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97편 녹취록-의로우신 하나님

조회 수 1076 추천 수 0 2010.09.23 16:43:06

시편 97편 강해- 의로우신 하나님

 

시편 97편입니다. 1절부터 12절까지, 이 말씀을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1.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2.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3.불이 그의 앞에서 나와 사방의 대적들을 불사르시는도다

4.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도다

5.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랍 같이 녹았도다

6.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

7.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8.여호와여 시온이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였나이다

9.여호와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니이다

10.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 에서 건지시느니라

11.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아멘!! 이 97편도 96편, 그리고 또 98편과 같이 여호와 대관식 때 부르던 노래, 기호(?), 그렇다고들 말합니다. 하나님에게 특별한 영광을 돌리는 그런 의식에서 어떤 대표자가 하던지 아니면 회중들이라든지, 기도드린 내용이죠, 그래서 비슷비슷한 내용들이 많이 있기는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상투적인 내용도 있는 거예요. 우리가 쭉 읽으면서도 느꼈습니다마는, 하나님의 의, 공평, 찬양, 기뻐하라, 이런 등등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성서기자들이 많이 이야기를 하잖아요? 구약과 신약이 조금씩 느낌이 다르긴 해요. 차이가 뭐냐, 그 이야기는 더 많이 해야 되니까 여기서는 그만 두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더 할 수 없다고 하는 게 또 거기에 문제거든요, 하나님을 말하긴 해야 하는데, 다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는 이유를 여러분들이 아시지요? 하나님은 세계 전체로 존재하시는 분이예요. 그러니까 창조와 종말까지 다 총체적으로가 다 하나님의 행위인데, 그리고 행위로 하나님이 존재하시는데, 지금 우리가 일부분만 살잖아요, 토막만 가지고 있잖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다 이야기 할 수 없는 거예요. 제가 어느 땐가 비유로 설명했는데, 퍼즐 같다고 말이예요. 퍼즐은 지금 한 토막 가지고 있으면서 이게 어떤 그림이 될지 알겠어요? 모르잖아요? 지금 하나님을 우리가 그런 정도로 인식을 하고 있는 겁니다. 퍼즐 마지막 조각까지 대충 맞춰지면 어느 정도 윤곽이 나옵니다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쪼가리를 넣어야, 완성된 그림이 나오듯이요,

 

