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50편녹취록 -자기열정과 참된 하나님 신앙

조회 수 1830 추천 수 0 2009.04.28 23:46:56

시편 50편 강해-자기열정과 참된 하나님 신앙

 

시편 50편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1.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 도다

2.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3.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 이 불리로다

4.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5.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 도 다

6.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 로다 (셀라)

7.내 백성아 들을지 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 로다

8.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 이로다

9.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10.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11.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13.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14.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 로다

16.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 느냐

17.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18.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되며

19.네 입을 악에게 내어 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

20.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 하는 도다

21.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 하였도다 그 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 도다

22.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23.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아멘!

 

23절까지 있습니다. 귀한 말씀이 많이 있지요. 시편기자의 특성들이 있으면서 동시에 예언자적 특성들도 같이 갖고 있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들을 우리가 다 새길만한 건데요. 다 하기는 힘들겠지요.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우리가 잡는 게 좋겠습니다. 전체주제는 이거지요 하나님 앞에서 갖는, 혹은 취하는 종교적 열정들, 그런 것 하고 정말 참된 신앙하고는 다르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 두 가지가 비슷한 거 아니냐 똑 같은 건데 왜 그걸 구별하느냐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 제사 열심히 드리고 우리식으로 하자면 예배를 열심이 드리고 전도하고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고 예, 그리고 셀 리더가 다 되고 등등 많은 그런 것들이 있잖습니까. 정말 교회 열심이다 충성된 그런 사람이다 하는 말을 들을 그럴 만한 일들 말입니다. 그런 거하고 하나님을 참되게 믿고 따르고 찬양하는 것은 다르다고 하는 거지요. 이게 인간의 본성이 뭐냐 하는 것도 우리가 거기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형식적으로 얼마든지 경건한 체 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흉내, 혹은 포즈를 취할 수 있어요. 속에는 뭐 있지요?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지요. 두 가지로 봐야 되겠군요.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을 수도 있고요. 그게 하나구요. 없으면서 겉으로만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고요. 그렇게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거구요. 또 하나는 하나님을 오해 하는 거지요. 잘 못 아는 거지요. 여기 말씀에 보면 2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그 어떤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그러한 일을 행해도 하나님이 가만 두었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는 도다 오해 하는 거지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기 수준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아, 내가 이렇게 잘못해도 뭐 아무 그런 거 없으니까 괜찮으려니 그런거라 든지요. 자기의 수준으로 오해하는 거 꼭, 뭐 윤리적인 걸 책망 받았다 안 받았다 그런 차원을 제가 말씀 드린 것은 아니고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오해하는 거지요? 제가 두 가지로 말씀 드렸잖아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포즈만 취하지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는 거, 그 두 가지를 구별해야 된다고 했는데, 두 가지로 인간에게 나타난 두 가지의 모습을 얘기를 한 거예요.

 

