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54편 녹취록-주의 이름으로

조회 수 1285 추천 수 0 2009.05.28 01:10:16

시편 54편 강해 -주의 이름으로  

 

1.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2.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3.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셀라)

4.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5.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6.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 심이니이다

7.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 히 보게 하셨나이다.

 

아멘! 이 시편 54편은 일반적으로 탄원시로 알려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자기의 어려운 형편을 아뢰고, 도움을 기원하는 그런 탄원시 입니다. 탄원시 중에서도 조금씩 내용들이 달라요. 내용이 다르다 기보다도 그 신앙의 깊이가 좀 다르다고 볼 수 있어요. 지금도 대충 그런 말이 해당 되는 거 아니겠어요? 같은 신학자라고 하더라도 신학적인 깊이가 좀 다르고요. 같은 설교자라 하더라도 그의 영적 깊이가 확연히 차이가 나고요. 그렇습니다. 이 차이라고 하는 것이 보기에 따라서 좀 작을 수도, 있고 좀 클 수도 있지요. 어쨋던 그 차이가 있습니다. 이 시편의 탄원시 그것뿐만 아니라 모든 시가 하나님과의 깊은 공감에서 나온 내용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영적인 깊이에서 좀 차이가 나는 거지요. 일반 시인들의 시도 좀 그런 거 있지요? 노벨문학상을 탈 정도의 그런 시와 괜찮지만 그런 수준 높지 못한 그런 시들이 있는 것 하고 비슷합니다. 이 54편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이 도우신다고 하는 확신, 그리고 그 어디에도 호소할 때가 없어서 하나님만을 향해서 호소하는 이 신앙적인 내용을 담고 있긴 하지만, 그런 점에서는 신앙시 인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자기에게 온 고통과 어려움과 억울함 그런 것들을 영적인 깊이 혹은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그러한 신비 이런 데서 승화 시키지는 못하고요. 인간적인 그러한 욕망이나 기원 그런 것들이 여과 없이 노출 되었다고 하는 점에서 좀 거친 시편에 속합니다. 천천히 좀 내용을 살펴 보겠어요. 1절 이렇습니다.

 

