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27(1)편 녹취록 -믿음의 용기

조회 수 1068 추천 수 0 2010.11.01 07:40:40


시편 27편(1) 강해-믿음의 용기

 

오늘 우리가 같이 읽고 공부할 하나님의 말씀은 순서에 따라서 시편 27편이 되겠습니다. 1절부터 14절까지 있는데요, 오늘은 1절에서 6절까지만 보겠어요. 이따가 다시 설명하겠지만, 27편은 완전히 다른 두 시가 하나로 묶여진 거예요. 그래서 이걸 한꺼번에 하기는 주제도 그렇고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어서 좀 자리 잡지 못하니까 오늘은 6절까지만 따로 떼어서 보겠습니다. 우선 제가 읽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눈으로 잘 보세요.

 

<공동번역>

〚다윗의 노래〛

1.야훼께서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오. 야훼께서 내 생명의 피난처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오.

2.나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악한 무리들 휘청거리고 쓰러지리라. 그들은 나의 원수, 나의 반대자들,

3.그 군대 진을 치고 에워쌀지라도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아니하리라. 군대를 몰아 달려들지라도 나는 그 속에서 마음 든든하리니,

4.야훼께 청하는 단 하나 나의 소원은 한평생 야훼의 성전에 머무는 그것뿐, 아침마다 그 5성전에서 눈을 뜨고 야훼를 뵙는 그것만이 나의 낙이라.

5.나 어려운 일 당할 때마다 당신의 초막 안에 숨겨주시고 당신의 장막 그윽히 감춰주시며 바위 위에 올려 높이시리니,

6.에워싼 저 원수들을 내려다보며 그 장막에서 제물 바치고 환성 올리고 노래하며 야훼께 찬양하리라.

7.야훼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주소서. 불쌍히 여기시어 대답하소서.

8.이렇게 내 마음 그대로 아뢰옵니다. "나를 찾으라." 말씀하셨사오니 야훼여, 이제 당신을 뵙고자 합니다.

9.당신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 그 동안 이 종을 도와주시었사오니, 진노하지 마시고 물리치지 마소서.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이 몸을 저버리지 말아주소서.

10.내 부모가 나를 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야훼께서는 나를 거두어주실 것입니다.

11. 야훼여, 당신의 길을 가르쳐주소서. 원수들이 지키고 있사오니 안전한 길로 인도하소서.

12.원수들이 독기를 뿜으며 거짓 증언하러 일어났습니다. 이 몸을 그들의 밥이 되지 않게 하소서.

13.그러나 나는 살아생전 이 땅 위에서 야훼의 은덕을 입으리라 믿사옵니다.

14.야훼를 기다려라. 마음 굳게 먹고 용기를 내어라. 야훼를 기다려라.

 

아멘! 다시 한 번 읽읍시다. 함께 읽겠습니다. 1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1.야훼께서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오. 야훼께서 내 생명의 피난처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오.

2.나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악한 무리들 휘청거리고 쓰러지리라. 그들은 나의 원수, 나의 반대자들,

3.그 군대 진을 치고 에워쌀지라도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아니하리라. 군대를 몰아 달려들지라도 나는 그 속에서 마음 든든하리니,

4.야훼께 청하는 단 하나 나의 소원은 한평생 야훼의 성전에 머무는 그것뿐, 아침마다 그 5성전에서 눈을 뜨고 야훼를 뵙는 그것만이 나의 낙이라.

5.나 어려운 일 당할 때마다 당신의 초막 안에 숨겨주시고 당신의 장막 그윽히 감춰주시며 바위 위에 올려 높이시리니,

6.에워싼 저 원수들을 내려다보며 그 장막에서 제물 바치고 환성 올리고 노래하며 야훼께 찬양하리라.

