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93편 녹취록-하나님의 권능

조회 수 1805 추천 수 0 2010.08.30 21:49:49

시편 93편 강해-하나님의 권능

 

시편 93편, 아주 짧은 시편입니다. 5편까지 밖에 없습니다. 기도하는 자세로 함께 읽겠습니다.

 

1.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2.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3.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4.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5.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 무궁하시리이다

 

아멘!

하나님이 존재하시나, 하는 그런 질문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좀 불경한 것처럼 들립니다. 이건 당연히 우리가 믿고 또 나름으로 경험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러나 다 따지고 들면, 그런 질문이 꼭 필요합니다. 성서도 물론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의 확실성 그런 것들을 얘기 하지만, 그렇게 고백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혹시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그런 불안감, 그런 회의 그런 것들이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보통 많이 얘기하구요. 믿는다고 말을 하는데,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경험하지는 못하지 않습니까, 직접 보이는 것도 아니고 들리는 것도 아니고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런 걸 여러분들이 어떻게 아시나요? 어떤 확신을 갖고 있나요? 보통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아, 내가 죄를 깨닫게 되었다, 죄인의 괴수를 깨닫게 하는 것 보니까 성령이 계시고, 성령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니까 하나님이 존재하는 거 아니냐 그렇게 말 할 수도 있고요. 또 어떤 사람들은 기도했더니 응답이 되었더라, 여러 가지 사업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기도했더니 사업이 잘 풀렸고, 또 큰 병에 걸렸었는데, 기도했더니 응답이 되었더라, 그런 걸 하나님이 계시다, 확신 한다 그렇게 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소박한 믿음이 잘 못 된 건 아니예요. 옳기는 한데 절대적인 건 되지 못합니다. 사업이 안 됬다고 되는 거는요, 기도 안 해도 그렇게 될 수도 있고요, 제가 기도무용론을 말씀하는 게 아니라고는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전제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병이 낫는 것도 보통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제 그런 것만 가지고 하나님 계시다, 안 계시다 말하는 거로는 충분하지 않은 거죠, 하여튼 이러한 문제들이 우리들에게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근본적인 질문을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하죠, 그 근본에 대해선 생각을 미뤄두고 그냥 쉽게 순전한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한 소박한 믿음은 아름다운 거예요. 모든 일이 일일이 다 시시콜콜하게, 아니면 모든 것들을 다 확실하게 확증해서 믿음생활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들은 미뤄두면서 앞으로 나갈 필요가 있긴 합니다, 그래도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가 늘 맞대결하는 좋은 뜻으로요, 그런 자세는 놓지 말아야 되겠지요.

 

오늘 여기 시편기자들은 하나님이 보이지도 않고 붙잡히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눈 앞에서 목도한 것처럼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걸 읽을 때마다 정말 그렇게 보이나, 생각하시면 곤란한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직까지 성서에 확실하게 언급 되어 있다하더라도 직접적으로 드러나시지는 않았어요. 그게 참 어려운 문제예요. 그리고 우리가 직접적으로 전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 분이 확실하다고 하는 인식과 믿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 이게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게 이제 여기서 긴장감, 균형감을 놓치게 되면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완전히 열광주의적으로 완전히 빠지던지 아니면 기독교 신앙을 우스운 것으로, 냉소적으로 생각하든지 뭐 그럴 겁니다. (밑에서 전자기타소리 좀 들리지요? 연습한답니다. 내일 발표회가 있다고 연습한다고요, 음악이 들리더라도 이해하시고, 공부하도록 합시다.) 예, 여기 시편기자들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러나 눈으로 보고 하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에 가서야 다 드러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우리가 부분적으로만 이해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부분이 정말 분명하다고 하는 것, 이러한 신앙 안으로 들어가야 되는 거지요. 그게 좀 어렵습니다. 어떻게 전체가 아니고 부분적이고 직접적이 아니고 간접적인 것만 붙잡고 어떻게 확실한 믿음으로 들어 가냐, 더, 더 분명한 게 필요하다, 보여주십시오. 보여주십시오. 그렇게 매달릴 수도 있는데, 그게 기독교 신앙은 아닙니다.

