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96편 녹취록-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

조회 수 928 추천 수 0 2010.09.23 16:06:28

시편 96편 강해-하나님의 영광과 권능

 

시편 96편, 1절에서 13절까지 우리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같이 읽겠습니다.

 

1.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2.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3.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4.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5.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6.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7.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8.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 다

9.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 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10.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 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11.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12.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 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13.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 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아멘!! 예, 우리에게 익숙한 그러한 시편입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96편은 여호와의 대관식에 불리운 시라고 합니다. 강의안에 지적한 그대로예요. '여호와의 대관식'이라고 하는 게 뭘까요? 여호와 하나님이야 만왕의 왕이시니까 늘 대관식을 할 필요가 없잖아요, 이것을 제가 충분하게 조사해 오질 않았습니다. 그 대목만 어떤 학자가 말한 것을 그냥 인용한 건데요, 여호와 하나님은 왕 중의 왕이시고, 대관을 한다, 왕 즉위식이죠, 한다, 안한다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의식이라고 하는 게 있거든요, 하나님께 모든 최고의 영광을 돌린다, 그런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여러 교회력 중의 한 날이 여호와 대관식이라고 잡힌 게 아닌가 뭐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유대교의 여러 의식 중에서 한 의식인 여호와 대관식에서 불려진 시라고 합니다. 그러한 시들이 제법 있거든요, 47편, 93편, 97편 등등이 그렇습니다. 다 연결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여호와께, 그 분의 대관식을 특별히 강조하고 의미하는 그런 의식이었다는 점에서 찬양, 노래 이런 것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주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시편을 공부하는데, 그 특징들이 있죠? 어떤 때는 한탄, 하소연을 하고 간구하고, 탄원하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 그런 종류가 있는데요, 이건 아주 특별하게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당연히 노래, 찬양, 이런 표현들이 많이 나오지요.

 

1절과 2절을 보면 노래하라고 하는 것이 반복해서 세 번이나 나오고요. 그 뒤로는 송축하라, 전파하라 이런 말들이 다 연관되는 이야기지요. 또 그 다음 쭉 이어지는 구절에서 경외, 예배 그런 말들이 나오는데 다 연결되는 말입니다. 이런 말들이 우리들에게는 상투적으로 들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노래하라니 뭐, 찬양하라, 영광을 돌려라, 예배하라, 우리가 많이 들었던 건데요, 과연 뭐를 얘기하는 걸까요?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가 지금 주일날, 혹은 등등.. 몇몇 약속한 시간에 예배드리는 걸 얘기할까요? 아니면 개인이 경건생활을 또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그런 걸 의미할까요? 어떤 걸까요? 그리고 우리가 정말 이건 뭐 여러분들이 다 생각하시고 있는 부분이겠습니다만, 겉으로 드러나는 노래와 찬양, 일반적인 그런 것만 이겠는가, 아니면 우리 삶을 실제적으로 따라 가고 있는가, 등등..그런 것 들을 우리가 두루두루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이 표현에 오늘 여기 우리가 읽은 95편 전체 백미는 제가 보기에 7절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노래하라, 송축하라, 전파하라, 경외하라, 예배하라, 등등.. 여러가지 다른 단어로 나오고 있는 이 하나님의 대관식 그 의식에서 불린 이 노래 키워드, 핵심구절은 7절이 아닐까 생각이예요. 이렇습니다.

 

7.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영광과 권능이라고 하는 단어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거든요. 오늘 공부제목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 그러니까 흔하게 들었던 단어예요. 제가 설명하기 전에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뭘까? 하는 거 말이지요, 영광이라고 하는 게 뭘까, 권능이라고 하는 게 뭘까, 우리가 자주 듣는 이야기지만 성서기자들이 말하려고 하는 그 핵심이 뭘까, 그런 것들을 구체적이기도 하고 실제적이기도 하고요. 아주 생생하게 그런 것들을 생각을 하시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 일상에서도 경험을 해야 합니다. 이 성서의 언어들과 우리들의 삶이 불일치되면 곤란하잖아요, 불일치되면서도 신앙생활은 가능합니다. 그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면 이제 불행한 거지요. 그것의 일치가 영성이라고 할 수 있고요. 그것이 성서 언어의 성육신(成肉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Incarnation 된 거 거든요, 육화되는 거지요. 죽은 낱말, 정보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삶의 내용과 하나 되는 것, 육화 되는, 그런 작업들입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쌓이면, 축적되면 우리가 성서기자들의 어떤 영성을 따라 가게 되는 거지요. 오늘 공부는 그러니까 이 두 단어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영광이고, 또 하나는 능력, 혹은 권능입니다.