종말까지 가야 하나님을 우리가 온전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퍼즐하고 하나님 인식이 똑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퍼즐은 말씀드린 대로 어느정도 3분의 1,2 가면 어느 정도 대강은 윤곽이 잡히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윤곽이 잡히는 분이 아닙니다. 마지막 어떤 한 지점까지 다 드러나야만 확 드러날 수 있는 분이라서요,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하나님을 아주 결정적으로 말 할 수 없습니다. 실증적으로 말 할 수는 없어요. 그게 우리의 인식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딱 손금 드려다 보듯이 말하지는 못하고, 다만 그 분의 속성을 이야기 하는 거지요. 하나님이 어떻하시다, 혹은 어떻게 통치하신다, 그런 것만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성서도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이해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속성,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Character 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부분적인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이 분명히 하나님의 속성이긴 한데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이다. 無所不爲다, 뭐, 등등.. 여러 가지 있지 않습니까, 그게 하나님의 속성이긴 한데, 그것으로 하나님을 다 이야기하는 건 또 아니거든요, 이게 계속 그러한 우리인식의 한계와 하나님의 자기 나타내심과 여기에 역학적인 그런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지요. 하나님의 속성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런 속성을 이해하면서도 온전히 하나님을 안다고 말 할 수 없는 그런 한계 안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자기가 본 것처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바로 사이비 이단들이거든요, 많은 사람들은 불안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해 주기를 바랍니다. 누가 나타나서 아, 분명히 이거다, 어떻게 봤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했다, 탁탁 끊어주면, 설마 이상하다 하면서도 믿고 싶어지거든요, 사람의 한계입니다. 그런 게 인간의 약점이기도 하고요, 그걸 이용해서 방금 말씀드린 대로 사이비 이단들이 출몰하는 거지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가운데서 볼 수 있는대로 가장 일반적인 속성 중의 하나가 의예요. 의, 오늘 그게 핵심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얘기 했잖아요? 이게 하나님이 의로우시다. 이게 당연한 대답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써 존재하신다고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 게 아니죠? 오히려 불의한 것들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이게 힘든 거예요. 이걸 어떻게 뚫고 나가면서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온전하게 붙들어 맬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건 우리가 억지로는 되지 않는 거거든요? 오히려 이 세상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의리가 아니라 불의로 점철되는 것 같고요, 이건 개인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의를 주신다고 그랬잖아요? 또 다른 말로 하면 평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평안이니까, 우리 개인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지면 우리가 평안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 믿고 구원의 확신이 있어도 평안하지 못할 때가 많잖습니까, 이게 왜 이러냐, 하는 거예요, 이건 개인의 문제도 그렇고 사회문제도 그렇습니다. 사회도 여러 가지 불의한 일들, 불의한 사람들이 오히려 잘 되는 사람들도 있고 말이지요, 우리 개인들도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해서 평안하지 못하고 산다는 거예요. 이러한 상황인데,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께서 의로운 분이시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우리가 이해하고 붙들고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거지요, 이거는 그렇게 간단한 대답이 아닙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속성은 단면만 있는 게 아니라 양면, 여러 다층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않고 그렇다 해 버리면 이거는 이제 구구단을 외우는 방식이거든요? 그런 식으로는 우리의 영성이 깊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영성은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잖아요? 열광, 광신이 아니라 우리가 삶과 세계의 깊은 이해를 통해서 나오는 어떤 그 생명에 대한 이해, 그런 것의 신뢰니까요, 이러한 성서기자가 말하는 하나님의 속성이 어떤 관점들이 있느냐를 이런 점에서 계속해서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쪽으로 삶의 무게를 놓느냐가 중요한 거지요. 세계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슷하게 작동됩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요, 믿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나쁜 일만 일어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고통이 누구 피해가는 것 없어요, 불치병 걸리려면 누구나 다 걸리는 거지 예수 믿는 사람, 살살 피해서 그런 거 전혀 없습니다. 이 세계는,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 하셨잖아요? 악인이나, 의인이나 똑 같이 햇빛과 비를 주신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문제입니다. 자꾸만 우리가 그걸 피하려고 한다면, 이기주의가 되는 거지요, 이 세계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문제들은 예수믿는 사람이라도 그대로 해야 됩니다. 문제는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똑 같은데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고 어디에 무게, 초점, 포커스 이런 것을 놓느냐에 큰 차이가 있는 거예요, 이 세상은 불의한 거야, 그래서 불안한 거야, 아니면 의와 불의가 계속 투쟁하는 거야, 뭐, 계속 그러니까 혼란스럽게 생각하면서 살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의가(?) 거기 기울어져서 살 수도 있고 그런 겁니다. 제 말 표현이 정확하지 않네요. 어떻게 표현할까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이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영적시각이 필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똑 같이 불치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아까 얘기 한 대로 피할 수 없는 문제거든요, 고난이 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빛이 되고요, 어떤 사람에게는 아이고, 어떻게 내 신세가 이렇게 됬나, 그렇게 자학? 좌절? 절망, 허무 불안, 그렇게 빠지는 길이 되는 거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기 삶을 합리화 하고 신앙적으로 모면하고 그렇게 하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 그런 눈만 가지면 볼 수 있는 겁니다. 시인들에게는, 똑 같은 삶이지만 어떤 새로운 세계가 있잖아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도 다른 사람은 지나가는데, 그 사람에게 어떤 빛이 그를 강렬하게 사로잡아가지고 어떤 색깔이나 등을 형상화 낼 수 있는 것 처럼요, 성서기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거든요, 우리들도 거기서 그걸 배워야 되는 거거든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성경공부에 기회가 주어지든지 아니 되든지 꾸준하게 나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주제가 그 “의로우신 하나님”이예요. 여러분들은 그렇게 믿으시나요? 만약 내가 그렇게 믿는다면 좀 불안할 게 하나도 없는 거지요. 하나님이 의로우신데, 의를 행하시는데, 왜 우리가 다른 것으로 인해서 혼란스러울 수가 있을까요? 그건 이제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보지 못한다고 하는 이야기지요.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장난이 아니라 교양이 아니라 우리 운명전체를 거는 실존적 결단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성서기자가 얘기하는 의로운 하나님, 하나님의 의를 좀 더 명백하게 알고 살아가야 되겠지요. 오늘 전체적으로 세 단원으로 나눠서 그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97편 시편기자가 시적인 감수성으로 그렇게 표현합니다. 의와 공평이 여호와의 보조의 기초 보좌의 기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임금이라고 하는 고대인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통해서 표현하는 거지요, 임금이 앉아 있는 기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속성이 뭐예요? 의와 공평 정의라고 하는 거지요? 그게 2절에 나와 있고요, 6절에도 보면 그와 같습니다. 하늘이 여호와의 의를 선포한다고 했습니다. 1절에서 6절까지는 제가 보기에 시내산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시내산이요,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구요,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산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고요, 이스라엘의 선민정체성이 그 산에서 이뤄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시내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지요, 그리고 모세가 시내 산에 들어갔을 때, 구름이 빽빽하고 산이 흔들리고, 불을 뿜고 하는 묘사들이 나오잖습니까, 그건 화산폭발에 대한 경험인 거거든요, 고대인들은 그 화산폭발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는 거지요, 지금도 그게 보통 일이겠습니까, 사람이 어찌 할 수 없는 그러한 사건들이니까요, 지금이야 그래도 지질학적으로 화산이 어떤 것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는 풀어내는데 그래서 그것 때문에 두려운 일이긴 하지만 그게 그렇게 신비한 일이다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고대인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단 말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자연현상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서 착각하지 마세요, 기껏 해봐야 그럼 화산폭발이구나, 그들은 가짜 경험이었구나, 그러니까 진짜 하나님 경험이 아니라, 화산폭발을 그렇게 착각한거구나,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 설명이 간단한 것은 아닌데요, 그런 자연 현상에 어마어마한 모습을 보고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거거든요, 자연현상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었는데요, 그것을 일으키시는, 근원이신 그 분, 그 분에 대한 인식이 거기에 있었던 거지요,