 

예, 마지막에 드러나게 될 그 분이 지금 부분적으로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 그걸 계시라고 하는데, 그것을 우리가 눈여겨보고 이해하려고 노력을 해야 되겠지요. 그래서 아직 종말이 오기 전에 사는 우리들은 역사 안에서 우리 모든 인식의 잠정적인 것을 전제하고요,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죠? 뭐를 이해하는 것, 생각하는 것, 지성, 이성 이런 것들이 모두 잠정적입니다. 우리는 지금 완전하게 아는 것은 사실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오늘 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전제하면서 성서가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을 가능한대로 바르고 정확하게 알아 가는 것이 하나님 경험에서 최선입니다. 제가 자주 예를 들 듯이 바둑에서 수 하나하나 공부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바둑의 도 안으로 들어가듯이 그러한 공부가 최선입니다. 오늘 시편 93편은 그 하나님의 속성을, 속성이라는 말은 성격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고요. 하나님의 특성이라고도 할 수 도 있고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 밖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말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게 딱 마음에 와 닿을 수도 있고, 사실 뭐가 뭔지 거리가 약간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조금 멀리 흐릿하게 들려도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천천히 나가봅시다.

 

우리가 성서가 이야기하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한다고 하는 것이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예, 그 속성을 알아가는 것이 최선인데요, 오늘 시편 93편은 그 속성을 ‘권능’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다른 걸로 얘기해 보세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말씀 드리면 얘기할 게 많죠? 인자하심, 긍휼, 사랑, 정의로움,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의 속성들입니다. 조금 더 나갈수록 무소불위, 전지전능,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에 대한 성격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로 다 하나님을 이야기 한다고 말 할 수가 없는 거죠. 그건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경험을 성서기자들이 그 방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이야기 한 대로 우리는 지금 거울로 보는 것처럼 그렇게 진리를 경험하고 있으니까요.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왜 나는 믿음이 확실한 게 없을까, 그런 것 때문에 불안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당연한 겁니다. 자연스러운 겁니다. 무엇을 완전히 뭣을 잡은 것처럼 이야기 하는 사람은 그럼 거짓말 하는 거예요. 바울도 그런 얘기 하지 않습니까, 내가 잡은 게 아니다, 내가 달려가고 있다. 그런 자세로 가는 거죠, 구도라고 할까, 진리를 향한 길을 가는, 그런 겁니다. 하여튼 제가 여태까지 이해한 기독교와 성서와 신학세계, 이런 관점에서 놓고 볼 때 이런 공부가 최선이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말이죠, 그렇습니다. 권능이라고 하는 관점으로 이야기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권능이 뭐냐 라고 하는 거죠, 많이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다 한다, 무소불위하다,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겠는데,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이 다 그렇게 하는 것 같지는 않잖아요? 이상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여기서 어떻게 하나님의 전능성이 나타나지 않는 것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전능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가, 하는 거죠,

 

