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25편 녹취록- 하나님의 길

조회 수 832 추천 수 0 2010.10.25 23:16:43

시편 25편 강해-하나님의 길

 

오늘 우리가 함께 읽고 공부하며 기도의 제목으로 삼을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25편입니다. 1절부터 25절까지 되어 있지요. 조금 내용이 긴 편에 속합니다. 우리가 앞에 있는 23편 24편은 다 10절 미만인데 여기는 22절까지 되어 있군요. 오늘은 우리가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제가 먼저 1절 읽고 여러분이 다음 절 읽고, 그래서 22절까지 내용을 잘 생각하면서 읽도록 합시다.

 

<공동번역>

〚다윗의 노래〛

1.야훼여, 내 영혼이 당신을 우러러 뵈옵니다.

2.나의 하느님, 당신만을 믿사오니, 부끄러운 꼴 당하지 않게 하시고 원수들이 으스대는 꼴 보지 않게 하소서.

3.당신만을 믿고 바라면 망신을 당하지 않으나, 당신을 함부로 배신하는 자 수치를 당하리이다.

4.야훼여, 당신의 길을 가리켜주시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주소서.

5.당신만이 나를 구해 주실 하느님이시오니 당신의 진리 따라 나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소서. 날마다 당신의 도움만을 기다립니다.

6.야훼여, 당신의 자비와 한결같으신 옛 사랑을 기억하시고

7.젊어서 저지른 나의 잘못과 죄를 잊어주소서. 야훼여, 어지신 분이여, 자비하신 마음으로 나를 생각하소서.

8.야훼여, 당신은 바르고 어지시기에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치시고

9.겸손한 자 옳은 길로 인도하시며 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10.당신의 계약과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당신의 모든 길이 사랑이며 진리입니다.

11.야훼여, 내가 지은 죄 크고 크오나, 당신 이름 믿사오니 용서하소서.

12.야훼를 경외하는 자가 누구냐? 바른 길을 그에게 가르쳐주시리라.

13.행복하게 한세상 살게 하시고, 후손 또한 유산을 물려받게 하시리라.

14.당신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당신의 생각을 털어놓으시고 당신의 계약을 가르쳐주시리라.

15.야훼 홀로 이 발을 올무에서 벗겨주시기에 나는 언제나 야훼만을 바라봅니다.

16.나를 굽어보시고 불쌍히 여기소서. 외롭고 괴로운 이 몸입니다.

17.나의 근심을 말끔히 씻어주시고 곤경에서 이 몸을 건져주소서.

18.나를 굽어보소서. 고통 받고 불쌍한 이 몸입니다. 나의 죄를 말끔히 씻어주소서.

19.보소서. 나의 원수들이 얼마나 많사옵니까? 미워서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저들입니다.

20.이 목숨을 지켜주소서, 건져주소서. 당신의 품속에 달려드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21.야훼여, 당신만을 바라보는 이 몸이오니, 지켜주시어 올바르고 흠 없이 살게 하소서.

22.하느님, 그 온갖 고초에서 이스라엘을 지켜주소서.

 

