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99편 녹취록-거룩하신 하나님

조회 수 998 추천 수 0 2010.09.23 18:45:37

시편 99편 강해-거룩하신 하나님

 

시편 99편을 보겠습니다. 1절에서 9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오래전 유대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익명의 영성가가 詩作을 했고 또 유대인들의 역사에서 더 다듬어지고 더 깊어진 신앙적 시를 오늘 우리가 함께 읽겠습니다. 수 천년의 간격을 뛰어 넘어서 우리가 거룩한 말씀을 읽게 됬습니다.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목소리로 이 시간 읽겠습니다.

 

1.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2.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시도다

3.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4.능력 있는 왕은 정의를 사랑하느니라 주께서 공의를 견고하게 세우시고 주께서 야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나이다

5.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6.그의 제사장들 중에는 모세와 아론이 있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중에는 사무엘이 있도다 그들이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

7.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니 그들은 그가 그들에게 주신 증거와 율례를 지켰도다

8.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9.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아멘!! 시편 99편입니다. 우리가 수요일 모여서 공부하는 것은 1월 첫째 주였어요. 그 전에는 제가 집에서 MP3 혹은 동영상 녹화해서 인터넷으로 나갔었는데, 우리 대구샘터교회의 정식 공부 모임으로 1월부터 시작했습니다. 벌써 오늘이 7월 21일인가요? 시간이 많이 갔네요. 벌써 반이 지났구요. 참 그렇습니다. 공부에 꾸준하게 나오신 분들은 시편이라고 하는 게 혼자서 읽다보면 그냥 스쳐지나가는 부분이 많이 있는데, 같이 공부하니까 그래도 거기에 많은 내용들이 많이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공부라고 하는 것은 자기 좋아서도 하는데요, 즐겨서 하기도 하는데, 억지로도 하는 공부도 있습니다. 이제 두 개다가 필요해요, 억지로 하는 것은 뭐 강제성이기도 하지만 어떤 시스템 안에 들어간다 그런 의미도 있는 거예요. 공교회의 하나의 멤버가 된다고 하는 것은 교회의 제도를 안에서 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같이 하겠다는 신앙적인 고백이거든요, 그런 점에서 학생들도 마찬가지고요, 학교에서도요, 그렇게 그런 경건훈련, 성경공부 이런데 참여하다 보면 제 경험입니다마는 남는 게 많이 있더라구요. 그런 방식으로 말이지요, 저도 공부하면서 가르친다기 보다도 스스로 공부하는 기회가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벌써 99편을 하게 되었네요. 다음 주 수요일이 100편이구요. 이렇게 해서 우리가 시편을 차츰, 점점 더 알아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오늘 제목은 “거룩하신 하나님,” 제목이 이제 쉬운 거지요, 그리고 다 아는 거고 말이지요, 거룩하신 하나님, 당연하지, 거룩하지,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면 곤란합니다. 지난 주 설교제목이 “예수그리스도는 누군가”라고 하는 거였습니다. 너무나도 뻔 한 제목이긴 한데,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상당히 많은 이야기 거리가 있거든요, 우리 각 개인들이 그 내용을 충실히 다 따라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알지 못하는 더 많은 이야기들이 기독교 신앙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을 어렴풋이 일단 짐작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어느 쪽으로든 가야 되는구나, 이게 다가 아니구나, 예수 믿고 복 받고 평안하고 위로 받고 죽어서 천당 간다 이런 간단한 구도만이 아니라 더 많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와 연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거기 있다고 하는 것을 눈치를 채고 있어야죠, 그래야지 다른 이야기들이 귀에 들어오게 될 겁니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거룩하다고 할 때는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러면 속되다하고 반대되는 뜻이겠네요, 그럼 속된 건 뭐고 거룩한 건 뭘까요? 교회는 거룩하고 세상은 속될까요?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기는 좀 정확한 건 아닙니다.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바로 말씀 드린 대로 속되지 않은 것, 악하지 않은 것 깨끗한 것, 좋은 것, 이러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하나님에 대한 속성으로 말할 때의 그 거룩성 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생각을 뛰어 넘는 거예요. 그게 뭘까, 그런 것들을 우리가 오늘 차츰차츰 찾아볼까 생각합니다.