1.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중요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깊이로 들어 갈 때에 놓치지 말아야 될 관점인 거지요. 이걸 보니까 나를 구원하시고 변호해 달라고 그랬어요 구원해 달라고 할 때는 주의 이름으로라고 했고, 변호 하소서 할 때는 주의 힘으로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지난 주일에 제가 설교한 내용의 한 부분하고도 좀 연결이 되는 거군요. 지난 주일에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이야기 나왔어요. 거기서 이삭이 아버지에게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묻습니다. 제단도 있고, 칼도 있고, 물도 있고, 번제를 드릴 만한 모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정작 필요한 관제물인 어린양은 어디 있냐고 말이지요 그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들아, 걱정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이미 그것을 준비했다고 말이지요. 그 구절에 유대인들의 아주 독특한 그러한 신앙이 녹아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준비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하는 거지요. 이것은 마치 돌아온 탕자를 위해서 잔치를 베푸는 그러한 아버지의 마음과 같은 거지요. 그 말썽을 부린 아들을 말썽쟁이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자신으로 생각한 거거든요. 예, 여기 1절에도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 하소서 얘기 하잖아요. 이게 어떻게 보면 좀 뻔뻔스러운 신앙 아니겠느냐 할 수도 있는데 이건 전폭적인 신뢰, 전폭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내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당신의 이름이 빛나기 위해서 거기에 영광이 되기 위해서 나를 구원해 주소서 하는 거지요.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 하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그 힘이 드러난다고 하는 사실을 증거 하는 그러한 방편으로 나를 변호해 달라고 하는 거지요. 시편기자 구약 성서기자들의 신앙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어느 정도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친밀감이 깊어야 이렇게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것은 좀 배워야 될 부분들입니다. 다시 1절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이름으로 나를 변호 하소서 이렇게 54편 시편기자가 이스라엘의 아주 기본적인 신앙적인 표현으로 이 시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리시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소서 하고 말한 다음에 자기 말을 하는 거지요. 이 사람이 처한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가 하는 것이 3절에 나와 있습니다. 3.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셀라) 낯선 자들, 누굴까요? 우리가 그걸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요. 이런 사람들이 아주 생면부지의 사람이었다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전혀 관계 없는 사람이 자기를 쳤다는 거 보다도 자기와 신앙이 같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정말 어려운 형편에 빠진 거 같습니다. 이 사람은 치는데 맞을 수 밖에 없는 거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는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고, 나를 죽일려고 하고, 그리고 이들의 신앙은 바르지 않다 이 이야기지요. 3절에 세 가지로 표현 되어 있군요. 낯선자들, 말하자면 이 시편기자를 대적하는 사람, 그를 괴롭히는 사람, 그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시편기자를 치고, 그리고 생명을 빼앗을려고 하고, 그리고 그들이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고, 그러한 내용들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호소를 한 다음에 시편기자는 다시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찬양을 합니다. 이런걸 보면 마치 어떤 학생이 동급생하고 싸우거나, 얻어 터지거나, 억울한 일 당하거나, 한 다음에 담임선생님에게 와서 고자질을 한다고 할까요. 하소연 하는 거 하고 비슷합니다. 자기의 입장을 이야기 한 다음에 선생님을 좀 치켜 세운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한 그림으로 시편을 보시기 바랍니다. 4절에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4.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이건 유대인들에게 기본적인 신앙이구요.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그러한 말씀입니다. 사실은 나를 돕는이시며 라고 했지만, 이 시편 기자가 어려움에 처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돕지 않았다는 말이긴 해요. 하나님이 실제적으로는 돕지 않은 건데 도와달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반어법으로 쓴 건가요? 어쨋던,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그리고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을 하긴 하는데 참 이 사람이 처한 형편은 어렵습니다. 