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23편 녹취록 - 여호와는 나의 목자

조회 수 1909 추천 수 0 2009.04.29 09:21:57

시편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23편 1절에서 6절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러한 내용이죠. 시편 23편 1절에서 6절까지 아주 짤막한 내용입니다. 일단 제가 먼저 읽을테니까 여러분은 따라서 눈으로 보십시오.

[1]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2]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3]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4]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5]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부어 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6]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잘 아는 거죠. 같은 목소리로 내용을 생각하면서 읽겠습니다.

[1]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2]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3]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4]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5]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부어 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6]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아마 시편 전체 150편 중에서 가장 많이 애독되는 시편이 바로 이 23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유대인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분명히 23편을 가장 많이 읽는다고 볼 수 있어요. 찬송가도 그러고 어린이들도 많이 외울 정도로 아주 익숙한 그러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23편이 우리들에게 가장 친근하게 가장 많이 읽혀지는 이유는 보기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두 가지예요.

하나는 23편의 언어가 친근합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시편 그 단어들을 보면 조금 울적하기도 하고 아주 힘들다고 하는 자기 하소연이기도 하구요. 또 어떤때는 심지어 자기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는, 다 없이 해달라고 하는 그런 단어들이 있고 그러한 부담스런 부분들이, 내용들로 들어가면 거기에도 깊은 영성이 있습니다만 일단 이 단어들이 풍겨주는 느낌으로만 본다면 이 시편 23편은 앞에 있는 시편들하고는 전혀 다르게 따뜻하고 평안해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두 번째 23편의 내용이 종교의 진수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예요. 뭐 시편 전체가 성서신앙을 바르게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기는 있습니다만 여기에는 조금 더 진수에 가깝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내용은 우리가 차츰 공부하겠습니다만 그냥 1절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아쉬울것 없는 참된 만족을 이야기하잖아요. 늘 아쉬움가운데 있는데 종교적 깊이에 들어가게 되면 아쉬울 것 없는 정말 만족스러운 실질적인 그런 삶이 아쉬울 것 없는 어떤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의 진수라고 할 수 있구요.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은총이다 이런 것들이 1절에서 6절까지 아주 여기에 중요하게 그리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또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어요. 내용이 종교의 참맛을 우리들에게 전달해준다. 두가지를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시편 23편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가깝게 읽혀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는 이거는 어린이들도 외우고 가깝게 하기 때문에 천진난만한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어떤 감수성 이런 데 있는 신앙을 표현한 거다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착각입니다. 이거는 청소년들의 감수성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살이를 다 거친, 인생의 여러 가지 풍파를 다 거진 나이가 들어서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관조한다고도 볼 수 있고, 그리고 이건 전체적인 것을 조망한다고 볼 수 있고, 그런 관점인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어린이들 청소년들 신앙이 아닌, 원숙한 삶의 우여곡절을 다 거친 노련한, 어떤 면에서 표현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나온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6절까지 한 절씩 내용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편 23편1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제목을 이렇게 붙이면 좋아요. 주님은 나의 목자, 야훼는 나의 목자,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하는 이 목자. 독일어로 히르케,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부르면서 이 시편을 인제 쓰고 있습니다. 이 목자라고 할 때는 어떤 개인적인 관계라고 보다도 공동체 전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양의 무리잖아요. 목자가 양 한 마리 키우는 것 봤어요? 수 백마리, 수천마리 무리되어 있는 것처럼 이 목자라고 단어를 통해서 이스라엘 전체 무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이런 것들을 내다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호칭을 하면서 하는 말이 아쉬울 것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 어떠세요. 이러한 신앙이 실질적인 어떤 것이었을까? 아니면 아니었을까 하는 것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을 것 입을 것 부족했다고 하는 것 다 알죠? 또 양도 사실은 이스라엘 땅이 척박하기 때문에 물과 풀이 늘 부족해요. 사실 이거는 신앙적인 문제입니다. 그 당시는 목마르고 배고픈데 지나놓고 주욱 보면 부족한 것 없었다 이러한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은 현재 당장 목마르고 좀 배가 고파도 이미 지나간 것으로 생각해서 이 삶을 돌아보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이 너무 크게 확대되어서 여기 있는 진을 다 빼는데 신앙적인 사람들은 이렇게 노래를 하듯이 이미 다음 시간에 가버리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것은 어쩌면 인생의 노하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80살 되었다고 생각해 보아요. 여러분들이. 난 그렇게 생각할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 내가 5년후에 몇 년후에 죽을때가 된 나이가 되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을 어떻게 회고할 것인가 그런 생각을 종종 합니다. 현실적으로 이렇게 살기는 하겠지만 이거는 현실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사람을 비디오로 돌려보듯이 하는 그러한 삶이다라고 하는 거죠. 만일 그렇게 된다면 실질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그렇게 돌아볼 수 있다면 힘을 뺄 수 있죠. 이것 때문에 아등바등 하지 않을거 아니겠어요. 이미 지나간 필름을 돌아보는 건데. 이런 눈을 어떻게 갖겠어요. 이건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삶을 돌아볼때만 가능한 거예요. 이것이 말 장난은 아닌거예요. 이런 현실 삶이 고되니까 이걸 모면하기 위해서 그냥 일부러 생각만 그렇게 하자 아니라 세상살이 정말 그런거거든요. 그걸 우리가 뚫어보지 못하기 때문에 아주 작은 어려운 어려움 때문에 우리 영혼까지 손상되는