하나는 실제로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던 거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오해 하는 겁니다. 오해도, 예, 거기에 더 뭐 깊이 들어 갈 것은 없고 한마디로만 하면 그 오해가 하나님을 자기의 수준으로 이해 하는 겁니다. 그것을 의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처럼 생각하는 거지요. 신인동성동형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사람들처럼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하고 혹은 권선징악 정도로 사람을 판단하고 혹 인간들 생각하는 어떤 가치기준 있잖습니까?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그 의인화, 신인동성동형론 그런 입장인 거지요. 그렇게 오해를 하는 거지요. 그걸 조금 더 더 적랄하게 표현한 대목이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내가 수소를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하는 거지요. 사람들이 하나님이 정말 제사를 드리면서요. 사람이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자기들이 드리는 그러한 고기 피, 이런 걸 먹고 마실 것 같다 그러실 분이라는 생각을 하는 거지요. 그래서 가능하면 그런 것 들을 많이 드리기만 하면, 많이 바치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거다는 그런 착각을 하는 거지요. 이러한 착각들, 오해들 이런 것들은 계속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쉬지 않았구요. 끊이지 않았구요. 그들이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우상을 섬기게 된 이유도 바로 그런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오해하는 거지요. 그러한 흐름 속에서 그 예언자들, 시편기자들, 영적인 그러한 깊이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걸 정확하게 구분해 내고 이스라엘 사람들에 갈 방향을 정확하게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하나님 신앙이 늘 처음부터 딱 정확하게 잘 정리 되어 갖고 발전해 온 것이 아니라 뒤뚱뒤뚱 대고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많았습니다. 그들도 여전히 당연하게 가나안 땅에 바알이나 아세라 신상 우상들이지요? 섬길 가능성이 많았지요. 실제로 그릇된 적도 많이 있었고요. 만약에 그 이스라엘 역사에 예언자들과 이 시편기자들 같은 영적인 깊이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없었다면 이들은 당연히 그 당시 그 근동에 있었던 다른 일반 종교들과 똑 같은 형태를 취했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 하나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위태로운 길을 걸어 온 거예요. 어느 한 순간에도 안정적으로 참된 하나님의 신앙이 자릴 잡을 때가 별로 없었습니다. 계속 그런 투쟁의 역사가 있었던 거지요. 그들이 결국 그러한 과정 속에서 다른 데로 완전히 치우치지 않고 새롭게 돌아오고 하나님 신앙에 그 바른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영적인 대가들 성서기자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이런 것들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 목회현장에 있는 사람들만 따라 가게 된다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어요. 하나님을 의인화하고 신인동성동형론 쪽으로 이해를 해 갖고 오해하는 거지요? 그래서 열정적으로 무무엇을 많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신앙은 작아지는 거예요. 이게 정말 지금 계속된 일이고 역사의 일이나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목회 현장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건 그 목회를 하는 사람들의 심성이 나쁘다거나 인격이 왜곡 되었다는 차원보다도 그 현장자체가 그렇게 만들어 갑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본 여기도 그렇고 다른 예언서나 구약의 오경도 마찬가지구요. 거기서 우리가 계속 확인 할 수 있듯이 그 민중이잖아요? 회중은 목회 현장은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건데, 민중의 요구라고 하는 것은 늘 즉흥적인 것이요. 그리고 말초적인 것이구요. 현실 안주이구요. 가시적인 거구요. 그러한 쪽으로 요구를 하기 때문에 그들과 같이 현장에 있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요구에 부응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목회 현장이 그런 거예요. 전 그래서 한국교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비본질적인 그러한 요소들 하나님의 신앙과 좀 거리가 있는 그러한 모습들에 대한 책임을 성장중심주의에 빠진 목회자들의 전적인 책임이다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현장 자체가 어쩔 수 없다 그런 거지요.

 

물론 그런 가운데서도 생각이 있는 목회자라고 한다면 본질을 추구해야 되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마는 그러나 현실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으면 그걸 혼자서 뚫고 나가기가 힘들거든요. 한국교회의 현장이 이런 거와 똑 같다 우리가 보는 시편에서 보는 이런 상황과 마찬가지다 하는 거지요. 하나님이 흡사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신 것처럼 생각하고 목회가 이루어지고 있거든요? 신자들도 그러한 방식으로 머릿속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런 것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제가 들 필요가 없겠지요? 여러분들이 잘 아실 테니까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까?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시간 그리고 돈 이건 아마 천문학적인 숫자 일 거예요. 그리고 그런 모임이라든지 각종 프로그램과 그러한 행사들 거기 쏟아 붓는 에너지들은 대단한 겁니다. 그 열정들이 강하지요. 그렇지만 그런 열정 자체가 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라고는 할 수 없는 거예요. 이건 구분되어야 됩니다. 물론 열정자체를 제가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하나님 신앙에서 나오는 열정 그런 것들 필요하지요. 이거는 지금 그런 열정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오해함으로써 벌어지는 자기 충족으로서의 열정을 이야기 하는 거지요. 하나님을 참되게 찬양하거나 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거예요. 제가 성서비평 할 때 성서도구주의라고 하는 말을 썼습니다. 성서 텍스트의 영적인 심층으로 들어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요. 그것을 딱 떼어다가 이용하려고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만 겉으로 내 놓았지 실제로는 자신들의 종교적 욕망을 이렇게 충족시키는 그러한 교회활동 일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뭐 꼭 그렇겠냐.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영적인 만족을 얻고 가고 있는데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건강한 거 아니냐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뭐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걸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요. 사실은요 일반 신자들은 그냥 그렇게 가르치니까, 그냥 가르친다고 하는 내용은 아시겠지요? 성서주일 십일조 목장모임 거기서 벌어지는 셀 지도자 활동들 등등 사람들이 인간관계와 그런 심리적 카타르시스 이런 등등 여러 가지로 얽힌 이런 문제들, 이런 가르침들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하고 딱 맞는게 아니다 하는 사실 조차를 그걸 사실 잘 모르고 있는 거지요.

