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100편 녹취록-선하신 하나님

조회 수 1308 추천 수 0 2010.09.23 22:32:45

시편 100편 강해-선하신 하나님

 

시편 100편 아주 짧은 구절입니다. 1절에서 5절까지 있습니다. 한 목소리로 이 시편 100편을 읽겠습니다.

 

〚감사의 시〛

1.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2.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3.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4.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5.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아멘!! 예, 아주 짧은 구절입니다. 이 100편, 숫자가 뭐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100편이라고 하니까 조금 더 기대가 되는군요. 이 100편은 95편하고 비슷한 특징을 보입니다. 크게 보면 두 가지인데요, 이 시편은 성전에 들어갈 때 합창단에 의해 불린 찬송이라고 하는 것이고요, 그 그림이 그려지시지요? 예루살렘 성전 말입니다. 저는 가 보질 못했어요. 이 예루살렘 성전을 처음에 솔로몬이 짓긴 했는데요, 그런데 여러 번 무너졌습니다. 새로 짓고 새로 짓고, 지금은 어느 상태인지는 제가 정확하게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이 유대사람들은 이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신앙생활이 유지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전에 들어 갈 때 마음이 어땠을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겠지요? 그 때 합창단이 부르는 거구요, 다른 하나 찬송은 당연한 이야기 이겠군요, 하나님을 높이는 찬송이라고 하는 겁니다. 성전에 들어갈 때 부르는 찬송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을 높이는 찬송이지요, 요즘으로 바꿔 말하면 예배찬송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드릴 때 부르는 <찬송 모음집>에 나와 있는 찬송이 모두가 다 예배찬송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복음찬송가도 있고, 여러 가지 종류의 우리 신앙을 고백하는 찬송도 있습니다. 부흥 찬송가도 있고요, 등등.. 우리 사명을 다짐하는 찬송도 있습니다. 그런 것 하고 예배찬송은 다른 거예요.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저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는 주로 예배찬송을 합니다. 그리고 설교 끝난 다음에 부르는 찬송 하나는 설교 주제에 맞도록 찾는데 그게 찾기도 쉽지않아요. 우리나라 찬송이 좀 빈약합니다. 이게요, 예배드릴 때 사용하는 찬송가인데 예배드릴 때 드리는 찬송이 앞에 별로 없어요. 하나님 영광, 하나님 송가, 창조, 이런 것들이 별로 없고요, 대게 이제 우리가 보통 은혜 받는다고 하는 차원의 찬송입니다. 그런 것들이 무의미하다고 하는 것은 아니고, 예배 때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와서 한 풀이? 하면 안 되는 거지요, 예배 때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자기 혼자 어떻게 해든지 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청원하고 간구하고 그런 건 어떻게 하더라도 그거는 우리 인간의 가장 깊숙한 절망가운데서 나오는 자기 하소연이라고 하는 점에서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거든요, 저는 다른 때도 한 번 말씀 드렸지만, 경배와 찬양예배, 이것에 대해서는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인간의 감정이 무절제하게 확산 되거든요, 사람이 기쁘면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그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건 따로 하는 거고, 대 예배 때는 개인의 한숨, 한탄 모든 것까지 다 묻어 두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해야 되거든요, 이제 이런 구분이 안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내가 마음이 뭉클해갖고 두 손 들고 옆 사람 손 잡고 찬송 부르다 보니까 속이 후련하더라, 기쁘더라 이런 걸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은혜는 가능하지만, 예배는 아닙니다.

 

한 말씀 더 드린다면 예배는 은혜 받으러 드리는 거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 드린다는 거예요. 그 차이를 여러분들이 잘 아셔야 됩니다. 예배찬송입니다. 제가 그 강의안에 썼습니다만, 사람의 고통, 슬픔, 자랑, 다 뒤로 물려, 어떻게 보면 이런 것들은 정말 사소한 것들, ‘어떻게 보면’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빛에서 보면 사소한 것, 이런 것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다른 때 하나님께 하소연 하면 되는 거구요, 예배 때는 그건 아니다 하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가능한대로 인간의 희로애락과 관련된 그리고 애증과 관련된 분노, 이런 것과 관련된 것들은 조금 축소시키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느냐에 대해서 관심을 활짝 여는 이런 예배가 우리 일상에서도 가득해져야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오늘 구절이 몇 구절 안 되요, 한 절 한 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연결이 되고요,

