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52편 녹취록-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조회 수 1980 추천 수 0 2009.05.01 10:07:59

시편 52편 강해-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시편 52편입니다. 오늘은 짧은 시편이군요. 1절에서 9절까지 밖에 없습니다. 읽겠습니다.

 

1.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2.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 하는도다

3.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 하는도다(셀라)

4.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 하는도다

5.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셀라)

6.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7.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 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8.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 지하리로다

9.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게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네, 짧은 구절입니다. 오늘 짧지만 내용이, 아주 심각한 그리고 아주 깊이가 있는 시편입니다. 이러한 시편들을 읽을 때 일반적으로는 너무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다 보니까 많은 부분들을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너무 익숙한 거 같아요. 언젠가 제가 한번 말씀 드린 적이 있다고 생각이 되는데, 이런 부분들을 우리가 참 진지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진지하다기 보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읽는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대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갖는 거지요. 우리가 교회를 5년 10년 뭐 등등 그 이상 다니다 보면 성경 구절들이 익숙하기 때문에 성경읽기, 성경 공부에서도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습니다. 처음 보는 것 같은 그러한 태도로 접한다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그러한 영적인 의미들을 훨씬 풍부하게 맛 볼 수 있을 거예요. 이걸 비유적으로 다른 것으로 설명해 볼께요. 우리가 지금 지구에서 살아가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도 우리가 너무 익숙한 거예요. 나무가 거기 있고 강이 있고 봄이 있고 가을이 있고 등등 우리에게 이런 것들이 너무 당연하게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우주 어느 별에서 살고 있다가 이 지구를 처음으로 보았다. 처음으로 왔다. 여행하러 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보통 오지나 외지 다른 나라 이런 데 여행 가더라도 신선하지 않습니까? 아프리카 같은 데 가서 약 한 달 정도 살다 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기 있다가 그곳에 가면 전혀 다른 삶이란 말이예요. 순간순간이 새로운 거지요. 지구에 처음 왔다고 생각한다면 이 지구의 모든 것들이 새로울 겁니다. 이 바람이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황홀한 것이겠어요? 우주의 이런 별들 직접 빛나는 별에는 생명체가 없고 있다고 해 봐야 행성에 있는데, 행성도 좀 드물고요. 어쨋던 그런 문제는 접어 두고, 바람이 있으려면 공기가 있어야 되거든요? 이 달에도 공기가 없으니까, 조금 있나요? 있다고 하더라도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바람이 없습니다. 이 지구에는 참 놀라운 그러한 생명현상들이 매 순간 일어났지요. 전혀 이런 것을 몰랐다가 처음 지구에 와서 이 바람을 맞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황홀한 경험일 겁니다.

 

구약 예언자, 구약기자들이 그 바람을 루아흐라고 불렀다고 하잖아요? 루아흐, 고대인들에게 바람이 얼마나 신비한 대상인지 그런 단어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거예요. 루아흐는 바람이라는 뜻도 있고 영이라는 뜻도 동시에 가지고 있어요. 그들은 바람과 영을 하나로 생각한 거지요. 우리가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그렇고 성서를 대할 때도 그렇고 매너리즘을 어떻게 벗어나는가 하는 것이 생명을 리얼하게 느끼고 살수있느냐 없느냐 하는 갈림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1절에서 9절에도 읽은 여기에도 뭐 그런 이야기 구나 음, 하나님 말씀 잘 듣고 그대로 살라고 하는 가 보구나 착하게 살라고 하는 가 보구나 이런 정도로 생각해 버리고 넘어 가면 뭐 더 이상 생각할 게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전문적인 성서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텍스트에 어떤 신학적 깊이을 다 파악하기 힘들지요. 그럴 필요도 없구요. 그것은 학문적인 차원에서 할 뿐이고 우리에게 신학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적인 신학자만큼의 깊이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성서 말씀에는, 우리가 보통 때 그냥 지나가고 놓치기 쉬운 그런 깊이 들을 우리가 만날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이야기들이 많았지요. 오늘 우리가 1절에서 9절까지 짧은 말씀이기 때문에 한구절 한구절 읽고 좀 보도록 하겠습니다.

