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46편 녹취록 - 주는 우리의 피난처

조회 수 1647 추천 수 0 2009.04.05 01:10:25

시편 46편 강해 -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시편 46편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4.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5.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6.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7.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8.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9.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개역개정)

셀 라라고 하는 이 단어가 3번 반복되었군요. 아멘과 같은 그러한 뜻이겠죠. 고거를 신학사전, 제가 옛날에는 확인해서 정확한 낱말뜻을 머리에 넣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이 이야기를 하지 않다보니까 그 뜻을 놓쳤습니다. 아마 추측키로 유대인들이 후렴처럼 이렇게... 우리 창에서도, 한국의 한민족의 창에서도 고수가 얼쑤 하듯이 이렇게 추임새를 넣는 거 있잖습니까? 그거와 똑 같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러한 뉘앙스를 가진 용어일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어떤 특별한 뜻이 있다기보다도 시편, 그 노래를 살리는 그러한 추임새와 같은 기능으로 사용되었을 겁니다. 아멘 그런 뜻으로 말이죠.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라든지 옳다는 말이죠.

46 편은 성서학자에 따르면 마틴 루터의 찬송시가 이 시편에 근거한 거라고 합니다. ‘내주는 강한 성이요’ 그 노래인가요. 하여튼 마틴 루터 때문에 이 시편이 개신교에 특별히 더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이 제목은 피난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라고 볼 수 있겠군요. 피난처 되시는~. 그런데 하나님은 피난처로 고백하는 가장 유명한 시편입니다. 1절부터 아주 그 내용이 강하게 나와요. 확신에 찬 노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환난처 힘 도움 이렇게 세가지 단어가 연속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피난처란곳은 피할 곳인데 어려움을 만날 때 필요한 것이죠. 보통때는 필요 없을 수도 있지요. 특별히 어려움을 만날 때는 꼭 있어야될 그러한 곳이 피난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평소에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이 아니고 어려움을 만났을 때만 필요한 분이냐? 이러한 질문이 가능하죠.

이 거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맞는 이야기죠. 평소에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그냥 살죠. 늘 뭐 하나님을 피난처로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것은 아니죠. 그냥 사회의 체계, 사회적인 흐름 뭐 거기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 하나의 관점이구요.

두 번째 관점으로는 일상자체가 위기, 어려움이다. 그러니까 일상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피난처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고 대목하고 서로 충돌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실상이라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을때는 그냥 잘 지나가는 것 같지만 그런 그 내면으로 들어가게 되면 끊임없이 위기에 노출되어 있는 거죠. 갑자 무슨 사고를 만난다 이런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갖고 있는 그러한 자기 충족적이지 못한 어떤 부분들을 숙명적으로 갖고 있다고 봐야죠. 군중속의 고독이라는 말과 이러한 흔한 말고 조금 비슷한 이야기도 할 수 있겠군요.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지내면 우리는 충분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 안에서도 여전히 고독하다는 것이죠. 위기가 늘 이렇게 숨어있다. 기회를 보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거를 우리가 다른 것 때문에 미쳐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그런점에서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무순 어려움을 만났을 때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체 삶에서도 피난처시다. 우리의 실존을 그러한 피난처로 피한다. 그러나 시의 기본, 원래 방향은 실제적으로 그런 시련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피난처로 생각하는 그러한 이야기를 바탕에 두는 겁니다. 네 그런 피난처라는 말로 생각해서 주욱 이야기가 설명되거나 또 확장되거나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2,3절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해일이군요)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엄 청난 자연재해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지금도 이러한 자연재해, 쓰나미라고 하는, 해일이라고 하죠.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네 사실 그런 것이 최근에도 동남아시아 지진같은 것 중국, 그런 것으로 수 만명 주습니다. 이런것이 거의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거든요. 지금도 그런데 고대인들, 지금은 그러한 자연 재해앞에서 우리가 엄청나게 두려운데 고대인들에게 어느정도 심각했을지는 우리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 시인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이러한 어려움은 평면적으로 설명되면 자연 재해 이지만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그럴 정도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삶의 위기, 그런 것을 다 포함한다고 봐야 되겠죠. 그런데 여기에서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게 어느 정도의 믿음일까요? 이러한 시인들의 믿음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가 당연히 배워야 할 부분이기도 하구요.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그냥 무조건 믿음이 좋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어느정도 아니면 일시적으로 가능해요. 자기확신으로서요. 그리고 아예 술에 취해있다면, 혹은 마약에 취해있다면 어떤 상황하에서도 두려워 하지 않을겁니다. 오히려 불을 보고 뛰어들어갈 수 있을 정도 이거예요. 그러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광신적이거나 술 먹은, 마약을 통한 이성, 감정의 손상으로 인한 판단력을 잃어버림으로 가능한, 두려움 상실이 아니라 그것은 명확하게 큰 어려움들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는 그러한 상태거든요. 이게 참된 신앙인데요. 이것도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기도 많이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구요. 두려워하지 않을만한 근거를 분명하게 알고 있을 때 가능합니다. 고 근거를 아는 것이 이성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기도 하고 또 감정적인 부분들 이런 것까지 같이 연결되어서 우리의 총체적인 인격으로요. 그걸 가장 적절하게 말할 수 있는 신앙적 용어는 영성입니다. 영적인거죠. 영적인 차원에서 분명한 확신을 가질 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보통 영적이라고 말할 때 그냥 이성적인 것을 다 제하고 무조건적인 믿음과 관계된 그러한 것으로 사람들이 많이 생각하죠.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에게 향한 예수님의 말씀에 나오는 단어를 보면요. 영적인 예배를 드리라고 할 때요. 그것이 이성적인 예배라고 하는 뜻을 같이 포함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성까지를 포함한 그러한 우리의 가장 심층적 생명의 작용과 현상이죠. 우리가 어떤 자연재해나 혹은 자연재해와 같은 위기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분명하게 그것을 위험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 안에서도 혹은 그것을 뛰어넘어서 우리가 피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러한 확신, 신뢰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대상은 하나님이시죠. 하나님은 우리들의 피난처라는 사실을 막연한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인식할때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게 어려운 거예요 그게 무조건적인 믿음 이런 게 아니라 어떠한 어떤 이성적인 판단력으로도 분명한 신뢰가 과연 가능한가? 그런가? 그러한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것의 실체가 뭐냐 그러한 질문인거죠. 물론 여기서 실체는 성서와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그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통치안에 우리가 들어가는 거예요. 들어간다고 하는 말이 좀 문학적인 표현인데요.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지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 그 하나님 우리가 어떻게 문을 열고 이렇게 들어갈 수 있는, 사실적인 실증적인 그러한 대상은 아니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모양을 만들거나 은행에 저금해두고 필요할 때 쓴다거나 이러한 방식으로 실증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들의 피난처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아주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 안에 들어갈 때만 우리가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제가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말들이 자칫하면 그냥 관념적인 것으로만 변죽을 울리는 것으로만 실질적으로 오지 않는, 그냥 막연한 것으로만 다루어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확실한 세계속으로 우리가 좀 들어가야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성서와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그 세계, 구원의 세계, 하나님 통치, 하나님의 계시, 생명의 세계, 그러한 것들을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일치가 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되는 거죠.

