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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편 녹취록-사람이 내게 어찌하랴

조회 수 1437 추천 수 0 2009.06.13 00:11:17

시편 56편 녹취록-사람이 내게 어찌하랴

 

시편 56편입니다. 읽겠습니다.

 

1.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2.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

3.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4.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5.그들이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나를 치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사악이라

6.그들이 내 생명을 엿보았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발자취를 지켜보나이다

7.그들이 악을 행하고야 안전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

8.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9.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10.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 이다

11.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12.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13.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네 마지막 절입니다. 다시 읽겠습니다.

13.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네, 13절 문장이 조금 애매합니다. 그 뒷부분에 부정하는 표현들이 반복 되서 이게 부정인지 긍정인지 좀 혼란스럽게 들릴 수가 있어요. 다시 보겠습니다.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그 다음요.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럼 실족하지 않게 했다는 건가요? 실족하게 했다는 건가요? 당연히 문맥상으로 보면 실족하지 않게 했다고 하는 거지요. 그런데 번역이 너무 좀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실족하지 아니하게, 실족하지 않다라는 얘기인데,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네, 고거로만 보면 실족하지 않게 하지 않았다고 하는 거니까 실족하게 했다고 하는 뜻이예요. 저도 지금 이렇게 읽다 보니까 왔다갔다 합니다. 문맥상으로만 본다면 실족하지 않게 했다는 건데, 그런데 이 번역된 문장으로 보면 실족하게 했다는 뜻으로 받아 드려 질수도 있어요. 의문형으로 썼기 때문에 실족하지 않게 했다는 뜻으로 받아 드려 질수도 있습니다. 번역이 좀 이해하기 곤란하게 되었군요. 제가 공부하는 주석서에 따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생명의 빛 안에서 걷게 하시려고 주께서 나로 하여금 실족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깨끗하잖아요?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은 문장을 비비꼬아서 번역을 했을까요? 네, 고 부분은 그냥 접고 넘어 가겠습니다. 어쨋던 요 문장은 실족하지 않게 하나님이 그를 도우셨다 그런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같이 읽은 이 56편, 이것도 앞에 계속 나온 다른 시편과 비슷하게 탄원시에 속합니다. 시편에는 탄원시가 참 많네요. 그러한 어려운 가운데 빠져든 사람이 하나님께 탄원하기 마련이지요. 그렇게 본다면 우리의 삶이 너무 잘 풀려도 그게 어떻게 보면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늘 모든 일들이 자기가 마음 먹은 대로 좋게 잘 풀리면, 사람은 약해서 그런데에 타성에 젖는다고 할까요? 그렇게 됩니다. 모든 일들이 잘 풀리는 가운데서 영적으로 긴장하기는 쉽지 않은 거지요.

 

이 시편기자들의 시들이 대개 다 어려움 가운데서 나왔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삶의 수난과 시련과 어려움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갈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요게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어려움 가운데 들어가서 하나님께 탄원하는 것은 도와달라고 하는 건데, 그 어려움을 벗어난다고 하는 건데, 벗어나게 되면 또 어떤 그 타성속에 빠져 가지고 우리 영성이 굳어 버리거든요? 그러면 계속 어려움 가운데 있어야만 우리 영성이 더 긴장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인데, 그게 참 서로 모순되는 말 같지요.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말아야만 우리의 영적인 긴장감이 유지 되는데 결국 그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에게 드리는 영적인 기도라고 하는 것은,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하는 거란 말입니다. 네, 그렇지요. 어쩔 수 없지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조건 어려움 가운데 있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은 힘들구요. 일부러 또 고난 가운데 빠져 들어 가는 것도 자학적인 그런 차원에서 별로 바람직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거기 때문에 접어 두고요. 우리가 시편을 계속해서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는 거지요.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과 공명이 가능하려면 그런 탄원을 드릴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중요하다는 거지요.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사도바울이 말한대로 부한데나 가난한데나 건강한데나 약한데나 풍족 한대로 부족 한대로 어떤 형편이든지 다 처할 줄 아는 태도가 중요 한 것 같습니다. 넉넉하고 편안하면 그런대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우리의 영적 긴장감을 놓치지 말아야 하고 요게 좀 요게 좀 힘들긴 하지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타성이 젖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없으면 우리가 형식적으로만 하나님을 부를 뿐이지 그 깊이 속으로 들어 가진 못하거든요? 여러분도 다 경험했을 것이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그러한 넉넉한 그리고 비교적 상대적으로 편안한 삶 가운데서도 최선으로 영적인 긴장감을 놓치지 말아야 되죠. 그러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 할까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런 것들이 곧 다 손가락을 다 벌린 상태에서 움켜쥐고 있는 모래와 같다는 생각을 해야 되겠지요? 어느 순간에 이것이 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내린단 말입니다. 헛것이라고도 볼 수 있고요. 지나가고 없어질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가 우리들에게 궁극적인 기쁨을 주지 못한다고 하는 것도 분명하고요. 그래서 그 한계들을 늘 뚫어 봐야 되는 거지요. 행복한 조건들을 부정할 필요는 없되, 그러나 그것이 우리들에게 참된 영적인 만족을 주지 못한다고 하는 것, 그리고 일시적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뚫어 볼 때만 우리가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탄탄하게, 긴장감을 갖고 유지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어려운 형편에 거하게 된다면 거기서 우리가 더 절실하게 이걸 누가 하라 마라 말할 필요도 없이 아주 자연적으로 그 쪽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그렇습니다. 시편 기자들의 상태가 다 그렇거든요. 네, 오늘 여기 56편에도 시편 기자가 정말 견디기 힘든, 방황하는, 그러한 자기 신세를 하나님께 한탄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에 벌써 그 내용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지요. 이렇습니다.

