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51편 녹취록-원죄와 구원

조회 수 1312 추천 수 0 2009.04.30 11:19:59

시편 51편 강해-원죄와 구원

 

시편 51편입니다. 아주 유명한 시편 이예요. 내용이 절실합니다. 죄와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태도 그러한 주제를 갖고 시편가지가 어떤 영적인 세계를 설명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단 제가 1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1.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2.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 하였나이다

6.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7.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 리이다

8.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9.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 하리이다

15.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 하리이다

16.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 제를 기뻐하지 아니 하시나이다

17.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 하시리이다

18.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아멘! 죄에 대한 통찰이 이 시편 51편보다 더 깊거나 날카로운 것은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하나하나 우리가 따져서, 한 구절 한 구절 다 따져서 읽고 또 해석하는 것은 필요할 텐데요. 전체 그림을 먼저 한번 그려 보겠습니다. 그 그림을 그리기 전에 지금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그 한 마디 먼저 드릴께요. 시편 기자가 죄를 이야기 하면서 심각하게 말하잖아요? 그냥 일반론적인 걸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이 시인의 고유한 영적인 통찰과 경험에서 나온 살아 있는 통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게 이 말씀들에서 우리가 감정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보통 회개, 죄, 통회 이렇게 하게 되면 펑펑 울고요, 또 감정적인 그러한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 시인이 그러한 감정적인 죄에 대한, 심각한 절망감에서 오는 그러한 감정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 건 이제 다 생략이 된 거예요. 절제되고 있습니다. 저는 시인이 그런 것을, 감정적인 요소들을 억제 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구요. 실제로 자신의 그 죄 성, 죄 경향성, 죄 지향성, 그런 것 들을 뼈저리게 느낀다면 눈물을 흘릴 수가 없을지 모릅니다.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는 거거든요. 이 눈물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연민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물론 다른 이유로도 눈물이 나오지만, 이 죄 문제, 이런 거 연관에서는 자기 연민이 남아 있을 때 눈물이 나오게 될 겁니다. 내가 왜 이런 정도 밖에 되지 않는가 에 대한 자책감, 그런 것들이구요. 물론 하나님 앞에서의 철저한 그 회개, 이런 것들에서도 눈물이 나올 수 있겠지요. 그런 것을 제가 다 부정하는 것은 아니구요.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죄의 깊은 절망감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지 못했을 때 나오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절망적일 때는, 그 때는 감정이나 눈물이나 이런 것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거지요.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손을 논다고 해야 할까요? 기절초풍한다고 할까요? 언어도 잃어버린 다고 할까요? 아예 그러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시편 51편에 감정적인 표현이 다 억제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 만큼 이 시편 기자가 죄의 심각성 안으로, 거의 나락에 떨어질 정도로 들어갔다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 51편의 전체 그림을 보면요. 자기 실존의 죄가 얼마나 숙명적으로 묶여 있는가를 날카롭게 지적을 하고 있구요. 그런 것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근데 그러한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죄의 어떤 윤리적이 차원에 머무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파악 하는 거지요. 사람들에 대한 잘못, 이러한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의 잘못한 것만 문제로 삼는 거냐 그 뜻은 아닙니다. 그러한 우리가 기독교인이 죄를 이야기 할 때 그런 쪽으로 빠질 염려도 있지 않아 있어요. 죄가 추상화 되는 거지요.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을 방패막이로 삼아서 자기 자신이 마땅히 감당해야 될 어떤 그 잘 못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마땅히 대해야 될, 건네야 될 사람에 대한 감사들이 이런 것들이 사라질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받아 갖고 사업이나 이런 것들을 새롭게 잘 하게 되면 그럼 그걸 도와 준 사람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감사하게 생각해야 되잖아요? 그러나 어떤 기독교인은 이것도 다 하나님이 해 주신 거야 하나님이 당신에게 축복해 주기 바란다 이런 정도로 지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고 그걸 감추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지 사람에 대한 감사는 이렇게 뒤로 미뤄지는 경우가 있어요. 오늘 시편 기자가 이 죄의 심각성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뚫어 보고 있다는 것은 그런 차원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사람 앞에서 행한 잘 못에 전적인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거지요. 사람 앞에서 행하는 모든 것, 이런 얘기가 됩니다. 죄라고 하는 것들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들을 행하는 거잖아요? 결국 자기가 모든 사람들에게 행한 것들이 얼마나 엄청난 거냐 얼마나 근본적인 거냐 그런 것들을 말하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이러한 시편 기자가 죄의 문제를 하나님관계로부터 풀어 갈려고 했었다고 하는 것은 죄에 대한 실제적인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이로 더 들어 갈려고 하는 자세였다 그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그 두 가지를 말씀 드린 거예요. 여기에 한 가지가 더 필요 합니다. 결국 그러한 구도요. 어떤 구도입니까? 자기 자신에게 절망적일 정도로 작용하고 있는 이 죄성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이것이 하나님관계 앞에서의 어떤 책임감, 잘못 그런 것들을 이야기한 거구요. 그러한 구도요. 죄의 존재론적 그 깊이를 하나님의 차원에서 들여다 보는 거지요.