하여튼 그러한 전체적인 관점을 가지고 오늘 이 말씀을 보겠습니다. 길지 않지요? 5줄 밖에 안 되기 때문에 한 절 한 절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통치로부터 이 시를 쓰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하나님의 통치예요. 이 통치, 다스린다는 말을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다스림이예요. 그 통치예요. 그 어떤 공간적인 차원으로 하늘, 바닷 속,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스림이다, 그러니까 그 다스리는 분으로 하나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권위와 능력의 옷을 입으셨다 띠를 띠셨으므로 하나의 문학적인 표현이네요. 능력의 옷, 그리고 띠를 띠었다, 권능과 옷을 입고 띠를 띠었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가 견고해서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계는 견고히 서 있어서 흔들리지 않는구나,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흔들리지 않을까요? 그건 여호와의 권능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이게 뻔한 대답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대인들은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몰랐습니다. 얼마나 신비로왔겠어요. 그것을 어떻게 바꿔 보면 좋을까요? 아주 어린아이들, 두 서 너살 되는 아이들이 밤에 하늘을 볼 때 그 아이들이 어떤 느낌을 갖게 되는가, 한 번 바꿔서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황홀하지 않겠어요, 전혀 그런 우주에 대한 인식이 없는 아이들이 그걸 보았을 때 말입니다. 사실은 서너 살 아이들만이 아니라 우주 물리학에 대해서 조금 안다고 하는 어른들도 사실은 생각이 다 거기에까지 미치면, 아득하다, 아, 도대체 이게 뭐냐 하는 그러한 놀라움, 그런 것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고대인들은 그런 걸 전혀 몰랐어요. 바다에서 배를 타고가다 더 나가면 폭포처럼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계 전체가 그들에겐 두려움이었지요. 세계 전체가 오늘 여기서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사실은 흔들렸습니다. 지진 같은 것을 경험 했을 때 그들이 얼마나 두려워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건 지금도 두려운 문제인데 그래도 지금 지질학적으로 어느 정도 분석이 되고 있잖아요? 이 고대인들이 어떠했겠어요, 화산폭발, 홍수 이런 것들 앞에서 그들이 어떤 두려움을 느꼈을지는 뭐,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그 자연을 절대적인 능력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걸 섬긴 거예요. 거의 모든 고대 종교는 태양을 섬겼습니다. 잉카문명도 그렇구요. 이집트도 그렇고, 로마도 그렇고 다 태양신입니다. 태양이 절대적인 능력이 있다고 한 거지요. 그럴 수 밖에 없지요. 보세요. 태양이 뜨기만 하면 밤에 있던 조그만 별들이 싸그리 없어지고요. 태양이 또 지면 모든 게 나타나고 정말 옛날 사람들 눈에는 이 하늘이 요술, 뭐라고 할까요? 요술가방처럼 느껴졌을까요? 그랬을 겁니다. 거기에 이제 태양은 완전히 발군(拔群)이라고 할까? 모든 것의 왕과 같은 거죠, 고대인들에게 그렇게 보였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 걸 우리가 않잖아요? 태양도 그렇게 큰 별이 아닙니다. 우주의 아주 평범한 별의 하나예요. 이것도 결국은 없어질거구요.

 