 

1.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2.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종일 이라고 하는 게 1절과 2절에 다 나오고 있군요. 한 순간도 그러한 수난, 시련 어떤 핍박 압박 이런 것들을 피할 수 없다고 하는 그런 상태지요. 참 어려운 형편에 빠져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지요. 뭘까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겁니다. 요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 가운데서 하신 말씀 하고도 연관되지요. 이 가난한 사람들, 우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는 말씀 말입니다. 이 가난이라고 하는 것, 또 질병 또 등등 어려운 삶의 조건들이잖습니까? 이런 가운데 빠진 사람들은 결국 이 땅위서 희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희망을 둘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요게 참 앞에서 이야기한 것 하고 연관이 되는 것으로 참 삶의 신비라고 할 수 있어요. 누구나 가난하고 울고 외롭고 하는 것을 벗어나고 싶기는 한데 오히려 그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 더 행복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런 말들은 사실은 그런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건 아니예요. 배고프고 외롭지? 그래도 그게 행복한 거야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거지요. 그렇지만 그것이 아주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확실한 거지요. 그러니까 어떤 진리 옳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서 해줄 말이 있고 해 주지 말아야 될 말이 있거든요?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이런 것들을 가난한 사람 앞에서 쉽게 말하는 것은 잘 못된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그 가난한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 할 수 있도록 해 줘야 되는 데요 그러나 그것은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하다 오히려 그것을 받아 드려라 그러한 방식이 아니라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따돌림 그리고 큰 질병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생명의 원초적 현실들과 좋아 할 수 있는 영적인 깊이로 안내하는게 중요한 거지요 그 미묘한 차이가 있는 거 아시겠지요? 이 가난한 사람이 우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런 이야기예요. 결국은 우리들에게 참된 만족을 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희망을 놓는다고 하는 거지요. 희망을 아예 가질 수도 없는 상태니까요. 지금 우리에게 참된 기쁨과 희망과 참된 만족을 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시겠지요? 우리가 움켜 잡을 려고 하는 어떤 것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취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다 날아가 버리고 마는 거니까요. 네, 다시 말씀으로 돌아 와서요.

 