 

결국 세 번째 단계는 이러한 것들의 회복이 결국은 자신의 노력으로는 불가능 하다 그걸 여기서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겁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안 된다면 결국은 하나님이 하셔야 되거든요. 이런 말들은 우리가 많이 들어서 당연히 하나님이 다 하시는 거지 이렇게 생각 할수 있는데 그런 그 입에 발린 소리요. 아주 교리화 되 버린 소리요. 너무나도 익숙해 가지고 우리 입에서만 붙어 다니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이 바로 제가 말씀드린 이게 그냥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낯익게 생각하고 있는, 말 재주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심층의 세계로 들어 간다고 하는 요 문제요. 이게 좀 어렵습니다. 구분하기가 좀 어렵구요. 신앙적인 언어유희(言語遊戱), 신앙적 교언영색(巧言令色) 이런데 머무는 것, 이게 정말 우리가 빠지기 쉬운 신앙의 태도거든요. 바리새인들에게서 우리가 그런 것들을 잘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금방 들통이 나는 거예요. 자기 보다 수가 낮은 사람 앞에서는 그럴 듯하게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들통이 안 나겠지만 자기 보다 조금 더 영적인 그러한 깊이가 있는 사람 앞에서는 금방 들통이 나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서 일종의 자신들의 일종의 허위일식이지요. 율법이라고 하는 규범 기준 형식 어떤 교리들 그런 것들을 방패막이로 해서 자기는 얼마든지 쉽게 모든 짐들을 벗어 버릴 수 있는 그러한 신앙의 태도, 일종의 위선인 거지요. 그런 것들이 유지 될 수가 없었습니다. 다 보이는 거니까 말이지요. 예수님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그런것 보다는 오히려 그냥 아예 죄인 같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 하고도 어떤 소통이 되었던 거예요. 이게 좀 아이러니해요. 바리새인들이 종교적인 인간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더 잘 이해했어야 하는데, 그 둘 사이에 더 많은 영적인, 신앙적인 관계들이 풍성해져야 되었을 텐데 정 반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점에서 신앙의 본질이 뭐냐 하는 것도 알 수 있는 거지요. 제가 누누이 말씀 드립니다만 다른 공부도 마찬 가지고, 신앙 혹은 신학, 이러한 영성 다 마찬가지예요. 이러한 것들은 결코 정보의 차원은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사과가 여기 있다고 한다면 사과를 자기가 아무리 사전을 보고 설명 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한계가 있는 거예요. 그건 정보입니다. 사전을 통해서 사과가 꽃이 몇 월에 피고 그 다음에 그게 어떤 수정이 얼마간 걸려서 어떻게 맺혀 갖고 어느 정도의 일사량을 통해서 이게 익게 되고 그러면 색깔이 어떻게 변하며 그 안에 당도 수분 이런 것들이 어떻게 몇 프로가 있다 이런 것들은 뭐 사전 보고 우리가 우리가 이야기 할 수는 있겠지요. 그렇고 맛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어떻다 어떻다, 그렇게 알아 가지고 사과 맛을 안다고 말 할 수 없겠지요? 사과를 안다고 할 수 없는 거 겠지요? 실제로 사과를 먹어 보야 되잖아요.

 

