭 진보인사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예수처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는 이유는, 그래서 사회적 영향력을 점점 잃어가는 이유는 개혁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옳은 주장입니다. 오늘 한국사회에서는 세례 요한과 같은 메시지, 회개의 세례가 필요합니다. 이들과 달리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이면서 개혁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사회윤리를, 후자는 개인윤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양쪽 모두 고린도전서와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볼로 파와 비슷합니다. 회개의 세례가 그 중심입니다.
바울은 이들과 싸웠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토라와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 기독교인들과 싸웠고, 고린도서와 사도행전에서는 요한의 회개 세례의 전통을 강조하는 아볼로 파와 싸웠습니다. 바울이 싸운 이들의 특징은 혼합주의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만 여전히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토라와 할례와 도덕적 변화입니다. 이에 반해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복음의 토대로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는 더 이상의 부가적인 요소가 필요 없습니다. 토라와 할례도 상대적인 가치가 있을 뿐이고, 요한의 회개 세례도 상대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아볼로 파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명확하게 전달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를 그리스도로 내세우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요한은 오히려 자기 뒤에 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전했습니다. 요한의 도덕성과 개혁과 변화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예수와 존재론적으로 하나 되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존재론적으로 하나 되는 길이 바로 그를 믿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믿고, 그의 운명을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입니다.
이런 바울의 주장이 그 당시 여러 기독교 파들에게 곧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바울의 주장은 너무 극단적이라서 오히려 거부감이 있을 정도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세상이 기독교를 향해서 무엇을 요구합니까? 세례 요한처럼 살아보라는 요구가 가장 강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의식이 있는 사람들도 그걸 주장합니다.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그런 요구는 강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바울이 설립한 교회들이 크게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이런 부분에서 타협하거나 절충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그대로 믿고 나갔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아니라 예수의 세례가 ‘답이야.’라고 말입니다.
바울의 주장이 옳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울과 바울을 변호하고 있는 누가의 설명에 따르면 성령이 그 대답입니다. 누가는 바울이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안수를 하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리고 그 현상을 방언과 예언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앞에서 방언과 성령은 그 당시에 다른 방식으로는 성령의 임재를 설명할 길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사용된 단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령의 임재가 그런 현상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이 그런 현상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그 사건에 임재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가 해명하는 성령과 세례의 관계가 너무 모호하다고, 그건 너무 일방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옳습니다.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당장 가슴이 뜨거워진다거나 불을 받는다거나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세례의 안수를 받을 때 성령이 임재했다는 누가의 해명은 더 근본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다.”라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성령이 임재했다는 말은 생명의 영이 임했다는 뜻입니다. 누가는 그것을 방언과 예언으로 표현했지만 반드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현상이 없을 때가 많을 뿐만 아니라 없는 게 오히려 더 정상적인 것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성령의 임재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활동은 우리의 오감 경험, 우리의 인식 범주를 뛰어넘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몇 가지 경험으로 성령의 임재를, 성령의 활동을 재단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에 성령이 함께 했다는 말은 바로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생명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입니다. 바울의 이방 기독교는 바로 이 사실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온 인류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죄의 용서는 바로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당한 인간은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 회복의 길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생명 사건이며, 따라서 성령의 사건입니다. 교부들은 성령이 바로 하나님과 ‘그리고 아들로부터’(필리오 께)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아들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에 성령이 임한다고 보는 것은 당연한 논리입니다.  
저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기독교 교리의 초보를 말씀드렸습니다. 진부하게 들리시나요? 그렇다면 바울이 왜 이런 문제로 다른 학파들과 전면전을 벌였는지를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바울에게 세례 요한의 가르침은 필요한 것이지만 절대적인 게 아니었습니다. 요한의 회개 세례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본질적인 게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없는 거 보다는 낫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인간과 세상을 쓸모 있게 고쳐서 구원받게 하겠다는 개량주의가 결코 아닙니다. 이런 요구들이 강하게 작용하면 결국 복음의 본질은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그런 유사 기독교와, 혼합적인 기독교와 싸우지 않을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례 요한의 회개 세례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닌지요. 아니 예수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와 더불어 요한의 세례도 더불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요. 오늘 예수님만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 성령의 임재라는 증거가 나타나고 있을까요? 자신이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려면 이런 질문을 적당하게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이런 질문 앞에서 우리에게 두 가지 신앙적인 태도가 요청됩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세계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곧 성령의 임재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받아들인 이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을 위해서 2천 년 전 바울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투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투쟁이 오늘 분문에서는 성령과 세례에 대한 질문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200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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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January 15, 2009
*.206.88.145


오늘 설교에서 목사님이
기독교 공동체에 회개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란 것은 바울 선생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가르키고자 한 핵심을 비켜 나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한마디 올려 봅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말하고저 한것은 예수님 만이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믿는 자 들에게 줄 수 있다는
메시아(구원자)의 세례와, 또한 예수의 능력으로 된 세례를 받으면
죄 사함과, 성령도 선물로 받는다는 것을 전파하기 위함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물론 세례 받을때 성령의 능력과 임재를 깨닫지 못하고 세례 받는 사람도 있고
세례 받은 후에 예수의 도 와 성령의 능력을 깨닫는 차이는 있겟지만은요
오늘 본문 말씀에는 예수의 능력으로 받는 성령 세례가 끼치는 복음과, 성령의 능력에
대한 가르침이 본문의 핵심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본문 19장 8절부터 20절을 참고 하시면 될것 같습니다