 

여기 99편은 여호와 대관식 때 불리던 여러 시편 중에 하나입니다. 여호와 대관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다, 참된 왕이다 대관식 자체는 왕 즉위식 아니겠어요, 여호와의 즉위식이라고 하니까 이것은 일반 왕들을 비유적으로 얘기하는 것 뿐이고, 참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는 그런 의식에서 부른 찬송, 기도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99편의 특징은 각 연마다 똑 같은 후렴이 반복된다고 하는 겁니다. 거룩하다고 하는 겁니다. 3절에 보면, 후 반절에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되어 있지요? 5절에도 보면, 그는 거룩하시다 되어 있지요? 그리고 9절 후반부에 보면,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이렇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찬송은 혹은 이 시편은 앞의 부분은 일반 청중들이 그렇게 부른 거고, 후렴부분은 전문적인 성가대라고 할까요, 그 당시에 하나님의 성전에 소속되어 있던 그런 사람들, 성가대가 부른 게 아니냐,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는 시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그런 것들을 지금 반복하고 있거든요? 참고적으로 일단, 신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면 성도다, 거룩한 무리다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하기오스(ἅγίος)라고 하거든요?

 

거룩한 성도, 무리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다 그런 이야기는 동의할 수 있는데, 마땅한데, 믿는 사람들이 거룩한 무리라고 하는 것은 조금 과장된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가 있어요. 하나님을 아무리 믿어도 사실 거룩하다고 이야기 하기는 힘들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붙이는 거룩이라고 하는 거하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인 성도라고 할 때의 그 거룩 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다른 뜻이죠, 오늘 거룩하다고 하는 게 뭐냐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이 거룩이 단순히 세속적인 게 아닌 차원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런 것을 우리가 좀 따라가려고 하는 거지요. 제 강의안에 쓰지는 않았습니다만, 말을 하다 보니깐 생각이 나서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이 하나님 경험, 종교경험에 가득한 원초적인 어떠한 차원, 그걸 가리켜서 전문적인 용어로 누미노제(Numinose)라고 합니다. 들어봤지요? 누미노제 혹은 누멘 (Numen) 이라고 하는 겁니다.누미노제라고 합니다. 루돌프 오트(Rudolf Otto)라고 하는 유명한 종교학자가 쓴 책 『DAS HEILIGE』에 나오는 개념이거든요? “거룩”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었다고 하던가요? 『성스러움의 의미 DAS HEILIGE』길희성역, 분도출판사 독일어 책으로 『DAS HEILIGE』거룩한 것에 대한 겁니다. 그게 누미노제의 경험인데,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두려움, 오늘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시편 99편의 “거룩한 하나님”하고 연결되는 거지요. 예, 그게 뭘까요,

 

거룩한 두려움, 우리가 길을 가다가 캄캄한데 특히 여자분들이 강도를 만났다고 하면 큰 충격을 받지 않겠습니까,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런 두려움 하고는 다른 거거든요,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요, 구약성서의 예를 빌리자면, 어떤 게 마땅할까요?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붙는 가시떨기 나무 앞에서 경험했던 어떤 것입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절대적인 것은 언어로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그런 경험을 할 겁니다. 깊은 어떤 체험들, 여러분들이 하실걸요? 사춘기 때부터 우리들에게는 그런 경험들이 자주 일어나고요, 살다 보면 그런 것들을 다 막아 버립니다. 내가 살아있다고 하는 것하고 죽는 다는 것, 존재 하냐, 아니냐, 그런 어떤 충격들, 자기 삶을 확인하기 어려운 그런 경험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게 아주 초보적인 종교경험인데요, 세월이 지나면서 모든 것들이 모두 매너리즘으로 떨어져갖고 그런 걸 다 막아 버립니다. 아, 그래서 종교생활 마저도 그런 매너리즘에 빠질 경우가 많이 있지요. 그러니까 거룩한 두려움 그건 언어로 잡아낼 수 없는 내가 어떤 사람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 영혼을 불길이 사로잡는 거와 같은 그러한 경험들입니다. 제 표현이 조금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는데, 그건 아주 분명한 거니까 여러분들이 아직 그런 것들을 경험하시지 못하셨다고 한다면, 했겠지만, 아마 잊어버릴 수도 있고요, 아주 충격이 작은 거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개인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좀 예민할 필요가 있는 거지요.