 

<참고>개역개정

〚다윗의 시〛

1.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7.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8.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10.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1.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12.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13.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4.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아멘!! 이 두 편, 두 개의 시가 하나로 묶여진 시편 27편이예요. 그 주제도 그렇고 또 어떤 분위기, 시의 분위기, 그런 것도 그렇고 또 저자도 똑 같다고 볼 수 없습니다. 1절에서 6절은 주로 믿음의 용기, 어떤 철저한 신뢰, 좀 전체적인 정서가 좀 강해요. 이렇게 확신을 갖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 완전하게 신뢰하겠다고 하는 그런 것이고 그런 일종의 탄식, 도와달라고 하는 그런 가치가 함께 있는, 전체적으로 힘이 있는 그런 기도입니다. 7절에서 14절은 오늘 우리가 읽지 않았습니다만 하나님께 이르는 길인데요, 이 사람은, 성서주석학자의 얘기를 좀 빌려서 하는 겁니다. 어떤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두려움 가운데 드리는 기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경건성이 어디 있느냐, 그런 것들을 좀 볼 수 있지요, 그러니까 앞부분에는 좀 더 강하고 뒷부분에는 좀 더 경건하고 그렇게 나눌 수 있습니다.

 

예, 오늘 우리는 1절에서 6절까지만 보는데요. 성서 주석학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시편 23편하고 분위기도 그렇고 주제 이런 것도 많이 비슷하다고 합니다. 시편 23편, 몇 주 전에 보았던 대로 나의 목자시지 두려움이 없다, 그런 아주 유명한 그 구절의 시편 있잖아요? 그게 이것 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냥 그것을 뭉뚱거려서 한 마디로 한다면 신뢰, 하나님에 대한 신뢰, 그리고 그 분이 목자, 우리를 지키신다고 하는 확신, 신뢰와 확신, 이런 것이 정확하고 분명하게 드러나 있고요, 어떤 형식에서 비슷한 것은 야훼 하나님을 제 3인칭으로 이야기 하는 거지요. 야훼여 나를 도우소서, 이것 보다도 야훼는 나의 목자이시니, 이렇게 하잖아요? 23편에, 27편도 야훼는 나의 빛, 이렇게 3인칭으로 나갑니다. 그러한 시적인 형식에 특징들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27편은 그 23편과 비슷한 분위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확신 이런 것을 안고 있다, 여러분들이 염두에 두고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23편 이야기 할 때도 짚었습니다만, 이것은 어떤 젊은이가 하나님을 향한 어떤 맹목적인 신뢰, 이런 것은 아닙니다. 한 평생 삶을 산전수전 다 겪은 그런 원로, 인생살이를 많이 살아서 고통과 배반과 또 아픔들, 절망, 이런 것들을 다 겪은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경험하는 그러한 신뢰와 확신, 그런 것들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인생살이의 최고봉이라고 할까, 아니면 거의 끝날 때쯤이라고 할까, 그 때 가서 부르는 기도니까, 참 이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 쓴 거라고 해서 경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삶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거거든요? 젊었을 때는 그냥 책을 읽고 공부하는 거죠, 어떻다, 어떻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면, 그러한 책을 통해서, 남에게 들어서 알았던 것이 실제 삶을 통해서 알게 되게 때문에 뭐, 여유도 있어지고 또 그런 삶들을 관조할 수 있고, 어떤 사태들을 객관적으로 잘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27편이 그러한 사람의 시다, 그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6절까지, 짧아요, 이것을 두 주제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전체적인 주제는 하나지만, 우리가 이해하는 데 좀 문단 구분하는 식으로 한다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에서부터 3절까지와, 4절에서 6절까지예요. 1절에서 3절, 먼저 볼까요, 이 소제목은, 이 소제목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 27편 1절에서 6절까지 전체 제목은 “믿음의 용기”,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다. 믿음의 용기, 1절에서 3절까지 소제목은 용기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비슷하긴 하지요? 용기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 1절에서 3절까지 우리가 읽으면서 반복 되서 나오는 단어가 우리 눈에 띄죠? 두려워 하리요? 두려움에 대한 겁니다. 어떠어떠 하니까 내가 두려워 할거냐, 두려워 하리요, 무서워 하리요, 1절에서 그렇게 얘기했고요, 3절에서도 두렵지 아니하다, 마음 든든하다 이런 것들이 다 두려움을 이겨낸 그런 사람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하고 3절이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요, 먼저 1절에서 나온 표현,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이건 좀 반어법 비슷하죠?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좀 강하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근거가 뭐예요? 이건 너무나도 뻔한 질문이죠? 야훼지요? 야훼, 그러나 야훼라고만 이야기 하지 않고, 야훼에 대한 표현이 나와 있는 거예요. 야훼에 대한 서술이라고 할까, 세 가지로 얘기해요.

