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53편 녹취록 -어리석은자

조회 수 1712 추천 수 0 2009.05.28 01:03:51

시편 53편 강해-어리석은 자

 

1.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 려 하신즉

3.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4.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5.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 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

6.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 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6절까지 되어 있는 아주 짧은 시편입니다. 이 53편은 14편과 거의 똑 같습니다. 성서 주석학자들도 53편은 따로 주석하지 않습니다. 14편을 참조하는 것으로 대신하지요. 14편은 잠시 보니까 7절로 되어 있네요. 53편은 6절로 되어 있구요. 절수는 14편이 하나 많긴 하지만 거의 똑 같습니다. 뒷 부분에서 조금 보충된 내용이 있는데 뭐 그건 큰 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저는 53편을 미리 앞에서 14편을 공부하긴 했지만 다시 공부하겠습니다. 우리는 시편 주석을 쓰는 게 아니라 그것을 읽고 영적인 의미를 찾아내고 그 말씀이 우리의 삶과 하나 되는 길을 찾으려고 하는 거니까요. 똑 같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공부하는 그 내용은 다르게 나올 수 있습니다. 그게 좀 재미있는 이야기지요. 성서 주석은 그 한사람이 만약에 쓴다고 할 때, 14편과 53편에 대해서 거의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될 거예요. 물론 그것도 쓸 때의 정신적인 상태나 그의 영적인 수준, 신학적 깊이에 따라서 달라지긴 하겠지만, 몇 년만에 다르게 쓰는 게 아니라 몇 달 안에 쭉쭉 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한다면 크게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겁니다. 주석은 많은 그 문헌들을 연구하고요. 학문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크게 다른 이야기가 한 저자에게서 나오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공부 방식은 때에 따라서 상당히 편차가 많을 수 있어요. 근본이 달라진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접근하는 깊이가 달라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14편과 똑같은 53편을 그대로 한번 따라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53편을 준비하면서 따로 14편을 제가 어떻게 강의 했는지 살펴 보지 않았어요. 그리고 53편은 또 주석학자들이 따로 쓴게 없기 때문에 14편에 대한 주석을 보긴 해야 되는데 그걸 보지도 않았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준비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이 말씀을 나눠 볼까 생각합니다. 짧기도 하고요 이미 앞에서 다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그것에 대한 전이해가 저에게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준비 없이 섰었습니다. 14편을 어떻게 이야기 했는지 깜깜해요. 전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나중에 한번 이 53편이 동영상으로 나가게 되면 여러분들이 비교해 보시기 바라겠습니다.

 

오늘 53편 전체 제목은 1절이 이야기 하고 있는 데로 ‘어리석은 자’라고 잡으면 될 것 같습니다. 어리석은 자예요. 구약성경의 성문서들은 이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구약성서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문서들을 크게 3가지로 나누거든요. 여러분들이 잘 아는 건데요. 그냥 간단하게만 짚고 넘어 가겠습니다.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예요. 예언서도 이제 여러 가지로 나누는데요. 율법서가 일단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요.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가장 먼저 유대인들에게 경전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예언서이고 가장 늦게 경전의 권위가 경전 안으로 들어 온게 성문서 거든요? 거룩한 문서라고 해요. 거기에 전도서 아가서 시편 잠언 등등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 이러한 성문서는 지혜로운 삶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하고 있어요. 전도서도 헛되고 헛되며 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앞부분에 이런 이야기로 시작 되잖아요? 잠언서들은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그런 것들을 이야기 하는 거구요. 시편에도 좀 그러한 내용들이 나옵니다. 53편 ‘어리석은 자’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특징이 뭐냐고 하는 거지요. 그러한 주제로 볼 수 있다면 3가지로 볼 수 있어요. 하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지요. 아마 이런 말들은 소위 말해서 무신론자들이 들으면 말도 되지 않는다 이렇게 주장할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있다고 얘기 하는 것이 어리석은 게 아니냐 그렇게 말을 할지도 모르겠어요. 종교라고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거지 아주 실질적인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하는 거지요. 하나님을 증명 할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이 그리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뭐 대충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예 그런 것은 접어 두고요. 그런 것에 대한 논란은 더 많이 있으니까요. 성서가 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이야기 하느냐 그 부분만 우리가 생각하면 되겠지요. 지금 뭐 여기서 유신론, 무신론 논쟁하는 자리도 아니구요. 시편기자의 영적인 깊이로 따라 가는 것으로 충분할 겁니다. 1절 다시 한번 잘 보겠습니다.

