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59편 녹취록-주는 나의 요새

조회 수 1836 추천 수 0 2009.08.07 00:33:00

시편 59편 강해 -주는 나의 요새

 

시편 59편입니다. 1절부터 17절까지 있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1.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 서

2.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3.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들이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 와여 이는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나의 죄로 말미암음도 아니로소이다

4. 내가 허물이 없으나 그들이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어 살펴 주소서

5.주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니 일어나 모든 나라들을 벌하소 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마소서 (셀라)

6.그들이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7.그들의 입으로는 악을 토하며 그들의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 다

8.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며 모든 나라들을 조롱하시리이다

9.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10.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 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

11.그들을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주의 능력 으로 그들을 흩으시고 낮추소서

12.그들의 입술의 말은 곧 그들의 입의 죄라 그들이 말하는 저주와 거짓말로 말미암아 그들 이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13.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어지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서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 (셀라)

14.그들에게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15.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16.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 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17.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네, 17절까지예요. 다른 시편에 비해서 약간 길지요? 뭐 더 긴 시편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볼 때 약간 긴 시편입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시편기자가 왜 그 원수를 보복하려는 생각을 할까, 그런 생각을 좀 하게 합니다. 여기에서 그 원수들, 자기를 괴롭힌 자죠?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복을 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 구절들이 있어요. 이런 시편을 아무 생각 없이 막 읽다 보면 독자들에게 원수에 대한 증오심을 유발시킬 염려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좀 어려운 점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원수에 대한 증오심이 있구요. 그리고 그러한 증오심이 문학적으로 혹은 수사학적으로 표현된 것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 시편기자의 마음속에 들어 있다고 인정을 해야 됩니다.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된다면 원수 갚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어요? 구약은 전체적으로 이 선악의 대립이 강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그런 원수를 갚는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나쁘게 나오지 않아요. 물론 다 그런 건 아닌데요. 그러한 내용들이, 또 그러한 사상들이 있는 건 분명합니다.

 

구약성서도 원수들 관계에 대한 일관된 입장을 보여 주고 있는 건 아니지요. 어느 쪽에서는 그러한 원수들까지 이해하는 쪽의 주장들이 있다면 완전히 배척해야 할 것으로 가르치는 그런 구절들도 있는 거지요. 어쨋던 그래도 전반적으로 본다면 구약성서는 원수하고의 관계가 좀 냉정합니다. 그 포용이라기보다도 극복 해야 될 대상들이지요. 이게 구약에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있습니다. 구약시대 전체가 이런 거지요. 생존이라고 하는 사실에 직면해 있었던 겁니다. 생존에서는 진화론에서도 나와 있듯이 적자생존이거든요? 싸워서 능력 있는 사람만 살아남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여러 부족들과 더불어 살고 또 경쟁하는 과정에서 다소 타협하면서 살 수 있는 길은 없었던 거지요. 어쨋던 상대방을 다 몰아내야만 되는 상황입니다. 뭐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악에 대해서는 추호도 양보할 수 없는 거지요. 네, 여기서 악이라고 했습니다만, 이게 실제적으로 악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일 수도 있거든요? 그게 조금 애매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경험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누가 볼 때도 악한 사람들이 있지요. 그러나 상당한 부분에서는 나에게 잘 못을 한 사람은 악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민종 분쟁 같은데서 많이 드러 나구요.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정당들 사이에서도 그렇구요. 예, 그런 차원에서 이 악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은 겁니다. 구약성서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악에 대한 문제를 상당히 냉정하게 그리고 과격하게 거부 하려고 했었지요.

 