 

그러니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인 힘을 그들은 하나님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구름과 흑암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그러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의와 연결시켜서 말하잖아요? 그게 좀 재미있지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연결이 안 되는 말 같기도 하지요? 그 자연의 어마어마한 사건 앞에서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얘기 했다고 하는 거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유대인들의 고유한 영적통찰이거든요? 예, 그걸 우리가 구약성서에서 배우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고 하는 사실 앞에서 그걸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로 경험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속성이 하나님의 의로 나타나는 거지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들이 성서를 읽으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시면, 그게 다 이해가 됩니다. 이건 그렇게 신학적인 깊이를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간단한 문제예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지요, 하나님에 대한 경험 앞에서는 인간의 모든 차이가 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의로운 거지요, 보통 불의라고 하는 것은 나만 억울해, 나는 월급을 얼마 받는데 저 사람은 노는데 얼마 받아 라든지, 내가 사기를 당했어, 이런 것 때문에 불의한 상황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차이가 정말 사소해 진다면, 그런데 그걸 사소하게 하는 근원적인 사건이 있다면 그게 이제 정의로운 거예요. 말이 전달이 됬는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자면, 고만고만한 7명 되는 형제들이 부모 없이 자기들끼리 싸우며 놀다가, 뭐 동생은 억울하다고 울고 그러다가 이제 어머니 아버지가 거기 왔다고 합시다, 어머니 아버지가 왔으니까 밥도 먹고 다른 거 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자기들의 놀던 일들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거예요. 사소해지는, 무의미해지는 거니까요, 어머니 아버지가 거기 왔다고 하는 사실은 그게 정의로움인 거예요. 그게 의, 공평한 사건인 거지요.

