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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편 녹취록-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

조회 수 1374 추천 수 0 2010.08.04 01:01:06

시편 91편 강해-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

 

예, 시편 91편 1절부터 16절까지 있습니다. 좋은 말씀이죠. 뭐 91편만 좋다고 말할 수 없는데, 조금 더 뭐라고 할까요? 익숙하다고 말 할 수도 있고, 우리들 마음에 많이 와 닿는다 그렇게 말 할 수도 있습니다. 예, 91편 1절부터 16절까지 같은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2.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5.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6.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7.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8.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

9.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10.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11.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13.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15.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16.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아멘! 예, 그렇죠. 익숙한 그런 단어들과 구절들이 많이 나옵니다. 피난처, 요새, 올무에서 건지고, 전염병에서 건진다고 하는 잘 알려진 그런 시편의 단어, 구절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어떤 모습에서요, 여러분들도 그렇게 경험 할 때도 있고 주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런 걸 느낄 때가 있을 텐데,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굳이 제가 ‘하나님의 현실성(reality of God)’이라고 제가 거기 강의안에 썼어요. . 요거는 신학용어예요. 꼭 신학용어라기 보다는 전문적인 용어입니다. 현실성, 리얼리티라고 하는 거예요. 보통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나 아니면 문학작품을 볼 때도 저 작품 참 리얼하다, 얘기하잖습니까, 리얼리티가 있다, 혹은 리얼리즘 문학이란 말들도 있습니다, 아주 현실성이 있느냐 없느냐 그런 뜻이지요. 그런데 초현실주의하고는 좀 다른 겁니다. 보통 현대시나 미술에서 초현실주의라고 하잖아요? 현실을 뛰어넘는 어떤 극단적인 사실 너머의 어떤 것들을 말할 때 초현실주의라고 하는데 현실주의라고 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명백하다고 할까요?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할까요? 그런 점들을 말할 때 그런 말들을 씁니다.

 

하나님의 현실성을 경험해서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좀 멀리 느껴지는 거죠. 가깝게 느끼지 못하죠, 그래서 계신가, 안 계신가 그렇게 생각되기도 하고요, 어떤 때는 정말 하나님이 계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게 이상한 건 아닌거예요. 하나님의 현실성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 탁자 앞에 차도 있고, MP3 녹음기도 있는데, 이런 것처럼 확인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이런 것이라고 한다면 ,만약 그렇게 확인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무리 절대적인 것이라 해도 사물처럼 어떤 범주 안에 들어오면 그건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금은보화, 금강석 다이아몬드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것은 하나님하고 비교 될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현실성은 이러한 사물처럼 확인할 수 있는 것, 혹은 범주 안에 들어 온 것, 우리의 생각 안에 들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하나님 경험이 확실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런 거예요. 너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거짓말 하는 쪽에 가까울 겁니다. 아니면 광신도 든지요. 그러니까 이성적인 판단을 할 줄 모르고 맹목적인 그러한 사람들이나 그렇고, 사이비 이단에 갈수록 그러한 확신이 강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실제 삶에서 내가 정말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느냐 아니냐, 그러한 혼란을 겪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겁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신자들은 보통 세 가지 태도를 취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시거나 혹은 안 계신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사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이면서 그렇게 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는 좋은 뜻으로는 그냥 인정하고 싶지만, 그러나, 하나님 경험이 안 되니까 그냥, 그냥 사는 거죠. 아무 상관없이 삽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제법 될걸요? 어떤 지성적인 사람들일수록 그런 가능성이 많습니다. 두 번째는 매 순간 하나님의 현실성을 느끼는 것처럼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인 거예요. 그러니까 흉내를 내는 거지요. 그래서 맨 날, 아멘, 할렐루야,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뭐 등등.. 이렇게 경건의 모양을 취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것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어떤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게 되면 금방 따라서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배울 수 있는 거예요. 구구단을 따라서 외우듯이, 습관이 되면 끝말마다 아멘, 할렐루야, 믿습니다. 전화할 때도 수화기 들자마자 “할렐루야, 누구누구입니다.”그런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건 얼마든지 가능한 거예요. 그게 나쁘다고 말씀 드리는 게 아니라 그렇게 경건한 흉내를 얼마든지 흉내를 낼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 경험되는 건 아니거든요, 세 번째는 이런 경험,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런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앞에 있는 사람들은 고민이 없어요. 첫 번째 두 번째는, 첫 번째는 아예 포기하는 거예요. 냉소적인, 기독교 신앙 전혀 상관없이 교회는 다니긴 하지만, 이름만 걸쳐 두고 하나님 없는 것처럼 세상의 기준대로 그냥 파 묻혀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고민이 없어요. 두 번째 사람들도 고민이 없어요. 자기들의 입에서 많은 종교적인 언어를 내면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거지요. 그러나 세 번째 사람들은 고민하는 거예요.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나님을 매일 경험하고 싶은데, 그건 또 안 되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요, 최소한도 정직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여기에 속합니다. 성실하면서도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면서도 그러나 확실하게 잡을 수 없는 어떤 것 때문에 고민하는 거죠,