그것을 위해서 신약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까지 말씀 하셨으니까요. 원수 혹은 악, 이것을 좋다 괜찮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가 원수 갚는 식으로 해결 하는 건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거지요. 그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에게 맡기는 거지요. 뭐 그 두 가지 구약성서, 특별히 이 시편 기자가 이야기 하고 있는 하나님에게 보복을 원하는 그러한 거하고 신약성서가 생각 하는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에게 맡기는 거하고 비슷한 것 같지만 다릅니다. 이 시편에서는 구체적으로 자기의 적개심을 드러내잖아요? 그러나 신양성서에서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네, 이렇게 차이가 있어서 우리가 구약 성서만을 놓고 특별히 한 두 구절 부분만 놓고 원수와 악에 대한 증오심 이런 것들을 타당한 것처럼 받아 드릴 순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분들은 제가 말씀 드리기 전에도 없겠지요. 다만 이런 시편들을 읽을 때 원수에 대해서, 이방 신들을 섬기던 사람들하고 비슷한 차원으로 왜 증오심을 품고 있을까 하는 그러한 의아심을 충분하게 우리가 털어 낸다고 할까요? 아니면 신앙적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면, 성서를 잘 못 이해 할 수 있는 거지요. 고런 점에서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 염두에 둬야 될 한 가지 사실은 이 모든 성서들은 그 당시 삶의 자리에서 나왔다고 하는 거예요. 이 시편 기자가 살던 그 시대의 형편에서 나온 거지요. 제가 그것을 전체적으로 생존의 문제에 직면에 있는 사람들의 진술이라고 얘기를 했어요. 예, 그렇지요. 지금은 생존이 아니라 어쩌면 본질에 더 천착해 할 시대 아니겠어요? 이 성서가 기록될 때 그 상황을 충분히 감안하고 그 말씀을 오늘의 삶의 자리에서 새롭게 해석해 낼 수 있어야 되는 거지요. 그런 것들을 다 무시하고 그대로 오늘 삶에 그대로 적용시키려고 하면 무리한 게 많습니다. 네, 오늘 여기 시편 기자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면서 하나님에게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긴 있지만 그것이 핵심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제가 말씀 드릴 필요도 없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이 사람은 집중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원수를 갚는 것도 내 속이 편하다 그래야 분이 풀린다 그러한 차원 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나타나기 위한 그러한 일인 거지요.

 

13절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을 진멸해 달라고 기도하는 그러한 내용인데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진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어지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서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 하나님의 통치를 만방에 알리는 것이 이 시편기자가 하나님께 원수를 없애 달라고 하는 이 기도에 참된 목표지요. 예, 그 두 가지를 우리가 구분해서 봐야 됩니다. 정말 이 사람이 분에 치를 떨면서 자기의 그것을 갚겠다고 하는 그런 것들에서 나온 이야기인지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에 알려지게 하기 위해서 하는 이야기 인지 구분해야 되는 거지요. 오늘도 우리가 이 말씀 읽으면서 개인적인 원한 관계를 갚자 풀자 이러한 차원으로 접근하면 안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접근해야 되겠지요. 예, 이 사람이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게서 받은 어려움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예, 한두 가지가 아닌데 바로 앞에서 제가 말씀 드렸듯이 그 원수를 갚는 것 자체라기보다도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나게 한다고 하는 그 사실에 근거해서 볼때 이 전체 시편 내용에서도 결국은 그러한 억울한 일을 당한 것 도저히 밤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의 분한 일을 당한 것 뭐 그게 힘들기는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16절, 17절 마지막 단락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참 놀랍습니다. 앞에서는 그렇게 원수 보복 하는 듯한 말을 하다가 이제 전혀 다른 색조로 노래합니다.

 

