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94편 녹취록-복수하시는 하나님

조회 수 1587 추천 수 0 2010.08.31 23:52:26

시편 94편 강해-복수하시는 하나님

 

시편 94편입니다. 1절에서 23절까지 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 같은 목소리로 1절부터 끝까지 한번 읽겠습니다.

 

1.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2.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3.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4.그들이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자만하나이다

5.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백성을 짓밟으며 주의 소유를 곤고하게 하며

6.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들을 살해하며

7.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8.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9.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10.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

11.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12.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13.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14.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15.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

16.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행악자들을 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악행하는 자들을 칠까

17.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18.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19.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20.율례를 빙자하고 재난을 꾸미는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어울리리이까

21.그들이 모여 의인의 영혼을 치려 하며 무죄한 자를 정죄하여 피를 흘리려 하나

22.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23.그들의 죄악을 그들에게로 되돌리시며 그들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끊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그들을 끊으시리로다

 

아멘! 예, 다른 시편보다 조금 길긴 합니다. 예, 오늘 시편 94편, 우리가 같이 읽었는데요, 첫 번 구절부터 아주 충격적인 그런 말이 나옵니다. 그런 걸 느끼셨죠? 이렇게 시작하지요.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얘기합니다. 참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복수하실까, 하는 거지요. 아주 인간적인 표현이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그런 생각들이 많이 있잖아요? 뭐 크고 작은 복수들 말이지요, 당했으면 그만큼 갚아주겠다고 하는, 그런 것들이 다 복수예요. 예를 들자면, ‘테러와의 전쟁’이렇게 하더라도 결국은 그 밑바닥에는 복수입니다. ‘테러와의 전쟁’은 전쟁해서 해결 될 문제는 아니거든요, 뭐, 범죄와의 전쟁 이야기하는데, 그 범죄와의 전쟁 한 두 번 합니까, 그렇게 해서 범죄가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조금 옆으로 나가기도 하지만, 관련된 이야기로 그 사형제도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거든요, 흉악범은 아예 생명을 끊는 게 낫다 라는 생각이 사형제도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범죄가 줄어 들 거라고 하는 그러한 판단에서 하는 거지요. 지금은 왠만한 문명 국가에서는 사형제도가 다 사라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실제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구요. 여기에는 윤리적으로도 논란거리가 많이 있겠습니까마는 흉악범을 사형시킨다고 하는 것도 그 밑바닥에는 범죄를 줄이겠다고 하는 마음도 있지만 분노, 복수심, 그런 것들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니까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적개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복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붙일 수 있느냐 하는 거지요. 이 복수의 하나님, 분명히 이 본문에 나오니까 우리가 부정할 수는 없는데요, 이게 사랑의 하나님, 혹은 긍휼의 하나님하고 서로 충돌하지요. 하나님의 뜻을 잘 따르는 사람만 사랑하신다면 사랑이 아니지 않습니까, 탕자의 비유에 보면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이다, 그렇게 비유적으로 나오는 이야기인데, 탕자가 그렇게 잘못했으니까 벌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잖아요? 형은 벌을 줘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것을 용납 못한 거지요. 그런 것을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하는 거예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어떤 법전에 나오는 이야기들이고, 구약성서에도 그런 흔적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긍휼, 그것도 신약으로 본다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말도 있는데요, 원수를 복수해달라고 하는 이 말을 이게 붙을 수 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을 때 좀 깊이 생각해야 할 대목이 그겁니다. 성경이 그렇게 표현되어 있다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좀 곤란한 거예요. 하나님을 사람들은 다 알지 못합니다.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는 거거든요? 그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나름으로 표현하는 거기 때문에 그 부분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다 이야기 한다고 생각하면 좀 곤란한 거예요. 그런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이 있어도 이걸 전체 하나님에 대한 생각하고 연관해서 그것을 받아 드려야지 옳거니 그걸 복수해야 된다, 당했으면 갚아야 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참, 곤란한 거지요. 그래서 또 하나의 관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다 모른다고 하는 부분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의미도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계속 나타나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종말에 가서야 하나님을 다 알 수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일부분인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복수하시는 분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그 당시 시인이 처했던 형편에서 일부인 거지요. 이제 그게 시간이 지나오면서 그리고 신약으로 넘어 오면서 오늘 현대에 오고 종말이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전체 모습하고 어떤 연관이 있느냐 그런 것들을 차근차근히 생각해야 됩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려고 했던 핵심을 제가 놓쳐 버렸는데요, 전달이 잘 안되서 그렇습니다. 이거예요. 예를 들어 설명해야 되겠군요. 물리학이 있잖습니까, 과학적인 발견이잖아요? 쭉 오고 있어요. 뭐, 뉴튼의 기계적역학 또, 양자역학도 오고요. 계속 지금 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뉴튼이 있을 때까지는 이 세계가 어떤 시계 안에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듯이 기계적으로 잘 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 물리의 세계를 들어낸 것이 아니예요. 일부예요. 이게 양자역학으로 오게 되면 우리가 그 세계를 실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실험을 해서 똑같은 것이 반복되어야만 진리로, 사실로 자리를 잡지 않습니까, 그런데 양자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실험이 불가능하고 똑 같은 결과가 안 나온다는 겁니다. 빛을 쏘아서 어떤 반응이 나오냐 그런 걸 찾아야 하는데 빛이 들어가면 그게 다 바뀌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겁니다. 별로 중요한 말씀이 아닌 걸 제가 드리긴 한 겁니다만, 그러니까 그 물리의 세계, 과학의 세계도, 계속 드러나고 있잖아요, 앞으로 천년 이천년 후에 어떻게 드러날까요?

