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24편 녹취록-영광의 왕, 만군의 여호와

조회 수 1227 추천 수 0 2010.10.01 00:26:00

시편 24편 강해-영광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시편 24편입니다. 오늘 말씀을 같이 공부 하겠습니다. 1절부터 10절까지입니다. 먼저 제가 읽을 테니까 여러분들은 눈으로 따라 보십시오. 내용을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공동번역>

〚다윗의 노래〛

1.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야훼의 것,

이 땅과 그 위에 사는 것이 모두 야훼의 것,

2.주께서 바다 밑에 기둥을 박으시고

이 땅을 그 물 위에 든든히 세우셨다.

3.어떤 사람이 야훼의 산에 오르랴?

어떤 사람이 그 성소에 들어서랴?

4.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

허망한 데 뜻을 두지 않고 거짓 맹세 아니하는 사람,

5.이런 사람은 야훼께 복을 받고

하느님께 구원받을 사람이다.

6.이런 사람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며

야곱의 하느님 앞에 나아갈 사람이다. (셀라)

7.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8.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힘세고 용맹하신 야훼이시다.

싸움터에서 그 용맹 떨치신 야훼이시다.

9.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10.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영광의 왕은 만군의 야훼 그분이시다. (셀라)

 

아멘! 7절부터 10절까지는 독일 찬송가에 있는 그러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일반성가로도 이런 제목의 찬송이 있을 겁니다.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유명한 구절이지요? 예, 이 시간에 같이 읽겠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같이 읽겠습니다.

 

〚다윗의 노래〛

1.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야훼의 것,

이 땅과 그 위에 사는 것이 모두 야훼의 것,

2.주께서 바다 밑에 기둥을 박으시고

이 땅을 그 물 위에 든든히 세우셨다.

3.어떤 사람이 야훼의 산에 오르랴?

어떤 사람이 그 성소에 들어서랴?

4.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

허망한 데 뜻을 두지 않고 거짓 맹세 아니하는 사람,

5.이런 사람은 야훼께 복을 받고

하느님께 구원받을 사람이다.

6.이런 사람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며

야곱의 하느님 앞에 나아갈 사람이다. (셀라)

7.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8.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힘세고 용맹하신 야훼이시다.

싸움터에서 그 용맹 떨치신 야훼이시다.

9.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10.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영광의 왕은 만군의 야훼 그분이시다. (셀라)

 

<참고>개역개정

〚다윗의 시〛

1.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5.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7.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아멘! 이런 말씀을 우리가 같이 읽을 때는 늘 그 당시로 돌아가야 됩니다. 이거는 아주 오래전에 고대시대에 살던 어떤 위대한 영성가가 생각을 했고, 기록을 했다고 보고요.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전승되어온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니까 2500년 전 훨씬 전 이야기예요. 지금이야 어느 정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천동설이 아니라 지동설이구요, 사실은 천동설이라는 말도 크게 틀린 건 아니예요. 이 태양계 자체가 움직이고 있고요. 또 태양계가 들어 있는 은하계인가? 하여튼 안드로메다좌인가, 그런 일종의 성운이죠, 이게 다 계속 움직이고 있고, 우주 자체가 팽창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너무 엄청난 사건이어서 우리가 의식을 못하고 있을 뿐이죠. 그런 점에서는 천동설도 기본적으로는 틀리지 않습니다. 다만 고대시대 때 천동설이라고 하는 것은 지구는 가만히 있고, 다른 별들이 돈다, 이렇게 말하니까 틀렸다고 하는 거지 지구를 포함한 태양이 있고, 태양도 움직이고 있고, 확장되고 그런 점에서 모든 것이 움직이니까 천동설이라고 하는 그 낱말 뜻만 보면 틀린 건 아닙니다.