우리 삶 자체가 헝클어지는 그러한 일들이 부지기수죠.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그렇게 삽니다. 아쉬울 것 없다 이런 영적인 상태가 필요합니다. 사실은 곰곰이 따지고 보면 아쉬울 것 없죠. 아주 절대적인 궁핍, 그러니까 북한 주민들, 정말 힘든 주민들, 우리 바로 육이오 직후라든지 이럴때 말고 지금과 같은 세대에서는 사실은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프지만 않다면 최소한도로 건강하기만 한다면 노동을 해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 아쉬울 게 없다. 풍족하다. 실질적인 삶인데 상대적인 빈곤함에 너무 많이 휘둘려 있는 것 같습니다.

1절 후반절과 2절에 굉장히 그림과 같은 장면이 묘사되고 있어요. 푸른 풀밭에 놀게 하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한다. 구약 성서학자 제가 참고한 시편을 주석한 사람의 말을 빌리니까 여기에 히브리어의 고유한 뉘앙스가 있다고 하네요. 그런 것들을 독일어나 다른 말로는 번역해 낼 수 없다고 합니다. 히브리어만이 요 구절에서 말하는 게 있는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곳으로 집중된다고 해요. 이게 무슨 말인지 설명이 더 필요하기는 한데요. 시간에 대한 이해가 히브리인들에게는 독특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늘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넓혀서 생각하잖아요. 따로 따로 다른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히브리 언어 구조속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안에서 하나로 결합된 어떤 그러한 세계를 내다본다는 것입니다. 시간에 대한 이해가 그들에게는 독특한 거예요.

이렇게 상상하는 것이 좋아요. 제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 하고 연계되는 건데 나중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혹은 하나님품에 안겨서 혹은 다른 말로 하자면 궁극적 생명에 참여해서, 또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한다면, 예수의 부활생명에 참여해서 우리가 지금 몸을 갖고 살았던 이 지구안에서 살았던 삶을 다시한번 되돌아 본다면 결국 과거로 된 게 아니라 하나님안에서 현재가 된다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안에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히브리인들이 볼 때 영원한 현재라고 하는거예요. 이게 확 와닿지 않을거예요. 우리는 늘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요. 과거가 바로 현재, 영원한 현재, 하나님안에서 미래 완성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흘러간 시간들이 과거가 아니라 그냥 어떠한 방식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 안에서 융해가 되어서 영원한 현재가 된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제가 칼국수 먹었는데요 국수안에 밀가루도 있고 고춧가루도 있고 멸치 국물 이런 것이 다 포함되었지만 위속에 들어가서 다 소화되어서 영양소가 되어서 하나가 되버리잖아요. 영양분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았던 살고 있는 시간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라면 융해가 되어서, 위속에서 소화가 되어 하나가 되듯이 영원한 시간속에 들어간다고 하는겁니다. 그러한 뉘앙스가 이 히브리어 안에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늘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주신다고 하는 미래이지만 동시에 현재인, 미래가 현재 안에 들어오는 그런거죠.