 

야훼께서 나의 빛, 구원, 피난처. 1절에 나와요, 여호와께서 나의 빛, 나의 구원, 그리고 생명의 피난처, 이렇게 되어 있네요. 사실 설교를 할 때에도 만약에 쉽게 쉽게 설교한다면, 이렇게 가능한 거예요. 이 세 가지 있잖아요? 이 세 가지를 가지고 하나하나 다 설명 대충하고 또 여기저기서 여기에 적절한 예화 같은 걸 좀 몇 개 가져다가 적절하게 연결하면 한 편의 설교가 되겠지요, 그렇게 하는 건 바람직한 게 아니니까, 우리는 전체 주제를 잘 파악해서 과연 그게 무엇을 얘기하려고 하는 가를 정확하게 이해를 해야 되겠지요, 어쨋든 실용적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게 가능한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는 근거,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는 이유, 그렇게 제목을 달아 놓고 첫째 뭐, 둘째 뭐, 셋째 뭐, 이렇게 나열식으로 많이들 하죠? 그냥 지나가는 길에 한 말씀 드렸어요. 어쨌든 여기 세 가지 개념들이 나옵니다. 여기서 야훼를 세 가지로 표현하잖아요? 빛, 구원, 피난처, 예, 이 용어들이 과연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이걸 우리가 정확하게 혹은 이 시편기자의 영적경지에 가서 이해하지 않으면 이거는 그냥 순전히 종교적 정보에 떨어지고 말아요, 그것을 아마 이해할 거예요. 이게 제가 자주 예를 들었듯이 뭐, 구구단을 외우듯이 이런 것도 그냥 외워치워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성서를 볼 때 아, 이 기자는 지금 세 가지를 이야기 하고 있는데, 과연 어떤 차원에서 이걸 이야기할까를 또 아주 깊이 있게 생각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거는 깊이 있게 생각을 한다고 해서 답이 주어지지는 않아요.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는 그 경구와 비슷하게 자기가 일단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영적인 훈련, 영적인 경지가 필요하겠지요, 좀 봅시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정말 빛으로 경험하는가, 하는 그런 질문인 거예요. 여기서 빛이라고 하는 게 뭘까 하는 겁니다. 빛, 지금이야, 별로 이런 게 확 와 닿지 않아요, 이 시가 언제 적 시라고 했어요? 2500년 전이예요. 그 당시는, 상상해 보세요. 이런 전깃불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가정에서는 아예 초롱불도 없었을 거예요. 해가 지면 그냥 자야 되요, 해가 뜨면 일어나야 되요, 그리고 간혹 일식 이런 것들이 몇 백 년 만에 한 번씩 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당했을 때에 고대인들이 얼마나 두려워했을까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낮이 점점 짧아지고 있을 때, 동지가 가까워 오면서,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날씨가 추워지면서 그렇게 되지 않겠어요? 그 때는 존재, 생존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느꼈을 겁니다.