 

그 당시에 지금하고는 전혀 다른 세계관에 있었던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의 고유한 그러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이 시편기자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게 중요합니다. 음악에서도 마찬가지잖아요? 쇼팽, 바흐 이런 것들을 오늘 식으로 편곡해서 친다고 해서, 오늘의 감각으로 무조건 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200년 300년 전에 그 당시의 음악가의 음악 경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대라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겁니다. 예, 그러한 시각으로 보는 건데요? 아무래도 그것은 예를 하나 들어야 되겠어요. 이게 중요한 거기 때문에, 이것은 오늘 이 본문만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성서 전체를 볼 때 중요한 자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어머니와의 교감을 촉감으로 느끼잖아요? 어머니 품안에 있는 느낌, 그리고 후각, 그러한 걸로 경험한단 말예요. 그런데 지금 큰 다음에는 어머니하고 그런 관계가 아니라 다른 관계로 하는 거예요. 그 유아가 만약에 글을 쓸 줄 안다면 촉각과 후각의 방식으로 경험한 어머니를 쓸 겁니다. 그러나 나중에도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를 생각하게 된다면, 바른 어머니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유아의 촉각과 후각이라고 하는 그러한 시각 이런 것도 필요한 거죠.

 

제가 오늘 왜 이렇게 서론이 기냐면 오늘 여기 본문 1절에서 2절에 여기 나와 있는 이야기들이 바로 고대 유대인들의 우주 물리학을 기초로 해서 기록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한 가지 그건 제가 설명을 하겠구요. 예, 오늘 여기 본문과 아울러서 다른 시편들도 제가 여러 번 설명했습니다만, 이거는 어떤 제사의식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찬송가라고 생각하셔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성서해석학자, 주석학자가 그렇게 이야기 하더라구요. 가을 축제 때 행하는 종교의식의 한 부분 이라고 합니다. 가을축제의 한 부분,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가을이 돼서, 어떤 절기겠지요, 정확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절기인지는 모르지만, 가을축제 절기를 맞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한 대목으로 이 시편이 낭독이 된 거지요. 그러니까 이러한 말씀들은 상당히 의식적이라는 걸 생각해야 되요. 시를 쓸 때 사실적인 것만 쓰는 것 아니잖아요? 사실적인 것을 쓰는 것은 신문기자가 쓰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문가자들도 사실적으로 안 쓰는 게 문제인데요, 이거는 신문기자가 사실적으로 쓴 게 아니라 사실적인 영감을 갖고 문학적 수사를 써서 썼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이 방식으로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무엇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 걸까요?

 

여기서는, 예, 표현을 보면 흡사 유아가 어머니 가슴에 안겨 있는 거와 같은 그러한 고대인들의 세계관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방식을 통해서 무언가를 이야기 하려고 했던 거예요. 그게 뭘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할까요?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배타적 하나님의 능력, 이런 것 들이예요. 아, 그건 우리가 뻔히 알고 있는 거다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시편기자의 독특한 영적 감수성, 그 문학적 수사를 통해서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건 그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도 중요하기도 합니다. 당연히, 오늘날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아니면 하나님의 권능, 그래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 그런 것들을 많이 이야기 하긴 하지만,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죠, 우리가 막 쏟아내는 하나님을 통해서 무엇을 얻었다든지, 했다든지 하는 것은 그게 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보다는 결국은 자기 관심인 거예요.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그러니까 사업이 부도날 지경이었는데도 헌금을 했더니 모든 게 기적적으로 됬다. 이런 걸 보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것을 확신한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권능, 초월적 능력, 이런 것들을 말한다고 말한 것은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결국은 자기에게 대한 관심이거든요, 여기 시편기자가 그러한 하나님의 배타적 능력을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는지 또 그것과의 신앙의 관계가 무언지 그런 것들을 우리가 알면 오늘의 신앙의 문제들이 뭔가를 또 분석할 수 있고요. 정말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좀 천천히 가 봅시다.