16절 이예요.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그 바로 앞에 나와 있는 구절과 대비됩니다.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14절 15절에 보면요. 개처럼 울며 성으로 돌아다니고 먹을 걸 찾아다니고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운다 그러한 원수들 악한 이들의 형편을 늘 말 하구요. 이것도 다시 말씀 드리지만 하나님의 통치가 분명하다고 하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길로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어쨋던 원수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계속 유리하고 밤을 새우는데 이 시편기자는 다르잖아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시고 환난날에 나의 피난처다 요새와 피난처라고 하는 말이 계속 반복 되고 있습니다. 17절에도 마찬가지로 16절과 같은 반복과 같은 내용이지요? 내가 주께 찬송 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9절에도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이렇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새시다 피난처다 라고 하는 신앙의 노래인 거지요. 앞에서는 굉장히 불안하고 원수 갚아 주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이교적인 사실 이 이교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겠군요. 어쨋던 인간적인 분노 이런 것들이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나와 있지만 이제 그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신앙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의 요새 피난처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말들은 우리가 많이 들었으니까요. 무슨 뜻인지 제가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근데 이 말이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느껴지는가 이것이 우리 신앙에 현실성이 되는가 하는 게 문제입니다. 주는 나의 요새시다 환난 날에 피난처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어요. 분명한 옳은 말씀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이제 이런 정도로 살아가지 못할 걸요? 요새 탄탄한 요새 적군이 아무리 온다 하더라도 우리를 안전하게 보장해 줄 수 있는 요새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을 진정한 의미에서 요새라고 경험하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작은 어려움만 와도 계속 흔들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주님을 요새로 생각하기 보다는 그 외 다른 것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 이외 것들이 충분하게 갖춰지지 않으면 우리는 늘 불안해 하지 않는 건가요? 주는 나의 요새시며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다 하는 이러한 시편 기자의 신앙 혹은 그러한 신앙고백을 실질적으로 이해하려면 우리 삶을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여러 가지 좋은 조건들, 이런 것이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우리 의식을 지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주님을 요새로 믿고 따르기가 사실은 어렵습니다. 형식적으로는 그래야 돼, 그러한 것처럼 우리가 살아 갈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포함한 전체 존재가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거예요. 이건 억지로 흉내를 내진 못합니다. 네, 요새와 피난처라고 하는 말씀을 아주 실질적으로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거 같습니다. 이게 가능한 이야기인가 우리가 세상을 사는데 가능하지는 않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하라고 하는 말이냐 그런 쪽으로 두루두루 좀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쪽으로 더 돌려서 생각해 봐야 될까요? 주는 나의 요새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이니이다 라고 했어요. 주님만이 나를 안전하게 지켜 주시는 분이라고 하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 이외에 모든 것들은 나를..다시 말씀 드려야 겠군요. 이 사실을 실질적으로 알고 우리 삶에 일치되는 상태 그 경지로 우리가 가려면 그 이외 것들이 나를 지켜 줄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이해해야 됩니다. 이 말은 제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우리를 지켜 줄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서는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얼마나 얼마나 허무할 수 있는지 긴 말이 필요 없지요? 자기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얼마나 외로운지는 더 긴말이 필요 없지요. 취미생활을 아무리 재미있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완전한 만족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도 분명 하잖습니까 물론 나는 그런 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건 분명한데요. 그것은 실체를 아직 정확하게 뚫어 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최면에 걸렸다고 할까요? 이 세계가 우리를 그렇게 최면에 빠지게 만든 거지요. 세상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들을 확보하기만 하면 행복할 것 같은 그러한 최면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생명의 깊이로 들어간 상태에서 본 다면 우리를 지켜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아, 이런 이야기가 너무 관념적으로 들릴까 좀 걱정이 되는군요. 요런 점이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것 기독교 신앙이 관념적인 요소가 있어요. 그러나 그게 아주 추상적이라고 하는 차원에서의 관념성은 아니거든요. 보이지 않는 현실성을 이야기 하기 때문에 관념적이긴 한데 아주 실질적인 거예요. 네, 이러한 말들 관념적인 현실성들 신앙의 내용인 그런 것들을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전달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런 거는 금방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좀 천천히 시간을 갖도록 하고요. 다시 요 주제로 돌아 가서 이야기를 해야 되겠습니다.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시편 전체의 결론이기도 하고 핵심이기도 합니다. 주는 나의 요새시며 라고 할 때 제가 앞에서 말씀 드린 것은 이 세계에 그 어떤 것도 나를 지켜 줄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충분하게 인식할 때만 이 성서 기자의 고백이 우리에게 이해 될 수 있다고 한 거예요.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가 이런 부분도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주가 누군가 하는 그런 질문을 여기서 던질 수 있고요. 대답도 우리가 찾을 수 있습니다. 주는 주님은 야훼는 그 분은 우리 요새 이신 분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피난처 되신 분이라고 말 할수 있습니다. 전달이 되었지요? 우리의 요새가 아닌 대상은 주님이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환난 날에 우리의 피난처가 될 수 없는 것들은 우리 주님이 아니라고 하는 거지요. 주, 주님 이 분은 우리가 아직 다 알지 못하잖아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주님이라고 하는 것 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이 주님이시라고 하는 말을 맞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지요. 그러나 제가 모른다고 하는 것은 여전히 종말적인 차원에서 그 실체가 다 드러나야 할 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주님을 부분적으로 간접적으로만 알고 있는 거지요.