어쨌든 고대인들에게 그런 것이 아주 특별하게 보여서 다 태양을 섬기고 자연을 숭배하고 그랬습니다. 이것에 반해서 성서기자들은 그 자연이 두려운 대상이긴 했지만,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게 특징인거죠, 그러니까 창세기,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다, 창조했다고 하는 그 말씀은 다른 고대종교들하고 달리,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탈주술화라고 할까요? 고대인들이 자연, 나무에도 신이 있고, 그런 것에서 벗어나는 거죠, 성서기자들은 자연의 힘이 아무리 막강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걸 다스린다, 다스리는 분이 있다, 그 다스리는 힘이 바로 이게 바로 여호와의 권능이다, 생각했습니다. 그게 가장 우월한 능력이죠, 1절에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실은 세계가 흔들려요, 그래도 흔들리지 않는다, 지나가게 되면 하나님이 그걸 다스린다, 통치하신다는 겁니다.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큰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거는 우리가 좀 큐티식으로 조금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읽으시면서 좀 신앙적인 도움을 받아야 되기 때문에요, 우리의 인생살이에도 흔들림이 많잖아요? 지진이나 화산폭발 같은 거 두려움이 있잖아요? 사람들이 그런 거 벗어나려고 용을 쓰고 있잖습니까, 사실 기독교인들은 사실 그렇게는 하지 말아야 되죠. 두려움의 대상이긴 한데, 사업이 망하거나 부도난다거나 이런 저런 많은 문제도요, 흔들리는 것들, 세계가 흔들리듯이 우리 삶이 흔들릴 때가 있는데, 내 삶도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하는 그런 믿음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아닌 걸 억지로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실질적인 사실이기 때문에요. 우리의 삶이 흔들리지 않는다, 견고하다, 왜요, 권능의 여호와께서 다스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절에 보좌라는 말이 나오죠? 권능을 더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이 보좌는 군대에 군주들이 앉는 자리이란 말이예요. 고대인들은 최상급의 권위있는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군주자리를 여기 성서기자가 말한 겁니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견고하다는 말이 반복되고 있네요. 견고히 섰으며 그리고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 두 개가 연결 되어야지요. 토대가 견고하다고 하는 거하고 영원하다고 하는 문제가 서로 연결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권능이 있으시니까 그거는 곧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 그렇게 우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권능이 있는 자만이 영원한 존재다, 사람을 비롯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영원하지 않지요. 영원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짧지요. 우리가 한 순간에 끝나 버리는 삶 아니겠습니까, 뭐 오래 생명을 유지한다고 하는 나무들도 언젠가는 그렇게 다 없어지니까요.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피조물들에게는 권능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만 영원하다, 권능 있다, 그런 말을 붙일 수 있는 거죠. 하나님은 영원하다고 하셨는데, 그 영원하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저는 여기에 대한 대답을 지금 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한 두 마디로 해결 되는 게 아니니까요. 우리는 무조건 계속 되는 거 그런 걸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걸 근본적으로 뛰어 넘으셔야 될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건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시간들, 2010년 몇 월 몇 일, 그 다음 2011년, 이렇게 가는 이런 시간 하고는 다른 차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을 연대기라고 하거든요? 몇 년 몇 년, 태양력에 따라서 계산해 나가는 것, 과거, 현재, 미래 쭉 이렇게 가는 것 말이지요. 하나님이 영원하다고 할 때 그런 시간들이 쭉 계속 간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을 너머에 계시다고 하는 뜻입니다. 시간의 초월성을 영원이라고 하는 거지요. 그러면 어떻게 초월하시냐, 아, 그것은 제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문제지요. 우리가 이런 걸 조금이라도 따라가려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계산 될 수 있는 것,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 이런 시간이해를 넘어서야 합니다. 예, 거기까지만 하지요.

 

3절 이렇습니다. 3.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큰 물이라는 단어가 연속되요, 큰 물이라는 말이 있고요. 그러니까 홍수와 같은 그런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이 높아진 격랑이라고 할까요, 이제 이러한 상태인데요. 시편기자가 이러한 말을 쓰는 것은 바벨론에 있었던 어떤 신화와 연결된 거라고 합니다. 학자들의 설명이예요. 태고적에 있었던 혼돈의 세력을 격파하는 신들의 투쟁에 관한 신화적 개념에서 빌려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바벨론의 마르둑의 승리에 관한 신화라고 해요. 자세한 이야기는 우리가 알 필요가 없습니다. 참고적으로 제가 말씀 드리는 거예요. 이 3절,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이러한 표현들이 주변에, 근동지방에 다른 문명에서 이야기 되던 하나의 신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겁니다. 그런 것에서 여러분들이 조금 불편하게 생각이 되나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구약성서가 바벨론과 이집트 문명의 틈바구니에서 기록됬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니까요. 이건 인정한다 아니다 차원을 떠난 겁니다. 아주 객관적인 사실이니까요. 그러니까 바벨론의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됩니다. 그래야 더 건강한 거예요. 그러니까 기독교가 순수하게 본질적인 것만, 우리 것만 가지고 지내오지 않았습니다. 그랬으면 자폐증이 걸리는 거지요. 신앙적으로도 주변세계와 끊임없이 대화를 했습니다. 구약성서만이 아니라 신약성서도 그렇고 이후에 기독교신앙 자체가 그랬습니다. 진리의 차원에서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자기의 기독교의 정체성을 풍요롭게 해 나간거죠. 그러니까 그런 신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에서 걱정하지 말자고 하는 겁니다. 신화라고 하는 말 때문에 또 오해할 수 있는데요. 아마 제가 다른 때도 한 번 말씀 드렸을 겁니다. 이 신화라고 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이 볼 때 조금 유치해 보이지 고대사회에서 그것이 합리적인 사고방식이었어요. 그게 과학이었습니다. 그게 세계를 해명하는 세계관이었어요. 세계관,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어떤 물리학 생물학 지질학 이런 것들도 하나의 세계관이잖아요. 세계를 해명하는 방식이란 말입니다. 이거와 비슷한 거였어요.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신화적인 세계관은 좀 미숙한 거다 그렇게 말할 뿐이지 성서가 기록될 때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엄정한 사실이었다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이 좀 더 필요한데 하지 않겠습니다. 그 자연이 얼마나 그렇게 요동하냐 하는 것을 3절에서 말한 거구요.