3절, 3절 후반절에 보면 목자 자신인데 그 분이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 분은 바로 우리의 길이다. 인도하시는 길이다.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요. 요건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하나님앞에서 새로운 시간이해와 더불어서 시간의 신비인데 우리가 살아왔던 삶도, 먼 미래에 혹은 과거인 동시에 현재인데, 미래와 현재를 하나로 생각해야 되어요. 하나님의 시간에 들어가게 되면 오늘 우리가 살아왔던 모든 삶의 것들이 하나님이 인도 하는 길로 우리가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거는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요. 다시 한번 제가 이렇게 표현해야 되겠네요. 먼훗날, 제가 먼훗날이라고 하는 것은 종말론적인 시간입니다. 생명이 완성되는 시간입니다. 그 훗날에 우리의 삶을 회상하면서 우리는 결국 이렇게 이해하게 될 거예요. 주님께서 나의 인생 길을 인도하셨다. 그러한 것들을 시인들을 미리 경험한 것이죠. 얼마나 놀라워요. 우리는 그러한 것을 모르고 매일 아등바등하면서 살잖아요. 왜 이럴까 왜 저럴까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안되면 불편하구요. 모든 것을 자기 주관성에 다 두드려 맞추려고 하니까 세상이 헝클어져 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길을 생각해야 된다니까요. 그러면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이예요. 지금 당장 돌맹이에 넘어지는 것 같아도 그러한 것들도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들로 오게 됩니다.

이러한 영성이 우리들에게 필요한데요. 이게 잘 안되요. 사실은 잘 안되요. 왜 안되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아실 겁니다.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건데 자기가 너무 중요합니다. 제가 자주 쓰는 단어로 나르시시즘, 자기연민이예요. 자기 속에 딱 갇혀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달걀처럼, 새가 알속에 숨어 있잖아요. 안에만 있으면 따뜻해요. 그러나 완전한 생명이 아니거든요. 우리는 알안에 갇혀있는 상태로 모든 세계를 판단하려고 하니까 이거는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거예요. 모두가 자기를 힘들게 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거예요. 그냥 좀 힘빼고 내버려두고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는 길이다 맡겨야 되고 그걸 못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신경성 병도 걸리고 인간 관계도 정말 나빠지고요. 인간을 이용하려고 그러잖아요. 자꾸만. 그리고 자기의 생명도 손상당하고 이게 악순환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이었다. 그러한 영적인 성숙한 자세를 조금 유지해야 되겠습니다.