 

1.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전반절 이야기예요.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없다 있다 그런 논쟁으로 들어 가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으냐 하는 것을 전제하고 말한다고 볼 수 있어요. 다시 말씀 드려야 되겠군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고 말하는 거지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은 정말 그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 아니라 핑계를 대는 거지요. 하나님이 없었음 좋은 거지요. 그러니까 더 편한 거지요. 편한 것, 왜 편하냐 하나님이 없어야 1절 후반절에 나와 있듯이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할 수 있다고 하는 거지요. 성서가 말하는 악 부패 이러한 죄 이러한 것들은 인간 품성의 문제로 그런 차원에서 다뤄어 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거예요. 우리는 저 사람이 왜 못 됬어? 뭐 대충요. 인격적으로 이야기하잖아요? 교양이 좀 안 됬어 뭔가 사람이 덜 됬어 그런 쪽으로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죄, 악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뱀의 유혹을 받을 때 그들의 마음이 가장 크게 흔들린 것은 그 선악과를 취하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진다고 하는 거거든요. 이게 인간이 악을 향하는 가장 밑바탕에 놓여 있는 성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고 하는 거 말이지요. 이것은 곧 평소에 자신의 여러 가지 한계로 인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부러워 한다고 할까요? 그걸 정확하게 뭐라고 표현할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을 불편해 하거나 그렇게 볼 수는 없는데요. 성서의 본문이 그렇게 이야기할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이 모든 문제를 우리가 성서 안에서 다 완벽하게 해결 할 수는 없어요. 그 대목에서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의 공개된 대목에서 분명하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즉,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 진다고 하는 그 말에 넘어 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 그러니까 여기 1절이 이야기 하고 있는 대로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편한 거지요. 좋은 거지요. 어리석의 마음, 하나님이 없다 하는 쪽으로 나가는 거지요. 제가 어리석은 자의 특징을 3가지로 말씀 드린다고 그랬는데요. 정확한 건 아닌 거 같네요. 두가지로 말씀 드릴 수 있는 거 같네요. 3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고요. 몇 개로 구분한다는게 그렇게 바람직한 관점은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의 특성이 이렇게 한 개 두 개 세 개 쉽겠어요. 시편기자도 그걸 염두에 두고 한 것은 아닌데요. 여러분들이 좀더 쉽게 따라 가시라는 뜻으로 이렇게 몇 개를 나열해 보려고 했는데, 그게 그렇게 바람직한 거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뭐 그렇게 3가지로 말할려면 더 할 수도 있어요. 그냥 제목만 말씀드린다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없다고 그들이 이야기 하고요. 두 번째는 그들은 무지한 사람들이다.

 