 

시편기자가 이 시를 쓸 때 그 당시에 빛, 그리고 어둠, 그런 것들을 우리가 좀 돌아봐야 되요. 우리가 일단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태양빛,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나의 은유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빛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이니까, 하나님을 생명이라고 이해했다고 하는 겁니다. 창세기에 하나님이 맨 처음에 창조하신 게 빛이라고 한 것 아시지요? 빛, 그러니까 고대인들의 영성이 그 쪽으로 열린 거예요. 빛이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을 한 거지요? 이것은 물론 태양빛만 이야기 한 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생명의 빛으로 인식되는가, 이걸 알려면 정말 우리가 철저한 어두움을 경험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지요. 아침에 태양이 떠오를 때 환희를 알려면 밤에 어두움을 만끽 할 줄 알아야 되는데, 그걸 절절하게 알아야 그 기쁨을 알지 맨 날 이렇게 환한 조명 켜 놓고 사는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태양빛이 뜬다, 밝음 어둠에 대한 그 생각들이 별로 강하게 전달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언제 우리의 삶을 어둠으로 경험할까, 시편기자는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경험했을까, 그런 것들을 좀 더 생각해 봐야겠지요.

 

구원, 두 번째 구원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구원으로 인식한 거예요. 멸망과 심판의 반대 되는 개념이지요, 어떤 때 멸망 심판을 당했을까요? 억울하게 고발을 당해서 그 사람이 감옥에 간 경험이 있었을까, 아니면 전쟁포로가 돼서 죽음 직전까지 몰린 적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죽을병이 걸렸을까요? 어떤 경험일까요, 아니면 극심한 죄의식, 죄책감, 큰 잘못을 했거나, 어쨌든, 그런데 떨어졌을까요? 그것도 어둠하고 비슷한 경험이죠? 멸망과 그러한 심판에 대한 그런 깊숙한 경험 안에서 하나님을 구원으로 경험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 신앙을 가르칠 때 중요한 건 신자들에게 자꾸만 구원받는다, 잘 된다, 그런 쪽으로만 이야기하면 곤란하죠, 축복, 뭐 이런 게 필요 없는 게 아니라 꼭 있어야 되는데요, 성서에도 복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까 건강하고 이런 것 그런 걸 알려면 그렇지 않은 세계를 알아야 되거든요? 이런 어두움의 세계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잘 되고 좋은 것만 이야기 하게 되면 이거는 아주 뜬 구름 잡는 이 추상적인 이야기, 가현설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많은 거지요.

 