네 여기에 앞서 말한 두가지 방향에 충돌이기도 하고 모순이기도 하고 통합이기도 한데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하나님의 구원통치 계시 생명 부활 이런 것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도 그것의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넓은 혹은 포괄적인 심층적인 기독교의 체계들 있잖습니까? 요새 우리가 판넨베르그의 사도신경을 공부하고 있는데 그러한 내용들 말이죠. 평신도들이 쉽게 따라가기 힘든, 그리고 잘 몰랐던 그러한 세계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냥 무식한 할머니들이 그냥 세례받을때 알고 있었던 단순한 그것만 알고 있고 그냥 하나님이 잘해 주시겠지. 그냥 막연한.. 막연한 것은 아니고.. 그런데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하고 저처럼 신학적인 세계를 풍부하게 알고 있는 거하고 과연 차이가 있을까 없을까 하는거죠? 만약에 여기서 차이가 없다면 굳이 그렇게 복잡한 신학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고 그런 것은 신학전문가에게 맡겨 둘 것이고 일반 신자들은 세례받을때 교리 문답 이것만 갖고 열심히 거기에 매달려 신앙생활해도 된다는 말이거든요. 이걸 완전히 부정하기도 힘들고 또 그 세밀한 한계에 들어갈 수도 없구요. 이게 조금 애매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사랑이야 무한하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깊이에 들어갔느냐 않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질 수 없습니다.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하나님이 신앙의 크고 작은 차이에 상관없이 구원해 주실 거니까요.

이런 것은 있는 거죠. 궁극적인 구원이 요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배타적 권한에 속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살아 있을때 우리 신앙의 역동성 그런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신학적으로 여러 가지 따지고 공부하고 기독교의 전체 역사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그냥 단순한 믿음을 갖고 거기에 전적으로 더 열광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믿음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냐 말할 수 있는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매달릴수록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거죠. 네 나가겠습니다. 제가 고 두려움 하나님에 대한 신뢰 요거를 말씀을 드리다가 불현듯 우리의 신앙생활에 나타난 다른 부분들이 기억나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네 1-3절까지 중요한 시편기자의 고백이었어요. 하나님의 피난처를 언급하면서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그러한 정도의 차원에서 깊이 이해하고 있는거죠.