예, 제가 지금 반어법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그럴 가능성은 많이 있습니다. 자기 생명이 위태롭거든요. 그리고 어디에서도 도움의 손길이 없거든요. 이 사람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그것을 찾을 수 밖에 없는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 신앙은 늘 가장 어려운 형편에 들어 갔을 때에, 그때 확실하게 드러나는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생각이 든다가 아니라 아주 확실한 거지요. 어디서도 도움이 없는 상황이요. 이런 것들은 오늘도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 구요. 우리가 지금 이런 문제들을 순교다 그리고 하루하루의 삶이 깜깜하다 이런 거 하고는 좀 다른 거지요. 물론, 전쟁통에 있는 사람들, 아프리카나 어떤 곳곳에 있는 절대빈곤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상황이 실질적으로 느껴지겠지만,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았고, 또 경쟁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실제적으로 와 닿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삶을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드려다 보면 이건 남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를 돕는 사람들이 있긴 하겠지요. 가깝게 멀게요. 그러나 그러한 도움의 손길들이, 사실은 그렇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건 경우에 따라서는 쉽게 배반할 수 있고 쉽게 끊어 질수 있어요. 물론 가족관계에서는 쉽게 끊어지진 않긴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도움이 아니라 방해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게 참 역설적인 거예요. 인간관계라고 하는 건, 참 그렇습니다. 관계가 없으면 외롭고, 너무 가까우면 이게 억압적이고요. 영적인 자유에 방해가 되고요. 그건 분명합니다. 여러분들이 그건 인정하시지요? 알고 계시지요? 중세기 때에 사막에 나가서 영성훈련을 했던 교부들이 많이 있었다고 그래요. 사막의 교부들이라고 하는 데요. 그들이 모든 인간관계들을 끊고 홀로 최소한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밀착했다고 하는 거 거든요? 그렇게 사는 게 불편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방식이 아니면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는 쉽지 않지요. 이것에 대해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한마디만 보충하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자유는 사람을 통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사람이 멀리 있어도 힘들고, 가깝게 있어도 힘들고, 사실은 다 그런 거지요.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를 돕는 사람은 없구요. 우리의 생명은 서로 풍성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훼손시킬 가능성이 많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 생명을 붙들어 줄 사람도 사실 없는 겁니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인간관계가 모두 악하다 무의미 하다 하는 뜻으로 말씀 드린 것은 아닙니다. 모든 문제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차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거든요? 우리가 서로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고 또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코이노니아를 중요한 본질로 여긴다는 점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신앙적으로 풍성하게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요소이긴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는 그 말이 옳은 거예요. 그러나 더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사람은 우리들에게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혼자, 어떤 궁극적 실제와 맞서야 하거든요? 우리는 혼자 숨을 쉬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내 숨을 다른 사람이 대신 쉬어 줄 수는 없잖아요? 숨을 쉬어 줄수는 없잖아요? 생명은 숨을 쉬어야 가능한 거거든요? 우리 숨을 쉴 때 옆에 사람들이 있으면 불편하잖아요? 조그만 방에 여러 사람이 있으면 호흡이 곤란한 것처럼요. 우리 혼자 숨을 쉬어야 합니다. 이 숨은 구약성서에서 루아흐라고하는 바람, 영 이런 단어에 나오는거니까요. 그게 생명의 영이거든요? 또 우리는 궁극적으로 혼자 죽어야 되니까 그 문제를 누가 대신해 줄수 없잖아요? 물론 따뜻한 가족의 사랑, 보살핌 가운데서 편안하게 죽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대신 누가 죽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예요. 죽음을 우리가 단독자로 직면해야 되고 숨을 자기 혼자 쉬어야 하는 것처럼, 궁극적인 차원에서, 우리를 돕는 자도 없고 우리의 생명을 붙들어 줄자는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이것이 가능하다 이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4절은 옳은 이야기인 거예요. 5절, 여기서부터의 이 시편기자의 조금 문제 있는 발언이 나옵니다.