 

예, 영광을 볼까요? 권능이라고 비슷합니다. 이게 왜 비슷할지도 생각해 보세요. 일단 여러분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상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세상 쪽으로 생각하라는 것이 직관하라고 하는 말이거든요? 영광과 권능이 어떻게 연결될지를 생각을 할 수 있어야 되고,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데에, 혹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하는데 일치될 수 있을까 하는 거지요. 요 맥락이 전달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경험 이런 것들이 약간씩 다른 낱말들이잖아요, 그러나 그것이 어떤 기독교 신앙, 성서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안에서 하나가 되고 있거든요, 다른 단어들이 이렇게 저렇게 거미줄처럼 연결되어가지고 어떤 커다란 성서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고 하는 것 그 맥락을 우리가 조금씩 느껴야 될 거예요. 이런 공부들이 그러한 것들을 느끼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한꺼번에 되지 않습니다. 다른 공부도 마찬가지로 하루 이틀 되지 않는 것처럼 천천히 어떤 그 축적되고 영향이 갖춰지면서 그 어떤 세계가 더 확대되는 거지요. 영광이라고 단어 말입니다. 그거는 히브리어로 카봇이라고 하거든요, 헬라어로 독사(δοξα)라고 합니다. 카봇과 독사, 사실은 영광이라고 하는 개념만 제대로 알아도 성서가 이야기 하는 모든 것들을 다 이해한다고도 말 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결국 하나님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 건데요. 거기에는 많은 영웅들이 나오고 있지만, 사람이 주제는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있는 이야기인데,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손에 잡히는 분이잖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잖아요, 이제 그런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까, 그 언어가 영광이라고 하는 거지요. 카봇과 독사,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그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강의안에 있는 내용 그대로예요.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은 뭐고, 하나님의 임재는 뭘까요? 하나님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임재는 또 따로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곧 임재예요 하나님의 임재는 곧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임재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시구요,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성서에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말은 많이 나오는데, 딱 집어서 뭐라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뭐 하나님 영광만이 아니라 세계 자체가 설명하기 쉬운게 하나도 없거든요. 우리가 그냥 피상적으로만 알고 규정할 뿐이지 그 궁극적인 그 깊이로 들어가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게 다 막연하다고 하는 뜻은 아니고요. 결국은 이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하고 연관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를 완벽하게 우리가 계산해 낼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에서 볼 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실은 우리 인식 너머에 있다, 그 얘기죠. 그런데 일반 사물들도 그럴진대 말이예요. 하물며 하나님의 영광은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성서가 부분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 부분적인 거예요. 그게 총체적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예루살렘 성전에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다. 이사야가 본 것, 시편에도 많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은 아니잖아요? 성전은 구약시대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종교적인 상징물이 가득한 장소, 역사적으로 오래된 그런데 들어가게 되면 어떤 존엄성, 어떤 숭고미, 뭐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어떤 거룩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겠어요, 그런 점에서 종교적 상징을 가진 건물이나 이런 음악이나 미술이나 이런 것들은 하나님 경험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긴 합니다. 그러나 성전자체가 영광은 아니지요. 그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지요. 구약시대에도 예루살렘 성전은 절대적인 장소이긴 했지만, 끊임없이 예언자들이 그 성전을 상대화 했습니다. 하나님을 이 성전 안에 가두려고 하지 마라, 그런 식으로 말이지요. 어쨌든지 구약의 상당한 사람들은 성전자체가 영광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거기에 임재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묘사들이 구약에 나오지요. 또 모세 같은 사람은 십계명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제가 이렇게 끊어서 얘기하는 건 쉽지 않아요, 구름, 땅 흔들림, 지금 보면 화산폭발과 같은 현상인데 거기서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나가면서 한 마디 드리고 갈께요, 그러니까 성서가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때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잘 못 볼 수도 있고 잘 볼 수도 있는데요, 어쩌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경험이라고 얘기하지만, 이건 헛것을 보고 그럴 수도 있고, 참일수도 있거든요, 그걸 누가 분간 하냐 우리 스스로 못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 안에서 그것이 분간이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늘 한정적이어서 뭘 깨놓고 절대적으로 네가 옳다, 내가 옳다 참 위험하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성서와 기독교 역사와 이 세계에 대한 올바른 최소한도 열린 마음을 가지고 본다면 옳고 그름을 이야기 할 수는 있지요. 조금 지나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에 사건을 우리는 하나님 임재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답답했던 거 같아요. 그렇게 하면서도 확신이 없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 거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어떻게 하는 것 같은 장면이 많이 나오잖아요? 그건 오히려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여러분들이 열어 두셔야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 직접 좀 봅시다, 그 만큼 자신이 없었다는 얘기예요. 다른 방식으로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어떤 뜻을 이해하는 것으로써는 성이 안차는 거예요.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좀 더 확실한 것, 확실한 하나님 경험을 하려고 하는데, 인간의 인지상정일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이게 하나님의 뜻 맞냐, 아니냐고 하는 갈급한 심령에 들어가게 되면 당신 좀 봅시다. 이런 것들이 나오는 것처럼요. 모세가 이걸 요구했지만, 제가 어떤 때 설교에도 했습니다만, 나 못 본다, 보면 죽는다, 그렇게 하고 이 모세를 바위틈에 숨겨두고 지나간 다음에 등만 봤다, 그런 얘기하잖습니까, 하나님은 등이 어디 있고, 앞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흔적도 보지 못했다, 그냥 영광을 봤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는 거지요. 하나님의 임재의 여러 가지 흔적들, 그게 구체적인 것은 아닌데, 그런데 확실한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게 좋겠군요.