 

그런 것처럼 하나님도 다 완전히 드러난 게 아니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해서 우리 기독교에 대적하는 사람들과 싸워야 된다고 얘기하면 정말 그것은 고대시대의 어떤 전투적인 가치관으로 살았던 사람들로 돌아가는 거지요. 어린아이였을 때는 동네 꼬마들이 싸우잖아요, 조그만 것 가지고도, 구슬놀이하거나 공기놀이 하면서도 싸우잖습니까, 그 방식으로 우리가 돌아가는 거지요. 이제 어른이 되면 그런 거 버리고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야 되는 것처럼 오늘 성서 안에서 몇 구절을 놓고 그것이 하나님 자체인 것처럼 오해 하지 말자, 그 얘기입니다. 이’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당혹스러운 표현을 우리는 이렇게 이해를 하셔야 되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소극적인 표현이예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양쪽으로 있습니다. 하나는 Positive 한 게 있고 Negative 한 게 있거든요? 그런데 이건 서로 역설적인 거예요. 그러니까 포지티브한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정의롭다, 그런 것들이고 네가티브한 것은 어때요? 심판하신다, 두려운 분이다, 우리는 그 분 앞에서 놀란다, 이러한 쪽으로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밖에 절대적인 존재를 표현할 수 밖 에 없어서 성서기자들이 그렇게 이야기 한 거예요. 그런 표현들을 가지고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똑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면 좀 곤란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소극적인 표현입니다. 이 시편기자가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소극적인, 혹은 부정적인, 이건 네가티브 니까요. 이건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라는 양쪽 다 의미가 되는데, 그 표현을 통해서 말하려고 했던 하나님의 속성이 뭘까, 몇 가지만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첫 번째는 심판이죠, 심판, 2절에 그렇게 나옵니다.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라고 합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을 세상의 심판주로 말합니다. 신약성서도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때에 대 심판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마지막 때에 심판자, 그러니까 구약과 신약에 전체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의 한 가지인 거예요. 심판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게 그렇지, 그렇지 쉽게 생각하실 수 있을 텐데요, 이게 그런 건 아닙니다. 성서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그게 간단하게 나온 게 아니예요. 어떤 사람이 그냥 기도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이 이런 분이다 그렇게 나온 게 아니라 세계와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 말씀 참고적으로 드리고 싶은 것은 신앙은 세계관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그렇습니다.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하는 관점의 차이인 거예요. 그러니까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보느냐 뭐 그런 차이가 있는 거처럼요. 우리는 창조로 보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 이 세계가, 누가 그런 얘기했나요? 아인쉬타인 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주사위를 던지신 게 아니다” 아무데나 던져서 나오는 대로 세계역사가 흘러 간 게 아니라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신다고 하는 그렇게 세계를 보느냐 뭐, 그런 거죠, 그러니까 철학이나 물리학이나 계속 논쟁이 될 만한 문제들입니다. 심판주라고 하는 것도요, 여러분들이 잘 생각하셔야 되는 거예요. 이걸 부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걸 인정하지 않고 세계를 본다는 거예요. 음.. 그러니까 세상은 나름의 원리로, 힘의 원리로 작동될 뿐이다 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의지를 가진 분에 의해서 움직이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능한 이야기예요. 