 

그 분이 누구냐 하는 질문은 우리에게 그칠 수 없는 거예요. 그 질문에 하나의 대답으로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는 거지요. 우리의 요새이신 분 우리가 환난 당할 때에 피난처 되신 분인 겁니다. 실질적으로 어떤 상황일까요? 어떤 분일까요? 그런 것은 계속 우리가 살아가면서 대답을 할 수 있지요. 점점 우리의 신앙적인 영적인 깊이가 깊어지거나 경지가 높아지거나 비례해서 그 주님이 달라집니다. 영원불변한 분이 어떻게 달라 질 수 있느냐 그런 차원의 말씀이 아닌 거예요. 여기에서 달라진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훨씬 많이 계시 되신다 드러 나신다 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시편기자는 자기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고 억울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을 제하는 것 그렇게 해 주시는 분을 바로 주님이라고 생각했고 바로 그 주님이 그런 차원에서 요새이고 피난처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성서의 유대인들의 주님에 대한 이해지요. 가나안 땅의 여러 부족들을 다 몰아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님, 구원자라고 하는 사실에 증거인 거지요. 그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이해했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다른 방식이겠지요? 우리에게 참된 요소가 누군가, 환난 날에 피난처가 누군가 그걸 생각해 보시면 되겠습니다. 답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요새이고 피난처이시거든요? 그런 점에서 바로 그 분이 주님이시거든요? 주님, 이건 주인이라고 하는 뜻 이예요. 우리 주인이 돈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내 사랑하는 자식들도 아니고 나의 업적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이지 않습니까 예 그러한 신앙의 세계로 점점 깊이 들어가야 되는 거지요. 어떤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요새이고 피난처인가 그런 점으로 우리가 점점 깊이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가장 기초적인 교리로 대답을 드리면요. 이렇습니다. 주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구요. 우리가 용서함을 받았구요. 그의 부활을 통해서 그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에게 약속된 그런 부활을 우리가 희망하고 있고 그리고 그것을 비밀스런 방식으로 오늘의 삶에서 살고 있다고 그런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요새이고 피난처이십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우리가 좀 더 깊이 이해하려면 죄가 뭔가, 하나님과의 단절이 무엇인가 생명이 무엇인가 그리고 부활 생명에 실질들이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되죠. 이런 것들을 우리가 더 알려면 세상에 더 잠정적이고 허무한 생명들은 또 무엇인가 이런 것과 대별되는 영원하고 참된 생명이 무엇인가 그런 부분들도 계속 연관되는 겁니다. 이건 아주 기독교 신앙 전체와 연관되는 문제예요. 죄가 용서 받았다고 말씀 드렸는데요. 실질적으로 우리가 죄를 이 세상에서 짓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칭의다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았을 뿐이다 라고 하는 바울의 가르침도 여기서 중요한 것들이지요. 예, 이러한 신앙들이 한 부분에 치우치지 않고 종합적으로 잘 연결 되서 통합적인 거죠. 통전적인 거죠. 그러한 방법으로 우리의 삶과 일치 되서 우리의 영성이 심화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신학을 얼마나 많이 알아야 되는 거 하곤 직접적으로 연관 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이건 평신도들에겐 더욱 더 그렇구요. 모든 것을 다 꼼꼼히 알 수는 없어요.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쟁이 많은 교리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다만 그런 배움을 통해서 각자가 영적인 현실들을 경험해야 되는 거지요. 그게 영성입니다. 영적인 현실들, spiritual reality와의 만남, 관계, 경험 이런 것들이 풍성해 짐으로써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 생명에 가까이 가게 거지요. 물론 이런 것들이 우리의 무조건적인 노력으로만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은총에 의한 거지요. 성령의 조명에 의한 거지요. 신학적인 그러한 훈련과 더불어서 우리 실천적인 기도와 영성,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성령이 우리를 조명하는 그러한 상태로 돌입하는 겁니다. 예 이러한 모든 신학 훈련이 예배에도 있다고 볼 수 있는 거지요. 개인적인 성서 읽기와 영성에 관련된 책을 읽는 것 종합적으로 다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 기독교 신앙은 이런 점에서 구약과 신약의 전체를 다 아우르면서 통합적인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통합적인 영성, 온전한 영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integrity 이게 통전적이라고 하는 건데 영성의 통전성, integrity of spirituality 이렇게 말할 수 있겠군요. 예, 오늘 이야기가 옆으로 많이 나갔습니다. 옆으로 나간 것이 우리가 시편 공부 하는데 잘 못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 나와 있는 몇 가지 단어들을 익숙하게 말하는 것이 성서 목표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성서는 손가락이니까 혹은 창문이니까 이걸 통해서 어떤 세계로 들어 가는게 중요한 거지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그 세계가 뭔가 하는 것을 기회 닿을 때마다 조금씩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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