<참고>개역개정

〚다윗의 기도〛

1.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2.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3.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4.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5.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6.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7.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8.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9.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10.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11.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12.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13.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14.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15.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16.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17.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18.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19.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20.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21.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2.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아멘!! 오늘 이 25편의 제목을 저는 “하나님의 길” 이렇게 정했어요. 이 시편기자가 당신의 길,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그 구절, 4절도 있고, 또 그런 내용을 전반적으로 많이 담고 있기 때문에 제목을 그렇게 정했어요. 성서학자는, 시편을 주석하는 학자는 이 전체 내용의 성격을 이렇게 해요. “한 경건한 슬픈 영혼의 탄식기도”라고 했어요. 경건한 슬픈 영혼의 탄식기도, 이렇게 몇 가지 단어가 나오죠? 경건한 것, 그리고 슬픔을 아는 자, 그러한 영혼이 드리는 탄식의 기도, 조금 전반적으로 어둡다고도 볼 수 있어요. 사실은 슬픈 영혼이 드리는 탄식기도라서 좀 절절한 부분들이 있긴 있지만, 마냥 어두운 건 아니지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사실은 어두움이라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경험이 어둠의 경험이긴 한데, 그 어둠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절망적인 어둠이라기보다도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더 놀라운 사랑의 세계를 접했을 때 다가오는 그러한 어둠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 어둠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될 때로 되라는 절망이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비에 가까운 그러한 어떤 영적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여기에 어두운 부분들이 이렇게 표현되고 있지만, 그러나 이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향한 희망, 그러한 기다림, 그런 것들을 놓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절망적인 기도라고 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 성격은 슬프다고 볼 수 있지요. 고난도 있고, 또 그러한 가운데서 나오는 경건성, 이런 것들이 같이 여기에 어울려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종교의 기초라고도 볼 수 있어요. 이렇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일이 잘 되고,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한 조건들, 사실 그런 데서는 잘 얻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인류구원의 길을 십자가로 이루셨는데, 그 십자가는 인간이 처하는 가장 밑바닥의 어떤 사건이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거기서 그런 말씀까지 하셨으니까, 하나님이 왜 나를 버립니까, 라고 하는 그 밑바닥, 그 보다 더 밑으로 내려 갈 수는 없는 거지요. 거기에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단절이라고 하는 경험이니까요. 그러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놓고 본다고 하더라도 종교경험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 경험인데, 마냥 우리가 즐겁게 뛰어 놀고 좋은 것, 이런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과 슬픔 이런 걸 밑바닥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조금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모든 게 잘 풀리면 아, 내가 잘나서, 운이 좋아서라든지, 내가 열심히 해서라든지 자기 잘난 것처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난이 닥치게 되면, 고난이 왜 왔냐, 그걸 생각해야 되는 거죠. 고난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여기에서 나를 향한 뜻이 있지 않나를 생각하게 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아는 구약의 많은 사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이예요. 그건 구약을 떠 바치고 있는 기둥이예요. 그런데 그것은 바로 앞 부분에 각각 그 민족이 처한 가장 처절한 고난이 있는 거예요. 엑소도스, 이 출애굽 있기 전에 이집트에서 거의 노예에 방불한 그러한 운명으로 히브리 사람들이 살았단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선택을 받은 민족이 왜 고난을 받느냐, 하는 문제의식을 거기서 받게 되는 거지요. 바벨로 포로 귀환도 마찬가지예요. 귀환하기 전에 포로생활이 있었어요. 50년에서 70년사이에, 특별히 바벨론 포로가 구약성경이 형성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됬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시편도 거의 바벨론 포로 기간에 완성되었다고 보면 좋아요. 생각해 봅시다, 아까 제가 이집트에서의 고난도 말씀 드렸는데,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살고, 솔로몬 성전도 지어 줬고, 계속 제사도 드리고 선택받는 민족이라고 하면서 그들이 그렇게 살아 왔는데, 결과적으로 그들이 어떻게 되었어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거예요.

 

그러니까 고민하는 거죠. 도대체가 이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우리 선조들이 잘 못한 것에 대한 보응을 받는 건가, 뭔가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거구요. 그리고 또 이런 것도 생각한 겁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정의라고 하는 것이 무어냐 하는 거죠. 하나님의 정의, 그러니까 올바로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벌어진 게 아니라 그들은 포로로 잡혀갖고요.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잘 된 것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되냐, 그런걸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때 그 당시에 구약신앙에는 ‘부활신앙’이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그 전에는 부활신앙이 없어요.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구약이 별로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다 땅속의 게헨나, 스올이라는 곳에 간다는 생각을 했지, 이렇게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상태에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신학적 질문을 하면서 얻은 대답이 아, 여기서 우리가 이렇게 고난 받고 불행한 운명가운데 빠진다고 하더라도 죽은 다음에 거긴 하나님의 통치가 되는 세계에서 거기에 영원한 우리의 안식처가 준비되어 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런 것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와서 조금 더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통해서 분명한 부활신앙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겁니다.