 

1절 이렇습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간단한 구절이지요? 온 땅은 모든 사람들입니다. 이건 잘 생각하셔야 되요. 복 받은 사람 몇 사람만 하는 건 아니다, 기분 좋은 사람 몇 사람만이 아니라 불행과 슬픔이 있는 사람까지 다 포함되는 겁니다. 온 땅인 거예요. 그건 한 개인에게도 좋은 일이 있을 때만 찬송 부르는 것이 아니라 고뇌와 절망적인 것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찬송한다, 온 땅이여! 온 존재여! 온 삶이여! 온 인생이여! 이렇게까지 나갈 수 있어야 되겠지요,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얘기 하잖아요? 어떻게 즐거운 찬송을 부를 수 있을까요? 손뼉 치며, 하나의 표현입니다. 즐거운 찬송을 부른다고 하는 것이 뭘까요? 매일 교회 나와서 그렇게 열광적으로 찬송 부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실테고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을 때 그걸 생각하셔야 되요. 성서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다 시인들이예요. 그리고 신학적으로 압축된 이야기들이예요. 그림을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어떤 비유들입니다. 상징들이예요. 그런 걸 실제적인 걸로 무조건 이해를 하게 되면 오해하는 거지요.

 

시를 읽을 때 누가 그 시를 사실 언어로 읽습니까, 거기에는 메타포가 있고, 때에 따라서는 알레고리도 있고요, 직유법등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이해해야 되는 것처럼 성경도 그렇습니다. 그런 걸 전제하면서 이게 필요한 거죠, 그럼 그게 무엇을 담아내려고 하냐, 시인이 어떤 경험이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구체적으로 그렇다면 우리 삶에서 어떤 거냐, 하는 걸 생각하셔야 됩니다. 즐거운 찬송을 어떻게 부를까요, 기쁨으로 충만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쁨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늘 우리가 노래하고 싶은 그러한 영적인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렇겠죠? 여러분들도 그렇게 살고 싶으시죠? 이 말은 여러분 잘 생각하셔야 되요, 바로 앞에서 말씀 드렸던 거하고 연관되는데요, 내 인생이 잘 풀리니까 즐겁다, 그러니까 노래하고 싶다, 그 차원은 아닙니다.

 

모든 생명과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을 향하는 거지요. 이러한 시각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되죠? 잘 안되고 우리의 시각을 뭐가 가려요? 자기 자신이 가리죠? 대개 자기를 향해서 있으니까 시각이, 이게 다 무의식적으로 잠재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관심, 생명의 관심, 이런 것들이, 어떤 뜻인지 아시겠지요? 그런 것들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해서는 둔감해지고, 가능한대로 나의 삶에 대해서는 축소화되고,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셨는가가 우리의 삶, 혹은 우리의 영혼, 우리의 마음, 정신에 가득 채우는 그런 신앙이 되어야 되죠, 그러면 우리가 당연히 어떻게 하겠습니까, 노래하고 싶은 거죠,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방식의 즐거움이 아니라 어떤 것을 만족 시켜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존재와 현재와 과거와 미래까지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안다면 거기에 우리의 영적인 시각이 향해 있다면 당연히 이거는 즐거운 찬송을 부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2절에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는 것은 교회 일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니죠, 일상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삶, 그것입니다. 교회 왔을 때만이 아니라 모든 삶이죠, 전체,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거죠, 그럼 기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우리가 그 기쁨을 잃었다고 생각한다면, 아, 하나님의 손길을 내가 지금 느끼지 못하는구나, 그렇게 알아들으시면 됩니다. 그런 삶이 뭐냐,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단전호흡과 비슷한 거예요. 우리는 보통 무의식적으로 숨을 쉬잖아요? 늘 있으니까, 단전 호흡하는 사람들은 공기가 우리 몸 안에 들어가서 복식? 복근인가요? 거기 닿고 다시 나오고, 공기의 흐름을 몸으로 느끼는 훈련이거든요, 그러면 그들이 거기서 새로운 생명의 에너지를 경험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말이죠, 우리가 일상에서 공기를 이렇게 느끼면서 단전 호흡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면 여러분, 우리의 생명의 깊이는 전혀 다르게 우리들에게 다가 올 겁니다. 그게 이제 어느 정도에 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성령이 충만 하냐, 아니면 여전히 이것저것 모르냐, 큰 차이가 나겠지요.