 

세 가지로 나눠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전체가 10절까지 있는데,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어요. 첫 번째는 이미 제가 서론적으로 강조한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진술입니다. 1절과 2절요. 이 땅의 모든 것, 이 세상의 모든 가득한 것, 그리고 그 위에 살아 있는 모든 것, 모든 생명체가 다 야훼 하나님의 것이다, 1절에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뭐, 당연히 그렇지, 생각하는 거하고, 아주 실질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하고는 큰 차이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너무 진부한 거예요. 일종의 신앙의 매너리즘에 딱 빠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입에서는 계속 종교적인 언어가 나오기는 하는데 죽은 언어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음악 하는 사람들도 매너리즘에 쉽게 빠지거든요, 맨 날 학생들한테 레슨 한다고 하지만 기술적으로 하고 맨 날 그 모양 그 타령이고 그러니까 그건 일종의 테크닉이 되 버리는 거지요. 그러니까 예술이나 시나 문학이나 신앙, 이런 것들은 테크닉이 아니라 창조적 세계, 보통 우리가 영성이라고 얘기하죠? 제가 테크닉하고 다른 거라고 비교해서 언젠가 얘기 한 것 같은데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어요? 테크닉이 아니라 사이언스라고 그랬어요.

 

사이언스는, 과학, 새롭게 앎의 문제, 새롭게 창조적으로 알아가는 그 태도를 얘기한다면, 테크닉은 이미 있던 것을 어떻게 확대 재생산하는가, 여기에 머물러 있는 거지요.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주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인들이 그런 사람들이 당연히 되어야 됩니다. 매일 매일이 새롭다고 그러잖아요? 그렇기도 하고 또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종말까지 자기를 계시하신다고 그럽니다. 이게 종말론에서 말하는 핵심중의 하나거든요?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하나님이 다가 아니라 그 마지막까지, 그 마지막은 생명이 완성되는 때고 전혀 질적으로 다른 생명이 시작되어서 그 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이렇게 구분되는 방식이 아니라 영원히 시간이 지속되는 지금 어떤 것으로도 상상할 수 없는 우리가 여태까지 알고 있는 모든 세계와 그 범주로 재단하고 가둘 수 없는 생명의 시작이거든요? 그 때까지 하나님은 자기를 계속 계시하시니까, 계시는 자기를 알리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당연히 늘 새로워지는 거지요. 하나님이, 그런데 조금 익숙해지면 새로워지는 게 없어요. 그냥 교회생활에 익숙해진다거나 기도를 조금 더 사람들 듣기 좋게, 은혜롭게 한다거나 이런 정도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이 세상 생물과 무생물을 포함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그에게 속해 있다고 하는 이 고백, 이런 것들을 우리는 그냥 들은 풍월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고 또 우리의 신앙과 삶이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뭐가 달라질까요? 뭐가 당연히 달라져야 할까요? 음, 여러 가지 대답을 할 수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결국 그것하고 반대되는 개념인 거예요.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하는 거지요. 하나님의 것이니까, 이제 000교우가 얘기를 낳게 될 텐데 귀한 이런 생명을 낳게 되는 일이 얼마나 귀중합니까, 자기 자식도 자기 소유가 아니거든요, 이걸 다 한국교인들은 말로만 이렇게 이야기하지 자기 소유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벌어지는 이 문제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러한 자식도 내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러면 다른 소유나 그런 것들은 당연하죠, 뭐, 어떻게 보면 교수들이 알고 있는 지식 이런 것도 자기소유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눠지는가, 이런 것이 어떻게 더불어서, 내 것이 아니니까 이걸 내 것처럼 생각하면 이제 큰 착각인거죠, 그러니까 이제 그게 내 것이라 아니라고 하면 욕심이 생길 까닭이 없이, 이런 이야기로부터 다른 이야기도 많이 풀어 갈 수 있어요.