세 번째는 피난처라고 그랬어요. 이게 정말 중요한 개념인데 피난처, 야훼 하나님이 바로 우리 영혼이 피할 곳이다, 피난 할 곳이다고 하는 이러한 시인의 말을 우리가 얼마나 리얼하게 받고 있을까요? 그냥 찬송을 부르고 기도는 하지만, 그러려니 할 정도지 실제적으로 이런 시인과 영성과 같이 우리가 도달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의 설교던가요? 아니 지지난주던가요? 뭐 연관되는 이야기네요. 우리들은, 이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일단, 피할 곳이 너무 많으면 그럼 이제 야훼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라고 하는 말은 잘 안 들어오는 거예요. 심심하면 친구 찾아가고 불러내서 놀 수 있고,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이 있고, 또 돈도 있고, 예를 들자면 뭐 등등.. 오늘 현대인들이 요구하는 모든 쾌적하고 복지가 잘 된 삶 안에 있으면 굳이 피난처를 찾지 않거든요, 우리가 무조건 가난하거나, 외롭거나, 힘들어야 된다고 하는 뜻은 아니라, 우리가 그런 편안한 삶의 조건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영혼이 쉴 곳은 야훼 하나님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걸 알아야 되는 거거든요, 아내와 남편도 그걸 주지 못하는데 사람들은 자꾸만 착각하거든요. 뭐 서로 외로운 세상에서 친구처럼 의지하면서 사는 것은 마땅하지요, 남편 아내 가족들이 그렇게 살아야지요. 그러나 우리 영혼이 피할 곳은 결국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나 여기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더 진지하게 깨달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인간적인 관계, 이런 걸 다 끊어라 라든지 아내와 남편이 소중하지 않다는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건 차원이 다른 거지요. 우리가 외로울 때 친구나 아내나 남편이 따뜻하고 좋잖아요? 그러나 그거하고 정말 야훼 하나님과의 영적인 그런 관계하고는 다른 겁니다. 조금 비슷한 얘기 하자면 예술가들은 그렇게 하잖아요? 그냥 모든 것, 그래서 결혼 안한 사람들도 있죠? 했다고 그래도 어떤 사람은 극심하게 가정도 돌보지도 않고 예술 속으로 빠지기도 하는데, 뭐, 잘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예술에 자기 영혼을 거는 거지요. 말하자면요, 우리는 신앙은 좀 다른 차원에서 우리의 인간적인 삶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살리는 차원에서 야훼 하나님만이 피난처라고 하는 사실, 이걸 우리 삶의 중심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영혼은 쉴 수가 없어요. 피곤한 거지요. 사람에게서는 참된 만족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절, 우리가 얘기한 거예요. 1절만 가지고도 우리가 할 이야기가 많겠지요? 빛, 구원, 생명의 피난처,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이렇게 참 놀라운 그런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2절과 3절에서는 이제 적대자들의 상태가 묘사됩니다. 시편기자의 삶을 파괴하려고 했었던 세력들이 허물어지는 거지요. 제가 다시 읽지 않아요. 휘청거리고 쓰러지리라 그러니까 그들이 나를 에워싼다고 하더라도 두렵지 않다 그렇게까지 얘기하는 겁니다. 잘 봐야 되요. 이게 시거든요. 어떤 영적인 상태인가를 봐야 되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모든 일들이 다 잘된 거냐, 그건 아닌 거예요. 사실 이 적대자들에 의해서 정말 고난 받은 일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영적인 눈높이는 그 순간에 묶여 있는 게 아니라 전체를 보는 거지요. 전체 역사, 그 순간적으로는 적대자들이 자기를 허물어뜨리는 일들이 있긴 있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쓰러뜨리게 하신다, 그런 영적인 안목, 그런 것들을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거지요. 그리고 전체적으로 본다는 것 하고 또 하나는 이런 영적인 경지를 가지려면 순간적으로 우리가 힘들어져도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 우리를 지킨다고 하는 게 분명하니까 그리고 더 궁극적으로는 죽음 이후까지 어떤 새로운 생명과 연관되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킨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데요, 그러한 긴 시간에서도 그렇고, 지금 당장도 그런 거예요.

 

사실은, 그 영적인 맥락이 아주 중요한 건데요, 그냥 쉽게 말하기 위해서 우리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다고 해 봅시다, 아니면 누구에게 싫은 소리를 많이 듣는다고 합시다, 어떤 경우라도 좋아요, 힘든 경우라고 합시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다가 팔 하나가 절단 되었다거나, 노동현장에서 장애되는 일들이 많이 있잖아요? 정말 자동차 사고도 많기 때문에 언제 어느 때 우리가 현재 비장애가 장애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그런 일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고 그런데요, 아, 그래도 우리의 어떤 영적인 시각을 다른데 두면, 새로운 데 두면, 이런 걸로 인해서 우리가 허물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이제 승리하는 거죠. 예, 거기까지 첫 단락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4절에서 6절, 소제목은 “오직 하나뿐인 열망” 예, 그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4절에 그렇게 말해요. 야훼께 청하는 단 하나의 나의 소원이 있다, 단 하나의 나의 소원, 그건 열망이죠, 그건 곧 아훼 성전에 머무는 것이다. 아침마다 성전에서 눈을 뜨고 야훼를 뵙는 것이 낙이다, 얘기하죠, 성전에 머무는 것, 성전에 머물러서 아침저녁으로 야훼를 뵈오려면 제사장이 되어야 되겠지요. 요즘 말로 하면 목사가 되 갖고 맨 날 교회서 사는 거겠지요, 그러나 이 시편기자는 그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늘 영적인 교제를 늘 놓치지 않겠다, 늘 정말 성전 안에 거하는 거처럼 야훼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유지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어떻게 가능할까, 이런 이야기는 많이 들었기 때문에 제가 길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종교에서 하는 것하고 비교해서 말씀 드리면요, 불교에서는 참선, 좌선, 그런 걸 한다고 그래요, 그 때 하는 게 화두(話頭)예요. 화두, 화두를 붙드는 거예요. “이게 뭐꼬?”하는 건데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거는 그 화두의 대답을 찾을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답을 찾으려고 하는 게 아니예요. 답을 찾았다고 하면 이미 화두가 끝나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은 어설픈 선승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도사연(道士然)하는 거지요. 자기는 답을 찾았다, 그럼 가짜라고 그럽니다. 정말 그 화두를 붙드는 사람들은 그 질문의 중심으로 그냥 빠져 들어가는 것을 얘기하는 거예요.