 

오늘 시편 99편은 이렇게 후렴에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하나님을 거룩하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각각 세 연에 나와 있는 그 내용을 조금씩 따라가면, 이 거룩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 손에 조금 더 잡힐 겁니다. 보시지요, 제 1연, 1절에서 3절입니다. 제가 소제목으로 “세상의 흔들림”이렇게 잡았습니다. 여러분들도 다르게 잡을 수 있어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성서텍스트는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구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풀어서 완벽하게 해명할 수 없을 정도로의 영적인 깊이가 있다는 뜻이고요, 종말까지 새롭게 계속 이해되어야 할 그러한 말씀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목사가 몇 가지 제목으로 이야기한 것으로 이것이 다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 두십시오. 시편 기자가 그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그리고 땅이 흔들린다,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걸 읽으면서 보통 때 읽으면서 그냥 지나가겠지만, 지나가지 않는 이게 뭘까에 대해서 더 강력하게 우리의 내면에서 궁금증이 솟아난다면, 그건 이제 영적으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구나, 그런가 보다 그렇게 지나가게 되면 조금 느슨한 관계에 있는 거지요. 이런 진술들이 사실, 그냥 우리 눈에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여호와가 다스린다, 그가 왕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사실을 사람들이 인정을 하나요? 인정하지 않지요? 우리들은 물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인정한다고 말을 하고 인정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는 그게 사실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이 잘 못 되서라기보다도 이 세상에 돌아가는 메카니즘 자체가 하나님이 통치한다고 하는 것 하고는 좀 거리가 멀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이런 일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들 필요도 없지요? 하나님이 정말 다스리신다고 한다면, 왜 악한 것은 계속 일어나고요, 다비아에도 도희아빠라는 분이 도희가 백혈병이 걸린 것 때문에 투병생활에 대해서 계속 올리고 기도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데요, 그렇게 아홉 살 된 소녀가 무균실에 두 달 동안 있고요, 지금 일반병동에 가서 계속 투병하고 있는데,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달라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전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 같지 않게 여겨지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하는 사실 속으로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각자 직장생활 할 때도 마찬가지고 말이지요. 이 세속의 돌아가는 힘들은 제멋대로 되는 것 같아요. 그런 마당에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시니,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다, 세상사람, 만민이 떠나요? 안 떨거든요, 예? 자기 잘난 맛에 다 살지 않습니까, 목에 힘주고 살지 않습니까,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살지 않습니까, 제가 뭐 지금 설교조로 말씀 드리는 거 아닙니다. 현상에 나타난 걸 그대로 말씀 드리는 거예요. 그런 것만 본다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여기 오늘 시편 기자들이 이야기 하는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하는 사실과, 그리고 만민들이 떨 것이라고 하는 이 말을 얼마나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드리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질문해 볼 만한 거지요. 요거는 이제 말씀을 읽을 때만 그런가, 그렇다고 믿는 게 좋겠지, 하면서 실제적으로 거리가 멉니다.

 

사실은요. 이건 여러분들이 믿음이 없어서 아니고요, 하여튼 세계 돌아가는 이치가 다 그렇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시편기자의 고백은 좀 다른 차원으로 접근을 해야 이해가 되는 겁니다. 어떤 근본적인 사태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강의안에 정리해 놨습니다. 여호와는 창조주시고 인간은 피조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주 명명백백하게 뚫어보는 영적인 시각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다른 메카니즘들, 힘 있는 권력가들이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이 굉장히 힘 있는 것 같지만, 결국 그런 것은 피상적인 겁니다. 곁가지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건 피조물이 자기가 피조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자기를 과대 포장하는 행위들이거든요, 그래도 자기 자신들이 신나서 살겠습니다마는 여러분, 그런데, 결국 그 방식으로, 뭐예요, 자기의 생명의 충만감을 느낄 수 없는 거지요. 이건 100% 확실한 겁니다. 그 맥락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계를 보는 통로, 그런 걸 찾아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을 부러워한다거나, 자기 패배중의에 빠진다거나 그런 거하고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러니까 피조물인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도 자기 생명을 완성할 수 없고 이렇게 가득 채울 수 없고 조금이라도 확장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 사실을 조금이라도 눈치 채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두려워하는 거지요. 아, 내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구나, 그걸 알게 되는 거지요. 예, 창조주 앞에 선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다가 결국은 완전한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아니면 그것을 또 극복하기 위해서 지나친 열광주의에 빠진다거나 소비를 통해서 자기를 확인하려고 한다거나, 하여튼 이런 저런 방식으로 자기를 확장하고 있긴 있지만, 여러분 그런 건 부러워하지 않으시겠지요? 그런 건 되지 않는다는 거 아시죠?