 

하나님을 공기처럼 느낀다고 하는 것은 시편기자는 3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 연결이 되죠, 우리가 하나님을 단전호흡 하듯이 공기의 흐름을 느끼는 것처럼 경험한다고 하는 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겁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말은 아주 결정적인 건 아닙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확실하다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그는 종말까지 이르는 전체 역사의 주인이신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말은 앞으로 더 나가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자기를 더 드러 내신다, 그런 뜻도 포함됩니다. 이건 복잡한 신학적인 문제니까 접어두고요, 여호와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고 노래하고 그 앞에 나간다고 하는 2절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3절이 아니냐 그 얘기입니다. 핵심적으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이 찬송하고 섬긴다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늘 시편 기자는 두 가지 사실을 이야기 합니다. 그 두 가지는 동시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창조주라고 하는 사실이 첫 번째이고요, 우리가 피조물이라고 하는 사실이 두 번째입니다. 창조신앙은 사실은 시편만이 아니라 신구약 성서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또 이건, 주로 창조신앙은 창세기에 나오는데 시편이나 다른 데도 많이 나옵니다. 신구약 성서에만 나오는 게 아니라 다른 데도 좀 나와요, 예를 들자면 바벨론의 마르둑 신화라고 있는데 거기에도 마르둑이 세계를 창조한 얘기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차이가 있는데요, 성서의 창조신앙은 출애굽이나 사도신경등, 그 이후에 모든 것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반면에 마르둑 신화 이런 것은 독립적으로 떨어져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있는 거예요. 제가 설명을 하다 보니까 어떤 느낌이 오는데요, 유대인들하고 근동에 있는 사람들하고 차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거든요? 같은 지역이기 때문에요, 바벨론, 이집트, 유대 서로 영향을 받았습니다. 고대문명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떤 하나의 신앙의 출발점에서 단절되지 않고 자기들 역사 속에서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출애굽 사건의 하나님도 창조의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아까 여호와 하나님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분이라고 얘기했어요. 그건 틀림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부분적으로만 알고요,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셨지만, 당연히 그래야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불공평한 하나님이니까요,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서로 소통 공명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 경험이 아주 고유하게, 아주 독특하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거기서 자랐다, 그러한 역사의 결과가 예수그리스도에게까지 연결 된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지요, 제가 아까 마르둑이라는 신화를 말씀드렸는데 유대인들과 서로 어떤 정보를 주고받았거든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신앙의 단초들이, 출발들이 더 심화되는 거지요. 그런데 다른 데는 끝나 버리고 마는 거지요.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예, 창조주와 피조물, 흔하게 들었던 이야기지요, 그런데 이 창조성과 피조성의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놀랍습니다. 이건 뭐, 물리학, 생물학까지 다 연결되는 문제고요, 고고학, 인류학, 사회학까지 사실은 다 연결되는 것이고요, 창조와 피조의 관계에서 우리는 성서와 기독교 영성의 진면목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접어두고요,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제가 강의안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창조주는 존재의 근거를 자기내부에 둔다면 피조물은 존재의 근거를 자기 외부에 둔다.” 그런 얘기죠, 이건 결정적인 차이인 거죠, 여러분, 창조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다, 위대하다 그렇게 말하면 되지 뭐 존재의 근거가 내부에 있다, 외부에 있다, 그렇게 설명 하냐 골치 아프게, 그렇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는데요, 기독교 신앙은 그 방식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그런 방식의 설명이 아니면 이 세계에 기독교 하나님을 변증할 길이 없습니다. 보편적인 인식의 토대에서 하나님을 설명하는 방식인거죠, 이것에 대해서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른지요,

 