 

이 셋이 다 바람직한 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현실성을 그냥 하나님이라고 합시다, 그 하나님을 일상에서 아주 실제적으로 경험하면서 사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여러분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더 자기 삶을 더 많이 지배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영성가라고 얘기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물론 다 영성가예요. 성령을 따른다고 하는 점에서는 영성가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그게 흔한 말로 하면 얼마나 성령이 충만한가, 가득한가 아니면 아니면 축소 됬는가, 그런 차이가 있는 거죠.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생생하게 리얼하게 경험하면서 일상에서 살아가야 되는데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요, 그 길이 뭘까요? 거기에 따르는 지름길, 유일한 길, 왕도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걸 배울 수도 없는 거예요. 시인이 되는 것, 시인이 되는 것, 시 경험은 모두 똑 같이 주어지는 게 아닌 것 처럼요. 딱 하나의 길이 있는 게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경험이 어떤 삶의 내용으로 채워지는 가하는 것은 분명하게 얘기 할 수 있어요. 복잡하게 들리는 것 같겠습니다만,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매일 생생하게 경험 할 수 있는 방법은 따로 없어요. 그거는 그런 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요. 우리 영혼이,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생명의 가장 깊이에서 어떤 ‘힘들’이거든요? 그것이 성령과 공명할 때 되는 건데, 그게 억지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뭐 20일 동안 철야기도 하든지, 성경을 열 번 통독한다든지, 이렇게 해서 되겠어요? 그건 너무 쉬운 거죠, 그 방식으로 되지는 않습니다. 각자 다 다양하게 주어지는 것인데요, 그래서 그런 것에 대해서는 딱 끊어서 이 길이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경험이 있을 때에 어떤 삶의 내용으로 나타나는 가는 얘기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스스로도 그렇게 검증해 보시면 될 겁니다.

 

하나님 경험은 딱 색깔로 칠하거나 모양으로 만들어서 보여 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자기 자신도 어쩌면 모를 수도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 경험, 성령에 대한 경험이 우리 삶에서 어떤 열매로 나타날 수 있는 거죠,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열매가 우리 삶이거든요, 예를 들자면 사랑이나, 기쁨, 해방, 자유, 희락, 평강 등등.. 이런 여러 가지 삶의 요소들이거든요, 그 중에 하나가 제가 오늘 말씀 드리려고 하는 신뢰입니다. 신뢰,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열매를 맺게 되는 거죠, 이게 뭐 너무 공식적인 표현 같습니다만, 그러니까 하나님 경험하고 하나님 신뢰는 같이 맞물려 돌아가는 거예요. 이거는 내 인생이 잘 풀리냐, 풀리지 않냐, 그런 거 하고 상관없이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가 형성됩니다. 그래야만 그게 바로 하나님 경험이 일어났다고 하는 증거인거죠, 이거는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거 같은 신뢰심일거예요. 그러니까 천둥번개가 치는 중에서도 어머니 품안에 안겨 있기만 하다면 아이들은 정말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잖아요, 그건 어머니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 그런 쪽으로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시지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전폭적인 신뢰가 있는가, 조금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생명에 대해서 혹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전폭적인 신뢰가 있느냐 아니냐고 하는 겁니다. 그런 것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경험을 못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오늘 본문에서 시편기자가 정말 신뢰하는 사람이 어떤 거냐고 하는 그런 모범을 보여 줍니다.