 

우리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우리 피조물의 한계를 인정하고 우리의 생명은 우리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 사실을 보는 거죠, 그런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성 입니다. 창조능력이 거룩성 인거예요. 사실은, 그런데 그거는 우리가 어떤 걸로 숫자로 계산해 내거나 말로 포장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뛰어넘으시기 때문예요. 그러니까 그것은 거룩하다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생명의 신비들을 볼 때 우리는 그 분 앞에서 이렇게 고백하는 거죠, 찬송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다른 것을 말할 개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 거기에 첫 번째 연이었었구요. 첫 번째 연에서만 보더라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거룩성이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깊이가 있다, 다른 거다 알 수 있겠지요? 제 2연 4절에서 5절입니다. 시편기자는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을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다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사랑하고 공의를 견고하게 세운다 이것도 많이 들었던 이야기거든요, 이 정의와 공의라고 하는 단어는 좀 비슷해요. 굳이 따로 번역을 하긴 했습니다마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을 제가 마틴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을 좀 봤거든요, 루터가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영성가이고요. 그가 신비주의 영성수도원 수도승 출신이예요. 그리고 개혁자이고 신학자이고 참 놀랍습니다. 거기다가 한 마디 덧붙이면 독일문학에서도 독일어성경 번역은 대단한 업적으로 인정되잖아요? 그러니까 루터에 의해서, 라틴어 성경만 미사에서 사용되던 것이 독일어 성경으로 보게 되었고 일종의 교회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할까, 그렇습니다. 독일어 성경중에서 루터가 비텐베르크에서 종교재판 받고 피신해 갖고 프레드릭이라는 선제후가 있는 성예요, 제가 이름을 잊어 버렸어요.(바르트부르크 성)거기에 피신해 있는 몇 년동안 신구약을 다 번역했습니다. 잠깐 봤더니요. 정의를 게리히트(Gericht)라고 되어있고, 공의를 게레히틱카이트(Gerechtigkeit) 이렇게 해 놨지요, 똑 같은 뜻입니다. Gericht 이게 정의고요. Gerechtigkeit 이렇게 붙인 것은 Gericht, 이것을 추상명사화 한 거거든요, 정의로움 그런 정도의 의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여튼 똑같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잘못은 아니예요.

 

여기에 시편기자가 야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신다, 그렇게 부연설명하지 않았습니까, 야곱은 이스라엘을 뜻하는 거예요. 성경에는 야곱을 개인을 뜻할 때도 있지만, 야곱 이스라엘을 말할때는 이스라엘 민족을 뜻한다고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정의롭게 다스렸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것도 사실은 꼬뚜리를 잡으려면 잡을 수 있는 거예요. 우리 개인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억울해 억울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부당한 분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잖아요, 내가 괜찮은 사람인데 내 인생이 이렇게 풀리냐, 이렇게 시작하면 다 억울한 거구요, 정의롭지 못한 거구요. 아, 내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다고 생각하면 이제 하나님이 정의롭게 느껴지는 건데요, 똑 같은 사항을 두고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게 개인의 인생이기도 하고 한 민족의 역사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해는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사건을 우리가 마음 먹기에 달렸다, 그런 뜻은 전혀 아닙니다. 이거는 우리를 합리화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가 아주 명명백백한 사실이라고 하는 영적인 시각에서 나온 고백인거지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이제 그걸 우리는 성서에서 배우는 겁니다.