 

오늘 제가 어떤 분에게 전화로 상담을 받았습니다. 그 분 하는 얘기가 지금까지 자기가 교회의 셀 모임의 리더라든지 이런저런 일로 열심히 교회 일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좀 허전하더라고 하는 거예요. 신자들 찾아가서 교회 나오게 하고 셀입니까? 하여튼 그러한 방식으로 활동을 열심히 했는데 교회 그러한 일에 참여하더라고 영적인 만족이 없다고 하는 거지요? 신앙의 본질 같은 것들은 거의 사라지고 여러 가지 교회 프로그램들이요. G12나, 그 몇 가지 그러한 한국교회에서 많이 벌어지는 몇 가지 프로그램들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이름은 깜박했어요. 알파코스 네, 그런 것들요. 그런 것들은 계속 반복 되고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거기서 만족이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영적인 만족이 안 된다고 하는 거지요? 이게 어디가 어떻게 문제가 된 거냐 그러면서 좀 그러한 고민을 하는 하소연이었습니다. 그 분이 표현 하는 게 재미있어요. 그가 그런 교회에서 얻은 그런 은혜라고 하는 것은 일주일차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고걸 겨우 받아 갖고 겨우 거기에 감정적으로 휩싸여 갖고 일주일 버텨내고 또 갈급해서 가서 그런 감정적이고 행사 위주에 그런 교회 활동을 하면서 또 약간 사랑하는 것처럼 하면서 일 주일 보내고 그러나 결국은 영적인 성장은 없이 왔다는 거지요. 네, 오늘 여기 시편 기자는 그 당시 사람들의 종교적 열정, 이것이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는 것 하고는 다르다 그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1절에서 6절까지는 하나님이 심판자로 자리에 섰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예요. 심판자는 정확하게 보시는 분이지 않습니까? 네. 6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해요. 6.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 이로다 심판장으로서 그 당시 이스라엘 신앙에 왜곡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한다고 하는 거지요. 그 하나님이 누구냐 하나님이 어떻게 무엇을 원하는가 신앙의 본질이 뭐냐 하는 것들을 그 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8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요.

 

8.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 이로다 그 번제에 신경 쓰지 좀 마라 하는 거지요. 그게 늘 넘쳐난다고 하는 거예요.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이스라엘의 끊임없이 그렇게 번제, 거기 또 제물 드리고 그런 일들을 드리고 자기만족에 빠지는 거지요. 네가 제물 적게 가져 왔다고 해서 그걸 책망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그걸 지금 넘치게 하고 있다고 하는 거지요. 이러한 말씀이 오늘 한국교회에 그대로 적용 되는 것 같습니다. 번제가 항상 있지요.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이 너무 많지요. 그래도 그것도 부족한 거처럼 조금만 잘못해도 불안해하고 말이지요. 주일 한 번만 빠져도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하고요. 심지어는 새벽기도 한번 안하면 불안해하고 말이지요. 큐티 한번 안했다고 그래서 이거 오늘 하루 어떻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그런 불안감에 빠진 다거나요. 이거 똑같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들도 그런 관점들이어요. 9.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그거 신경 꺼라. 하나님이 그런 거 맘에 두고 있는 것처럼 생각 하냐 그건 하나님을 인간처럼 생각하는 거 아니냐 얘기입니다. 혹은 신자들이 그런 점에서 심리적으로 불안증에 빠져 있지요. 이거 돈을 어떻게 벌었는데, 이거를 얼마를 바쳐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상당히 과민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물질을 원하지도 않는 거거든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에게 드리고말고 예, 그런 것으로 불안하게 생각한다면 문제가 되는 거지요. 예,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10절이 이렇습니다.10.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그렇지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요. 11.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다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어떤 물질에 눈독을 들이고 있겠냐 아니라고 하는 거지요.

 

12.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이건 은유적으로 이야기 한 겁니다. 하나님이 주리긴 무슨 주리겠어요. 그냥 은유적으로 말해서 헌금이 많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그것 때문에 일일이 너한테 이게 없으니까 내가 너한테 이거 말하지 않겠다. 거기 가득한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잊지 마셔야 됩니다. 모든 것들이요. 아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13절은 아까 읽은 고기와 피 이야기이구요. 그게 점점 에스컬레이터 되는 것 같군요. 하나님이 우리의 돈이나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뭐냐 하는 것을 이렇게 점증적으로 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기를 먹으며 피를 마시겠냐, 그렇게 쓸데없이 착각하지 말라고 하는 거지요. 그런데 관심 좀 꺼라 라고 하는 겁니다. 예, 정말 우리는 쓸데없는 신경을 쓰는 것 같아요. 하나님을 위한다고 고생스럽게 무얼 하긴 하는데, 헛수고지요. 이미 예수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말씀하셨잖습니까? 그 수고는 율법적인, 종교적인 수고거든요? 지금 얼마나 많은 그런 종교적인 부담감으로 신앙생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참 불쌍해요 어떻게 보면요 신앙이 자유와 평화인데 오히려 반대로 나오고요. 겉으로는 평화 안식 얘기를 하면서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하고 자기가 한 행위로 조금 보상 받는 거지요. 아, 내가 예배를 이렇게 드렸다든지 헌금을 어떻게 드렸다든지 내가 그래도 좀 어떻게 했다고 하는 하나님을 위해서 제물과 번제를 드렸다고 자기만족에 빠지는 거지요. 그게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뭐냐 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감사로요. 감사한 마음 찬양을 부르라고 하는 뜻 아니겠습니까? 감사 찬양 우리 영혼의 깊이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그런 찬양 말입니다.