 

오늘 조금 복잡한 신학적이 문제를 처음부터 거론해서 좀 그렇습니다만,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냐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면 좋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거꾸로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영적이라고 하면 뭐예요? 이건 하나님관계에서 얻어지는 생명의 체험이거든요. 그러니까 사람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것은 한계가 있는 거예요. 아무리 내가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완전한 만족으로 우리에게 와 닿을 수는 없거든요, 그만큼 우리가 아내와 남편에게 기대하면 또 실망하게 되고, 결국은 그것으로는 자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그런 가족이 무의미하다라는 뜻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알겁니다.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는 거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영적인 만족이 가능한데, 그런 것은 오히려 고난과 시련과 어려움 가운데서 더 풍성하게 주어진다,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늘 잘 되는 걸 바라는 것은 이게 어리석은 일들이예요. 뭐 그렇게 잘 돼서 살면 좋아요, 그거야 어쩌겠어요. 일부러 몸이 아프고 일부러 가난하게 사는 그런 것이 미덕이라는 것은 아닌데, 지금은 우리가 너무 우리가 고난과 가난과 시련과 궁핍 이런 것에 대한 전적인 두려움에 떨고 있으니까, 이건 정말 기독교신앙은 아니다, 하는 거죠, 오히려 그럴 때, 오히려 자기가 혼자라고 생각할 때 외로워지는 거죠, 그리고 그런 물질적인 어려움들이 올 때 생명이 뭐냐, 하나님의 사랑이 뭐냐, 그런 경험을 더 할 수 있는 거죠, 오늘 여기 이 시편기자가 어떤 사람이냐 하면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인 거예요. 경건한데, 그렇지만 형편이 좀 어려워요. 그래서 그의 영혼이 슬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건한 슬픈 영혼의 탄식기도, 탄식을 하긴 해, 그러나 이것이 신세한탄은 아닌 거예요. 고걸 잘 알아야 되, 일반 세속사람들이 자기가 원통해서 죽겠다, 신세한탄 그런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다 전적으로 맡기는 그러한 상태인 거죠, 그 두 차이가 아주 미묘해서 어떻게 보면 차이가 안 날 수도 있어요. 겉으로 보면요, 그러나 내면으로 들어가면 분명히 차이가 있는 거예요.

 

겉으로 보면 저 원수들이 날 조롱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보면 세상 사람들이 하는 한탄하는 거와 비슷하지만, 그러나 그 내면의 세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거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서 자기 모든 삶을 맡기는 그러한 신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오늘 여기 슬픈 영혼의 탄식기도에서 우리는 그것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6단원으로 간단히 나누어 오늘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1절에서 3절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예요. 하나님에게서만 우리의 영혼이 치유된다는 그러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에게서만 영혼이 치유된다, 일일이 제가 읽지는 않겠습니다. 당신만을 믿는다, 당신만을 바라고 당신만을 믿는다, 그런 표현들이 지금 반복해서 나오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잘 아는 이야기이고, 늘 우리가 기도할 때도 그렇게 하죠, 하나님만을 우리가 믿고 바라고 따른다, 그러니 나를 어떻게 해 달라, 그런 얘기입니다. 여기서 무슨 뜻인지를 더 생각해야 되는 거예요. 이 시편기자가 믿으며 따르고 있는 그 당신, 그 주님은 과연 누굴까요? 예, 그 하나님을 아는 게 중요하거든요? 하나님을 아는 것, 그러니까 그걸 알면서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것하고, 그런 것 전혀 없이 하나님을 무조건 따른다고 하는 것은 크게 차이가 있는 거예요. 두 번째의 것, 무조건 그렇게 하는 것은 이것은 일종의 광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자기에 대한 확신인거지요,

 