네 그다음에 4-7절까지는요. 물론 이거도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라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는 겁니다 1-3절까지의 이야기는 자연재해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피난처로 알고 산다고 하는 이야기이구요. 4-7절까지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어떤 제국들, 왕국, 이런 위기들, 위협들 전쟁 이런 것이죠. 이러한 것들 앞에서도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처리하시니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피난처로 여긴다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1-3과 4-7절을 배경만 다르게 하고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7 절만 조금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우리와 함께 하신다 했잖아요. 피난처다. 함께 하신다. 도움이시다 연관되는 이야기입니다. 1-7절까지 전체적인 흐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 하나님은 나라와 왕국이 떠들고 흔들리고 그렇게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한마디로 땅이 녹는다. 이런 정도의 하나님, 천지개벽의 하나님,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 혹은 그러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어떤 두려움이 있어요? 이러한 신앙은 죽음앞에서도 우리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그러한 차원에까지 이릅니다. 우리 몸이, 우리가 죽는다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생물학적 삶의 형태들이 다른 걸로 변화되는 거지 않습니까? 참

우리가 무화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도 한데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즉 그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셨고 지금도 땅을 녹이기도 하는 그러한 분이다. 모든 생명의 근원되시는 분이다. 그러한 신앙이 있다면 우리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겠죠.

네 8절부터 11절까지 이렇게 새 연으로 되어있습니다 한연마다 다 셀라라는 말로 끝납니다. 8-11절까지 여기에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네요. 9절보면 이렇습니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그 당시의 최고의 전쟁무기죠. 활, 창, 수레 이런 것을 꺾고 끊고 불사른다. 이런 것에 자기의 안전을 담보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보장받지 못하는 거죠. 하나님앞에서 이런 것들은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과연 어느정도로 타당할까요? 혹은 이 시편기자가 어떤 상황에서 이러한 신앙 인식에 도달했을가요? 실질적으로 활, 창 이런 것들이 인간의 운명을 쥐었다 폈다 하지 않습니까? 이 시편기자는 무엇을 보고 하나님이 그것을 꺾고 불사른다고 이야기할 까요? 이건 요즈음 말로 바꾼다고 한다면 핵무기 미사일, 대전차포, 최신식 무기가 될 수 있겠습니다. 지금 남한과 미국이 연합군사훈련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인공위성 미사일 발사 연습을 하겠다고 하구요. 온 세계에서도 전쟁연습을 하고 있고 있습니다. 부산에 입항한 항공모함이 5조원짜리라고 하나요. 이 훈련에 참여해서 투자되는 돈이 모두 합해서 수십조원이 된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전쟁무기인데 그런 것들이 정말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의 이러한 영적 시각으로 본다면 하나님이 그런 것을 다 불사른다. 꺾는다. 끊는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런 것을 근거로 자기의 개인이나 국가의 운명을 걸어두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도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이게 인제 성서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딜레마라고 할까요? 그렇습니다. 오늘의 사회는 전혀 이런 것하고는 맞지 않게 돌아가고 있는데요. 자칫하면 우리의 말이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왜 하나님이 그런 것을 꺾고 불사른다고 있을까요? 이런 것은 다 지나갑니다. 하나님은 침묵하는 것 같지만 침묵의 방식으로 인간들의 전쟁, 폭력 이런 것들을 다 활을 꺾듯이 꺾으시는 거죠. 우리가 말은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정말 실제적으로 우리가 그렇게 믿고 살 수 있느냐는 것은 두 번째 문제예요. 한국이라는 하는 사회안에서 기독교가 이러한 전쟁을 거의 무력, 이런 것들을 절대화하는, 무력도 그렇고 군사도 그렇고 경제도 그런 것데요. 다 통하는 것인데 힘의 논리들이거든요. 그런 것하고 대항해서 싸우고 있느냐? 하는거죠. 하나님은 활을 꺾고 창을 꺾고 수레 불사른다고 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이러한 경제와 군사력과 하나님이 꺾는다고 하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우리가 살고 행하고 도전하고 있느냐? 이런 문제입니다. 안 그렇잖아요. 전혀 안 그렇죠. 오히려 우리가 부화뇌동하고 있고 종교적으로 합리화하고 있잖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실질적인 것이 아니라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겠죠.

네. 10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 설치지 마라. 네가 살 길을 네가 자꾸만 찾으려고 너무 애쓰지 말아라. 하나님을 하나님되심을 알아라. 이 말이 어떤 뜻일까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뭐가 잘 되것거니 하라는 것은 아닐겁니다. 이건 바로 앞에서 말씀대로 경제, 군사, 정치적인 그러한 힘에만 전적으로 의지하려고 하는 삶에 대한 경고예요. 그냥 가만있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기울여져 있는 삶들, 최선을 하기는 해야 하지만, 거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올인하지 말고 가만있어라. 하나님됨을 알지어다. 하나님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존재,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시는가 그것을 봐라.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하나님이 높임을 받는다 그것에 대한 설명을 그만하겠습니다. 마지막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7절 말씀이 다시 반복되었군요. 똑같은 구절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피난처시다. 그러한 신앙고백입니다. 바라기는 이러한 시편기자의 신앙이 우리들에게 아주 실질적으로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시고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피난처라고 하는 사실을 온 몸으로 이해하고 느끼고 하나가 되어야 하겠죠. 네 그러한 영적인 길을 계속해서 같이 가봅시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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