 

1.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두 가지가 서로 대조 되고 있습니다. 포악한 자들이 자기 계획을 자랑하고 있어요. 인간의 자랑 거기 그리고 대비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인 거예요. 우리들은 주로 자기 자랑, 악한 계획을 자랑하는 것 선한 거라 하더라도 그것도 결국 자랑으로 떨어 질 수 있는데, 인간의 자랑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여기서 대조되고 있습니다. 이 시편 기자가 왜 1절에서 대조하고 있을까요?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 하는 것, 이런 것으로는 우리가 결코 영적인 만족 다르게 말하면 구원을 경험 할 수 없다고 하는 거 겠지요. 반면에 우리의 영적인 만족, 혹은 구원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의존 할 때 가능하다는 말씀이겠지요. 이 대비되는 두 가지 요소만 갖고도 한 30분짜리 설교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생각할 거리가 얼마나 많겠어요.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 하는 것, 우리의 삶들이 다 여기로 집중되고 있다는 하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는 없지요. 악한 계획까지도 자랑하는 인간의 모습, 참 파렴치 하지요? 그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파렴치 한 일도 반복되게 되면 스스로는 파렴치하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갱단이라든지 조폭 이런 친구들이 서로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매장하고 위협하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일어나는 일들이지 않습니까? 그러한 일도 서로 자랑한다고 하는 거예요. 어디 그런 일 뿐이겠습니까. 요즘 기업들 간에도 그런 악한 계획들이 많이 있을 걸요? 뭐 그들은 그런 경쟁에서 살아남아 야 하니까 그런다 하더라도 변호사 검사 판사 이런 사회에서도 악한 계획을 자랑하는 일들이 많이 있을 걸요? 왜 대학교 사회는 안 그럴까요? 어쩌면 교회도 마찬가지지요. 그 안에서 벌어지는 악한 계획들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것들을 잘 성취하는 것을 자랑삼아 말하거나 생각하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지요. 악한 계획만이 아니라 그 악한 계획은 인제 그게 반복되게 되면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악하게 느껴지지 않는 거예요. 영원히 그렇게 안 되는 건 아니지요. 결국은 깨닫게 되는데 그게 굉장히 시간이 많이 걸리구요. 어쩌면 깨닫지 못하고도 죽을 수 있구요. 결국 그건 악순환인데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악한계획만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선한 계획도 그게 자랑 거리만 된다면 혹시 우리들에게 영적인 만족으로 와 닿을 수는 없습니다. 자랑이라고 하는 것은 참 문제인 것 같아요. 이걸 피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자신이 뭔가를 좀 읽으면 그걸 드러내고 싶어 하는 거지요. 사람에 따라서는 차이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작은 것도 아주 크게 확대해 갖고 자랑하고 싶어 못 견디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좀 큰 거라 하더라도 좀 축소시켜서 아주 속으로는 자랑하고 싶어도 크게 드러내지 않는 그러한 사람도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분명 있어요. 그의 삶에 대한 이해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차원에서 보면 결국은 자랑한다고 하는 점에서는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지요. 조금 더 노골적으로 그렇게 자랑하는 사람이 있고 조금 점잖게 교양 있게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의 정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자랑이라고 하는 것은, 저도 개인적으로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데요. 결코 우리의 영적인 만족을 허락하질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시겠지요? 이건 선의의 자랑이라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사실 뭐 선의의 자랑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데, 좋은 일 자랑하는 거 뭐 그런 것은 있겠지요. 왜 그런 것들이 우리의 영적이 만족을 주지 못하냐 하는 말입니다. 영적인 만족이라고 하는 말을 여러분들 잘 이해 하십시오.