그러나 성서신앙은 믿고 있는 자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대상이 중요한 거예요. 이건 제가 여러 번 얘기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그래서 성서는 하나님은 창조하신 분이다, 늘 얘기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 분은 이집트 파라오를 홍해 바다에 쳐 넣은 분이다라든지, 하나님에 대한 규정들이 있는 거지요. 규정이라기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중요한 요소라고 하는 거죠, 며칠 전인가, <긍정의 힘>을 쓴 오스틴 목사의 설교를 기독교 TV에서 잠깐 봤는데, 처음 봤어요. 이름만 들은 사람이지, 그 설교에서 말을 굉장히 빨리 하고 1초도 쉬지 않고 막 나가요, 숨이 가쁠 정도로, 그게 다 좋은 이야기인거예요. 이런 거죠. 핵심적인 것은 여러분들, 힘들지만 감사하십시오. 어려운 일이 있어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더 축복을 주시고, 사회적 지위도 더 높이 올라가게 하시고 집도 살 수 있고, 원하는 것들이 됩니다. 축복받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감사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인상 쓰고 사는 거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나는 이건 복음이 아니다, 저거는 종교적 처세술이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그것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데, 그냥 좋은 이야기려니 그냥 괜찮으려니 생각하지만, 설교시간에는 그냥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냐, 그걸 이야기해야 되거든요, 그거는 그냥 아는 것처럼 접어두고, 감사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전도하십시오. 심지어는 웃으십시오. 긍정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이거는, 이거는 기독교 성서신앙이라기 보다도 종교적 마인드 컨트롤, 처세술, 자기신뢰, 자기 확신, 그런 거에 불과한, 나쁜 건 아니예요. 그러나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세상에서 아는 세상에서 많은 교양강좌 나쁜 게 어디 있어요? 다 좋지, 기독교 신앙이 그런 종교에 머무른다고 한다면, 이건 참 우리가 스스로를 자학 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것이 뭐냐,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가에 대한 그 이해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4절에서 6절까지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자비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4절에서 6절까지예요. 신앙의 위인들은, 그리고 지금도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도움과 자비를 생생하게 인식하고 경험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자비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실증적이지 않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돈이 없으니까 돈이 툭 나온다거나, 병들었는데, 병이 탁 낫는다거나 이런 것들만을 도움과 자비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성서 영성에 전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제가 서론적으로 이야기 했듯이 오늘 이 성서기자가 아주 슬픈 영혼을 가진 자였고, 탄식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도움과 자비를 확신했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차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거예요. 고난과 시련 중에서도 하나님의 도움과 자비를 알고 그리고 깨우치고 아주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것, 이게 중요한 거지요. 그게 과연 구체적으로 뭘까요?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도우심과 자비라, 그게 뭘까요? 우리가 실제로는 고난과 시련과 어려움이 있는데도 그걸 느낄 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게 서로 어긋나는 것 같이 생각되는데, 그게 과연 뭘까요? 그건 어떤 하나라고 딱 끊어서 말 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과의 소통이 아주 다양하듯이 또 조금 다른 예를 들자면 어떤 시인들이 시를 쓰는 시적경험이 다 다르듯이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 자비에 대한 경험도 다 다르죠.

 

그러나 그것이 그래도 가장 뿌리만 되는, 기본이 되는 것만 이야기를 한다면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심층에서 찾아오는 영적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쉽게 예를 드는 거예요. 상다리가 휘어지는 밥상을 받아야만 우리가 밥을 맛있게 먹는 것은 아니거든요? 된장찌개 하나만 끓여 먹는다고 하더라도 서로 이해하고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 옆에 앉아 있으면 그게 정말 좋은 식탁자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먹는 행위도 사실 깊이가 있는 거죠. 그런 점에서 성만찬이 기독교 영성을 담아내는데 굉장히 중요한 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 간단한 음식이잖아요? 포도주와 빵 한 조각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굉장히 풍부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형편, 오늘 여기 본문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어떤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생명의 심층에서 경험할 수 있어야 되는 거지요. 그게 쉽지는 않아요. 사실은, 쉽지는 않은데, 가능합니다. 그 쪽으로 우리의 영성이 열리면, 그 때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 자유 이런 것들을 충만하게 경험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게 제게 말을 이렇게 하면서 그것을 제가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지금 제가 머리가 좀 복잡해요. 자칫하면 이런 말들이 뜬구름 잡는 말로 떨어질 것 같아서 이건 굉장히 분명한 건데, 그걸 전하기 어려운 거예요.