 

조금 더 말씀드리면, 제가 강의안에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건 제가 다른 때도 이야기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나타내는 가장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그리고 지식이 많다고 해서 죽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돈이 많거나 지식이 많거나 명예가 많거나 하면 죽기가 더 싫거든요, 오히려 더 불행한 겁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은 이게 죽음 앞에서 사람이 살려고 하는 욕망이 있겠습니다마는 상대적으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자기소유가 너무 많아서 그걸 놓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훨씬 자유로운 거지요. 죽음이라고 문제가 나왔으니 한 마디 하고 넘어가야 되겠네요. 결국 우리가 소멸되는 거거든요, 살아 있는 동안에 소멸에 대한 연습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게 없으면 죽음이 계속 두렵게 됩니다. 죽음은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이잖아요? 이것을 살아 있을 때 해야 되요. 이것도 연습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 연습 아니겠어요? 소멸되는 연습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된다고 그래요? 무화된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영성가들이 얘기하는 목표가 “무”예요. 자기자아가 없어지는 상태죠, 그게 정확한 건 아니예요. 자기의 Identity, Personality, 용어 하나하나도 설명이 필요한 거긴 한데 복잡한 거고, 어쨌든 Personality 는 갖고 있으되 자아는 살아지는 상태, 아마 이것을 이야기할 겁니다.

 

우리 신앙이 깊어지고 신앙의 훈련이 바르게 된다면 자기를 확대하려고 하는 욕망은 당연히 줄어들려고 합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예요. 그런데 자칫하면 기독교신앙이 이걸 거꾸로 합니다. 믿으면 잘 되고, 붙들고 소위 말해서 몇 박자 축복이라든지 기복신앙, 이런 것들은 다 거꾸로 하는 것들이거든요, 자기들의 이루어 질 것이 더 많게 하는 이러한 것들은 기독교신앙이라기 보다도 다른 세속주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바알숭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게 아주 매력적이기 때문에 그게 이제 통하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할 수 밖에 없어요. 아무리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빛처럼 나타나신다면 그 억울했던 일들도 사라지는 거지요. 사라져야만 되지요.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한 거예요. 그 6절에서 한 마디 하고 지나가야 되겠네요. 6절 후반부에서 그렇게 이야기 하잖아요?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 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 이런 단어들이 여러분들이 굉장히 추상적으로 생각 했을텐데 지금 제가 잠깐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문제지요? 하나님의 의, 공의, 그 절대성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런 성서의 용어들을 여러분들이 좀 바꿔서 생각할 줄도 알고 자기 삶에서 일치시켜야 됩니다. 그의 의를 선포하니 라고 하는 말씀은 그의 절대성을 의미하는 겁니다. 우리는 다 상대적인 거니까요. 피조물이니까 그의 절대성이 드러나게 되면, 하나님의 공의롭다고 하는 것이 나타나게 되잖아요? 하늘이 그런 것들을 선포하는데 그러면 그의 영광을 본 거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절대성, 하나님의 의, 그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인거죠, 영광, 곧 하나님에게만 돌아가야 될, 최고의 가치를 뜻하거든요, 성서기자들이 참 막연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들예요. 예, 이런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되요, 결국은 자기 것에 매달리게 되죠? 자기를 확대하려고 하죠? 그런 사람은 결국은 자기확대에 어떤 동기를 자극하는 우상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상의 특징이 바로 그런 거예요. 너 잘 되, 너만 어떻게 해, 주로 물질적인 차원에서라든지 그런 자극들입니다. 우상을 섬기고 또 뭐라고 그래요? 허무한 것을 자랑한다,

 