 

여기 컵이 있듯이 이렇게 실증적인 것은 아닌데, 어떤 신탁을 경험한 예언자라든지, 어떤 영성가들에게는 확실한 것으로 와 닿는 그런 것들이죠. 음악가들이 그런 음악경험을 그렇게 합니다.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데 작곡가들은 영감을 통해서 그게 실증적인 건 아닌데, 그의 영혼을 휘 흔들어 가지고 어떤 창조적인 음악을 만들어내게 하잖아요? 성서기자들과, 영성가들, 예언자들이 다 그런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면 희한한 거였어요. 도대체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그 사람들에게는 확실한 것이었습니다. 권능이라고 하는 것은 능력이라고 하는 말과 똑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다이나믹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에게만 붙일 수 있는 거지요. 전능, 권능, 능력, 그래서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능력, 하나님이 능력으로 존재하시니까요, 제가 낱말들을 개념적인 것을 썼는데,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단어들도 접해야 우리가 성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 그렇게 쓰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생각하세요. 영광은 하나님의 존재능력을 가리킨다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능력으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신비 이런 것들을 가리켜 카봇, 독사(δοξα), 다른 걸로는 말할 수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여호와께 영광과 권능을 돌려라, 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께, 그분에게만 해당되는 온전한 절대적인 생명의 가치를 돌려라, 이 이야기겠지요. 이런 설명들이 강의안 세 번째 패라그래프입니다.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어요. 그렇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렵더라구요. 제 딸들하고도 대화할 때 그 한계가 있어요. 그 개념 안으로 들어가는 게 잘 안 된다고 하는 건데 책을 읽더라도 이해가 잘 안되는 게 있는 거지요. 추상적인 거예요. 늘 우리들은 딱 먹는 거, 손에 잡히는 거, 계산해 낼 수 있는 거, 이런 것만 확실한 걸로 습관적으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 능력 이런 것들은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존재능력,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 하냐, 이게 오늘 공부에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질문, 화두이기도 해요. 이건 그냥 오늘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될 거구요. 항상 저에게 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제가 그걸 끝낸 사람이 아니니까요. 끝낸 사람이 어디겠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임재가 이게 확실하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마 그런 상황을 종료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나 그 질문은 가지고 있어야 되고요. 그런 질문을 가져야만 최소한도 모세나 이사야나 등등.. 이런 예언자들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도 그림자나마 경험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어떤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냐의 질문이예요. 일반적인 대답을 제가 거기에 나열했습니다. 하나는, 오, 내가 어려운 일을 당했었는데, 내가 기도하는 중에 해결 됬더라,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그런 얘기예요. 