예,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이 심판자라고 하는 말을 설득시킬 수 있을까요? 설득시킬 수 있는 근거가 뭘까요?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 했으니까 무조건 믿어라 그렇게 하면 될까요? 그럴 책임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아, 이건 계속 우리들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냥 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습니다. 정말 잘 못한 사람들 마지막 보니까 잘 못 되더라, 이거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냐 그렇게 말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꼭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죠, 꼭 그렇게 악을 행한 사람이 마지막에 나쁘거나 그런 식으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이 세상에서 이렇게 작동되는 그런 일들만 보고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혹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이건 우리들에게 주어진 숙제인데요, 이렇게만 하나 참고적으로 말씀 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 우리의 기준으로 생각하지 말자고 하는 거지요. 뭐, 권선징악처럼 말이지요, 그런 방식으로, 그러한 윤리적인 가치의 관점으로 하나님이 잘 한 사람은 그렇게 복 주고 못 한 사람은 어떤 징벌을 내리고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이 심판주라고 하는 것을 도저히 납득시킬 수 없습니다. 그건 근본적으로 논리의 토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냥 이 세상에 어떤 원리로만 본다면 오히려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심판이 도저히 없는 것 같이 느껴지는 세상입니다. 다른 것 생각할 것 없이 신앙의 토대로 삼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결과가 십자가라고 하는 것, 정말 그건 실패의 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정말 예수님에게 일어났다고 한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된 거냐, 그러한 회의, 우리가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 착한 사람 잘 되게 하고, 악한 사람 징벌을 주는 이런 관점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이렇게 결정한다고 할까, 재단한다고 할까, 규정한다고 할까,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은 고유의 방식으로 심판하시는 거죠, 고유한 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어떤 생각으로도 다 규정할 수 없는 방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말장난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잘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 관점으로 우리가 기독교의 진리를 세계에 변증해 가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 것 없이 그냥 믿으면 잘 된다, 믿지 않으면 벌 받는다 이런 식으로는 성숙한 시대에 기독교의 진리를 전할 수가 없지요. 예, 두 번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다, 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는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러한 주제로 시편 94편을 공부하고 있는데, 굉장히 당혹스러운 표현이예요. 어떻게 하나님이 복수하냐, 제가 앞에서 서론적으로 말씀 드린 건데,(늦게 오신 분들을 위해서)좀 더 보충하는 겁니다. 이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한 정의, 이것을 네가티브하게 이야기 한 거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근본적인 속성을 포지티브가 아니라 네가티브한 방식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복수라는 말에 너무 묶이지 말고, 과연 그가, 시편기자가 하나님의 속성을 무엇으로 이야기 하려고 했었는지를 봐라 그 얘기죠,

 