 

결국 그렇다면 우리는 청지기다 우리는 잠시 맡아서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청지기이면서 동시에 또 하나는 손님이다. 우리는 빌려 쓰는 손님일 뿐이지 결코 내가 안방주인처럼 세상을 살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들을 들으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거예요. 전부 내 것처럼 생각을 해갖고 여기서 손해 보는 걸 용납을 안 하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깍쟁이라는 말도 많이 듣잖아요? 이제 그런 것들이 기독교 중심에 들어가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은 처세술만 있으면서 기독교신앙에 무늬만 들어 온 이러한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모든 것이 소유된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이것은 엄청난 세계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들이 생각을 해야 될 것은 이 시편기자가 이 자연의 위대함을 말하고 있구나 아름다운 그러한 세계를 말하고 있구나 그런 정도로만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 자연을 찬양하는 것은 근동종교들이 많이 하는 거구요, 이 유대신앙은 그런 자연숭배가 아니라 그것을 창조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2절에 보면 이게 바로 고대인들의 우주관이 여기 그대로 나타났지요? 주께서, 주는 야훼라고 하는 뜻하고 똑같습니다. 주인이라고 하는 뜻이니까, 주께서 바다 밑에 기둥을 박으시고 그러니까 고대인들은 이 땅덩어리, 물을 포함한 덩어리가 어떤 기둥 위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기둥을 세워놓고 우리가 거기에 올라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세계관이 그들에게 있고, 또 이어서 이 땅을 그 물 위에 든든히 세우셨다. 땅이 물 위에 세워졌다, 그러니까 이 땅이 물 위에 떠 있는 걸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밑에도 물이고 하늘 우주 창공 너머에 하늘 끝도 물이예요. 물과 물로 나뉘는,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물만 있었는데, 갈라지게 해서 하늘의 물이고 밑에 물, 그 사이에 창공이 있고, 이런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대로 여기 나타나고 있지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이 속해 있는데, 이 세계를 기둥을 세워갖고 올려놓은 그러한 하나님의 권능, 1절에서 2절,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한 다음에 제가 앞에서 이 시가 가을축제 의식의 한 부분이라고 말씀 드렸듯이 성전에 들어갈 때에 어떤 태도여야 되느냐, 하는 것들에 대한 교훈이 3절에서 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절에서 6절, 3절 그대로 나와요, 어떤 사람이 야훼의 산에 오르랴? 어떤 사람이 그 성소에 들어서랴? 찬양이죠, 어떤 사람입니까, 4절에 보면, 두 가지 종류로, 두 가지 종류라기보다도, 뭐 한 가지이긴 한데 일단 다른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적극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좀 소극적인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적극적인 것은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 이게 적극적인 거죠, 행실과 마음이 깨끗하다, Positive한 거죠, 두 번째는 허망한데 뜻을 두지 않고 거짓맹세를 하지 아니하는 사람, 않고, 아니하는 이라는 말이 있어서 이걸 조금 Negative하다고 할 수 있는데, 포지티브던지, 네가티브던지 결국은 다 하나님 성소에 들어갈 만한 사람의 자격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겁니다. 요 대목을 주석한 성서학자의 말을 좀 빌려서 제가 말씀 드리면요, 유대 구약신앙의 원리가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에 대한 확신을 갖고, 예, 하나님과의 결합일까요? 이렇게 확신을 갖고, 기쁨에 찬 확신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찬양을 하는 차원에서도 그건 기쁨이니까, 그런 기쁨이 넘치는 확신으로 하나님의 관계에 들어가는 거, 이게 그것이 3절에 기록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야훼의 산에 오르고 성소에 들어가는 것, 정말 이것은 기쁨과 확신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6절에서도 그러한 이야기가 있는 거거든요? 그게 하나고, 원리가요.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간 사람, 혹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책임이 또한 강조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기쁨에 찬 깊은 확신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 들어간다고 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고, 그래서 구약성서 여러 군데에서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야 됩니다. 이게 잘못하면 추상적으로만 받아드려지거든요? 음악 하는 사람들은 그런 걸 잘 알 텐데, 그러니까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는 거예요.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거지요. 베토벤과 관계를 맺으면 그런 음악경험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서 구약성서가 가장 중요한 원리를 얘기하구요.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근동종교라고 한다면 어쩌면 대개 그런 것으로 끝납니다. 열광적이라고 할까, 엑스타시라고 할까, 뭐 그러한 종교의 희열, 환희, 그런 자극적이기도 하고, 그러한 것에 빠진다고 한다면, 유대종교는 상당히 책임을 요구하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책임도 똑 같이 강조 되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 또 하나는 관계라기보다도 다 관계이긴 관계인데, 이건 확신, 어떤 신뢰라고 할 수 있겠지요. 확신이 주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책임이 주어진다, 이 두 가지가 중요한 원리로 작용한다고 그래요.