 

4절에, 이제 시편기자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나오죠.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바로 3절에서 이야기한 많은 물소리와 바다의 파도보다 크다 고 하는 거지요. 이게 시편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그 신화의 개념으로 영향 받은 내용에 있는 그러한 그 신화를 차용하면서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이 이거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물의 능력, 뭐 이런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 거지요. 여호와는 높이 계신 분이라고 했지요? 물은 낮은 곳이니까 이게 대비됩니다. 하나님은 높이 계신 분, 물은 낮은 곳, 낮은 곳에서 물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지만 높이 계신 분을 당하질 못하죠. 여기서도 높이 계시다고 하는 말을 너무 공간적으로만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우주 공간에 어느 높이에 계신 분은 아니예요. 하나님은 이곳저곳의 한정되 계신 분이 아니라 세계 전체입니다. 세계전체, 이 세계는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 전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시간과 공간, 모든 것을 전체 통틀어서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이예요. 시간과 공간 모든 것을 통틀은, 그렇게 되면 앞서 우리가 생각 하는 대로 2010, 2011년, 이런 계산이 무의미해지는 그러한 세계전체인 거죠. 거기서는 오른쪽과 왼쪽도 없고, 높이와 깊이도 없습니다. 그건 전체니까요. 그 여호와의 능력이 크다, 이야기하잖아요, 크다, 지금 이 여호와의 능력이 그런 모든 물보다 크다고 할 때 그 증거가 무엇일까요? 이 세상 일들이 너무 두려우니까 하나님이 정말 그것을 다 다스려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간절한 희망사항일까요? 아니면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걸까요?

 

5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증거들이 확실하다, 여호와가 주님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확실하다, 여호와의 권능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크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무엇보다도 확실하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기자가 지금 무얼 보고 그런 이야기를 할까요? 무얼, 그럼 어떻게 하는 걸까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두 손 벌리고 오, 하나님 크시도다, 그렇게 찬양 부르면 그게 그냥 저절로 믿어지는 것일까요? 억지로 믿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서도 공부 처음 시작할 때 말한 긴장, 딜레마가 연결되고 있어요. 이 증거라고 하는 것도 실증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종이컵처럼요, 이렇게 만져가지고 확인 할 수 있는, 종이컵은 동그랗고 촉감이 어떻고 이렇게 실증으로써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권능, 이런 것들이 실증적이라고 한다면 믿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보지 않고 등만 봤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절대성, 통치, 권능 이건 사람이 실증적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시시해지는 거예요. 이러한 실증적이진 않지만 부분적이고 간접적인 증거지만, 거기서 확실성을 획득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신앙이 영적인 시각이 필요한 거죠, 어떤 비약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어떤 부분에서는요, 어떤 부분에서 결단이 필요하기도 하고 어떤 것을 뚫어 볼 수 있는 직관력도 필요하고 그렇습니다. 이게 그냥 합리적인 증명으로써만 가능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이, 그럼 성서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늘 애매모호하구나,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고, 그럼 뭐 대단한 게 아니네, 그렇게 생각하시면 조금 곤란합니다. 참고적으로 말씀드리면 자연과학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게 엄밀하게 객관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추론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어떤 무엇을, 과학자들이 발견하는 거, 있잖습니까? 그런 것들도 처음부터 있기 때문에 발견한 게 아니라 그 쪽으로 추론하는 거예요. 붙잡힌 게 아니예요. 그 쪽으로 실험하면서 점점 나타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자연과학하고 정신과학하고 사실 이걸 너무 구분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실은 방법이 다른 거지 근본에서는 비슷합니다.