요한은 선지자 이사야의 말처럼 주님보다 먼저 와서 주의 길을 예비한 자이겠지요
요한은 이미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을 가르치기도 했지요

마가복음서에서 예수님도 당신의 첫 사역이 바로 회개하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고 강조 하셨습니다.
또한 마가복음 9장 말씀에서도 주님께서는
손, 발, 눈, 등 육체가 죄를 저지르면 차라리 죄 된 육체를 가지고
지옥에 던져 지는 것 보다 죄를 저지르는 육체 한 부분을 과감하게
짤라 내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더 좋다고 까지 죄의 나쁜 결과와 죄의 영향을
강조 하였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 해주면서 그냥 보내어 주신 것이 아니라
이후에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였구요..
병을 고쳐 주면서도 더 심한 상태가 되지 않도록 역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였구요..
죄의 결과와 심각성을 말씀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오늘 설교에서 목사님은 역시 성령의 개인 내주를 긍정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보이시는군요.
또한 죄 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큰 핵심 임도 간과 하시는 것 같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 고 한 것은
요한의 세례로서는 받을수 없는.. 예수의 권능과 능력이 숨을 쉬는 세례
믿는자 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세례.. 바로 성령세례(개인 내주의 세례)가 있다는 것을
깨우치고 알고 경험하라는 내용이 오늘 본문 말씀이 가르키고저 하는 메시지 아닌가요..
또한 예수의 세례와 복음도 먼저 회개가 선행 되는 것이 첫번째 전제 조건임을 예수께서도
복음서에서 수차례 강조 하고 있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anuary 22, 2009
*.120.170.242

저별달 님,
대글을 며칠 전에 읽기는 했는데,
무슨 답변을 드려야 할지 난감해서 이렇게 늦어졌어요.
늘 비슷한 문제가 불거지는 거 같군요.
조금 답답해도 참고 천천히 진도를 나가보는 게 어떨는지요.
기독교 신앙은 단답식의 대답을 얻는 게 아니라
생명의 영이신 성령과의 영적 공명 안으로 들어가는 거랍니다.
주의 은총이.
profile

[레벨:29]유니스

January 21, 2009
*.235.166.149

목사님의 이 설교본문을 대하며 먼저 드는 생각은
'아...난코스를 택하셨구나..' 였습니다.
비록 주현절도 최근에 알게 되었지만,
설교들은 제법 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오순절 계열 외에는 이 본문으로 들은 설교는
거의 없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도 이 점을 의아하게 생각합니다만
어느 정도 이유는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보통 교회에서 성령에 대하여 구체적이지않게 전달하며
물론 성령세례라는 말도 명확하게 사용치 않습니다.
반대로 오순절 계열은 너무 명확해서 한계가 있을 정도로 언급을 하구요.
결국은 각자가 이해한 하나님나라가 다른 것과
성령을 언급과 무언급함으로써 그 분을 존재자로 보기보다는
무의식 중에 기능으로 본다는 점,
그리고 성령의 경험에 대한 다양한 태도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제 개인적으로는 회개의 세례와 다른,
성령세례의 존재와 구분을 위해 이 본문을 들여다봅니다만
목사님께서 어떻게 저 양자의 상황에서
설교를 이끌어가실까 침을 삼켰습니다.
제 사정은 그만두고 새롭게 인식되는 점들을 짚어보자면,

첫째,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하여 기독교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것은 성령의 임재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성령세례를 비롯한 성령에 대한 교회의 무심함 혹은,
지나친 확대와 제한적으로 성령에 집착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성육신의 사역과 더불어 성령의 영적 사역을 같은 무게로 신앙한 바울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둘째, '우리의 몇 가지 경험으로 성령의 임재를, 성령의 활동을 재단할 수 없습니다. '
하신 대목에서 우리의 몇 가지 경험이 무시되어서도 않되고,
이것으로 그 활동을 재단할 수도 없다는 점을 받아들여야한다는 점입니다.
경험자와 무경험자를 나누기 전에 성령의 활동 자체를 재단치않는 열린 신앙이어야 한다는 것.

세째. 성령은 '생명의 영'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에 대한 인식이 깊어질수록 세계와의 접점이 더 치밀하고 확대가 될 것이라는 것.