 

앞에서 1연을 공부할 때도 잠깐 짚은 것 같습니다만, 이 세상은 불의가 판을 치는 것 같이 보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도 그렇고 우리 개인적인 삶도 그렇고 지금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표면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혹은 실질적으로 보면 이 세계는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통치세계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명확하게 이해를 하시고 계셔야 되요. 약간 설교조로 한 마디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 신앙은 특별히 부활신앙을 믿잖아요, 부활은 궁극적인 승리 아니겠습니까, 이 세계의 시시비비 여러 가지 그런 것들이 몽땅 다른 차원으로 생명의 세계로 변화된다고 하는 그것을 우리가 전제한다고 할 때 이건 우리가 손해다, 아니다 이런 걸 말할 게 하나도 없는 하나님의 온전한 정의로운 승리하는, 이 정의로운 것은 뭐예요, 악한 놈 완전히 없애고, 착한 사람을 살려내고, 그런 것만을 정의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낮은 수준입니다. 그 모든 것까지 살려내는 힘을 가리켜서 정의라고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쁜 놈, 나쁜 놈 이거 다 골라내서 젓가락으로 콩알 하나하나 집어 내듯이 그렇게 해야만 정의롭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우리 인간적인 생각인 겁니다. 모르겠어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때에 어떻게 하실지에 대해서는, 제가 재단하는 방식으로는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 제 2연 주제와 연관해서 하나님은 공의롭고 정의롭게 판단하시는데 그것이 우리의 눈으로 볼 때 나쁜 놈 이쁜 놈 골라내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활 생명이 온 만민에게 일치되는, 실현되는 방식으로 하신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설교 차원이라고 하는 것을 그런 방식으로 말씀 드린 거구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이 세계가 표면적으로는 불의하고, 불공정하고,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왜 저렇게 어려움을 당하느냐라는 연민도 느끼고요, 그렇지만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의 정의가 통치하는 세계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제가 그 강의안에 일상적인 예를 하나 들었습니다. 돈이 많고 건강한 사람이라고 해서 하루 열끼 스무끼 먹을 수 없어요, 똑 같습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다만 반찬이 얼마나 있냐, 없냐 그런 차이일 뿐이지 세끼 먹는 것은 똑 같습니다. 아무리 하늘의 새를 떨어뜨리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미국의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태양빛을 독점할 수 있나요? 아니거든요, 거지도, 노숙자도 똑 같은 분량의 해빛만 내리 쪼입니다. 정의로운 거 아니예요? 기본적으로 정의로운 거 아니겠습니까, 누구나 똑 같이 몇 리터의 산소를 호흡하면서 사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제 이야기가 말장난처럼 들리진 않겠지요? 그런 거 보다는 지금 이 세상에서 조금 더 경제적으로 넉넉하냐, 아니냐, 그런 것들이 경제적인 것들이 중요하지 뭐, 햇빛, 세 끼 먹을거리 얘기하냐, 그것 제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바탕은 그렇다고 하는 거지요. 하나님의 정의가 우리 삶 자체를 끌어가고 있다, 그 시각을 놓치지 말아야 되는 거지요.

 

하나님의 정의로움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라고 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어떤 것인지 우리가 다 집어 낼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정의롭게 통치하셨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억울하다고 많이 생각할걸요?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가지고 40년동안 광야에서 고생시키냐, 실제적으로 그런 것들은 출애굽기에 많이 나왔고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사실은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은 뭐 주변의 제국에 의해서 수 천년동안 거의 수탈만 당했거든요, 시편기자가 이 시를 쓸 그 당시에도 바벨론 포로 이후인데요, 바벨론 포로 이후 석방만 되면 뭔가 세계가 잘 될 것 같다, 그랬는데,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시편기자는 새로운 차원의 영성으로 하나님이 정의롭게 이스라엘을 통치하신다, 얘기한 거죠, 여러분 각자각자도 하나님이 그렇게 통치하시니까 혹시라도 억울하는 게 있으면 접어 두십시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다 얘기 할 수 있지요.