기독교 그런 신앙의 교리와 형식들 그런 안에 들어가는 게 중요합니다.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거 말이지요. 요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구요. 또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구원을 받는다 못 받는다 그런 차원 아닙니다. 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한에 속해 있는 거기 때문에 그러한 영성의 깊이로 들어간 사람만 구원 받는다고 하기는 힘든 겁니다. 오늘 뭐 그런 구원의 문제까지는 나가지 말구요.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야 되겠지요? 이 시편 기자가 결국 자기 죄의 문제를 자신의 어떤 도덕적인 변화 자기 의지력 아니면 심리적인 그러한 도움들 그런 것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예요. 이거는 그 죄의 존재론적 근거들이 우리 피조물인 인간이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심층적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한 인식인 거지요. 예, 전체 그림이 되겠지요. 중요한 구절들을 우리가 좀 더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 부분은 죄의 심각성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3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3.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죄가 항상 앞에 있다고 그래요. 그러면 이 사람은 늘 자나 깨나 잘 못했다고 하는 얘길까요? 늘 남을 괴롭힐 생각을 한 걸까요? 늘 파렴치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 일까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렇지는 않잖아요. 나쁠 때는 나쁘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녀들은 사랑하고요 예, 그렇게 삽니다. 또 자기들끼리는 의리가 있고 말이지요. 이 시편 기자가 내 죄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고 하는 것은 그런 문제하고는 차원이 다른 거지요. 그러니까 죄가 뭐냐 하는 것에 대한 그 통찰이 실증적인 잘못들, 부도덕한 행위들 그런 차원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규정이야 뭐 학자들에 따라서는 많이 다르긴 하니까요. 그걸 딱 집어서 어떤 거다 그렇게 말 할 순 없습니다.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휘브리스 라고 했어요. 교만이라고 하는 겁니다. 교만,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 보려고 하는 그런 태도, 이런 것들을 교만이라고 하겠지요?

 

판넨베르크는 자기 집중이라고 했고요. 판넨베르크만이 아니라 뭐 학자들이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기 사랑, 아모르스 위라고 했고요. 결국 여기에 모든 것들이 다 자기가 들어 가는 거예요. 자기, 자기연민이 이런 것이 포함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자아가 계속 예민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 자기를 집중하는 거지요? 자기를 확대 하는 거지요? 자기 열망에 사로잡히는 거지요? 이건 우리가 눈 만 뜨면 그렇게 되잖아요. 눈만 뜨면이 아니라, 눈 감고 있을 때도 그렇게 되지요? 잠 속에서도 우리 자아를 확대 하려고 하는 욕망이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이 시편 기자가 한 말,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하는 것은 옳은 지적이지요. 아주 정확한 지적이지요. 저는 여기서 벗어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말이지요. 평화를 우리가 위해서 일하고 그럴 때는 자기 열망 자기 집착 이런거 하지 않는 거 아니냐 말 할 수 있습니다. 예, 그런 것 까지 이 죄에 포함 시키는 건 아니지요. 이것도 하나의 문학적 수사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의 존재 전체를 일단 죄가 지배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짚어야 될 것은 우리가 윤리적으로 이렇게 선한 일을 하는 경우에 이거는 우리의 죄와 상관없다고 꼭 단언 할 수는 없는 거예요. 우리는 선한 일을 하면서도 겉으로 볼 때, 그런 선한 일을 하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자아가 작동 한다는 거예요. 어쩌면 죄가 없는 상태는, 그 죄와 죄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 상태를 떠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뭐 이게 옳으냐 그르냐에 대한 인식이 시작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거기에 죄가 작용 하는 거지요. 아주 어린 아이들 인식의 단계에 들어가기 전 그 아이들에게만 죄가 없다고 말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뭐 다른 관점에서는 그렇게 말하기도 힘듭니다. 결국 그 아이들이 조금 나이가 들면서 점점 친구들하고 싸우기도 하고 자아에 대한 의식이 강해 지면서 사회로부터 여러 가지 영향을 받고 결국 모든 인간들이 죄의 경향 속으로 빠져 들었다고 하는 점에서 이 천진난만한 아이들, 그 당시에는 죄 앞과 상관이 없지만 결국 거기에 어떤 가능성들이 놓여 있다고 하는 점에서 역시 죄와 연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5절이 이야기 하는 말씀이 일리가 있는 거지요. 이렇습니다.

 