우리 피조물은 존재의 근거가 외부에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차(물)를 마시잖아요, 이것을 마시지 않으면 죽습니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거예요. 모든 것들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먹고사는 문제도 그렇고요, 사실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지만, 영적인 힘도 사실은 주어지는 거죠, 성령이 우리들에게 조명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기독교의 가장 기초의 칭의론에서 보더라도 우리 스스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다고 그래요?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들에게 전가되었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존재할 수 있는 존재자들이다, 그런 면에서 피조물이다 하는 거죠, 이런 것이 단순히 신학적인 표현만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 000교우 큰 아버지시던가요?) 서울대 물리학 교수이셨던 장회익 선생의 <공부도둑>이라는 유명한 책에 그런 이야기가 쓰여 있더라구요. 그 분이 젊었을 때 교회 다녔는데 중간 이후로 교회를 안 다니시는데,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있으세요. 거기서 이런저런 현대과학의 논의들을 다 거론하면서, 진화론과 관계된 거거든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지구 안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주어졌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렇게 자기가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로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건 생명이 외부에서 주어졌다고 하는 그런 과학적인 논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 그게 뭐 그리 중요 하냐, 우리가 살아가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돈 벌어서 오늘도 밥 해 먹고 사는 건데, 외부에서 주어지느냐, 내부냐, 그게 뭐 그리 중요하느냐 할 수 있는데 이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걸 모르면 헛수고를 할 수 있는 거거든요, 내가 의로워지고, 내가 내 생명을 채우고, 내가 노력해서 무엇을 할 수 있으려니 하는 것은 이건 기본적으로 피조물의 한계, 본성을 거스르는 거거든요,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 있어야 되는 거냐,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을 아시겠죠?

 

아주 기본적인 사유의 기초를 얘기하는 겁니다. 예, 제 강의안 마지막 그 부분의 단락에 그렇게 썼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 스스로 손을 댈 수 없다, 토기장의 손에서 만들어진 질그릇처럼 창조주에 의해서 주어질 뿐이다.” 저는 이런 성서와 기독교의 가르침이 소극적인 게 아니라 실체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오히려 적극적인 인간이해다 생각을 합니다. 4절 이렇습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예, 피조물이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는 것은 당연하죠,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바로 이 사실, 어떤 사실이요?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우리가 피조물이라고 하는 이 사실에 대한 인정이고 고백입니다. 그 다음 5절이 중요하지요,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예, 1절에서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로 시작해서 쭉 나오죠? 하나님을 섬기는 일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 성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자고 하는 것으로 이어지면서 마지막 결론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걸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찬송하고 기뻐하고 그 분을 섬기는 모든 일들의 근거가 있는 거지요, 이미 창조주라고 하는 고백에서 다 나온 이야기지만, 그걸 좀 더 구체화 시킵니다. 뭐예요?

 

하나님이 선하시다, 하나님이 선하시다, 바로 그 선하신 분의 인자와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친다, 영원하다 그 얘기입니다. 이런 신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인자하심, 성실하심을 아는데서, 그걸 경험하는데서 전적인 신뢰가 가능합니다. 여름 수련회 “주기도문” 준비를 하면서, 책도 좀 보면서, 요즘 <매일묵상>에 연속으로 글도 쓰고 있는데요, 글 쓰기 시작하니까 할 말이 참 많아지더군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 한구절만 가지고도 할 얘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아버지”라고 하는 것, 우리를 보호하시는 그러한 분이라는 데에 표현인데요, 지금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 없는 시대를 살고 있잖아요, 불안하고 별로 근거가 없는 것을 찾고 말이지요, 고아처럼 살고 있는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거, 전적인 신뢰인거죠, 이건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하심을 알아야 되겠지요,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이 사실에 동의가 되시나요? 물론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이지 않을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자하셔? 성실하셔? 그런데 내 인생은 이래, 이런 일들이 왜 이렇게 벌어질꼬 그러한 늘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룹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여기에 대해서 불안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구체적으로 어떤 거냐 하는 것은 이 시간에 제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때도 한 두 번 이야기 한 것이기도 하고요, 하나님의 선하심, 인자하심, 성실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 거기에 우리의 영성, 우리의 신앙이 기초하고 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참 아름다운 시편이었지요? 우리 다시 한 번 1절에서 5절까지 제가 설명한 것을 기초로 두고 읽어 보겠습니다. 1.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2.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3.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4.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5.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이렇게 복 더위에 하루의 삶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인자하심, 성실하심이 우리가 세상에서 숨을 끊을 때까지 계속 되리라는 사실, 우리가 잊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의 삶을 걸어두고 기쁨으로 섬기며 살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들 삶의 상처 난 부분들을 주님께서 씻기시고 회복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0.09.23 23:43:15
*.120.170.243

와, 이렇게 많은 시편 녹취록을

하루에 다 푸셔서 올리시다니요, 음.

오늘 다 한 게 아니라

앞서 풀어놓았던 것은 오늘 정리해서 올리셨겠군요.

수고가 너무 많았습니다.