 

그래서 오늘 여기 3절에서 6절에도 이야기들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소, 야훼 산, 그에게 나아간다, 그러한 찬양을 하면서 동시에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 허망한데 뜻을 두지 않고 거짓맹세하지 않는 사람, 이게 책임들이거든요. 이런 것들이 있는데 오늘 시편기자는 이런 것을 성전에 들어갈 사람을 위한 교훈으로 여기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건 조금 다른 단락 이예요. 성서주석학자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더라구요. 여기 24편에는 세 편으로 나누어져 있는 다른 시들이라고 그래요. 세 편으로 나누어진 시들이 결합되어 있는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는 제의, 의식에서 일치되기 때문에 하나로 묶여져도 큰 문제는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는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7절에서 10절인데요? 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지요? 이거는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이야기하는 거지요. 현현 나타나심 이예요. 어디에 나타나실까요? 성전이죠, 성소, 하나님의 현현,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현현에 대한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들아, 이렇게 이야기하네요. 그리도 문들아, 그리고 오래된 문들아, 혹은 영원한 문들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문들아, 이게 어떻게 말이 될까요? 그걸 뭐라고 그러지요? 살아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사물인데 사물을 인격체처럼 말해갖고 상대하는 표현하는 문학방식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예, 의인법이요, 그 문인데, 성소로 들어가는 문이거든요? 하나님이 나타나시려면 문을 열어야 되니까, 사실은 하나님은 문을 통해서만 가능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방식이 아니라 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문이 있든지 없든지 중요하지 않지만, 지금 이것은 노랫말 이예요. 시적인 표현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현현하신다고 하는 것에 대한 더 리얼한 표현, 문학적인 표현으로써 문들아, 영원한 문들아,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들어가시려면 문이 열려야 되니까요.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얼까요? 그건 법궤가 그곳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법궤에 하나님이 현현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법궤 안에 중요한 게 세 가지 있다고 그랬지요? 십계명, 아론의 지팡이, 만나, 맞지요? 맞을 겁니다. 십계명을 새긴 두 돌비(출25:16), 아론의 싹 난 지팡이(민16:1-11),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출16:33), (제가 요즘 다른 신학적인 문제에 빠져 있다 보니까 가장 초보적인 것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네요.) 예, 그러한 이 법궤를 하나님이 현현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이 경험하는 거지요. 그러나 사실은 엄격하게 말하면 법궤에만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게 일종의 상징인거예요. 보통 우리가 성만찬할 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몸과 피라고 생각하는 것하고 비슷합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그게 실제 화체(化體), 그렇게 변한다고 생각하고 루터는 하나님이 임재한다고 생각하고 쯔빙글리 이런 사람들은 기념설로 얘기 할 텐데요, 서로 입장이 다른 긴 하지만, 성만찬이라고 하는 종교적인 상징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 된다고 말하는 것은 다 동일합니다. 그 법궤가, 물론 지금은 법궤가 없지요. 역사적으로 다 사라졌으니깐, 나무로 만든 궤,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 현현한다고 유대인들이 그렇게 믿었다고 하는 것이 크게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노래를 하면서 왜 문을 열라고 그래요?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그 영광의 왕에 대한 묘사가 8절에도 있습니다. 거기서 키워드가 뭘까요? 용맹하다는 거예요. 용맹, 힘세고 용맹한 야훼, 싸움터에서 용맹을 떨치신 야훼, 용맹, 능력 이런 것들을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지금 가을축제를 벌이면서 유대인들이 성가대를 중심으로 해서 부른 찬양입니다. 문들아 열어라, 영광의 왕께서 들어가신다, 그 분은 정말 힘세고 용맹 있으신 야훼이시고 싸움터에서도 용맹을 떨치신 야훼이시다, 그 당시 사람들이 용맹, 능력 이런 것들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얼마나 필요로 했는지를 조금 생각하면 시편기자의 이런 진술은 우리가 정말 실질적으로 받아 드릴 수 있습니다. 예, 그것에 대해서는 제가 긴 말을 하지 않겠어요, 현대인들도, 그런 악한 능력도 있으니까 힘도 있으니까, 그런데서 힘들어 하잖아요? 그럴 때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선한 영이 자기를 도와준다면 얼마나 큰 하나님 경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고대 유대인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힘세고 싸움터에서 용맹을 떨치시는 그러한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예요. 다 각각의 종교에서 그 신은 자기들 민족을 아주 강한 능력으로 지켜주는 존재로 그렇게 인식이 됬습니다. 유대인들도 사실은 마찬가지인데요?