 

1절에서 16절까지 우리가 앞서 읽은 내용입니다. 이거는 암기력만 좋으시다면 외우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정말 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의 어떤 영적인 상태를 문학적인 수사를 통해서 아름답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1절을 우선 보시지요, 1절만 봐도 사실은 공부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이렇죠? 1.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이렇게 어떻게 어떻게 사는 자여,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 시편기자 자신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나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고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다, 그런 뜻이죠? 혹은 이렇게 바꿔도 되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고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은 어떻다 말 할 수도 있죠, 그런데 시편기자의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이야기 합니다. 지존자(至尊者)라고 했지요? 한자예요. 가장 높은 자란 뜻입니다. 가장 높은자, 최상급으로 표현 되어 있어요. 가장 높은 분, 지존이니까 가장 존엄 한 분, 그거죠? 바로 하나님을 이야기 하겠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다르게 말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높은 분이라고 얘기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 시편기자는 어떤 사람이냐, 지존자의 은밀(隱密)한 곳에 거주하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전능자의 그늘아래 사는 자라고 했습니다. 전능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 하나님을 다른 방식으로 얘기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이고 지존자예요. 지존자의 은밀한 곳, 은밀한 곳은 비밀한 곳이죠, 그러니까 여기에는 이 세상 사람들이 침범 할 수 없는 곳이죠, 이 세상의 것으로 어떻게 훼손될 수 없는 그러한 곳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통치라고 얘기하면 될까요? 그런 거죠, 은밀한 곳, 그늘진 곳을 보호하는 곳이니까요. 예, 이런 말들이 조금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지존자의 은밀한 곳이라고 하는 게 뭐냐, 너무 막연하다고 하는 거죠, 전능자의 그늘이 뭐냐, 즉, 막연하다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게 막연한 게 아니고 실질적으로 우리의 생각, 우리의 영혼 안에 들어와야 우리가 성서의 세계로 깊이 들어 갈 수 있어요. 우리가 공부하는 게 그런 학습입니다.

 

하여튼 우리들 세상에서도 어떤 철학책이라든지, 역사책, 문학책을 읽으려고 하더라도 그 단어 개념들을 알아야 되는 것처럼요, 성서도 그렇습니다. 이 안에 있는 단어 하나하나가 다 의미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건너뛰면 성서의 깊은 세계를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런 훈련이 안 된 경우에는 이런 것들이 추상적으로 들리는 거예요. 지존자의 은밀한 곳, 전능자의 그늘이라고 하는 것이 막연하게 들리는 거죠, 지존자의 은밀한 곳은 제 강의안에 설명해 놨는데, 생명의 궁극적 비밀을 가리킵니다. 그 표현 자체가 더 추상적일 수 있겠네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뭐냐, 할 때 육체적으로만 해명은 안 되잖아요, 이 인간도 육체와 영혼이 아주 비밀스럽게 결합 되어 있는 거구요, 의학이 아무리 발달 된다고 하더라도 감기 바이러스 하나 극복하지 못하거든요, 예, 인간을 알면 알수록 신비한 구석이 많거든요, 그 가장 신비스러운 생명의 비밀, 그것을 가리켜서 지존자의 은밀한 곳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내가 들어 있다고 하는 거죠, 좀 영적인 표현이죠, 그러나 비현실적인 건 아닌 거예요. 비현실적이지는 아닙니다. 전능자의 그늘이라고 하는 말도 좀 생각해 보시지요, 이 전능자라고 하는 말을 우리 생각 안에 가두면 안 됩니다. 나 보다 조금 더 힘이 센 어떤 분,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분, 이런 정도로 생각하시면 안되고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 넘어서 계신 분, 바로 그게 전능자 하나님이다 라고 하는 거지요. 그런 쪽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전능성이라고 하는 개념을 더 확대시켜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능력이 있다 없다 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무얼 이루는 것을 능력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권투 시합에서도 저 사람이 힘이 있으니까 능력이 있다고 한다거나, 아, 죽을 사람을 살린다거나 병든 사람을 고친다거나 쓰러져 가는 기업을 일으켜 세운다거나, 등등..그런 것들을 우리는 자꾸만 능력이라고 얘기하는데요,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힘, 센 거, 그런 차원이 아니라 그걸 뛰어넘는 힘을 가진 분이 전능자시거든요,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셔야 되요, 우리가 볼 때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에게는 승리일 수 있습니다. 이미 복음서하고 바울서신에도 나온 이야기거든요,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것을 대변하고 있거든요, 십자가가 가장 무기력한 죽음의 자리였었는데, 그게 하나님의 승리의 길이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역설이잖아요, 하나님의 전능성은 바로 그거다, 우리가 이겼다, 하는 차원을 송두리째 뛰어넘는 그러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이런 예가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세 살 쯤 되는 아이하고 장난삼아서 레슬링을 하는데, 져 주잖아요? 어린아이가 아, 내가 이겼다, 이겼다, 얘기를 하지만, 그건 아니잖습니까, 아버지가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하고 노는 거니까, 우리는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것을 자꾸만 내 기준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주시면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거고, 아니면 아니고, 이런 생각을 하루빨리 벗어나야 됩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은 전능하시거든요, 예, 차원이 다른 거죠, 그러한 분, 그러한 지존자, 그런 전능자 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이 시편기자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할 수 밖에 없는 거죠,