바로 두 번째는 정의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편기자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입으로는 담기 힘들 정도의 복수, 이렇게 운운한 것은 이 세계가 하나님의 정의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방식으로 점잖은 거, 체면, 교양, 이런 것까지 송두리째 내버리고, 복수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이 세계의 악을 보았고, 그것과 대비해서 하나님의 정의가 얼마나 분명한지를 이야기 하려고 하는 거지요. 6절에 보면, 5절도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표현하네요. 그가 목도하고 있는 악입니다. 과부, 나그네, 고아가 여기서 열거되고 있습니다. 힘이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지금도 이런 상황이면 아주 어려운데 고대 시대에 말 할 것 없지요. 이런 사람들을 죽인다고 했는데, 실질적으로 뭐, 이런 일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악은 하나님의 정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거리가 너무 먼 거지요. 하나님의 의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시편기자가 자기 스스로는 할 수 없잖아요? 그는 체면불구하고 복수해 주십시오. 하는 거예요. 이러한 마음을 여러분들이 깊이 헤아려야 되요, 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왜 저따위로 이야기 하느냐, 그 따위로 이야기 하면 안 되죠, 사랑을 이야기하고 관용을 이야기해야 되는데, 또 어떤 경우에는 이럴 필요가 있는 거죠, 예수님도 오죽했으면 “독사의 자식들아” 얘기했겠습니까, 그러한 말만 따 가지고 욕을 했다, 어쨌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성경을 잘 못 읽는 겁니다. 그렇게 말 할 수 밖에 없는 이 시편기자의 속, 중심, 영성, 그걸 보는 게 중요한 거지요. 예, 다시 말씀 드립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정의, 이 세상의 불의를 너무 절실하게 깨닫고 있기 때문에 복수를 이야기 하고 있긴 있지만, 이건 무협소설에 나오듯이 복수가 복수를 낳는 악순환 이런 차원은 전혀 아닙니다. 이 시편기자가 말하는 복수는 제가 강의안에 썼듯이 그건 꼭 기억해 두세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네가티브한 답변입니다. 그러니까 복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뭐가 중요할까요? 정의가 중요한 거지요. 하나님의 의가 중요합니다. 이걸 우리 개인의 큐티 방식으로 조금 이해를 한다면 우리 안에도 불의, 의 이게 뒤범벅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영성이 흐릿하면 그게 그거 같고 좋은 게 좋은 거 같고, 이런 식으로 지나가게 되는데, 조금 더 선명하면 자기의 잘못된 것이 더 두드러져 보입니다. 자기의 의식하는 모습들, 위선적인 것, 이게 확 드러나기 때문에, 이제 못 견디는 거지요. 이걸 하나님께 불살라 달라, 없이 해 달라, 그렇게 매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시편기자는 이런 것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경험한 거죠. 예언자들이 대개 다 사회적 영성에 그 영혼이 불 살려졌던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을 아는 분이다. 전지하신 분이다.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지요? 예, 첫 번째는 심판, 두 번째는 정의, 세 번째는 전지, 이렇게 하면 되겠네요.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전하기 위해서 악이 횡횡하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복수를 이 시편기자가 좀 성서적인 표현이 아닌데도, 신앙인으로서 담기 힘든 말인데도 지금 하고 있는 거지요. 이 하나님의 정의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아주 정확하게 보고 있어요. 만약에 과부 나그네 고아를 살해하고 못 살게 하고 가난한 사람을 힘들게 하고 정말 비인간적인 그런 악들 있지 않습니까, 그 행하는 사람들이 그게 곧 발각되리라고 한다면 하겠어요? 안 하거든요? 이건 모른다, 이건 지나갈 수 있다,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이걸 이제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그렇게 표현 한 거예요. 여호와가 보지 못하고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시겠지요? 여기 맥락에서도?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은 없어도 일반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관점이 있는 거죠. 이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악은 그렇게 잘 들어나지 않습니다. 대게 숨겨집니다. 우리 개인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구요. 이제 그게 포장이 되기 때문에 잘 몰라요. 개인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파렴치한 것 이게 쉽게 드러날지 모르지만, 노골적으로 파렴치한 것 보다 사실은 더 나쁜 악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일일이 말씀 드리지 않겠어요. 한 가지만 말씀 드리자면 공권력 같은 것들이 사실은 그럴 수 있습니다. 공식적인 권한을 갖고 행사하는 권력이 때에 따라서는 굉장히 악할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걸 행사하는 사람들은 뭐가 좋은지 나쁜지, 오히려 정의를 행사한다고 얘기를 하는 거지요, 여러분들이 뭐 세계역사에 나와 있듯이 십자군 전쟁 같은 것들이 다 공권력들이거든요? 이걸 성전(聖戰)이라고 하는데, 거룩한 전쟁을 한다고 하는데,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지만, 정말 그것은 적개심, 원수 갚는 것, 이거 인간의 심리를 자극하는 그러한 일들이었거든요, 사람이 참 스스로도 분간을 못해요, 이게 자기가 겉으로는 사명감으로 하는데, 내면으로, 무의식으로 들어가게 되면 인간적인 욕망인 경우가 한 두 가지가 아니죠, 예, 그게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오늘 여기 7절 나와 있는대로 여호와 모른다, 사람은 모른다, 감춰진다, 사실 그런 일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기자는 분명하게 이야기 하고 있어요.