일단 여기까지요.
목사님의 (제가 생각하기에는)난코스설교를 통해서 제 안의 난코스가 해결이 됩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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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22, 2009
*.120.170.242

제 설교는 요점 정리가 잘 안 된다는 평을 듣고 있던 차에
유니스 님이 대신 정리해 주신 거 같아서
이렇게 고마울 데가 없네요.
위 설교에서도 중요한 관점은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과 보편성의 상관 관계랍니다.
회개의 세례는 보편적인 거라고 한다면
성령의 세례는 독특한 거지요.
이 두 가지가 이원론적으로 나뉜다는 말이 아니고요.
성령의 세례에도 당연히 보편적 차원이 들어 있지요.
생명의 영으로 새로운 세계관을 얻게 된다면
그건 분명히 보편적인 거에요.
생명만큼 보편적인 게 어디 있겠어요.
문제는 그 성령이 어떻게 역사적 인물인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온전히 경험될 수 있느냐 하는 거에요.
이런 곧 왜 예수가 그리스도, 메시아인가 하는 궁극적인 질문이기도 해요.
이런 점에서 모든 설교는 케리스마로 집중되어야 합니다.
좋은 하루.
profile

[레벨:13]토토

February 21, 2009
*.64.66.99

바울의 두려움, 편을 읽고 이 설교를 읽었는데요
비슷한 것 같아요
부수적인 것을 치우고 중심에 집중하라, 는 말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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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파란하늘지붕

April 06, 2014
*.129.3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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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여기서 요한이 말한 세례는 '회개의 세례'라고 하는데 제가 알기로는 '회개'라고 함은 윤리적인 차원을 넘어선 하나님을 향한 전인격적인 방향전환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요한의 회개는 윤리적이나 개량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회개였다는 말로 받아들여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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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 부활절 죽임, 살림, 증인 [25] 2009-04-27 16220
323 부활절 복된 믿음 [29] 2009-04-20 13885
322 부활절 죽음을 무너뜨리리라! [7] 2009-04-13 13277
321 사순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26] 2009-04-06 19369
320 사순절 그날이 오리라! [12] 2009-03-30 12812
319 사순절 구원의 신비와 선한 일 [11] 2009-03-23 13731
318 사순절 무엇이 구원의 표적인가? [13] 2009-03-16 14865
317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29] [4] 2009-03-09 14373
316 사순절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22] 2009-03-02 16831
315 주현절 창조의 빛, 인식의 빛 [15] 2009-02-23 19862
314 주현절 바울의 두려움 [12] 2009-02-16 11962
313 주현절 예수와 귀신 [44] 2009-02-09 14324
312 주현절 무죄한 피 흘림에 대해 [9] 2009-02-02 11955
311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9] 2009-01-25 10708
310 주현절 무화과 나무와 하늘 [9] 2009-01-19 11427
» 주현절 성령과 세례에 대한 질문 [6] 2009-01-13 13885
308 성탄절 크게 기뻐하라! [11] 2009-01-05 12415
307 기타 생명 상실의 두려움을 넘어서 [2] 2009-01-01 10730
306 성탄절 종이냐, 자녀냐 [26] 2008-12-29 12275
305 성탄절 하나님의 영광과 아기 예수 [8] 2008-12-25 16805
304 대림절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 [7] 2008-12-22 11671
303 대림절 광야의 ‘소리’를 넘어 [18] 2008-12-15 14120
302 대림절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8] 2008-12-08 14052
301 대림절 마지막 ‘때’ [11] 2008-12-01 12711
300 성령강림절 깨어 있으라! [10] 2008-11-23 16263
299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747
298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19] 2008-11-09 14578
297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475
296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715
295 성령강림절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28] 2008-10-19 23501
294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604
293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611
292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0947
291 성령강림절 믿음의 위험성 [9] 2008-09-21 11488
290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082
289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믿음 [6] 2008-09-07 11934
288 성령강림절 율법과 사랑 [9] 2008-08-31 13138
287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9] 2008-08-24 13759
286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52
285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512
284 성령강림절 예수와 유령 사이에서 [9] 2008-08-03 13236
283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 [8] 2008-07-27 13211
28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 [10] 2008-07-20 15256
281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와 예수 [23] 2008-07-13 15835
280 성령강림절 말씀은 성취된다 [10] 2008-07-06 17895
279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8506
278 성령강림절 경계를 넘어서 [5] 2008-06-22 16299
277 성령강림절 이삭의 하나님, 이스마엘의 하나님? [8] 2008-06-15 25717
276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6870
275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20414
274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241
273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의 하나님 [6] 2008-05-18 27795
272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20755
271 부활절 간질병과 믿음 (마 17:14-20) [8] 2008-05-04 25571
270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7653
269 기타 참된 안식 [1] 2008-05-01 17257
268 부활절 사랑과 계명 [7] 2008-04-27 16324
267 부활절 하늘이 열립니다! [4] 2008-04-20 15255
266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683
265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2000
264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148
263 부활절 부활의 오늘과 내일 [15] 2008-03-23 15472
262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34] 2008-03-16 16363
261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758
260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3805
259 사순절 하나님과의 다툼 [13] 2008-02-24 16050
258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8762
257 사순절 악마의 유혹 앞에서 [14] 2008-02-10 15716
256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7] 2008-02-03 17649
255 주현절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4] 2008-01-27 13218
254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437
253 주현절 하늘이 열리다! [5] 2008-01-13 13290
252 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11] 2008-01-06 14860
251 성탄절 예수는 예언의 성취! [5] 2007-12-30 15249
250 성탄절 성탄에 참여하는 길 [18] 2007-12-25 19267
249 대림절 임마누엘 예수 [17] 2007-12-23 20172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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