 

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 로다 유명한 구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우리가 바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바치거나 바치지 않거나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요.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일하는 거예요. 환난 날에 부르라 하나님에겐 환난이라고 하는 것은 없지요. 말하자면 하나님이 무감정 전혀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 초월적인 그런 분이라고 하는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죄 우리의 어려움에 같이 고통을 당하시지요. 지금 여기서 말씀 드리는 그거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환난 그러한 것은 하나님에게 환난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돕는 분이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면 그 분이 우리를 건지시고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이게 아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기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15절입니다. 다시 읽겠습니다. 이 15절이 오늘 50편의 중심 주제 같네요. 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 로다 예, 하나님이 건진다고 하는 사실 이것을 우리가 더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사업이 망했다가 사업이 잘 되고 이런 걸 건진다고 할 수 있을까요? 뭐 그런 거야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될 수도 있겠지요. 우리에게 생명으로부터의 단절, 이런 것들이 정말 환난이지 않습니까? 거기서부터 우릴 건진다. 생명이 우릴 건진다고 하는 거지요. 우리가 생명으로 건짐을 받는 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일치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 이외의 것들로는 우리가 결코 어디에서도 생명을 경험 할 수 없으니까요. 하나님과 일치 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영화롭게 한다. 그게 뭘까요? 영화롭게 한다는 말씀이요.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기도 하고 말이지요. 이것도 역시 생명과 연관되는 문제입니다. 생명이 가장 심층적 차원에서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 이게 영화롭게 하는 거지요. 손 올리고 그럴듯한 모양을 갖고 찬송을 부르는 이런 모양들이 별거 아닙니다. 흉내 낼 수 있구요. 자기감정에 도취 되어 가지고 얼마든지 그렇게 살아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에게 의존시키는 그런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이런 말씀들이 추상적으로 들리시나요? 아주 실질적으로 들리시나요? 16절 부터는 악인에게 이르는 하나님의 경고인데요. 그거는 넘어가도록 하고요. 마지막 23절 결론적으로 그 말씀만 읽고 간단하게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영화롭게 하는 말이 다시 나오지요? 15절에 나와 있는 그 단어입니다.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 14절에도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14절과 23절이 연관됩니다. 14절과 15절이 같이 묶여서 14절은 감사로 제사 드리고 15절은 영화롭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두 개가 같이 묶여서 23절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한다. 그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는 거지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한다. 제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 네, 이 감사의 차원을 오늘 우리가 훨씬 깊이 있게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 그 안에서 우리는 먹고 마시고 이 땅에서 주어진 삶을 사는 거지요? 그리고 죽음 이후에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 될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하나님께 감사 드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형식적인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서 결국 자기 연민에 빠지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를 끝없이 축소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영혼 전체를 사로잡을 수 있게 하는 그러한 신앙적인 태도 이것이 바로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레벨:18]눈꽃

2009.04.29 05:39:20
*.187.19.193

사티아님!
올려주시는 녹취록을 대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 집니다.
님의 열정에 답글을 아니 올릴 수가없습니다
동영상강의는 현장에서 설교 듣는 것 같아 좋고 사티아님의 녹취록은 한자한자 씹어먹는 즐거움이 있고....그러나 시편50장은 즐거움이라기보다 내 심장과 폐부를 찌르는 듯 서늘합니다

시편50장은 51장 119장과더불어 제가 제일 애송하는 시 랍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4~15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라시리라"시51:17   이 귀절 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기도 할때마다 이 귀절이 내입에서 떠나지 않았었는데...........

오늘 다시 이 말씀을 접하면서 다시 목이 메어 옵니다

녹취록 대할 때 마다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사티아 선교사님 건강하시고 주안에서 행복하시길...........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9.04.29 08:00:41
*.139.165.36

위 녹취는 사티아 님이 아니라

라라 님이 받아쓴 거랍니다.

사도신경은 사티아 님이,

시편은 라라 님이 맡기로 잠정 합의했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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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97편 녹취록-의로우신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9-23 1076
11 96편 녹취록-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 file 박은옥 2010-09-23 928
10 95편 녹취록-완악한 마음 file [3] 박은옥 2010-09-23 985
9 94편 녹취록-복수하시는 하나님 file 박은옥 2010-08-31 1548
8 93편 녹취록-하나님의 권능 file [2] 박은옥 2010-08-3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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