 

여기에는 그런 발전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야훼 하나님 이해도, 인식이해도요, 그 광야 40년 동안의 경험이라고 하는 것도 있고, 거기 보면 거기 보면 바로의 말굽에서 그들을 건져 주셨다 그런 표현도 있는 거구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이제는 어떻습니까, 생활이 어떻게 바뀌어요, 농사짓고 살아야 되거든 그러니까 야훼 하나님이 늦은 비와 이른 비를 적절하게 내려 주시는 그러한 분으로 신앙고백 되는 거예요. 하나는 농경문화에서 이해되었던 하나님이고, 또 하나는 농경생활이 아니라 유목생활에서 이해됬던 그러한 하나님 이해가 유대교 안에 사실은 다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변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구요. 바벨론 문명, 이런 것들도 들어 온 흔적도 있으니까, 그걸 전제하고 우리가 봐야 되겠지요? 그래서 자기들의 신이 자기들을 지키는 능력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은 다 마찬가지인데, 이 유대교에서는 이 능력이 창조자의 능력과 연결된다고 하는 점에서 훨씬 더 하나님 개념에 가까이 간, 이런 표현이 정확하지 않은데 다른 표현이 없어서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이 철학이 얘기하는 철학적 대상의 개념이냐, 이렇게 말은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거기에는 조금 약간, 그러니까 철학적으로는 자꾸만 사람들이 인식하고 이해하고 넓혀감으로써 어떤 철학이 말하려고 하는 중심의 존재근거를 따라가는 방식인데 도대체 하나님도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지는 분이냐, 철학이냐, 이러한 논란이 있긴 합니다마는 여기에는 서로 복잡한 문제가 서로 연루되어 있으니까 제가 긴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다 우리 인식이 그 철학하고 똑 같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계시 하실 때 우리가 바르게 이해해야 된다고 하는 점에서는 우리의 인식과 하나님의 자기계시 하고는 서로 맞물려 있는 겁니다. 그래서 창조능력과 그리고 실제의 삶, 전쟁터에서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과 연결된다고 하는 점에서 유대교가 말하는 하나님 이해는 주변 종교의 다른 시에 비해서 훨씬 탁월하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예, 대충 그런 얘기예요.

 

오늘 결론으로 삼을 말씀은 영광이라고 하는 겁니다. 영광, 영광의 왕이 누구냐, 계속 이야기하잖아요? 잘 생각해 보세요. 제가 영광에 대한 이야기들를 몇 번 했고요, 또 그것을 딱 끊어서 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성서를 읽으면서 혹은 기도하는 중에 혹은 예배를 드리는 중에서도 영광을 경험 할 수가 있습니다. 그건 굳이 조금 설명을 하자면 생명의 가장 심층적이고 역동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가장 심층적이고 가장 역동적인 그러한 현상,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뭐다! 딱 끊어서 결정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하나님의 능력 자체인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생명창조자이시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늘 그런 쪽으로 연결을 잘 시켜서 생각하세요. 하나님, 하면 막연하지요? 그럼 생명창조자? 그렇게 생각하시면 좀 더 구체적이지요? 성령? 하면 조금 추상적이지요? 자칫하면 또 주술적으로 떨어지지요? 생명의 영, 이렇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아주 우리들에게 가까이 있는 거예요. 지금도 이 안에도 성령이 함께 한다고 하는 이 말은 이거는 신앙적으로도 그렇고 실질적으로도 맞는 말인 겁니다. 우리가 지금 숨을 쉬면서 살아가잖아요? 숨을 쉬는 이거 자체가 성령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죽으니까, 생명을 가능하게 하니까요.