그 문제를 시편기자는 4절에서 자기가 젊었을 때 경험한 것을 다시 한 번 회상하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이 계시오니 무서울 것이 없어라.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 여러분 이거 우리 인생에 찾아와요. 이거는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어요.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뭐 시집장가 잘가서 사회적인 직분도 갖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여러 가지 면에서 그런데 불치의 병에서 걸린다거나 사업이 망한다거나 그런 것만이 아니라 그렇게 좋은 쪽으로만 살게 되면 어느 순간엔가 큰 허무에 휩싸이게 될 거예요. 인간은 생활환경이 좋은 것만 갖고는 인간은 만족스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이 영적인 동물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이거는 아주 실질적인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회피하거나 자극적인 무엇을 산다거나 취미 생활에 아주 집착한다거나 아니면 권력을 얻기 위해서 비인간적인 행동을 한다거나 그렇게 하긴 하거든요. 그건 인제 악순환이죠.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가 오게 되는데 이 시편기자가 그런 경험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요거는 다윗의 시에 좀 가깝기는 해요. 다윗이 직접 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다윗의 삶에 이런게 많이 있었잖아요. 다윗의 삶을 반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막대기와 지팡이. 하나님의 막대기와 하나님의 지팡이가 우리의 삶에 활동하는 거거든요. 문제는 그것을 우리가 못보는 거지요. 하나님의 막대기과 지팡이를 못 보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왜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가 못 볼까요? 이게 여러분 우리가 잘 생각을 해야되요. 불치병에 걸렸다고 하면 삶이 완전히 정말적인 것 같죠. 그렇지 않아요. 정말 자기의 생명을 포기하면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불치병에 걸렸다 진단받으면 정말 이 땅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게 되면 놀라운 평화를 얻게 됩니다. 나도 개인적으로 그러한 불치병 진단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처음에는 좀 힘들겠지만 난 괜찮을 거라고 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길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평화를 얻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이 땅에서 50년 더 사는 거나 아니면 조금 적게 사는거나 시간적인 계산은 차이가 없는 거니까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있다 그걸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못보는 이유는 지금 우리앞에 놓여있는 것이 너무 크게 부각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게 다르게 보일 수 가 없는 거죠. 이게 참 비극인거에요. 예. 이 시편기자가 아무 걱정 할 것 없다. 1절에서는 아쉬울 것 없다 이야기하구 4절에서는 걱정할 것없다 이야기하구요. 

여기서 한단계 더 나가서 5절에 보면 놀라운 표현을 합니다. 원수들 보라는 듯. 원수들은 누구일까요? 니까짓게 잘되나 보자. 원스들은 늘 많죠. 어쩌면 우리의 친구가 원수가 될 수 있어요. 겉으로는 뭐 좋다 좋다 하면서도 흥 그래봐야 너가 어떻게 되겠냐? 사람들은 늘 경쟁하니까 그런 옆에서 노려보고 있는 사람들을 뜻하겠죠. 그걸 내가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요.

여기서 시편 기자가 놀라운 단어들을 세 가지 이야기합니다. 보이죠. 상, 기름, 잔 요 세가지 단어만 갖고도 우리가 묵상을 하기 시작하면 많은 내용들이 들어올 수 있겠네요.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네요. 상 기름 잔 상을 차려주셨다. 무슨 뜻인가요? 잔치상 같은거죠. 하나님이 우리를 중요한 손님으로 초대하셔서 많은 먹을 거리를 올려놓은 상을 차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게 빈 말이 아니죠. 독일어로 성서주석한 사람이 써 놓았던데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손님으로 초대해주시는 가스트게버, 영어로는 아마 host라고 하나요. 초청해 주는 주인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하나요. 하나님은 이 땅위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풍성한 것을 상에 차려 주시고, 잔치상을 베풀어 주셨고, 그리고 기름을 머리에 발라주셨다. 여성들이 좋아하는 향수를 뿌려주는 거예요. 그리고 잔. 포도주잔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 당시에는 포도주가 모든 면에서 중요한 요소였는데요. 전체적으로 풍요로운 향수 냄새를 풍기면서 먹을게 많은 상다리,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음식과 그리고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포도주잔, 이게 아주 문학적인 용어들을 통해서 시편기자가 하나님이 우리를 손님으로 초대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보여요? 이게 안보이면 우리는 불평하면서 살게 되는 거죠. 우리가 손님이라는 사실을 놓쳐 버리는 거죠. 늘 주인처럼 생각해서 주인대접 안해주나. 금만 안해줘도 불평하죠. 나만 이렇게 손해보나. 이게 반복되지 않습니까? 손님이라고 하는 것과 더불어서 이미 우리 주인은 너무나도 풍성한 것을 우리들에게 준비해주셨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뭔지는 제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되겠죠. 그거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없는 사람이예요. 오늘 저녁에 먹은 한 그릇 먹은 밥, 혹은 국수 이게 얼마나 놀라운 우주론적인 사건인지. 이거는 우주에서 우리만이 이렇게 먹을 수 있는 아주 놀라운 먹을거리고 그러한 감격이거든요. 이것이 너무 지천으로 널려 있으니까 우리는 그게 얼마나 값진, 우리 주인이 베풀어주신 상인지, 상에 올려진 음식인지 그걸 모르고 살아가요. 이렇게 좋은 믿음의 식구들끼리 만나서 예배드리고 대화하고 가족을 꾸리고 하는 이러한 모든 생명현상들, 이런 모든 순간순간들까지 이런 것들이 다 놀라운 하나님의 상이며 기름이고 잔이다.