 

제 3연, 6절에서 9절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인물 세 사람을 열거합니다. 모세, 아론, 사무엘입니다. 이 시편기자가 위대한 정치인을 거론하지 않고요, 왕들을 거론하지 않고 종교지도자들을 거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했다, 그러는 거지요. 구름기둥가운데서 말씀했다고 하는 건데, 이건 광야 생활에 구름기둥, 불기둥, 그런 것들을 이야기 하고요, 시내산에서의 자욱한 연기, 구름, 거기서 십계명을 받은 사건들, 등등..여러가지들을 가리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은폐의 방식으로 이 이스라엘이 종교적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고, 그들은 말씀을 수행했다, 얘기를 하는 거구요, 또 하나 중요한 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8절 중반절에 있는 거예요.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무슨 뜻일까요? 금송아지을 섬겼으면, 많이 벌을 주고 우상을 섬겼으면 벌을 주고 그런 일들이 일어난 것을 여기서 상기시키는 거죠, 그렇게는 했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그들을 다 용서하셨다, 그들을 잘 못대로만 생각한다면야, 진작에 다 민족이 멸절될 가능성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부분적으로 벌을 받고 대개는 다 용서 받았다,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용서야말로 거룩성을 이야기하는 가장 분명한 어떤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룩이라고 하는 것이 여러 가지하고 연관되지요. 거룩은 깨끗하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생명사건인거예요. 그러니까 용서, 이 세가지 단어, 거룩, 용서, 생명, 이 세 가지를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으세요? 그런 걸 성서에 나오는 단어들, 개념들을 연결해서, 또 억지로 연결시키는 것은 우스운 거고요, 바르게 해석해 내는 거지요, 그게 혹은 신앙적인 혹은 신학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요. 음악 작곡을 할때도 그런 것 같아요. 콩나물 대가리 그 오선지에 얼마나 변화가 있겠습니까, 줄도 뭐, 다섯줄에다가 덧줄 한다고 해 봐야 7,8줄밖에 안되고요, 거기 뻔하거든요, 눈에 딱 보이는 건데, 거기서 오만가지 조화로운 소리를 만들어 내잖아요? 음과 음 사이를 어떻게 연결해 내느냐에 따라서 각자의 작곡자들이 창조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신앙, 신학도 그렇습니다. 거룩성, 용서, 생명, 이런 것을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시라고 참고적으로 말씀 드린 겁니다. 이게 다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성서적인 용어입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용서, 잘 생각해 보세요, 그러니까 이게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비유거든요? 탕자가 왔을때,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요놈, 잘 못했지, 그럼 회개했냐, 그럼 됬다, 받아 드린다, 그렇게 하지 않으셨거든요? 있는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거예요.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님께서 술 당장 끊어라든지 아니면 잘 못한 것 다 그만 두고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고요, 모두, 집을 버리고 포기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거였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차원을 더 넘어서는 거지요.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인격적인, 신앙적인 상처들, 한계들, 그것 가지고 너무 불안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대로 있는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받아드리시는 거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은혜라고 할 수 있지요. 칭의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우리가 깨끗해갖고 뭔가 괜찮은 게 있어갖고 하나님에게 점수 딸 수 있는 거와 같은 것으로 인정받는다, 주고받고 하는 이건, 계산, 상업적인 거죠, 이건 용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거룩성하고는 거리가 먼거죠, 예, 여러분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인식하고 경험했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건 당연하죠, 그를 찬양하는 건 당연하죠, 그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찬송가에도 많고요, 시편에도 자주 나오는, 그들이 그냥 거룩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건 아시겠지요? 거기에는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는 겁니다. 창조, 용서, 칭의, 선과 악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뛰어 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생명창조적 용서, 그런 단계인 거지요. 그건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고유한 창조사건입니다. 아, 이렇게 이야기 하면 되겠네요. 하나님의 거룩은 첫 번 창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창조하시는 거예요. 새롭게.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보시고 받아드리시고, 용납하시고, 종말에 가서 이 세계를 우주론적으로 창조를 완성하는 그러한 대 우주의 역사의 드라마가 성서가 이야기 하는 인간,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한 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예, 잠깐 차 한잔 마시고 다음에 질문응답 받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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