 

9.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사람들에게 숨겨지더라도 하나님에게는 어떻해요, 다 밝혀지는 거죠,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공기와 같아서요, 공기, 실제로 구약과 신약에서 영을 루아흐, 프뉴마라고 했잖아요? 공기라는 뜻이거든요? 공기가 없는 데는 없잖아요? 아무리 남 몰래 하더라도 그 공기는 그 자리에 있으니까, 비유적으로 제가 말씀 드린 겁니다. 그는 공기 없는데, 진공한 데서 악을 행할 수 있다면 그거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두려워하라고 드리는 말씀은 아니예요.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은총이 아니면 주님 앞에 나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끊임없이 성령의 빛에 조명하고 성찰하는 것이 있어야 이거는 그것 하고 다른 관점입니다. 이건 끝까지 모른다 모른다 비밀이다 하더라도 그런 건 없다, 하나님이 더 잘 안다, 11절에 보니까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지요,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예, 세 가지 하나님의 속성을 말하기 위해서 시편기자가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을 했습니다. 전반부는 그 이야기이고요, 이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 했지만, 결국은 다른 걸 말하려고 했다, 하는 거는 지금 제가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악을 행한 사람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누구냐에 대한 해명인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은 과감하게 원수 갚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 사람이 계속 원수 갚아달라는 말로 이 시편을 끝낸 게 아니라 12절에 가면 전혀 다른 논조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감이 오지요? 하나님의 은총인 거죠,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12절부터 23절입니다. 이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해서 힘들긴 하지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그가 분노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를 돕고 위로 하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게 놀라운 거예요. 악은 득의양양한 것 같지만, 결국은 악의 사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일종의 노예가 되는데요, 비록 악의 고통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연관 되어 있으면, 그는 위로를 받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보통 살아가면서 잘 되고 출세하고 예를 들자면 돈 많이 벌고 복권사서 횡재하듯이 이렇게 하면 참 재미있다,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은 다 그런데서 행복한 사람은 잘 못 봤을걸요? 여러분들이 그것은 다 동의하실 겁니다. 계속 그게 반복되는 거예요. 이게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 여기서 밖에는 우리 삶의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18절과 19절에 그렇게 이야기 하네요. 그 18절과 19절은 나중에라도 더 읽어 보시면 좋겠네요,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상투적인 게 아니니까 잘 기억 하십시오. 주의 인자하심이 날 붙들었다, 19.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내 영혼이 즐겁다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이건 뭐,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가장 심층에 있는 생명운동이거든요? 이건 그 무엇으로도 control 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배 부르는 걸 많이 먹어도 영혼이 배부를 수는 없어요,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관계에서만 가능한 우리 생명의 정체성의 운동들입니다. 영혼이 즐거우려면,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말이 되는 겁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로와 도움을 얻지 못하는 거지요. 이거 자체가 심판이예요. 제가 보기엔, 하나님의 위로와 도움을 받는 그 자체가, 우리 영혼이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 정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이러한 말을 패배주의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쫄딱 망했으니까 마음으로라도 좀 위로받아야지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자기 합리화도 아닌거구요. 정말 그 미묘한 차이가 있어가지고 쉽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쉽게 자기합리화 많이 하잖아요. 그건 아닌 거예요. 