간증에서 보통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아주 뜨거운 경험인거지요. 또는 신비한 은사경험, 또는 예수영접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신앙의 레파토리 있잖습니까, 조금 마음이, 신앙이 식을 것 같으면 처음 신앙 예수 영접 했을 때로 돌아가자 그런 이야기 말이지요. 또는 그렇게 특별한 건 아니라고 해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평안한 마음의 경험, 이런 것들이 하나님 임재에 대한 경험이 아니냐, 그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요, 신앙경험에서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건 종교적인 현상인 거예요. 그건 제가 딱 부러지게 말하는 건 쉽지 않은데 들어 보십시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것들, 방금 말씀 드린 거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한 신앙경험, 이런 것들은 더 본질적으로 나온 종교적 현상들인 거예요. 더 본질적인 것이 영광과 권능의 경험이거든요. 이제 이게 어려운 거예요. 이런 권능과 영광, 성서가 이야기 하고 있는 세계가 잘 안 잡히니까 자꾸만 회개했어, 영접에 대한 것, 은사, 여러 가지 그런 것들에 우리가 더, 좋게 얘기해서 집중, 좀 다르게 얘기해서 집착하고 삽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에서도 사실은 그런 것들은 많이 나타나잖아요, 생명의 신비, 삶의 어떤 의미, 이런 것들이 잘 안 잡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우리는 악순환들이 많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이런 경험, 본질적인 것에 대한 경험, 우리는 여기서 정말 본질적인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더 본질적인 경험, 이것은 오늘 공부제목의 영광과 권능인데요, 오늘 제가 조금 바꿔서 시편 96편 전체 줄거리에 따라서 두 가지로 나누어서 좀 더 구체적인 거지요, 그렇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건 조금 더 우리들에게 확실하게 와 닿을 거예요.

 

첫 번째는 창조사건입니다. 96편 5절에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지금 이 시편 96편이 여호와 대관식 의식에서 불려진 노래, 찬양, 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영광과 권능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얘기하면서요, 이미 앞에서 제가 두 개로 나눈다고 그랬지요?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얘기를 하는 거지요. 하늘은,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가장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을 말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늘을 지으셨다면, 다른 모든 것은 두 말 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창조, 하나님의 창조를 이야기 한다고 하는 것은 야외예배 나가서 참 아름다워라, 라든지 그런 자연을 보고 감탄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어쩌면 좀 낭만적인 거구요. 틀렸다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요. 이제 창조라고 하는 것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뛰어넘는 겁니다. 노자의 글에 있나요? 하늘은 인자하지 않다, 그런 얘기를 하지요, 문자로 뭐라고 하죠?(天地不仁천지불인 以萬物爲芻拘이만물위추구) 그러니까 늘 우리가 감상적으로 보는 방식의 창조는 아닙니다. 참 간단한 문제죠, 다 들어나는 문제죠? 보세요. 강한 짐승이 약한 짐승 잡아 먹잖아요, 잔인하지 않습니까, 그런 걸 보고서 아름답다고 말 할 수 없잖아요, 이건 우리가 우리 기준으로 생각할 수 없는, 넘는 어떤 창조행위예요.