이 56편 기자는 종일토록 숨쉬기 힘들 정도로 어려움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이게 복인 거지요. 사실은요. 이게 우리는 잘 안 되서 문제인 거지요. 왜 안되냐, 다른 것들이 그걸 가로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희망을 걸어 둘만한 일들이 세상에 너무 많은 거예요. 이런 것에 대해선 제가 길게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를 매혹적으로 만드는 것, 또 우리를 성취해서 자기 성취에 만족하게 하는 것 이런 것들이 너무 많아서 사실은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게 못합니다. 무슨 말이냐 나는 모든 일들이 잘 되니까 범사가 잘되고 영혼이 잘되고 해서 삼박자 축복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잘 되어서 하나님께 찬양 드리고 정말 그렇게 기쁘게 하나님만 생각하면서 산다 그렇게 말할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것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예요. 그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매우 높은 경지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게 잘 되는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까지도 잘 된다고 하는 것은 그건 쉽지 않은 거예요. 일반적으로는 그건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이라면 너무 심한 말인가요? 거짓말이 심하다고 한다면 착각일 수 있는 거예요. 그게 자기합리화 일수도 있는 거지요. 자기가 하나님만 위하는 것처럼 포즈를 취하는 거지요. 실제로는 자기성취가 더 크지요. 예, 이 삶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이건 참 미묘한 겁니다. 결국은 다 모든 것을 다 놓아야먄 가능한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가 이뤄진다고 하는 사실, 이게 문제인 거지요. 사도바울이 말한,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이야기,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부터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했던가요? 그러한 경지에 올라간 사람에게만 좋은 조건에서도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가 가능한 거지요. 그런데 이게 쉽지 않잖아요? 네, 여기 56편 기자는 그렇게 종일토록 핍박을 받는 상태이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건 아주 솔직한 고백인 거지요. 3절과 4절에 그 의지한다는 말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어요. 3절 보세요.

 

3.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음흠..오늘 목이 좀 막히네요.)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의지한다 4.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이까? 의지한다고 하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지요? 이러한 고백이 우리들에게서도 똑같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러길 바라구요. 주를 의지한다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는 거 말이지요? 그런데 이게 말로만 되는 게 아닙니다. 말로야 뭐 산을 옮길만한 그러한 믿음도 우리들에게 있는 거지요. 그런데 그게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게 제가 앞에서 한 얘기가 그런 것 하고 연관되는 건데,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고도의 영적인 경지에 올라선 사람이나 아니면 억지로라도 이 세상의 많은 것들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사람에게만 가능한 그러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예,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행복한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두려워 하지 않는다 두려움으로부터 시작했어요. 세상 사람들의 압박이 두렵지요? 두려워서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결국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하는 거지요. 이런 점에서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떤 고난과 시련 아픔 이런 것들도 우리에게 영적인 준비만 되어 있다면 정말 감사함으로 받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힘들긴 한 거예요. 우리가 다 피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억지로라도 그런 상태로 들어가게 되면 다 모든 것을 떨쳐 버릴 수 있으니까 떨쳐 버릴래야 떨쳐 버릴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게 되잖아요? 하나님만을 향하게 될 때만 그게 참된 평화 만족이 가능한 거거든요? 네, 제가 오늘 똑 같은 이야기를 자꾸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게 중요해서 그런 거예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니까요. 이 사람은 두려움 가운데 빠져서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그 의지하게 됨으로 더 두려움을 극복하게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4절 후반절에 한 이야기가 참 멋있습니다.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이까?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이까? 이런 수준에 도달하는 거지요. 아예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거지요. 죽이기 뿐이 더하겠냐는 거지요. 예수님께서도 우리 육체를 헤치는 왕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 영혼까지 판단하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 하셨지요? 이런 말씀하고도 연관되는 거지요.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 하겠냐, 죽이기뿐이 더 하겠냐 하는 거지요. 참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야 참 멀었어요. 늘 사람 눈치보고 사는 거 많지요? 출세하기 위해서 눈치 보는 것만 뭐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잘 보일려고 선의라고 하더라도요 그러한 일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그렇고 세상에서도 그렇고 혈육을 가진 사람에게 계속 우리는 휘둘리는 거지요. 이게 우리의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이런 방식으로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벌어지거든요? 그러나 오늘 이 56편 시편기자처럼 아예 그런 희망 마져 둘 수 없는 상태에 이른 사람들은 그쪽 하곤 담을 쌓고 하나님만을 향하게 되는 거지요.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네, 꼭 기억해 둬야 할 말씀입니다. 이 3절과 4절이 10절과 11절에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반복 되어 있어요. 이 56편은 문학적으로 완성도가 좀 낮다고 합니다. 빠진 구절들도 많이 있고 뒤 섞여 있다고 그래요. 몇 가지 비슷한 시편들이 이렇게 편집되서 하나로 묶인 것 같습니다.