4절에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첫 번째 말씀드린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악을 행하기 위한, 혹은 자기가 행한 악을 합리화 할려고 그렇게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 특징은 첫 번째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악을 행하는 것인데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한다고 하는 겁니다. 제가 정리가 조금 덜 되어 있네요. 그래도 어떤 말씀인지는 전달이 됬을 겁니다. 세 번째는 5절에 나와 있는 것이예요. 두려움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또 네가지로도 이야기 할 수도 있겠네요. 첫째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두 번째는 악을 행하고 세 번째는 무지하고 이거는 곧 어리석은 거하고 똑 같은 것인데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악을 행하는 거니까 정말 무지하고, 무지는 무엇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반대는 뭘 안다는 건데요. 이거는 학문적인 용어로 말씀 드리면 이거는 인식의 문제거든요? 인식론 뭐 이야기 하잖아요? 성서는 인식의 근원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앎의 근원입니다. 이거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타당한 말이예요. 우리는 보통 안다, 유식하다는 것들을 이 세상에서 요령 있게 살아 갈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의 어떤 상태를 이야기 하잖아요? 정보지요. 뭐 실용적인 정보요. 이런 것들을 많이 알고 갖고 있는 것들을 안다, 유식하다 지식이 있다 안다 이야기 하잖아요? 사실 이게 설교조로 흘러 갑니다만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한 앎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거지요. 잠언서에 그렇게 있잖아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이해하지요? 그건 그냥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삶, 역사 그런 것들을 깊숙이 뚫어 본 사람에게서 나온 그러한 경구예요. 하나님을 알아야 되는 데 그걸 모르니까 부르지도 않고 악을 행하고 그렇게 되는 거지요. 어리석은 자의 특징들입니다. 다시 정리해 보시지요. 첫 번째,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 하구요. 두 번째 악을 행하고요. 세 번째 무지하고요. 하나님을 모르고요. 네 번째는 두려움입니다. 이게 제일 중요한 문제인지 모르겠군요. 제가 앞에서 어리석은 자의 특징을 세 가지로 이야기 한다고 했다가 두가지 밖에 없는 거 같다 이야기 하다가 다시 또 네 가지로 늘어 났네요. 어떻게 이야기 하더라도 사실은 다 통하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를 하다가 어리석은 자의 특징들이 세 개에서 두 개로 다시 네 개로 이렇게 들쑥날쑥 한 것 같습니다. 이게 다 연결 되는 거지요? 하나님이 없다고 해야 악을 행하기 좋은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이 없다고 이야기 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참된 인식이 없다는 거고요. 무지한 거구요. 그 무지하다고 하다는 것을 좀더 이야기 해야 할까요? 앞에서 우리 인식론에서 가장 핵심이 하나님을 아는 거라고 말씀 드렸는데요. 이게 그냥 좋은 게 좋다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고 잘 살라는가 보다 정도로만 이해 하면 곤란하기 때문에 내가 이걸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생각이 드는 군요.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 구절 달달 외우고 그런 것도 아니구요. 바리새인들처럼 멋들어지게 신앙생활 잘 하는 것 그런 것들도 아니지요. 그런 것들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형식이거든요?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 안에서 앎의 깊이로 들어 가는 것, 이것은 생명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거라고 할 수 있지요. 예, 하나님이 창조자니까요. 창조하신 분안에서만 생명이 가능하니까요. 이 땅의 모든 것들은 생명을 근거로 하고 있어요. 이렇게 쉽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대학교 교수라고 하더라도 생명의 신비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있구요. 시골 무지랭이, 속된 표현으로 무지랭이처럼 산 분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생명의 신비를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걸 의식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그게 이제 우리 성서적 언어로 이야기 하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거든요? 녜 되었습니다. 네 번째의 특징으로 두려움이라고 했지요? 성서가 얼마나 인간의 중심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지에 대한 하나의 방증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 없어, 겉으로 말하거나 아니면 속으로 이야기 하면서 결국 악을 행하게 되거든요? 그런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물론 무신론자들이 모두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게 조금 어려운 문제군요. 무신론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모두가 다 무신론자라고는 할 수 없어요. 예를 들자면, 니체 같은 사람들, 하나님이 죽었다고 떠들었지 않습니까? 그가 정말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거든요. 그 당시 유럽의 잘못된 기독교에 대한 비평으로 무신론적 언급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가 지금 여기 성서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기 변명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하고는 다른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둘을 구별해야 할 것 같아요. 실제적으로 악을 행하는 무신론자가 있는 반면에 겉으로 무신론자 같지만 그러나 생명의 신비를 놓치지 않는 그래서 악으로 향하지 않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제가 자꾸만 중간에 옆으로 나간 이야기 였는데요. 다시 돌아 와서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있다 그것은 곧 어리석은 자의 네번째 특징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절에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어요.

 