 

예,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자라고 하는 사실을 적극적인 면과 소극적인 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도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거예요. 나오는 것을 제가 조금 조직적으로 다시 설명을 하는 중입니다. 시편기자가 정말 제가 지금 분석하고 있는 것 대로 생각을 하고 시를 썼는지는 제가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칫하면 제가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해석 할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해석이 그만큼 위험하기도 합니다. 자기 주관성에 떨어지게 되면 얼마든지 이용해가지고 다른 이야기도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또 성경해석에 더 적극적인 면이 있어요. 시편기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더 이상의 것을 그 텍스트 안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서텍스트는 하나님의 말씀이고요, 종말까지 이르는 전체세계와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텍스트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미술작품도 그렇고, 다른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적극적인 면하고 소극적인 면으로 볼수 있는데요, 적극적인 면은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그의 기이한 행적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야 선포하겠지요? 역사, 이 세계, 지질학적인 어떤 인류역사까지 포함하는 그 모든 것 속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신기한 행적, 이것을 이제 선포하는 거죠, 욥기서 에서도 그런 표현들이 많이 나오고요, 정말 기이한 행적이거든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세계가 움직이니까 그 예상하지 못한 그러한 힘, 창조의 하나님이다 그 뜻입니다. 소극적인 면으로는 이 세상의 피조성을 뚫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만국의 모든 신들도 우상에 불과하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피조성을 인정하지 않는 게 우상숭배잖아요? 하나가 창조사건이고요, 이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창조행위, 창조성,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뭐냐라고 하는 것을 따라 갈 수 있지요. 더 근원적인 거죠, 본질적인 거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뒷부분에 나오는 거예요. 10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이게 몇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흔히 심판 같은 것은 조금 끔찍한 이야기지요? 피하고 싶은 이야기지요? 그런데 그게 왜 본질적인 거냐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시편기자는 심판하면 일단 부끄러운 것, 두려운 건데, 오히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라고 있습니다. 그게 이제 노래하듯이 앞으로 나가요. 심판과 찬양, 기쁨 이런 것들이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그 답을 하기 전에 왜 우리가 심판을 왜 우리가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할까요? 이게 다 선입관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심판은요, 의가 드러나기 때문에 당연히 그건 찬양, 찬송 불러야 하는 사건이거든요, 오늘 제 강의안에는 이렇게 썼습니다. 심판은 창조완성이다, 그리고 심판을 통해서 정의가 실현된다, 그러기 때문에 모두가 다 즐거워한다고 하는 겁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러한 삶들, 즐겁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냥 마냥 계속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거는 행복한 게 아니라 저주에 속합니다. 마냥 계속하는 것 종말이 없이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거든요. 죽음이 없이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 천년만년 계속 하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에 가깝습니다. 이걸로 완성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지막 심판은 창조완성, 정의와 의가 드러나는 사건,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 찬양하는 거지요. 이런 것들을 그냥 그러려니 라고 생각하지 말고 아주 실질적으로 생각하셔야 되요. 아주 실질적으로 신학에서는 마지막 심판을 그리스도가 행하신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 때 양과 염소가 구분됩니다. 이런 것 때문에 두려워 하지요. 내가 염소가 되면 어떻할까, 어떻게 하나, 그런 거 말이지요. 한쪽은 영생으로 다른 한 쪽은 형벌로 막 알곡과 가라지 이런 것들, 그러니까 내가 영원하게 불붙는 그 속에서 고통을 당하면 어떻할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런 걸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거는 불신앙입니다. 왜 그런지는 제가 굳이 설명하지 않겠어요. 마지막 심판에 대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뒷 부분에서도 나오고요, 그것을 이제 묵시문학이라고 합니다. 묵시문학은 늘 심판을 주제로 하는 거거든요? 거기에 여러 비유들이 나옵니다. 이 심판의 기준에 대해서 우리가 말 할 수 가 하나도 없어요. 이게 정말 우리를 두렵게 하기도 하는 거지요. 아, 나는 당연히 양의 편에 들 줄 알았더니 염소가 된다, 나는 당연히 염소가 될 줄 알았더니 양이 된다, 뭐 그런거요, 구원받을 줄 아는 사람들이 떨어진다, 그런 식의 기준, 그런 것 때문에 혹시 내가 구원받지 못할까 그런 두려움들을 기독교인들이 갖는 것 같습니다. 절대 그런 것들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영원한 형벌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더 정확하게는 오늘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자기의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서 내가 어떤 사람 단죄하고 재단하고 그렇게 하는 방식으로 사는 삶은 이건 근본적으로 허물어진다,

 