 

오늘의 우리의 삶과는 완전히 무시하고 그저 정신적인 심령적인 혼령적인 초월적인 그러한 만족, 뭐 그러한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이라고 할 때 여러분은 늘 기억하십시오. 이 원론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생명이 심층에서 작용하는 힘 우리는 그런 것을 영성, 영, 영혼 이렇게 이야기 하거든요? 영적인 일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육적인 일을 다 포기, 무시하고 이원론적인 차원에서 심령적인 만족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총체적인 인간의 가장 심층적 생명의 차원에서 얻어지는 만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영적인 만족이 가능하지 않는 이유 로는요 자랑을 통해서 되어지는, 자랑을 통해서 계속해서 확인하려고 하는 이 방법 이러한 삶의 태도 가 우리에게 영적인 만족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는 당연합니다. 그래서 계속 매달리게 되는 거예요. 칭찬을 듣고는 또 칭찬 듣고 싶어 합니다. 독재왕 이나 독재자들도 그 간신들에게 간사한 말을 듣잖아요?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게 계속 반복 되면서 듣고 싶어 지는 거예요. 인간이 약하기 때문이어요. 인간의 자랑이 결코 우리들에게 결코 만족이 되지 않다는 사실을 짚으면서 시편 기자가 1절부터 확실하게 어떤 것을 우리들에게 확실하게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있다 요렇게 이야기해야 되겠군요. 이렇게 말씀 드리다가 방금 생각이 났네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있다고 하는 표현 때문에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악한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은 그건 가을에 낙엽이 떨어져서 그냥 흘러 가는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 만은 항상 있는 거 거든요. 항상 있는 것에 삶의 무게를 놓아야만 우리에게 영적인 만족, 구원, 이런 세계가 가능하다고 하다는 거지요. 제가 말씀을 설명하면서 읽다가 이렇게 깨달은 건데, 어떻습니까? 그런 것처럼 들리나요?

 

시편 기자가 그것을 생각 했을까요? 앞서 제가 이야기 한 데로 두 가지를 대비한 것만 생각했을까요? 언어라고 하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이것을 처음에 쓴 처음에는 이제 구전되었겠지만, 어쨌던 문자가 되고요 이렇게 편집되어서 한 성서기자가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표현했는데 우리가 지금 이것을 읽고 있습니다. 시편기자가 의도하지 않은 것이라 해도 언어를 통해서 독자가 훨씬 깊은 세계를 맛 볼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것을 해석학에서 언어사건, 언어사건이라고 합니다. 보르트 게쉔 이라고 합니다. 독일어예요. 보르트 이거는 낱말 말이라는 뜻 이구요. 게쉔 사건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언어사건, 그러니까 언어 자체가 진리의 세계를 열어 가고 존재론적으로 우리들에게 그 진리와 맞닿을 수 있도록 하는 사건이다 힘이 능력이다 그 능력이 바로 그 사건이 바로 언어사건인 거지요. 인간의 자랑은 휑 날아가 버리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다, 있다 영원하다, 참 되다 우리가 어디에 삶의 무게를 둬야 되느냐 이미 우리에게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52편 시편 기자가 생각하고 쓴 건지 아니면 모르고 썼지만 제가 설명 하다가 이렇게 깨닫게 된 건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이 포악한 자에 대한 책망들이 이어 집니다.

 