 

우리가 이러한 영과 어떻게 호흡하듯이 일치해서 사느냐, 그게 이제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한 걸 바탕에 놓고, 조금 더 기독교적인 토대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어떻게 이러한 우리의 생명현상과 일치 되는가 그런 쪽으로 잘 우리 신앙이 풍요로워지면 우리는 정말 그 때 참 된 기독교인으로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 영광 이러한 문제들의 정답을 이 시간 드릴 수는 없구요. 여러분들이 그러한 생명의 가장 심층적이고 역동적인 경험을 언제 하는가 그걸 생각해 보시라고 하는 겁니다. 어느 순간에 예배를 드리는 중에 아주 거룩한 두려움, 우리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내 삶 전체를 감싸는 그런 놀라운 충격들, 그래서 그런 것들이 결과적으로 참된 평화, 참된 기쁨으로 나타나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성령과 악령의 차이일거예요. 악령도 사실은 충격으로 다가 오긴 해요. 그러나 참된 성령하고, 악령하고는 많이 차이가 납니다. 악령은 쓸데없이 불안하게 하고 그리고, 겁먹게 하고 그러니까, 성령은 두려움은 두려움인데, 이거는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우리가 비록 두려움과 불안이 있어도, 결국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평화 안으로 우리를 끌어 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 오늘 시편기자가 말한 것이고, 바라기는 여러분들의 삶에도 가득하기를 바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시편 24편 말씀을 같이 나누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영광의 왕, 만군의 야훼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었습니다. 주님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떤 다른 사람의 신앙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신앙으로 바로 받아 드릴 수 있도록 주님,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이 세상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가 바로 야훼의 산, 그 성소에 거하는 사람이 되며,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영광의 왕을 찬양하는 저희들 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27 23편 녹취록 - 여호와는 나의 목자 file [2] 김현혁 2009-04-29 1905
26 50편녹취록 -자기열정과 참된 하나님 신앙 file [2] 박은옥 2009-04-28 1848
25 105편 녹취록- 구원의 주체이신 여호와 file [1] 박은옥 2011-01-10 1354
24 104편 녹취록- 신앙의 두 중심축, 찬양과 기쁨 file 박은옥 2010-11-15 1043
23 27(2)편 녹취록-하나님의 얼굴 file 박은옥 2010-11-01 1027
22 27(1)편 녹취록 -믿음의 용기 file 박은옥 2010-11-01 1088
21 26편 녹취록-무죄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10-25 875
20 25편 녹취록- 하나님의 길 file [2] 박은옥 2010-10-25 831
» 24편 녹취록-영광의 왕, 만군의 여호와 file 박은옥 2010-10-01 1227
18 103편 녹취록-여호와를 송축하라! file 박은옥 2010-09-25 1149
17 102편 녹취록-탄원과 찬양 file 박은옥 2010-09-25 1338
16 101편 녹취록-제관식 선포문 file 박은옥 2010-09-25 1468
15 100편 녹취록-선하신 하나님 file [4] 박은옥 2010-09-23 1309
14 99편 녹취록-거룩하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996
13 98편 녹취록-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file 박은옥 2010-09-23 1105
12 97편 녹취록-의로우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076
11 96편 녹취록-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 file 박은옥 2010-09-23 929
10 95편 녹취록-완악한 마음 file [3] 박은옥 2010-09-23 998
9 94편 녹취록-복수하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8-31 1573
8 93편 녹취록-하나님의 권능 file [2] 박은옥 2010-08-30 1806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