우리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한 기준으로 모든 생명이 완성된다, 그걸 얘기하려고 하는 거지요.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다고 한다면 두려워할 게 하나도 없지요? 예, 다시 기독교신앙의 근본으로 들어와서 십자가는 세상에서 완전히 저주받은 것이거든요? 그래도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 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저주받은 거와 같은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두려워 할 게 하나도 없지요. 그런 영성으로 우리가 분명하게 두 발을 딛고 들어갈 수 있다면 우리는 이제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거지요. 예, 오늘 결론 부분, 마지막 패라그래프입니다. 제목이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라고 그랬습니다. 과연 우리가 그렇게 사나, 하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지요. 그럴 때도 있는 것 같지요? 어떤 때는요? 어떤 때는 간혹 있습니다. 어떤 종교적인 어떤 경험을 할 때에, 그런데 우리의 삶의 대다수의 부분들은 턱없이 부족하지요, 그리고 그런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권능, 이런 것들은 그냥 종교적인 언어로 포장되고 있을 뿐이지, 실제적인 우리 삶의 내용으로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그건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도 그렇고, 아닌 사람도 마찬가지로 말 할 것 없고 말이지요. 이게 우리의 관심은 ‘나’에 모아집니다. 저를 포함해서 말씀 드리는 거예요. 다 그렇습니다. 아, 내가 욕 먹으면 안되지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지라든지, 등등.. 그런 방식들입니다.

 

예, 우리가 이걸 우리가 죽을 때까지 극복할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엔 극복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특별한 경우 빼놓고는 영적인 경지에 올라간 그런 분들, 그런 분들도 마찬가지예요. 사실은요, 다 올라갈 수록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거든요, 그게 영성가들의 특징입니다. 올라가지 않은 사람들은 아예 생각도 안하는 거고, 그 깊이에 들어간 사람도 뭐, 등등.. 여러 영성가들이 있지 않습니까, C.S.루이스라든지, 나우엔이라든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람들도 그 분들의 글들을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절망하는지, 그 기도들을 보면 우리가 알수 있거든요, 예, 그런 거지요. 근본적으로는 힘든데요, 그래도 우리 삶이 많은 부분에서 그쪽으로 좀 기울어져야 되겠지요, 그쪽으로 방향이 가냐 안 가냐, 그거는 이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한계이긴 해요. 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 시편을 쓴 사람도 혹은 개인이 썼다기 보다도 이스라엘 공동체가 쓴 건데요, 그들도 사실은 우리와 비슷했습니다. 별로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떳떳하지 않았어요, 시편들을 보면, 굉장히 아름답고, 귀하고, 진지하니까 늘 그렇게 신앙적으로 산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성문서, 거룩한 문서들이 이스라엘에서 자리를 잡은 거지요. 그런데 어쨌든 문제의식은 갖고 있었던 거예요. 이런 방식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 말이지요.

 

그들은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시편을 부르는 의식, 시편 96편이 여호와 대관식에 불려진 시라고 한 것처럼요, 여러 의식에 참여해서 정기적으로 참석해서 자기 삶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성찰했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그런 거지요. 예배 각종 예식들, 거기에 있는 예전들, 그런 것들이 다 각각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임재와 우리의 응답 이런 것들이 아주 이천년동안 역사를 통해서 아주 집약되서 엑기스로 모아진 것들이거든요, 그런 경험들이 많아지면, 우리가 이런 시편기자의 영성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고전음악도 잘 안들으면, 점점 낯설어지고, 처음엔 잘 몰라도 자꾸만 들으면, 어릴 때부터 들으면, 더 가까이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독교 영성, 성서적 영성도 마찬가지이거든요, 그러니까 조금 힘들어도 정기적으로 자기 영적인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 것도 우리 영적인 훈련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예, 오늘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공부했습니다. 각자 느끼신 바가 다르겠습니다마는 어떻게 보면 보잘 것 없는 우리 각자의 인생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의 창조와 심판과 그의 생명의 완성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 그래서 우리 삶 전체가 결국 나중에는 하나님과 일치된다고 하는 것, 하나님의 불길 속으로 결국은 우리가 들어간다고 하는 사실을 이 살아있는 동안에도 좀 풍성히 누리며 살아야 되지 않을까, 그 생각입니다. 잠시 차 한 잔 하고 질문응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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