 

그래도 이 시편기자가 증거들이 확실하다고 이야기 했으니까 그게 뭔가, 우리가 좀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냥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세요. 무엇을 보고, 아니면 무엇을 생각하고 이 시편기자가 주의 권능이 확실하다는 증거, 이게 분명하다, 매우 확실하다 그렇게 이야기 했을까요? 제가 그것을 다 따라가기는 힘듭니다. 제가 뭐 시편기자의 영성보다 훨씬 미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다 설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제 수준에서 이렇게 설명할 수는 있어요. 큰 자연재해가 휩쓸고 지나가잖아요, 지진도 일어나고, 일식도 일어나고요, 정말 충격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걸 경험하고 쓴 거예요. 시편기자들은 삶이 굉장히 위태롭다고 느끼고 흔들린다고 느끼고 쓴 거지 그냥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서 만사 좋다, 이렇게 쓴 건 아닙니다. 그러한 자연재해, 전쟁, 전염병 그러한 숱한 그러한 우리의 생존의 위기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그런데 지나가면 다시 생명의 토대가 잡히는 걸 보았거든요, 다시 살 수 없을 정도로 홍수가 전체를 밀고 나갔지만, 그래도 다시 새싹이 돋잖아요? 그게 놀라운 거죠. 여러분 개인적으로 그런 경험을 해 보신 적은 없어요? 이건 절망이다. 아이구 이거는 삶이 끝났다, 이래가지고 내가 어떻게 앞으로 사나, 했다가도 우리의 영혼 속에서 희망의 싹이 조금 씩 조금 씩 싹트잖아요, 그게 인제 신앙이 깊은 사람은 빨리 트는 거구요. 그러한 관점으로 보면 이 시편기자가 한 말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토대구나, 아무리 자연재해가 엄청나고 파괴적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일시적이지 그것으로 하나님의 권능에 도전이 안되는구나 하는 증거를 거기서 찾은 거지요. 그것 말고 다른 것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의 눈에는 증거들이 확실하게 보이는 거예요. 이게 이제 영성의 차이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들은 아이쿠, 신앙 그거는 그냥 취미정도지 여성들이 다는 악세서리 정도고, 있으면 좋고 없어도 없을 수 없지만, 있으면 좋은 종교적으로 우리를 꾸밀 수 거지, 그렇게만 생각하고 온통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그러한 가치관에서 살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건 이제 그것 밖에 안 보여서 그렇습니다. 이제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은 뭐가 옳고, 뭐가 중요하고 아니고, 어떤 것이 내 삶의 본질적이 아니냐 이게 이제 눈에 들어오는 거지요. 그게 늘 우리들에게 깨어있는 영성으로 다 자리를 잡으면 좋은데 늘 흔들리고 힘들어지죠?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말씀을 늘 묵상하는 태도는 필요합니다. 억지로라도, 바리새인처럼 율법주의는 아니지만, 그러나 자기를 성찰한다는 차원에서라도 매일 성경을 어떻게 읽고 이렇게 정기적으로 성경공부 하는 모임에도 기회가 되는대로 참여하고 이러한 훈련들이 사실 필요합니다. 이제 말씀을 우리가 다 봤는데 정리를 좀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핵심은 이거예요. 하나님만이 권능이 있는 분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분만이 이 세계를 다스리는 분인거지요. 그걸 우리가 믿는다면 이 세계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예, 이것을 거꾸로 이야기하면 그러한 생명과 세계를 다스리는 권능이 있는 그 어떤 분, 어떤 존재, 어떤 힘, 바로 그 분이 여호와 하나님, 그 분이 우리들에게 언제 확연하게 다 자신을 드러내실까요? 그 때를 우리는 종말이라고 합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비록 부분적이지만,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다, 라는 것을 잘 배워야 되고요, 알아가야 됩니다. 그러한 우리의 배움과 깨우침에서 우리는 모든 생명의 토대이신 하나님에게 우리 삶 전체를 맡기고 담대하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그게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잠시 차를 마시고 질문하겠습니다.