 

백척간두라는 말 들어 보셨지요? 백척간두, 백척이라고 하는 나무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거예요. 그럼 아찔하지요. 그리고 얼마나 정신을 차려야 되겠어요, 백척간두 진일보 시방세계 현전신(百尺竿頭 進一步 十方世界 現全身), 그런 말 있는데 이게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긴장이라고 하는 것은 비슷한 거예요. 그 화두를 얘기하는 스님 예기 잠깐 들어보니까, 그런 상태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깊은 우물 속, 뭐 하여튼 100m면 100m 깊은 우물 속에 사람이 빠진 상태라고 합니다. 그럼 그 사람이 갑자기 거기에 빠진 상태면 그 사람은 지금 어떤 상태예요? 다른 건 아무생각 안하고 우물 밖에 나올 생각만 하는 거잖아요, 그것만 생각하잖아요, 한 가지만, 화두를 붙드는 건 바로 그런 거라는 겁니다. 이게 그들이 얘기하는 것하고 우리가 얘기하는 것이 똑 같은 것은 아니지만, 어떤 상태, 영적인 상태는 비슷한 거지요. 하나님만 생각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게 화두 붙드는 것하고 비슷해서 답은 없는 거예요. 사실은, 하나님이 어떻다, 이야기 하면 가짜예요. 사실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무소불위(無所不爲), 몇 가지, 전지전능(全知全能)이런 이야기를 하긴 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간접적인, 혹은 일부의 표현이지 그것으로 하나님을 다 이야기 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조금 다른 거지요. 화두하는 것 하고요, 화두는 계속 그 질문을 하고 있을 뿐인데, 우리는 질문 한다기보다도 하나님이 말씀을 거는 것에 대해서 영적인 귀를 여는 거지요. 계시라고 그러지요.

 

하나님의 계시를 늘 기다리는 거예요. 아,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림’이라고 하면 되겠네요. 불교에서는 질문을 붙들고 화두 싸움을 한다면, 그들은 자꾸만 자기 내부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거고, 우리는 “기다림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파숫꾼이 새벽을 기다리듯이, 시편에 나오잖아요. 그러한 상태가 된다면 그러면 우리가 늘 자나 깨나 성전에서 야훼 하나님을 뵙는 거나 똑같다, 그렇게 볼 수 있어요. 이렇게 살아갈 때, 오늘 시편기자가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요, 저도 오늘 많이 배웠습니다. 그럴 때 안전하다, 자기의 삶이, 5절에 그렇게 이야기하네요. 여기에도 그 안전하다고 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하나님이 숨겨 주신 건데, 세 가지 비유가 나와요. 초막, 장막, 바위, 예, 초막 장막, 바위, 오늘 이것도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설교 한 편이 되겠지요, 초막과 장막, 바위 이걸 하나하나 비교하고 차이점 이런 것 하고, 또 구약에 이런 것들이 쓰여 지던 쓰임새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하고 뭐 등등..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일까요?