5.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 하였나이다 심각한 지적이지요?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나를 죄 중에서 잉태하였나이다. 그러면 죄 중에 나를 잉태 하였다는 이러한 말을 그냥 문자적인 의미에서 받는 다면 남녀의 성관계, 얘기를 출생하기 위한, 말이지요? 그런 관계를 통해서만 생명이 준비되니까요. 그런 것들이 죄라고 하는 말이냐 이렇게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초기 교부들 중에서는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한 사람들도 많이 있지요. 원죄가 바로 성행위를 통해서 이어 진다 그렇게 말한 학자들도 있습니다. 어거스틴도 그런 방식으로 얘기를 했을 거구요. 제가 이게 백 프로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원죄 개념은 어거스틴에게서 나온 거는 분명하고요. 그게 아마 이런 구절도 해당 될 겁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이거는 내가 어떻게 의도해 갖고 죄를 짓고 안 짓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숙명적으로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갔다는 하는 겁니다. 다시, 어머니가 나를 죄 중에 잉태 하였다고 할 때 이 남녀 성 관계 이런 것도 그런 죄의 문제로 이야기 할 수 있느냐 하는 그런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면, 저는 그렇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 남녀의 성 관계는 딱 하나님의 창조와 연관되기 때문에 이거는 생명 사건인 거지요. 그 자체가 죄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성을 매매 한다거나 성을 도구화 한다거나 상품화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은 죄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이러한 걸 다 뭉뚱거려서 애기가 만들어지는 행위 자체를 죄로 이야기하는 것은 이건 기본적으로 창조론에서 어긋나는 거기 때문에 그건 잘못된 생각이지요. 시편 기자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구체적인 행위를 얘기 할려는 것이 아니라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죄의 힘이라고 하는 것이 그게 아주 선천적이다 근원적이다 존재론적이다 그 뜻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예요. 우리가 원죄론을 사람들이 많이 비판 합니다.

 