2.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 하는도다 혀죠 혀, 혀로 심한 악을 꾀하여 인간의 세치 혀가 얼마나 큰 악을 행하는지 말도 못합니다. 가능하면 말하지 않고 사는 직업이 가장 중요할지 모르겠어요. 목사는 늘 말을 많이 하게 되니까 그러다 보면 허튼 말도 하게 되거든요. 참 불행한 일입니다. 3.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 하는도다(셀라) 이게 포악한 자의 모습입니다. 선과 악, 의와 거짓 이것이 대비 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럴수 있느냐 좀 지나친 평가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참 선 할려면 참 선할 수도 있구요. 의로워 질려면 참 의로워 질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악해 질려면 한없이 악해지고 거짓에 휩싸이면 얼마든지 더 전문적으로 거짓말쟁이가 될 수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거짓말하는 거예요. 거짓말을 통해서 악을 통해서 자기를 확인하는 그러한 것이 가능한 거지요. 인간은 이런 점에서 자연 속에서 살고 있는 동물들보다 때로는 더 선할 수 있고 때로는 더 악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포악한 자를 향한 책망입니다. 4.간사한 혀여 다시 혀가 나옵니다.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 하는도다 반복되는 이야기겠네요. 2절 3절 4절 이어서 이 포악한 자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 하는도다 참 인간의 혀가 간사한 거 분명하지요? 여러분들은 그런 경험이 없으신가요? 자기도 모르게 이 혀가 움직여서 이상한 말을 하는 경우가 있어요. 평소에는 그렇게 하지 안하려고 생각하고 어떤 경우에 말하다보면 남을 헐뜯는다거나 노골적으로 헐뜯지 않아도 말하다 보면 그런 쪽으로 갈 수가 있어요. 인간의 혀라고 하는게 정말 간사합니다. 다 끝난 다음에 후회 하지요. 내가 왜 그렇게 말을 했을꼬 하는 거예요. 이 간사한 혀는 우리의 의식의 지배를 받기도 하고 무의식의 지배도 받는 거 같아요. 겉으로만 보면 혀가 의식의 지배를 받지요. 생각해서 말을 하니까 이번에 설교를 내가 어떻게 어떻게 내가 하겠다. 예를 들자면 그런 계획을 갖고 쓰면 그렇게 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는 의식의 지배를 받는 거 같아요. 그러나 상당한 부분에서는 자기가 전혀 생각지 않은 말들을 툭툭 툭툭 뱉어 냅니다. 이것을 보면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다고 할 수 있는 거지요. 간사한 혀 이것은 바로 우리의 혀 실제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셀라) 강력한 경고지요. 심판이지요. 간사한 혀로 사람들을 헤치는 것을 그냥 하나님이 두고 보실 수는 없잖아요. 그를 멸하고 완전히 뽑아내서 뿌리를 뺀다 참 표현이 강합니다. 이렇게 문학적으로 뭐 어떻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시편 기자가 참 문학적으로도 굉장히 수준이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멸한다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멸한다 뽑아 낸다 살아 있는 땅에서 뿌리를 뺀다 멸하심, 뽑아내심 뺀다 이게 다 그 악한 포악한 자 간사한 혀를 놀리는 자를 근원적으로 없애겠다고 하는 그러한 표현이지요. 또 이러한 말씀들이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세상은 포악한 자가 설치고 있지요. 간사한 혀가 사람들을 괴롭히지요. 그렇다면 이건 도대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시편기자의 고백은 맞는 이야기예요. 틀린 얘기예요? 예, 이러한 진술들은 그 시편 기자의 강력한 희망사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 근거도 없이 무조건 시편기자의 개인적인 희망사항이라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이 사람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들을 끌어간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구요. 또 신탁이라고 할까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떤 소통이 일어나는 어떤 신적인 현상들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말하자면 시인이 언어 세계에 들어 가 듯이요. 그러기 때문에 그는 그냥 아무 근거도 없이 개인적인 희망 사항만 여기서 나열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왜 이러한 뿌리 뽑는 일이 끝장나지 않고 여전히 별로 변화도 없이 이 세상이 돌아 가느냐 하는 질문은 가능 합니다. 예 그런 거지요. 종말론적으로는 일단 이 말이 옳은 거구요. 종말론적인 심판 때에 어디 이러한 포악한 것들을 다 제거 한다고 하는 것은 옳구요. 그것은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일들이 여전히 계속 되어진다고 하지만, 그러나 더 이상 그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자기의 존재론적 뿌리가 뽑히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해야 지요. 