7절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조각한 신상을 섬기고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다, 참 놀라운 진술입니다. 여기서, 신상, 우상이지요? 허무한 것이라고 하는 말을 정말 타종교 이야기 하는 것, 하여튼 괴상망측한 것, 정말 보기도 싫은 것,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는구나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아요, 굉장히 매력적인 겁니다. 아주 그럴 듯한 것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보장 할 것 같은 것들을 가리키는 것 들이예요. 돈, 집, 명예, 지식, 지금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모든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고요, 자극시키는 것들입니다. 얼마나 매력적이예요? 우리 현대인들은 이런데 더 예민하지요. 옛날 사람보다 어떤 면에서 더 우리는 영적으로 살기가 더 힘들어요. 여기서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살기 힘듭니다. 그냥 티비나 하여튼 그런 것에 의해서 우리가 노예처럼 살아가거든요, 습관적으로 텔레비 봐야 되고, 광고 봐야 되고요, 다 매력적인 것에 휩쌓여서 살고 있고요, 우리가 인제 재테크 하지 않으면 어떻게 큰일 날 것처럼 불안하게 만들고요, 현대가 요구하는 그런 걸 무조건 죄악시해서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우리를 자극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아갖고 안정적으로 어떤 근본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요즘 청소년들은 더 그럴 겁니다. 아예 태어날 때부터 그러고 있으니까요, 저의 세대나 저보다 조금 밑의 세대만 하더라도 공부에 대해서 그렇게 스트레스 받지 않았잖아요, 초등학교때도 학교갔다 오면 밤 늦게까지 계속 놀고, 뭐 그랬습니다. 그리고 대학 다닐 때도, 누가 그런 얘기를, 서울대학교 나온 그 분이 그런 얘길 하더라구요. (저보다 조금 연배가 높으신 분인데 서울대 나와 갖고 대구대 생물학과 교수하시다 은퇴할 때 다 됬는데) 자기들이 대학 다닐 때 취업 그런 거 얘기하면 똘아이 취급을 당했다고 하더라구요. 그 어떤 역사, 세계, 삶, 고난, 참여, 이런 것들이 핵심이었는데 서울대 학생들도 지금 취업 이런 데만 몰두하고 있는 거, 그러니까 이 세대가 그런 쪽으로 가기 때문에 오늘 여기 성서가 말한 대로 조각한 신상, 허무한 것, 여기에 빠져 들게끔 사회구조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 없이 제가 살 수 있다는 말은 아니예요. 이런 것을 섬기고 자랑한다고 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거지요. 우리가 당장 이슬먹고 삽니까, 돈이 필요하고요, 노후도 준비도 하고, 그런 것들을 제가 부정하는 뜻으로 말씀 드린 건 아니예요. 자랑, 거기에 매달리는 거예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엔 어떻게 된다고 그래요? 결국에는 수치를 당한다, 왜 그런지 아시겠어요? 왜 수치를 당하는지요?

 