특별히 현대 신학에서도 포스트 모던 적인 그런 경향의 학자들이 비판하지요. 비판 받을 구석이 많이 있습니다. 이 죄론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인간의 삶을 왜곡한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거든요. 쉽게 말해서 너희들 다 죄인이야 죄인이 뭐 민주화다 뭐다 얘기해 뭐 이런 식으로 접근하게 되면 이게 기독교 죄론의 왜곡인 거지요. 그렇게 사용된 적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죄의 개념은 그렇게 역사적으로 왜곡되고 오용되어서 문제이지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닌 거예요. 기독교 신앙이 인간을 얼마나 더 근원적으로 보고 있느냐에 대한 하나의 교리적 대답이라고 할 수 있어요. 기독교 신앙은 인간을 그렇게 낭만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현실주의적 윤리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거지요. 가만 둬 두면 이건 부패 한다고 하는 거지요. 자연 주의 학자들은 좀 다르게 이야기 하겠지요? 이건 교육의 문제하고도 연관이 되는 건데요? 기독교 신학이 상당히 전반적으로 연관 되어 있습니다. 심리학 교육학 인간론 물리학 우주 시간, 철학 문제에 까지요. 루소 뭐 그런 사람들이 자연주의 교육학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자연 상태로 돌아 가는 것이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이 인간다워 지는 것은 죄와 상관없이 인간성을 확보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다워지는 것이라고 얘기 할 수 있는 데, 기독교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자연스러워 지는 거 자체가 거기 구원이 있다고, 혹은 참된 인간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더 논의를 해 봐야 되겠지요. 우리 입장에선 그렇습니다. 이게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다른 동물들하고는 참 특이하게 우리는 자연 상태로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게 그렇게 던져 진거지요. 그렇게 피조 된 거지요. 원죄 개념은 그런 점에서 저는 여전히 지금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절대적으로 옳다 보다도 최선의 방식이다 인간과 죄의 문제를 해명 하는 데에 이 원죄 개념은 최선으로 거기에 해당되는 말이다 이렇게 보는 거지요. 다시 오해하지 마십시오. 인간이 어쩔 수 없다 죄의 숙명주의로 떨어 질 수 밖에 없다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오해 되는 거예요. 죄의 힘이 얼마나 존재론적 깊이에서 인간을 유혹하고 지배하고 있느냐에 대한 그런 통찰인 거지요. 거기서 머물러 있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그 깊이에서 우리는 그런 죄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된다고 하는 거지요. 그 길이 무얼까요? 이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능할 거예요. 제가 아까 큰 그림을 그릴 때 두 번째 한 것은 다 넘어갔습니다. 예, 그건 넘어 갔어요. 죄 문제를 하나님 안에서 찾는다고 하는 것, 그렇고, 그러한 우리가 원죄에 근거한 죄를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죄 숙명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짚었어요. 어떻게 우리가 원죄를 이야기 하면서도 동시에 죄 숙명주의에 빠지지 않느냐 하는 거지요. 성서가 이야기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도움으로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아주 기본적인 교리에 속한 거예요. 구도가 간단하지요. 간단하긴 하지만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어쨋던 그 구도는 옳은 거예요. 10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a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의 창조 이걸 새롭게 하는 게 하나님의 창조지요.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 이것을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저는 여기에 동의 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예요. 노력하지 않고 그러면 기도 하면 되냐 질문도 가능하지요? 예, 근본적으로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니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다시 새 창조하실 수 있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그걸 어떻게 증명 할 수 있냐 예, 그 깊이로 들어 가는게 신학이고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보이게 설명 할 수 없어요. 그러나 그 길을 명확하게 볼 수 있는 영적인 사유 그것은 가능합니다. 우리가 자꾸 그 쪽으로 나아가야 하는 거지요. 하나님의 창조, 새로운 창조를 우리가 죄 숙명으로부터 벗어 난다고 하는 거지요. 12절에도 비슷한 이야기입니다.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자, 하나님에게 의존하잖아요? 하나님이 정한 마음을 창조하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고요.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우릴 붙드실 때 우리가 그렇게 죄로부터 벗어 날수 있다고 하는 거지요. 여기서 제가 벗어 난다고 표현 했는데요. 하나님이 우릴 붙드신다면 결코 죄를 짓지 않겠냐 그런 뜻은 아닙니다. 예, 요걸 우리가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지고 안으로 들어 갈때만 그 때만 죄의 지배가 우릴 벗어나게 되는 거예요. 두가지 이렇게 예를 들께요. 자석이 있다고 합시다 자석이요. 두 개가 있어요. 한쪽 자석에 딸려 가지 않으려면 다른 쪽 자석 가까이에 가야 되잖아요? 저쪽의 자석의 힘이 점점 약해 지지요? 우리가 한 쪽 힘이 강해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 죄는 존재론적인 힘이기 때문에 그거는 우리가 어떻게 타치 할 수 없는 거예요. 그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거지요. 죄를 극복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부활은 죽음과의 투쟁을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는 기독교 신앙의 실질적인 증거 고백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차원들을 이야기 하는 거지요. 하나님이 회복하고 붙드실때만 가능한데요. 그러나 우리가 늘 하나님만 붙어 있지 못 하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지 않는게 아니라 우리가 자꾸 벗어나게 되는 거지요. 그런 긴장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세례를 반복해서 받아야 되고요. 용서 받고 칭의로움을 받게 되고요. 그러나 세례는 단 한번이기 때문에 세례를 의미하는 성만찬을 이것을 반복할 수 있지요. 그러한 성만찬에 참여하고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에 대한 그 (?) 그러한 것을 나타내는 메타포들을 고유한 방식으로 안고 있는 역사적으로 안고 있는 이 교회 공동체 활동에 참여하는 거지요.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하는 거지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점점 하나님에 가까이 또는 하나님의 품에 가까이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에 하나님의 붙드심에 더 가까이에 가게 되는 거지요.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그게 원칙입니다. 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조금 더 설명하고 말씀을 읽을 그런 필요가 있는 거 같은데 조금 아쉽지만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47 70편 녹취록-지체하지 마소서 file [1] 박은옥 2009-11-01 1559
46 69편 녹취록-천지가 찬송하리라 file 박은옥 2009-10-27 1671
45 68편 녹취록- 신앙의 세 가지 토대 file [1] [11] 박은옥 2009-10-01 1972
44 67편 녹취록-하나님의 빛에 휩싸임 file [5] 박은옥 2009-09-29 1713
43 66편 녹취록-주님으로 인한 기쁨 file [2] 박은옥 2009-09-19 1815
42 65편 녹취록-영혼이 안식할 토대 file 박은옥 2009-09-01 1427
41 64편 녹취록-여호와로 인한 즐거움 file 박은옥 2009-08-25 1537
40 63편 녹취록- 영혼의 갈망, 영혼의 만족 file [3] [1] 박은옥 2009-08-08 1941
39 62편 녹취록-영혼의 침묵 file 박은옥 2009-08-08 2052
38 61편 녹취록-땅 끝에서의 부르짖음 file 박은옥 2009-08-08 1402
37 60편 녹취록-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file 박은옥 2009-08-07 1512
36 59편 녹취록-주는 나의 요새 file [16] 박은옥 2009-08-07 1835
35 58편 녹취록-하나님이 계시다 file [4] 박은옥 2009-07-07 1302
34 57편 녹취록 -지존하신 하나님 file [2] 박은옥 2009-07-07 1262
33 56편 녹취록-사람이 내게 어찌하랴 file 박은옥 2009-06-13 1437
32 55편 녹취록-탄원의 영성 file [4] [16] 박은옥 2009-06-09 1716
31 54편 녹취록-주의 이름으로 file [2] 박은옥 2009-05-28 1283
30 53편 녹취록 -어리석은자 file 박은옥 2009-05-28 1712
29 52편 녹취록-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file [4] 박은옥 2009-05-01 1981
» 51편 녹취록-원죄와 구원 file 박은옥 2009-04-30 131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