 

5.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라, 이렇게 이야기 하네요. 이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당했을까 하는 것을 여기서 읽을 수는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이랬을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또 이것은 순전히 원수 갚는 것을 통쾌하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주의 성실하심을 드러내는 신앙의 차원에서 나온 기도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잖아요?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 하소서 그러니까 악을 볼 때에 물론 여기 표현을 보면 원수에게 악을 갚으라고 하니까 이게 아주 세속적인 적나라한 인간적인 모습들이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지만 시인의 입장에서 좀 볼려고 하는 거지요. 자기가 당한 것에 대한 앙갚음에서라기 보다는 주의 성실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이러한 신앙고백이 아니냐는 거지요. 그래도 이런 표현들은 나쁘다 이렇게 말하기는 힘들지만 좀 아쉬움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신약성서에서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얘기 했잖아요? 악을 갚을 수 있는 것은 악을 징벌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구요. 그런 관점으로 보면 이 5절 이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없습니다. 이 시편기자가 자기 스스로 악을 갚겠다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니까요. 다만 하나님의 정의로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나타나야 된다고 하는 것은 옳되, 원수를 악으로 갚아 달라고 하는 그러한 표현이 시편기자가 이 시를 쓰던 시대에는 신앙적으로도 타당한 말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신약시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좀 미흡 한게 아닌가 이런 말씀이지요. 6절 다음과 같습니다.6.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54편에는 이름이라고 하는 단어가 많이 나오네요. 주의 이름이요. 1절에서도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6절에도 주의 이름으로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이렇게 나오고 있네요. 세 번 반복해서 주의 이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거는요. 실제적으로 하나님에게 이름이 있다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이름이 있을 수가 없지요. 야훼 하나님, 이렇게 부를 수는 있지만 그게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은 그 대상을 이름으로 한정 짓게 되는 거거든요? 예를 들면 이게 책상이다 말을 붙이면 책상일 뿐입니다. 그 안으로 한정되는 거지요. 하나님은 어디 한정되는 분이 아닌 거예요. 그 분의 이름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서가 이름이라고 할 때는 그 본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 본성, 하나님 자체, 사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그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름이라고 하는 한계 안으로 끌어 드릴려고 하면 그건 또 잘못된 생각입니다. 어쨋던 이 시편기자는 주의 이름에 감사한다, 주님의 주되심에, 주님의 본성에, 주님의 참됨에, 주님의 행위에, 주님의 영광에 감사 하오니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뜻이 있다고 볼수 있어요. 이어서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이렇게 되어 있잖습니까 이름이 선하다고 하는 것은 ‘정용섭’ 이런 말이 선하다고 하면 안되 잖아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선하다고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 선하다고 하는 말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선하다고 하는 차원하고는 좀 거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다 주관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참되게 선하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없어요. 우리에게 굉장히 불행한 일인데도 그것이 선할 수 있거든요?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선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볼 때 이게 좋다 나쁘다 이 차원이 아니라 그걸 뛰어 넘는 그런 하나님의 존재방식, 존재신비라고 할 수 있지요. 이건 뭐 우리들의 인간적인 삶에서도 간혹 경험하는 겁니다. 철부지 7살짜리 어린 아이에게 아버지 어머니의 선하심이 잘 이해가 되지 않거든요? 이 아이는 계속 안아 주고 먹을 것 주고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채워 주면 선하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부모들은 늘 그러한 방식으로 선하다고 하는 것을 그렇게 표현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오히려 이 아이가 화를 낼 지도 모를 그러한 일들도 부모로서는 해야 되지 않습니까? 네 그것처럼 주님의 이름이 선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통치를 이 땅위에 실현하는 모든 사건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선하심에 대한 우리들의 확고하고 바른 그러한 이해와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공연하게, 또 과도하게, 분노하거나 두려워 하거나. 절망하지는 않겠지요. 인간이기 때문에 아무리 믿음 좋더라도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흔들릴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건 이런 전제를 하고 하는 이야기예요. 급성맹장이 걸려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데, 하나님이 늘 잘해 주시니까 허허 하고 기쁘게 그것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건 아프거든요? 그럼 소리를 내야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하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면 그러한 어려움이나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그러한 것들을 빨리 극복할 수 있고 결국은 우리의 모든 운명을 하나님에게 온전히 맡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노래한 시편 기자가 뛰어난 시인인 것만은 분명해요. 마지막 7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7.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 히 보게 하셨나이다. 아, 이 7절에서 다시 한번 삐끗하고, 5절과 비슷한 방식으로 인간적인 서운함, 인간적인 적개심 이런 것들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신다고 하는 것까진 참 좋은데요.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다고 하는 것은 좀 신앙적인 눈,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의 섣부른 표현이 아닌가 이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요. 이게 참 어렵습니다. 시편기자의 영적인 상태를 우리가 이러한 문자로 된 것만으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요. 과연 그가 어떤 영적인 경지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 아주 확실하게 말씀 드릴 수는 없는 거지요. 환난에서 자기를 건지셨다고 하는 거하고 원수가 보응 받았다고 하는 거, 이것이 서로 언발란스처럼 보일 수 있긴 있지만 또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그 어떤 것을 보고 있는 거거든요? 그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그동안 억울한 일을 당했던 자기는 그런 데서 건짐을 받는 것이고 그렇게 억울한 일을 남에게 끼친 사람에게는 그것은 그 만한 댓가를 받는 일이 될 수 있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는 우리가 이 시인의 이 신앙고백에 동의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원수 사랑에게까지 이르는 신약의 차원에서 본다면 이런 표현은 좀 아쉬운 점이 있는 거지요. 나를 건져내신다고 하는 사실에는 방점을 더 크게 두고 원수가 보응 받는다고 하는 차원, 이런 것들은 훨씬 축소하는 방식,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방식 그런 것이 더 하나님을 통한 구원을 놀라운 세계를 경험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바른 신앙고백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네 오늘 우리는 시편 54편을 읽었습니다. 전형적인 탄원시에 속합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가르침 중에서 하나는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표현이 정확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네요. 주의 이름이 여기 세 번 반복되었다고 앞서 말씀 드렸지요? 예 나를 특별히 이뻐해서가 아니라 나만을 편애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평화 그러한 차원에서 내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받아 드릴수 있는 그러한 신앙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는 거지요. 이럴 때만 우리 신앙이 성숙할 수 있고 우리 구체적인 삶까지 한계 안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 그의 뜻 이런 쪽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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