왜 성서기자들이 이것을 뜬 구름 잡는 식으로 한 거 아닙니다. 정확하게 보고 있는 거예요. 왜 수치를 당하는가, 한두 가지 차원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이렇게 자극적이고 보암직하고도 하고 눈을 밝음직도 하게하고 일종의 선악과라고 할 수 있겠네요. 매력적인 것, 그런 것들은 결국 우리 영혼을 배부르게 하지 못한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동의하실 걸요?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거기서 만족이 안 됩니다. 근원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고도 하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그게 안 되니까 악순환이 되는 거지요. 더 자극적인 것, 더 많은 것, 그런 것으로 계속 가게 되는데 그러면 결국은 그게 수치당하는 거지요. 두 번째는 우리가 결국은 아주 빨리 이런 것들을 아무리 붙들고 있으려고 해 봐도 안 되는 때가 온다고 하는, 결국은 다 포기해야 되는 거예요. 결국은 모든 것들을 다 놓아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놓아야 될 것을 계속 붙들고 있으면 수치 당하는 거죠, 결국은요, 우리 젊음이나, 미모나 이런 것들, 다 마찬가지인 거예요. 사실은요, 계속 붙들고 있으려고 하면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예, 궁극적이지도 않고 절대적이지도 않은 그런 것들을 신처럼 섬기면 결국 우리의 영혼이 타락하게 되고 영혼이 타락하게 된다고 해서 부도덕하게 된다고 하는 뜻 아닙니다. 지금 제가 드리는 차원은 도덕적이냐, 부도덕적이냐가 아니라 더 근원적인 거예요. 결국 우리 영혼이 불안한 거예요. 영혼이, 참된 안식이 없는 거죠, 결국 절망에 빠집니다. 자기가 절망에 빠져 있는 지도 몰라요, 사실 그럴 정도로 우리가 어떤 것에 노예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 곧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뭐 잘나가는 사람들 실패하게 만드는 것, 이걸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한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은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공부한 걸로 말하자면, 그거는 영원하지 않은 것, 그런 것들을 붙들고 매달리다가 결국 수치를 당하는 거지요, 허무한 것을 자랑하는 거지요. 그러면 허무하지 않은 것, 신상으로 만들지 않은 것, 그건 뭘까요? 그게 유일하게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게 하나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바로 그와 같다라고 하는 겁니다. 세 번째 단락이네요. 그 일, 곧 하나님의 심판, 허무한 것을 자랑하는 자가 수치를 당하는 것을 보고 시온의 딸들이, 유대의 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8절에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그랬습니다. 이것도 또 오해하시면 또 곤란하지요? 야, 저 놈 저렇게 얄밉게 저러더니 잘 됬다, 심판 받았다,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남이 망한 것을 보고 즐거워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시편은 표현을 그렇게 할 때가 있어요. 나를 괴롭게 한 사람이 망하게 해 주십시오. 그런 표현이 있는데, 결국 뒤편에 가 보세요. 그게 핵심은 아니라고 하는 것들을 그 전에도 제가 몇 번 말씀 드렸던 것처럼요, 여기도 그렇습니다. 남이 잘못된 것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은 하나님이 의로움이 드러났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기쁨인 거예요. 다른 사람하고 비교해 갖고 다른 사람이 잘 못되고 내가 좋게 되고 이런 걸로 자꾸 기뻐하는 습관이 되면 이런 거하고는 하나님하고는 점점 거리가 멀게 되는 거지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핵심인 겁니다.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거예요. 심판은, 그러니까 즐거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확증인 거예요. 그 세 가지가 다 연관됩니다. 하나님의 의, 그의 심판, 그의 통치를 아는 사람은 기뻐할 수 밖에 없습니다. 1절과 12절에 그렇게 나오고 있어요.

 

오늘 여기 97편이 결국은 1절과 마지막 12절에서 기뻐하라고 하는 말을 하는 것처럼 핵심은 그거네요. 하나님의 의로우심 앞에서 기뻐해라 하나님은 온전하게 심판하신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다 그걸 그 앞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해라 그런 이야기지요. 예, 어떻습니까, 이런 기쁨이 우리들에게 있나요? 아마 그런 게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잘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경우가 태반일 겁니다. 그건 뭐, 우리가 어쩔 수 없어요. 일상에 묶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땅위에서 사는 한 아, 그런 것이 절절하지 않습니까, 그거는 제가 인정을 하고 그 안에 제가 들어 있기 때문에 그걸 완전히 도사처럼 한꺼번에 벗어나갖고 완전히 구름처럼 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건 우리 모두에게 전제되는 거예요. 그건 저만이 아니라 상당히 영적인 경지에 올라선 사람들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한계들을 우리가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그런데서 계속 머무르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가야 되잖아요, 예수의 성품에 다다를 때까지 우리가 나가야 되잖습니까, 그것이 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거구요. 구원이 우리가 노력해갖고 고상한 인간이 된다는 차원은 아니고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그 복음 안에 있긴 있습니다마는 우리가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나가야 되는 것은 분명한 겁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영적 시선을 어디 두고 살아야 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거지요. 우리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희노애락들 분노, 좌절, 열정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거는 있긴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 영적 시선을 하나님에게로 돌려 보자, 성서기자들이 그걸 경험했고, 거기서 절대 안식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예, 강의안 밑에서 네 번째 줄부터 제가 한 번 읽고 마치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편기자의 영적 시선이 하나님을 향했다는 사실이다. 자기에게서 벌어지는 온갖 문제에만 매몰되어 있었다면 분노, 좌절, 걱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이게 우리의 일반적 삶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의와 그의 통치에 집중될 때만 우리 삶은 놀라운 영적 깊이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예, 여기까지입니다. 잠시 차 한 잔 마시고 질문응답 받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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