마지막으로 6절에 시편기자가 모든 것을 결론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은총과 복에 겨워산다. 은총과 복 이거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여기서 여러분들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 팔자 늘어졌다 그 차원이 아니라는 것 알죠.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와 같은 순간들이 많이 있었어도 인생을 다 뒤돌아보니 이게 다 하나님의 은총과 복이었다. 그게 다 하나님의 시간안에서 그 은총으로 융해가 되버린거죠.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마지막 구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영원히 주님집에 거하리로다. 이것이 매일 예배에 참석한다. 교회당에 와서 산다 그런 뜻은 분명히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죠. 생명의 신비와 환희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과 일치되어서 살아가는 삶, 그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죠. 이게 얼마나 시편 23편이 중요한지. 이거를 제발 그냥 좋으니까 그러려니 그런 사람이나 그렇겠지 나는 지금 힘든 일이 많아서 안된다 이렇게 하면 그건 참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이미 우리들 앞에 하나님이 많은 거를 차려주셨는데도, 준비해주셨는데도 다 그런 것을 전혀 은총과 복으로 여기지 못하고 온통 자신의 개인적인 불안과 불만, 힘든 것 그런 것에만 우리의 삶이 소진된다면 우리는 진주를 받은 돼지와 같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제목이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했어요. 오늘 저도 새롭게 말씀을 준비하면서 늘 듣고 외우고 찬송으로도 많이 부르기도 했는데 새롭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 이게 보통시가 아니구나. 하는 그러한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시편 23편 기자의 영적인 깊이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는 아주 오래전 어떤 시인의 놀라운 신앙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바로 우리 삶의 목자이십니다.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인줄로 믿습니다. 비록 우리의 삶 앞에 이런 저런 해결해야 될 문제들, 크고 작은 문제들, 혹은 음산한 골짜기와 같은 일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 모든 길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인줄을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지팡이와 막대기가 되어주시는데 우리가 무엇을 우리가 걱정하겠습니까? 오늘 시편 기자처럼 아쉬울 것 없다는 그리고 걱정할 것 없다는 그러한 신앙을 저희들에게 허락해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오늘 다시한번 23편을 함게 읽고 마치겠습니다. 다 같은 소리로 말씀을 읽읍시다.

[1]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2]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3]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4]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5]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부어 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6]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profile

[레벨:26]사띠아

2009.04.29 09:29:17
*.162.49.124

새벽 4시에 일어나 눈꽃님의 오해의 글을 보고

라라님이 받으셔야 할 찬사를 다 받은 죄송함으로

23편을 녹취했습니다.

그래서 이 녹취는 순전히 눈꽃님의 공로입니다.


이 말씀을 이번 주일 설교 말씀으로,

또 내일 벧엘한인교회 여전도회 기도모임에서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여호와 우리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여호와의 시간안에서 누리는 관조(觀照),

그리고 그 넘치는 잔으로 인하여 

여호와를 찬미합니다.

[레벨:18]눈꽃

2009.04.30 02:36:08
*.187.19.193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한 평생 은총과 복에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추운 시기 내 행복은 이제 여기서 끝인가~~
그러나 그 절망의 시기가 내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가 될 줄이야

사티아선교사님 녹취록 고맙습니다

열강해 주신 목사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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