 

2절부터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예, 2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여호와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호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 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단어들은 우리가 제법 많이 들었던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자기 신뢰가 어떻다고 하는 것을 2절부터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그 뒤로 쭉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3절에 보면 사냥꾼의 올무에서 건지시고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시고요, 4절에 보면 깃으로 날개로 덮고 피하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대단히 문학적인 상상력이 뛰어나지요? 예, 구약의 이 시편기자들은 영적으로 경지가 높은 사람들이면서 문학적으로도 아주 세련된 그런 사람이예요. 시편만 그런 게 아니죠, 성경의 다른 부분도 그렇습니다. 언어와 신앙의 깊이와도 어느 정도 맞물려 돌아 갈 수 있습니다. 언어라고 하는 것이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신앙을 구체화하고 더 명료화 하는 힘이 있거든요? 이 성서기자들에게는 언어를 다룰 줄 아는 그러한 은사가 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시편 91편 기자가 말하는 영적인 깊이도 참 놀랍지요, 그게 근본이기는 하지요. 그걸 전제하면서도 문학적인 표현도 대단히 뛰어나다고 볼 수 있습니다.

 

5절에 보면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화살, 이런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6절, 어두울 때 전염병과 밝을 때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쭉 3절부터 2절부터도 마찬가지 겠습니다마는 여러 가지 고대인들이 두려워할 만한 단어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 거예요. 그런 두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이 지켜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이 사람이 아주 리얼하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런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두려움이 있죠, 고대인들은 더 심했습니다. 그 일상 생존자체가 위태로왔죠, 지금도 간혹 비행기 사고도 나고 구제역도 나타나고 뭐 등등 예상하지 못한 사고들 많이 있지만, 그것이 더 심각했거든요? 전염병이 돌아서 한 마을이 쑥대밭이 된다거나 혹은 또 전쟁이 일어나면 상대방을 물불 가리지 않고 몰살시키는 그리고 노예로 잡아가고 하기 때문에 지금하고 상황이 훨씬 더 다른 거거든요? 그리고 삶이 주인하고 노예하고 분명히 있었고요, 그러니까 고대인들은 우리가 상상하기 없을 정도로 두려움을 경험했습니다. 이 시편기자도 사실은 그러한 두려움을 벗을 수 없는 상황이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어떻게 그런 두려움을 어떻게 두려움의 조건들이 하루 이틀 사이에 다 없어지겠습니까, 다 다른 사람들 하고 똑 같이 그런 상황 속에서 사는 거예요. 언제 무슨 일을 만날지 모르는 상황이죠, 그래도 이 사람이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 말을 상투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생각하라는 가보다 가 아니라 이 시편기자는 실질적으로 그런 영적인 단계에 들어간 겁니다.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예요. 단 한 가지, 자기에게 두려워할만한 조건들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면 조건은 똑같아요, 예수 믿는다고 하더라고 여전히 다 똑같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는 사람이 그런 두려움 앞에서 대하는 태도, 이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겉으로 보면 작은 것 같죠,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순간적으로 두려워하게 되거든요, 어떻게 안 그러겠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들이 그의 마음에, 그의 영혼에 늘 가득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곧 그 두려움에서 벗어 날수 있는 거지요,

 