그 세계를 볼 수 있어야지요. 겉으로는 큰 소리 치지만 결국은 그 안에 있는 세계들에 있는 뿌리가 뽑히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6.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의인이 그러한 포악한 자의 그러한 행동들 말들 이러한 것 때문에 두려워 하긴 하지요. 시편기자도 포악한 자들을 통해서 시달림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정말 두려움의 대상이지요. 그렇지만 두려움으로 끝나지는 않는 거예요. 한편으로는 두려움이지만 그를 향해서 자신 있게 여기서는 비웃어 말하기를 했는데요 이건 냉소적으로 말 한다기 보다도 뭐 자신감의 표현이지요. 여기 말고도 다른 시편에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그런 얘기 있지 않습니까? 그런 차원이지요. 비록 포악한 자 때문에 두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그 포악한 힘 간사한 혀 이런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우습군 이렇게 하고 넘어 갈수 있는 정도의 영적인 경지가 바로 이 의인에게 있는 거지요. 의인이 그런 사람이라는 거지요. 의인은 그러니까 양면성이 있네요. 의인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두려운 건 두려운 거예요. 그러나 결국 그 두려움에 완전히 빠지지 않고 그걸 인제 웃어 줄 수 있는 그런 단계로 가는 거지요. 어떻게 말하냐 하면 의인의 그런 포악한 자를 향한 생각은 이런 거지요.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에 의지하며 자기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실상을 뚫어 보는 거예요. 이 포악한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재물로 자기 악으로 이만하면 된다 아주 든든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얼마나 가소롭습니까 얼마나 우스운 일이어요? 의로운 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지요. 참 멋진 표현이지요? 그렇지요?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의인은 세상의 악을 비웃을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게요. 그냥 자기가 쇄뇌 자기도취에 빠져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포악한 자 간사한 혀를 놀리는 자들의 실체를 뚫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물 악 이런 것으로 자기 삶의 토대를 삼고 있으니까 그거 정말 별거 아니거든요. 그러니 웃을 수 밖에 없는 거지요. 반면에 8절과 9절에서 의인의 참된 영적인 상태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인정 하리로다 감람나무 같다고 그랬어요. 올리브 나무지요? 푸른 감람나무요 아주 건강한 상태를 이야기 합니다. 제물과 악으로 자기 삶의 토대를 삼으려고 애썼던 삶의 초라한 모습에 비해서 이 의인은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이제 눈에 보여야 되는 거지요. 이게 겉모양은 아니잖아요? 겉모양은 오히려 반대일 수 있어요. 더 큰집 더 권력 지향적이고 사람들이 모이고 포악한 자가 간사한 혀를 놀리는 자에게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의인들은 작은 집에 살고 가난할 수도 있고 또 외로울 수 있어요.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할 수 있어요. 그러나 푸른 감람나무와 같은 상태는 전혀 새로운 영적인 상태를 이야기 하는 거지요. 그게 인제 보여야 우리는 시편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럴 때만 들어오는 거지요. 이 사람은 왜 이렇게 감람나무 같을 정도로 건강할 수 있냐 영적으로 건강할 수 있냐 생명의 힘들이 가득 풍부 하냐 8절 후반절이 이야기하는 그대로예요. 그것은 앞서 1절에 나와 있는 단어하고도 똑 같은 건데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라 얘기 했잖아요? 1절하고 8절이 연결 되네요. 제가 1절할 때 잘 한 거 같습니다. 자랑, 이런 것들은 휙 날아 가버리고 말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다 이게 대비된다 말씀 드렸어요. 항상 있는 거 하고 휙 날아 가는 거 하고 여기서도 이 8절에서도 그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히 항상 있는 거니까 영원히 의지할 수 있는 거지요. 물질 악 자기계획 이런 것들은 그냥 지나가는 거지요. 남의 칭찬 그것도 그냥 지나가는 거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하심 영원한 거지요. 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할 때만 의인은 푸른 감람나무처럼 건강하다고 할 수 있는 거지요 참 놀라운 표현이지요 중요하고요.