 

시인들의 시적 경험은 그게 뭔가 분명한 건데, 그게 어떻다 딱 규정해서 말하기가 힘든 거와 비슷한 거거든요? 그건 또 각각 그 사람의 놓여 있는 영적인 눈높이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하나로 말하기는 힘듭니다. 어쨌든 우리가 생명의 심층, 제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이지요? 그건 이제 하나님이 생명의 창조자이고 성령이 생명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표현해 낼 수 밖 에 없습니다. 거기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어떤 소통, 그런 것들이 가능 하다면 그러면 우리는 실증적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우리들의 도움이시고 그리고 그 분은 자비하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지요. 그러면 우리의 삶이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7절은 이제 이 시편기자가 자기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신뢰, 하나님의 관계 속으로 점점 들어가 놓고 보니까, 그 다음에 뭐가 보여요, 자기의 우스운 모습이 보이거든요, 특히 여기에는 젊었을 때 저지른 잘못, 그런 것 까지 용서해 달라고 하는 기도를 드리네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가게 되면, 우리의 허물들이 아주 투명하게 드러나게 되고, 그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죄기도를 드릴 수 밖 에 없습니다.

 

다음 8절에서 10절은 다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편이 계속 그런 것들을 계속 반복하고 있어요. 아까 4절에서 6절에도 하나님의 도움과 자비라고 했는데, 그러한 것에 근거해서 8절에서 10절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좀 더 노래하고 있습니다. 8절에 당신은 바르고 어지시다, 그렇게 신뢰하는 거죠, 그리고 9절에는 겸손한 자를 옳은 길로 인도하신다, 10절에는 당신의 모든 것은 사랑이고 진리이다. 오늘 여기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의 아이덴디티, 하나님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자기가 신뢰한다고 하는 뜻을 여기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바로 이거 같아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고 사랑과 진리라고 하는 사실, 하나님이 참되다고 하는 사실이죠, 그것에 대한 전적인 신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되다, 정의롭다, 하나님만이 진리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신뢰거든요, 이 말은 곧 이외의 것들은 참될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참 된 것 있지 않냐, 좋은 것 있지 않냐, 그리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냐, 그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성도로서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냐,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것이 우리에게는 스스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조명되고 있을 뿐이거든요? 우리는 스스로 빛이 아니니까 진리의 빛이 될 수 없으니까 진리의 빛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조명하시면 우리가 그것을 반사시킬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참되게 살아가는 최선의 길은 무엇일까요? 우리 내면에 있는 어떤 가치 있는 것들을 막 꺼내서 발현 시키는 거기에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라, 그 얘기지요. 우리 스스로에게서는 참된 것이 나올 수 없어서요. 하나님의 빛이 우리들에게 오면 우리를 자극하고 우리를 움직여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참된 그러한 일을 행하신다, 그게 참된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비유적으로 설명한다면 우리는 피리다, 피리가 소리를 내려면 피리 스스로는 소리를 못 내죠, 그건 바람이 내는 거거든요? 바람이 우리를 통과해서 소리를 내는 것처럼 빛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비출 수 있도록 우리를 온전히 내어 놓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의 삶의 바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 하나님이 참되다고 하는 그러한 신앙고백, 이것을 8절에서 10절까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11절에서 14절은 다시 7절에서 11절까지 이야기를 반복하는 거예요. 7절에서 사죄기도를 드렸지요, 11절에서도 또 사죄기도를 드립니다. 8절에서 10절까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이야기 했잖아요?