에이, 나는 이 모양 이 꼴이니까 하나님께만 나가자 이런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 위로를 실질적으로 경험하고 거기에 휩싸이는 거지요. 제가 더 이상 표현하기는 힘드네요. 삶의 조건이 불행한 사람들 중에서도 기쁨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잖아요, 이건 아주 실질적인 기쁨이예요. 그냥 기쁜 척 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그는 분노하지 않아요. 사실은, 뭐, 우리가 화를 절대 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응어리와 같은 복수심에 불타지는 않고요, 좀 실망되더라도 곧 일어설 수 있고, 기쁨이 오히려 우리 삶의 중심에 있는 거지요. 제 강의안에 썼습니다만은 다시 이 부분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냥 우리 마음먹기에 달렸다, 마음을 좋게 먹자, 그 차원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심리학이 아닙니다. 자기 self-control 해 가지고 무의식, 이렇게 작용하고 최면을 걸어서 내가 불행하지만 행복하다, 그렇게 하는 거하고는 전혀 차원을 달리 하는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는 성령과의 관계죠, 성령은 생명의 리얼리티예요. Reality of Life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알맹이들, 그것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거지요, 영에 사로잡히는 거지요. 그 때 영혼이 정말 즐겁습니다. 어거스틴도 그런 얘기 했잖아요?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 전 까지는 그 무엇으로도 내 영혼이 안식을 얻을 수 없다.” 이건 말 장난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복수해 달라고 살벌한 얘기로 시작했는데, 결국은 하나님을 찬양하는군요. 22.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22절에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찬양이예요. 결론적으로 오늘 시편 94편의 핵심은 ‘복수 갚기’가 아니라 ‘하나님 찬양하기’다, 찬양, 예, 오늘 여기 94편 말씀을 제가 좀 준비하면서 제가 처음에 복수한다고 하는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좀 하다가 말씀을 점 점 더 깊이 묵상하고 좀 이렇게 저렇게 보다 보니까 역시 시편기자의 새로운 영적인 깊이를 다시 느꼈습니다. 제가 평생 동안 신학을 하고 성경공부하고 가르친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볼 때마다 새로워지는 거예요. 왜 그런지 여러분들이 아실 겁니다. 그건 우리의 영성이 자란 것 만큼 들어오게 되거든요, 여러분들이 꾸준하게 하나님 말씀 보는 게 정말 필요합니다. 이게 교회를 조금 다니면, 그게 잘 안 되요. 늘 그런 식으로만 성경을 읽습니다. 뻔한 거로만 말이죠, 우리의 선입관들을 내려놓고 우리의 영혼이 예민한 감수성, 영적인 감수성으로 성경을 읽어 가는가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관건이겠지요, 오늘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살벌한 용어였지만, 결국은 그것이 하나님 정의에 대한 무한한 신뢰이고 결국 그는 그런 어려운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찬양할 수 있었다, 그 얘기입니다. 예, 잠깐 차 마시고 질문응답 하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27 23편 녹취록 - 여호와는 나의 목자 file [2] 김현혁 2009-04-29 1908
26 50편녹취록 -자기열정과 참된 하나님 신앙 file [2] 박은옥 2009-04-28 1864
25 105편 녹취록- 구원의 주체이신 여호와 file [1] 박은옥 2011-01-10 1368
24 104편 녹취록- 신앙의 두 중심축, 찬양과 기쁨 file 박은옥 2010-11-15 1044
23 27(2)편 녹취록-하나님의 얼굴 file 박은옥 2010-11-01 1028
22 27(1)편 녹취록 -믿음의 용기 file 박은옥 2010-11-01 1101
21 26편 녹취록-무죄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10-25 876
20 25편 녹취록- 하나님의 길 file [2] 박은옥 2010-10-25 833
19 24편 녹취록-영광의 왕, 만군의 여호와 file 박은옥 2010-10-01 1228
18 103편 녹취록-여호와를 송축하라! file 박은옥 2010-09-25 1154
17 102편 녹취록-탄원과 찬양 file 박은옥 2010-09-25 1349
16 101편 녹취록-제관식 선포문 file 박은옥 2010-09-25 1481
15 100편 녹취록-선하신 하나님 file [4] 박은옥 2010-09-23 1310
14 99편 녹취록-거룩하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999
13 98편 녹취록-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file 박은옥 2010-09-23 1108
12 97편 녹취록-의로우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077
11 96편 녹취록-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 file 박은옥 2010-09-23 930
10 95편 녹취록-완악한 마음 file [3] 박은옥 2010-09-23 1001
» 94편 녹취록-복수하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8-31 1587
8 93편 녹취록-하나님의 권능 file [2] 박은옥 2010-08-30 180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