5.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 조금 복잡하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하나님이 그들의 어떤 기초를, 그들이 힘을 쓰고 있던 그 뿌리를 해체 시킨다고 하는 흩으셨다고 하는 거지요. 당연히 그러면 두렵게 되지요. 이걸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악을 행한 사람 뻔뻔스럽게 행한 사람들의 다리를 잘라 버린다거나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뼈를 흩으셨다고 하면 곤란합니다. 오히려 겉으로 보면 잘 되는 일이 많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악한 사람이라고 해서 늘 실제로 일이 안 되는 건 아닙니다. 기독교 성서의 하나님은 권선징악 옥황상제와 같은 그런 존재는 아닌 거예요. 그런 방식으로 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실상을 놓치게 됩니다. 그들의 뼈를 하나님은 흩으셨다고 하는 말 이거는 훨씬 심층적인 차원의 문제인 거예요. 아무리 악을 많이 하고 자기가 싶은 대로 막 하고요. 또 돈도 끌어 모으고 자기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많이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인간은 그것으로 영적인 만족이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목 마르지요.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뼈를 치신다는, 흩으신다는 말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면 참된 영적인 만족이 불가능한 거지요. 삶의 풍성한 의미와 연관된 그러한 이야기들이예요. 이런 정도로 말하면 여러분들이 무슨 뜻으로 이야기 하는지 이해는 하셨겠지요. 이거는 제가 말로만 해 갖고 전달이 잘 안될 수도 있습니다. 이거는 스스로 경험을 해 봐야 되는 데요. 기독교 신앙도 그런 거 같습니다. 그가 삶의 깊이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신앙도 따라 다니는 거 같애요. 같애요가 아니라 그렇습니다. 돈만 좋아 한다거나, 친구들하고 몰려 다니는 것만 좋아 한다거나 하여튼 그러한 사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걸어 둔다고 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자리를 잡을 자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에 있으면 하나님이 뼈를 친다는, 흩으신다는 말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나는 돈과 건강과 친구들만 있으면 정말 재미 있더라 그게 최고더라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뼈를 친다고 하는게 와 닿기나 하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삶, 세상 이런 것들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사는 사람들이 더 행복할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보면 그렇습니다. 정신 병원에 있는 사람들이 사실 극단적으로 얘기 하자면 더 행복할 수 있는 거지요. 이것 저것 골치 아픈 거 생각 안 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철저하게 세속적으로만 사는 사람들이 기독적인 어떤 죄, 슬픔 좌절 이런 등등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기독교인들의 삶보다 어떻게 보면 더 행복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걸 조금 더 끌어 와서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적 성서 읽기를 중심으로 한 대구 성서 아카데미 이런 운동들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떻고 종말론적인 부활이 어떻고 이런 신학적인 관점들이 뭐 그리 중요하냐 오히려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 신앙이 더 삭막해 질수 있지 않느냐 그런 반론 말입니다 이것 저것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부흥회 식으로 떠들고 박수치고 즐거워 하고요. 열린 예배 방식으로 인간의 감수성을 극대화 시킴으로서 자기 만족에 들어 갈 수 있고요. 그런 신앙생활이 오히려 더 편리하고 쉽지 않겠냐 어떤 깊이 이런 것으로 기독교 신앙이 간다면 오히려 힘든거 아니냐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 이게 참 간단한 문제가 아닌데요. 이게 신학적인, 인문학적인, 영적인 깊이를 전혀 모르고 아주 단순하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저는 매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도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 성령의 경험을 할 거구요. 그것은 곧 생명의 신비로 들어 갈 테니 말이지요. 그리고 기독교 전통 성만찬 세례 이러한 전통안에 있게 된다면 본인은 그러한 깊이로 들어 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공동체 안에서 그러한 힘에 사로 잡힐 수 있다고 제가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렇게 신앙생활 하지 않겠습니다. 개인적인 선택이라고 하면 말입니다. 이러한 신학적인, 인문학적인 깊이로 들어 갈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그런 구원의 세계에 더 깊이 들어 갈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들이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말할 수 있겠군요. 바둑을 두는 데요 어떤 사람은 프로 기사처럼 두고 어떤 사람은 동네바둑처럼 두거든요? 동네 바둑처럼 둬도요. 점심내기 하고요 심심풀이처럼 할 수 있습니다. 바둑의 재미를 조금 알지요. 그러나 프로 기사가 된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바둑을 둘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떤게 바둑을 두는 즐거움에 들어갔느냐 이건 제 3자가 말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동네바둑만 두면서도 좋다고 한다면 그건 뭐 옆에서 말 할 수 없는 거예요. 노래도 마찬가지지요. 매일 노래방에 가서 뽕짝 비슷하게 노래 부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아리아나 리트나 이런 전문적인 클래식을 부르거나 창 판소리 이런 것도 오랫동안에 훈련을 통해서 득음의 세계로 들어 갈 때 가능한 노래의 경지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하고는 비교 할 수 없는 데요. 노래방에 가서 맨날 뽕짝이나 부르고, 이게 뭐 나쁘다는 뜻으로 말씀 드리는 게 아니니까 이해 하십시오. 그렇게 노래 부르는 삶과 그 음의 존재론적 깊이, 소리의 깊이로 들어가는 구도적인 음악을 하는 거하고는 차이가 있는 거 잖아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 와서요. 어리석은 자의 모습들이 이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없다고 하고 두려워하는 삶이거든요?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이 두려움이 벌벌벌벌 떤다 강도가 들어 왔을 때 두렵다 이런 두려움이 아니라 그 어느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깊은 공허 같은 거지요. 이건 바닷물을 계속 마시는 거하고 비슷합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갈한 상태지요. 하나님이 뼈를 치신, 흩으신 것과 같은 겁니다. 이 시편 기자들의 표현들이 참 놀랍지요. 녜 이러한 어리석은 자의 모습으로서는 그러한 태도로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없지요. 6절에 구원은 하나님이 행 하신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자가 누구인가 그렇게 질문하면서 대답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등등 이렇게 나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러니까 구원이 불가능한 거지요. 고맙습니다. 다음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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