 

아무리 힘든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시편기자가 직접 이야기 했듯이, 결국은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피할 곳을 마련해 주신다, 아니 하나님 자체가 피할 곳이다, 라고 하는 사실이지요, 이걸 오해하지 마세요, 정말 이 문제가 다 해결된다는 뜻은 아니예요. 사업을 하다가 빚을 졌는데,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해서 그 부도 날 게 안 된다, 라거나 그런 뜻은 아닙니다. 부도가 나더라도 그래도 우리가 피할 곳이 있는 거란 말이예요. 생명의 가장 깊은 세계에서 야훼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한 거죠, 그런 거예요. 그런 게 우리의 초막이고 장막이고 바위다, 저도 이러한 영성에 좀 깊이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대충 알고 그러한 생각이 나를 잡을 때가 많이 있지만, 또 어떤 때는 작은 일로 신경 쓸 때도 있긴 해요, 이런 데서는 저도 신앙훈련이 아직까지 많이 부족하다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시편기자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렇게 경고도 받고, 또 다시 새 출발도 하고 그래서 좋은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6절을 보면,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가운데 있으면서, 이 시편기자의 마지막 놀라운 삶의 자리를 이야기 합니다. 이 표현이 참 재미있어요. 동사가 반복해서 나와요, 6절, 원수들을 내려다보며, 그러니까 자기는 높은 데 있는 거예요. 성전의 높은 자리에서 안전한 거지요. 내려다보고, 장막에서 재물을 바치고, 내려다보고, 바치고, 그 다음에 노래하고, 찬양한다, 이렇게 반복되죠? 그러니까 굉장히 적극적 이예요.

 

앞에 어려운 일들이 있지만, 그런 일들을 야훼 하나님 가운데서 어떻게 이기는가, 이야기 하면서 마지막으로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유라고 할까요, 어떤 새로운 영적인 에너지가 가득차서 부르는 그런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내려다보고, 철없는 아이들이 노는 것처럼 이 원수들이 있는 것을 내려다보고 전혀 삶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간 거죠, 예물을 바치고 노래하고 찬양한다, 이러한 삶의 영적인 경지를 지금 노래했습니다. 결론으로 한 말씀만 드려야 되겠네요. 우리 삶의 과정에는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시련과 어려움들이 있는데, 거기에 완전히 파묻혀서 정신없이 살다보면 우리 신앙은 성장 할 수 없습니다. 늘 들은 이야기일거예요. 우리가 이 말씀들을 읽고 묵상하면서, 우리가 (아직 나이가 젊으니까) 불안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염려도 있고 하잖아요? 이럴 때 이런 중간 중간, 아직 젊을 때 삶의 과정의 출발에서 오늘 시편기자가 말하는 거와 같은 이런 영적경지들을 간접적으로라도 늘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훈련됨으로써 우리는 아직 이 사람처럼 원숙한 단계에 아직 직접 들어가진 못했지만, 흉내는 낼 수 있고, 좋은 뜻으로 흉내를 내고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도 그러한 원숙한 신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게 중요한 거지요. 사실은, 인생의 문제가 풀리는 것, 이것은 사실은 살다보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요.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 삶을 새롭게 조명하는 거거든요? 오늘 이렇게 시편기자처럼 마지막에 6절에 그렇게 이야기했잖아요? 노래하고 찬양하고, 믿음의 용기를 갖는 그런 신앙이 우리 젊어서부터 점점 더 깊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정말 귀한 말씀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신앙적으로 원숙했던 시편기자의 신앙고백을, 그리고 그러한 찬양을 그러한 노래를 저희들이 읽고 들으면서 놀라운 신앙의 경지를 맛보았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어떤 한 고대 영성가의 신앙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 살아서 우리들의 삶을 꿰뚫는 하나님의 말씀인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만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 거기서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지키시고, 초막과 같으며 장막이며 바위라고 하는 사실을 어느 한 한 순간도 잊지 않도록 저희를 붙들어 주십시오. 우리의 삶 속에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총이 넘칠 줄 믿고 흩어지는 발걸음도 지켜주실 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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