 

이 시편의 주제인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 요것이 3절과 4절에 나와 있는데, 다시 10절과 11절에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0.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11.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비슷한 내용이지요 4절 후반절에는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이까 이렇게 되어 있구요. 11절 후반절에는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이까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용은 똑 같은 거지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네, 오늘 우리가 중요한 성서적 영성을 한번 읽고 들었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한번 읽고 지나가는, 그래서 우리 신앙의 어떤 교양적인 정보로 머물지 않고 우리 삶의 중심으로 체화 되었으면 좋겠어요.성육신이지요. incanation이지요. 초월적인 하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그 성육신,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는 교리가 이것이 말하는 것처럼 오늘 여기서 우리가 같이 읽은 그 내용,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이 영적인 어떤 경지가 우리 삶에 중심에 아주 구체적으로 자리를 잡아야 되겠지요. 이게 쉽지 않다고 하는 것은 분명하고요 또 내일 되면 잊어 버리고 다른 일을 만나게 되면 휩싸여서 또 놓치게 되고 또 우리가 계획하던 일들을 열심히 하다보면 거기에 매달리게 되고 결국 사람들에게 더 신경을 너무 많이 쓰게 되고 우리 일상적인 삶에서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참 형식으로 떨어 질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건 목사들에게도 마찬가지예요. 매번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고 설교하고 그러한 공동체를 꾸려 가는데 앞장서고 있긴 있지만 그러나 정말 하나님만 의지하고 있느냐 그래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그렇지 않거든요. 이게 참 불행한 겁니다. 목사도 그렇고 기독교인들도 그렇구요. 자신들의 입으로 쏟아내는 그내용이 실제 삶이 되지 못한다고 하는 이게 불행한 거지요. 그런데 이게 그런 상태로 가면 결국 자기 모순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거든요? 불안하게 되는 거지요. 우리가 그렇지 않은 척 우리가 무늬를 만들어 가는 거지요. 믿음이 정말 있는 거처럼 하는 거지요. 실제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못하면서 말이지요? 제가 뭐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약한 믿음 이렇게 저렇게 흔들리는 모습들 그런 것을 무조건 잘못이다 그렇게 할 바에야 예수 믿지 말아라 그런 차원에서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우리가 안고 살아야될 우리의 한계예요. 다만 거기 안주는 말아야지요. 계속 거기서 탈출을 해야지요. 늘 신앙적인 투명성이 유지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것으로 인해서 계속 얼룩진다고 하더라도 곧 정신 차리고 다시 중심신앙으로 돌아 와야지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더 부단히 개인적으로는 기도와 말씀 읽고 그런 것들 하면서 바른 예배에 참여하고요. 그리고 영적인 스승들의 책들을 통해서 우리 영성이 이렇게 자극받을 수 있도록 성찰 되도록 그런 노력은 계속 해야 됩니다. 여기서 영적인 스승이 참 중요합니다. 저도 그런 스승들을 많이 만났지요. 뭐 직접 사람을 만났다기 보다도 책을 통해서 주로 그런 만남이 있는 거지요. 직접 사람을 통해서도 한다면 좋지만 그게 흔하진 않습니다. 어쨋던 직접 사람이거나 아니면 책을 통해서거나 영적인 스승, 멘토라고도 얘길 한다면서요? 예.영적인 멘토, 그런 면에서 중요한 거지요.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지금 바르냐 그르냐 고런 것들을 레슨, 영적인 레슨인 거지요. 그렇게 받을 수 있는 거니까요. 그런게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게 없으면 신앙적인 진보가 이뤄지지 않아요. 피아노나 바이얼린 이런거 하는 학생들 배울때도 계속 레슨을 받아야 되잖아요? 좋은 선생들은 이 학생이 잘 하는 것 같지만, 어디가 문제라는 걸 정확하게 짚어 주고요. 어떻게 고쳐야 되느냐 그 방법까지 제시해 주고요. 그 중심으로 계속 끌어 가요. 실수하지 않도록 말이지요. 그런 방식을 통해서 이 학생이 음악의 길을 갈수 있도록 돕는 거지요. 기독교 신앙에서도 비슷한 겁니다. 예, 우리가 중간중간 흔들린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너무 좌절하진 마십시오. 우리는 곧 거기서도 새롭게 성령의 조명을 받아서 바른 길을 갈 수 있고요. 그리고 또 계속 우리가 영적인 진보를 하게 된다면 이전에는 더 많이 흔들렸다가 덜 흔들리게 되고 점점 더 기독교 신앙 중심으로 들어 가게 되겠지요. 예, 오늘 여기 말씀 우리가 같이 읽은 대로 여러분들 꼭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두려웠지만 하나님만을 의지하므로,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이제는 혈육을 가진자,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되었다 예, 결국 이 세상에서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참된 길은 하나님과의 연합에 있다고 봐야지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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