나도 기회가 되는 대로

잘 읽어보겠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profile

[레벨:38]클라라

2010.09.25 18:29:38
*.209.173.60

목사님,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그동안 시편받아쓰기가 많이 밀려 있어서요,

기다리시는 분들에게 너무 송구스럽기도 하고,

사실, 저도 이번에서야 강의를 듣게 되었거든요, 에효~~^^ 

그래서 추석 연휴만 벼르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무사히 임무 마친 것 같네요.^^

그런데, 앞 부분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요.

24강부터 47강까지요.

에효~~ 또 이건 언제나 마치려나..

목사님, 쉬엄쉬엄, 그렇지만 열시미 할께여~~!

응원 감사드립니다. ^^

 

참, 9,18,19강은 파일이 아예 엄써요.

나중에 땜빵을 좀 해 주셔야 될듯 합니다..헤헤..

 

목사님, 그리고,

맨날 맨날 말씀 드리는 거지만,

저, 시편받아쓰기하면서 얻은 수확 생각하면,

저는 백날이고 천날이고 요 받아쓰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정말, 무엇으로 이 기쁨, 즐거움을 표현해야 될까요?

주님이 제게만 특별하게 베푸신 밥상 앞에서 호식하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아, 딱 표현하자면 그거네요. 숲속에서 옹달샘 찾아가는 비밀길, 고걸 발견한 기분인걸요?

특히 102편, 받아쓰기 하면서 저..숨이 멋는 줄 알았어요.

그 숲길을 한참 걷다 보니 어느새 그 옛날 , 그 분들이 제 옆에 계시지 뭐예요?^^

(아, 이건 틀림없이 영화 아리에티 증후군같네여..헤헤)

profile

[레벨:32]도도아빠

2010.09.24 23:37:38
*.121.215.165

많은 교우들에게 그렇겠지만, 제게 이 시편은 큰 힘이 됩니다. 집사님도 짐작하시겠지요?

하루하루 읽는 시편으로 저를 돌아보고 하나님께 반 걸음이라도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이 시편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기도 합니다. 또 집사님, 고맙습니다.
profile

[레벨:38]클라라

2010.09.25 18:43:53
*.209.173.60

도도아빠, 김정환 집사님, 저는 요즘 집사님을 보면서 함빡 기분이 좋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많은데 그 중에서 특히 말씀에 집중하는 집사님 모습 뵈면서,

얼마나 기쁘고, 눈물날라고 하는지..

꼭 예전 제 모습을 뵙는 것 같아서요(저도 도희처럼 아플때가 있었잖아요.)

그때 저는 딱히 누가 말씀의 꼭지를 열어 주시는 분이 안 계셔서,

정말, 멀뚱멀뚱하게 지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은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었던 것 같네요.

그래서 줄창 성경은 붙들고 살았는데 그냥 겉돌 뿐이었어요.  

그렇게 지나오다가 <기독교를 말한다> 그책으로 정목사님을 처음 뵈었구요.

이해가 반타작도 안되었지만, 그 책이 계기가 되서

제가 살아온 신앙의 여정을 다시 곱씹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이제는..

시편기자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의 영광, 거룩"에 대한 지대한 관심사로

뒤뚱거리지만 이렇게 서 있게 되었네요.

집사님, 이 길 함께 걷게 되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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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6편 녹취록-무죄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10-25 875
20 25편 녹취록- 하나님의 길 file [2] 박은옥 2010-10-25 831
19 24편 녹취록-영광의 왕, 만군의 여호와 file 박은옥 2010-10-01 1225
18 103편 녹취록-여호와를 송축하라! file 박은옥 2010-09-25 1149
17 102편 녹취록-탄원과 찬양 file 박은옥 2010-09-25 1312
16 101편 녹취록-제관식 선포문 file 박은옥 2010-09-25 1442
» 100편 녹취록-선하신 하나님 file [4] 박은옥 2010-09-23 1308
14 99편 녹취록-거룩하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995
13 98편 녹취록-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file 박은옥 2010-09-23 1105
12 97편 녹취록-의로우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076
11 96편 녹취록-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 file 박은옥 2010-09-23 928
10 95편 녹취록-완악한 마음 file [3] 박은옥 2010-09-23 985
9 94편 녹취록-복수하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8-31 1548
8 93편 녹취록-하나님의 권능 file [2] 박은옥 2010-08-3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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