 

여기서도 또 12절에서 14절까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고백합니다. 뭐 앞에서 한 이야기니까 제가 여기서 더 길게 말하지 않고 한 가지만 짚지요. 왜 이렇게 사죄기도를 드려야 될까, 시편기자들을 보면 그런 구절들이 많이 나와요. 어떻게 보면 거의 전체가 다 하나님을 향한 사죄기도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이유는 개인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어떤 것을 원하는 그런 기도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거의 예배 때 사용되던 것들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사람의 심정으로 이 기도문을 읽은 거예요. 그럼 예배드리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하나님 앞에 나왔다고 생각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뭘까요? 하나님의 거룩성 앞에 설 때 우리도 거룩해져야 된다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는 거룩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건 인제 용서 받는 길 밖에 없는 거지요. 그래서 시편에서는 계속 반복적으로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 사죄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나를 용서한다고 하는 그 맥락에서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15절에서 21절까지 여기는 이제 이 전체시를 끝내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원인거죠. 이 기원의 내용을 보면 이 시편기자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애처로운지 얼마나 처절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단어들이 계속 반복해서 나오고 있어요. 15절에도 보면 뭐예요? 올무가 나오지요? 16절에 괴로운 이 몸, 17절 근심, 18절 고통, 그리고 죄, 19절에 원수, 20절에 수치, 이런 것들, 단어하나하나가 다 이 시편기자의 처한 상황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 시편기자가 스스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거였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이것을 없이 해 주십시오. 기원했습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을 향해서는 말 할 사람이 없는 상태, 우리는 가장 불행하다고 하는 건데요,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에게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몰라요, 우리 주변에 나와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면 행복한 삶이긴 하겠지만 어쩌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진정한 의미에서 드릴 수 있는 기원의 기회가 적어지는 것일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아무도 없을 때 출구 없는 방처럼 다 막혔을 때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세계 창조자 하나님을 향해서 기원 드리잖아요, 이럴 때 이제 이 사람은 전혀 영적인 차원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개인적으로 정말 처절한 운명 가운데 빠진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그래도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하면 그런 어려운 조건이 있긴 하겠지만 이 사람의 영혼이 그만큼 더 예민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합니다. 지금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요즘 세상도 살기 좋다, 살만하다 뭐 핸드폰도 있고, 자가용도 있고, 인터넷도 있고, 뭐 재미있는 거 많고 재미있게 살 만하다 이렇게 생각을 보통 많이 하면서 살지만, 그러나 또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은 또 여기서 힘들어 하거든요? 이러한 가운데서도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야지요? 또 북한 주민들도 생각해야지요? 또 결식하는 사람들도 생각해야지요? 이 빈부 격차속에서 벌어지는 이런 구조적인 어려움도 생각해야지요? 좀 더 나아가게 되면 이디오피아나 다른 쪽에 정말 굶주리는 10억명인가가 굶주리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들도 생각을 해야지요? 뭐 등등.. 그리고 또 이 생태계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고 하는 점도 그렇고 이렇게 이런 부분 부분에 예민한 반응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서 고통스러운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구원해 달라고 말이지요. 이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가 사람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고 하나님만을 향해서 드리는 이러한 기원을 했다는 점, 이 사람보다 우리가 형편이 보다 낫다고 하더라도 꼭 배워야 할 요소지요, 부분들이지요. 하나님을 향한 탄원과 기도와 사죄에 대한 기원과 신뢰와 확신,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지는 그런 신앙적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 마쳤고요.

 

22절은 요거는 조금 내용이 다르지요? 여태까지는 개인이 하나님에게 쭉 이러이러한 형편들을 기원하다가 마지막 22절에 이렇게 이야기해요. 하느님, 그 온갖 고초에서 이스라엘을 지켜주소서. 조금 약간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을 지켜주소서, 왜 이게 들어 왔냐하면 이 시편이 나중에 회중들이 제사드릴 때 공동 기도문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이 이스라엘을 지켜주소서 라고 하는 것이 훗날 덧붙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 시편 25편에 전체 내용 성격은 처음에 얘기한 그겁니다. 그것을 한 번 더 기억을 하십시오. ‘한 경건한 슬픈 영혼의 탄식기도’ 2500년 전 어떤 누가 그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이런 기도가 우리들에게 필요하지 않나, 생각입니다. 25편, 이것을 다시 한 번 우리가 같이 읽겠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같은 목소리로 내용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읽도록 합시다.

 

1.야훼여, 내 영혼이 당신을 우러러 뵈옵니다.