profile

[레벨:38]클라라

2010.08.30 22:15:28
*.209.173.60

어제 수련회 다녀오니 어느 분께서 쪽지를 보내 오셨네요.

어느 사이트에서 이 시편녹취 소개 받고 요즘 큰 도움 받고 있는데, 

근데.. 많이 바쁘시냐꼬.. 왜 92편에서 멈추셨냐고요.^^

애공.. 부끄버라..저도 시편녹취 무지무지 자랑하고 다녀싸면서 이렇네요..^^

언릉언릉 올려 드리겠다, 약속드렸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 죄송한 마음 드립니다.

[레벨:2]모돌

2010.08.31 20:35:44
*.150.201.4

라라님~^^

올려 주셨군요~

정말 정말 큰 은혜 받고 있답니다...

 

녹취하시느라 많이 수고하시구요..

좋은 자료 너무 감사합니다.

 

정목사님의 깊은 신학적 통찰도 존경스럽구요...

해석도 너무 가슴에 와 닿는답니다.^^

이거구나! 하면서 감격과 함께 눈물을 흘릴 때도 있네요~

 

하늘의 평강이...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27 23편 녹취록 - 여호와는 나의 목자 file [2] 김현혁 2009-04-29 1904
26 50편녹취록 -자기열정과 참된 하나님 신앙 file [2] 박은옥 2009-04-28 1828
25 105편 녹취록- 구원의 주체이신 여호와 file [1] 박은옥 2011-01-10 1326
24 104편 녹취록- 신앙의 두 중심축, 찬양과 기쁨 file 박은옥 2010-11-15 1042
23 27(2)편 녹취록-하나님의 얼굴 file 박은옥 2010-11-01 1026
22 27(1)편 녹취록 -믿음의 용기 file 박은옥 2010-11-01 1067
21 26편 녹취록-무죄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10-25 875
20 25편 녹취록- 하나님의 길 file [2] 박은옥 2010-10-25 831
19 24편 녹취록-영광의 왕, 만군의 여호와 file 박은옥 2010-10-01 1225
18 103편 녹취록-여호와를 송축하라! file 박은옥 2010-09-25 1149
17 102편 녹취록-탄원과 찬양 file 박은옥 2010-09-25 1311
16 101편 녹취록-제관식 선포문 file 박은옥 2010-09-25 1441
15 100편 녹취록-선하신 하나님 file [4] 박은옥 2010-09-23 1307
14 99편 녹취록-거룩하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995
13 98편 녹취록-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file 박은옥 2010-09-23 1105
12 97편 녹취록-의로우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075
11 96편 녹취록-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 file 박은옥 2010-09-23 927
10 95편 녹취록-완악한 마음 file [3] 박은옥 2010-09-23 983
9 94편 녹취록-복수하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8-31 1546
» 93편 녹취록-하나님의 권능 file [2] 박은옥 2010-08-30 180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