그 뒤로 쭉 7절 이하로 그러한 시편기자의 마음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 여기까지만 봐도 오늘 공부는 다 된 거예요. 91편이 이야기 하려고 하는 기본적인 가르침을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게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일 텐데요,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이 성경본문 앞에서 솔직하게 서 보자 그런 뜻으로 드리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이 그 앞에서 솔직해 지면서, 그러면서 그 깊이를 또 찾아내야 되고, 참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고 하는 것은 외줄타기라고 할까요, 어떤 영적인 그 긴장감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 것 없이 하나님 잘 믿으라는 가보구나 그런 정도로 생각하면 이 세계로 들어가기 힘듭니다. 이런 질문이예요. 여호와께서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를 완벽하게 정말 지켜주시나, 하는 겁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그런 것처럼 쭉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두려워할만한 재앙들이 우리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만 피해 가는가,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우리함께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추락했는데, 예수 믿는 사람만 살고 다른 사람은 다 죽는가, 이건 그렇지 않다고 하는 건 여러분들이 아시겠구요, 당연한 거구요, 상식적인 거구요, 그리스도인들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을 많이 당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재앙, 이러한 상황들이 우리 삶을 파괴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입니다. 왜 그래요? 오늘 1절에 본 것처럼 우리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고 아까 제가 설명 드렸듯이 전능자가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그런 전능자의 그늘아래 우리가 살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을 그 어떤 것도 파멸시키지 못한다는 그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인식하라고 해서 인식되지는 않습니다. 다른 것들이 너무 크기 때문에 당장 내가 해야 될 문제들, 풀어야 될 것들이, 그것이 내 영혼을 밀물처럼 뒤덮어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지존자의 은밀한 곳, 전능자의 그늘, 생명의 비밀, 이런 것들은 사실적으로 다가오기 힘든 거예요. 거기서 인제 우리 영성의 어떤 긴장감이 있냐, 없냐 그런 것을 좀 알 수 있겠지요. 분명한 겁니다. 그건 성서가 누누이 이야기하는 거고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부분인데요, 여러분 그 어떤 것도요, 지금 당장 제가 건강진단을 받았는데, 뭐 대장암이다, 그래서 6개월 사형선고 받았다, 그런 일들이 충격적이겠지요, 그러나 그것도 우리의 생명을 완전히 파멸시키지 못합니다. 그 생명의 신비를 우리가 좀 알아야 되거든요, 그런데 이 말이 실제로는 우리가 파멸되는데, 심리적으로 안정감 얻기 위해서 자기합리화 하는 것,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생명의 근거를 우리가 전혀 새로운 데 두고 있다고 하는 거지요. 그 강의안 마지막 부분에 썼습니다. 이 시편기자의 신뢰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자기합리화, 종교적인 자기만족, 결코 아닙니다. 생명의 근거를 우리가 전혀 새로운 데 두고 있다고 하는 거죠, 이 시편 기자의 신뢰,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자기합리와 종교적인 자기만족, 결코 아닙니다. 그건 이제 사이비 이단들이 하는 거예요. 이거는 그의 영적인 시각에서 또렷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예, 이런 신뢰에서만 여러분, 우리 영혼은 구원받습니다. 그 때만 우리 영혼이 평안할 수 있어요. 이런 신뢰가 없으면 매일 일희일비한다고 할까, 계속 파도에 요동치는 나뭇잎처럼 그렇게 살게 되지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에서만 우리의 영혼은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 몸은 죽고 우리 영혼만 구원받느냐, 이런 이원론적인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은 우리 삶 전체를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우리가 미래에 얻게 될 우리가 어떤 형체로 돌아갈지는 우리가 아직은 신비로운 세계이기 때문에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의 전체인격, 전체 우리의 인격성, 이런 것들을 포함 한 것을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라고 얘기 하는데요, 영원히 구원받습니다. 더 높은 생명의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이러한 세계로 우리가 하루하루 더 깊이 들어가야 되겠지요. 오늘 91편의 전체제목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신뢰가 우리 일상을 다 담아 낼 수 있도록 신앙적인 훈련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하고요, 잠시 쉬었다가 질문응답 받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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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6편 녹취록 - 여호와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김현혁 2009-04-05 1604
1 1편 녹취록 - 복되어라 김현혁 2009-04-05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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