2.나의 하느님, 당신만을 믿사오니, 부끄러운 꼴 당하지 않게 하시고 원수들이 으스대는 꼴 보지 않게 하소서.

3.당신만을 믿고 바라면 망신을 당하지 않으나, 당신을 함부로 배신하는 자 수치를 당하리이다.

4.야훼여, 당신의 길을 가리켜주시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주소서.

5.당신만이 나를 구해 주실 하느님이시오니 당신의 진리 따라 나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소서. 날마다 당신의 도움만을 기다립니다.

6.야훼여, 당신의 자비와 한결같으신 옛 사랑을 기억하시고

7.젊어서 저지른 나의 잘못과 죄를 잊어주소서. 야훼여, 어지신 분이여, 자비하신 마음으로 나를 생각하소서.

8.야훼여, 당신은 바르고 어지시기에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치시고

9.겸손한 자 옳은 길로 인도하시며 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10.당신의 계약과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당신의 모든 길이 사랑이며 진리입니다.

11.야훼여, 내가 지은 죄 크고 크오나, 당신 이름 믿사오니 용서하소서.

12.야훼를 경외하는 자가 누구냐? 바른 길을 그에게 가르쳐주시리라.

13.행복하게 한세상 살게 하시고, 후손 또한 유산을 물려받게 하시리라.

14.당신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당신의 생각을 털어놓으시고 당신의 계약을 가르쳐주시리라.

15.야훼 홀로 이 발을 올무에서 벗겨주시기에 나는 언제나 야훼만을 바라봅니다.

16.나를 굽어보시고 불쌍히 여기소서. 외롭고 괴로운 이 몸입니다.

17.나의 근심을 말끔히 씻어주시고 곤경에서 이 몸을 건져주소서.

18.나를 굽어보소서. 고통 받고 불쌍한 이 몸입니다. 나의 죄를 말끔히 씻어주소서.

19.보소서. 나의 원수들이 얼마나 많사옵니까? 미워서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저들입니다.

20.이 목숨을 지켜주소서, 건져주소서. 당신의 품속에 달려드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21.야훼여, 당신만을 바라보는 이 몸이오니, 지켜주시어 올바르고 흠 없이 살게 하소서.

22.하느님, 그 온갖 고초에서 이스라엘을 지켜주소서.

아멘!

 


[레벨:18]눈꽃

2010.10.26 01:20:50
*.121.217.198

라라님! 시편 녹취록을 대할때마다 느끼는 것 이지만 라라님의 시편 사랑이 정말 대단함을 느낌니다

하니 그만큼 시편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으리라 짐작되구요

시편 녹취록은 말그대로 한마디도 빼먹지 않고 그대로 옮긴 것이라 강해를 그대로 듣듯이 활자를 통해 든는 것이지요

읽는 저희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주기 위해 애쓰시는 모습이 역역합니다

시편강해를 통해 은혜를 받고 또한 라라님의 자상하고 세심한 사랑도 함께 받아갑니다

라라님~~~ 증말 고맙데이~~^ ^ *

profile

[레벨:38]클라라

2010.10.26 22:26:11
*.237.95.2

감사합니다. 눈꽃 집사님,

집사님이야말로 이 시편녹취록 일등팬이라는 거, 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답니다.^^

거기다가 신학적 지식까지 탄탄하게 쌓아가시니,

집사님의 영성이 날로 깊어지시고 풍성해 지시는 건 당연하시지요.

  

집사님, 저는 시편강해 받아쓰기 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자주 들더라구요.

만일 시편을 숙고해서 묵상하다보면, 신학무용론에 대한 생각이 확 바꿔질 것 같다고요.

왜냐면, '기독교 교리'가 고스란히 배어있는 이 시편을 신학적 배경이 없는한 

수박 겉핥기 식의 이해밖에는 못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래왔던 것처럼요.

 

집사님 말씀대로 저는 시편을 통해서 거듭남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결코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성'이 임한 '실제 삶'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구도자적 삶에 비하면, 지금 우리의(나의)삶이 얼마나

소시민적이고 자기집착에 빠져 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로 참회하고픈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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