 

9.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게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결론 말씀입니다. 악한 자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다 그리고 의로운 의인에게 어떻게 하시겠다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이 행하신 거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거가 확실하게 들어 오려면 영적인 시각이 분명히 필요 합니다. 그거 없이는 이러한 말씀들은 공자 왈처럼 종교적인 덕담 여기에 머무를 수 있어요. 그래서 늘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들어오지 않는 거지요. 그냥 따로 노는 거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으니 그렇다고 이 의인이 생각하고 있으니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겠어요.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9절이요 다시 9절 A와 B가 좀 두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해야 겠어요. 그렇게 일을 행하셨으니까 나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당연히 그렇게 나오겠지요? 알게 되면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후반부에는 이렇습니다. 주의 이름이 선하심으로, 포악한 자는 악을 꾸미잖아요? 악한 계획을 꾸미잖아요? 그러나 주의 이름은 선하심으로 주의 이름이라고 했지만 그냥 주님은 해도 됩니다. 주의 이름은 그 분의 존재를 이야기 하는 거니까 주님은 선하심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주의 이름을 사모 하나이다 주 성도 앞에서 이게 제사 드리는 장면을 이야기 하는 걸까요? 어쨋던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 앞에서 주의 이름을 사모 한다 주님을 하나님을 기린다 사모한다 그리워 한다 그런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중요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도 이렇게 설명하다가 제 스스로 공부가 많이 되네요. 참 이런 점에서 가르치고 배운 다고 하는 것은 진리로 들어가는데 중요한 통로 혹은 방법이 되는 것 같아요. 혼자서 쉽게 말씀을 읽어야지 하면서 읽어야지 하는 거 하고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서 가르치려고 하는 거하고 물론 가르치려고 의도해서는 안되지요 저도 지금 뭐 여러분들을 가르친다고 하는 생각이 많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형식적으로 가르친다고 하는 거고 결국 내가 들어간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할 뿐이거든요. 결국 이러한 가르친다고 하는 형식 안에 들어가게 되면 말씀을 더 직면하게 되기 때문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이 저에게 크게 깨달아 지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제가 강해를 하는 것은 여러 분들을 위해서라기보다도 나 스스로를 위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늘도 제가 말씀 드리면서 새롭게 생각되는 것들이 떠올라서 좋았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여기에 우리가 눈을 뜨자 예요. 그 인자하심 다 잘된다거나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거나 마냥 사춘기 소녀들의 어떤 감수성과 같은 짝사랑과 같은 기분이라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실체를 뚫어 볼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하나님의 인자하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거거든요. 예,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의 삶에 실질적으로 와 닿기를 바랍니다. 예 다음에 만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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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9.05.01 16:45:11
*.139.165.36

라라 님,

수고 몽땅 하셨군요.

사도신경보다는 짧아서 그래도 다행이군요.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좀 알아서 고쳐주세요.

감사.

profile

[레벨:38]클라라

2009.05.02 23:02:21
*.216.132.150

목사님, 수고라니요.

제가 요새 시편강해에 풍덩 빠져 있거등요.^^

[레벨:18]눈꽃

2009.05.02 00:34:00
*.187.19.193

주님을 구했던가?
여호와가 함께하심을 구했던가?

아! 그 주님은 내개로와 좌우의 날선검이되어 내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쪼개어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시는구나

그때에 나는 민망함으로 ,
산더러 말한다 나를 가리라고 내 위에 무너져 내려 나를 가리워달라고.........

주님은 말씀 하신다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겠느냐
너는 돌아서 그길에서 떠나거라
네가 사는 것을 내 어찌 기뻐하지 않겠느냐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주님이 하시는일을 모든사람에게 알리리라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크시니

나는 벙어리가 되나이다

 

 


P.S: 라라님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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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2009.05.03 00:35:28
*.216.132.150

눈꽃님도 시편에 풍덩 빠져 계시군요^^

노고라니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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