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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편 녹취록-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조회 수 1513 추천 수 0 2009.08.07 21:29:40

시편 60편 강해-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시편 60편입니다. 1절부터 12절까지 제가 읽겠습니다.

 

1.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2.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흔들림이니이다

3.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를 우리에게 마시게 하 셨나이다

4.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

5.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

6.하나님이 그의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 를 측량하리라

7.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 며

8.모압은 나의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나의 신발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로 말미암아 외치라 하셨도다

9.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까

10.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1.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12.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아멘! 시편 60편은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크게 패한 경험을 앞에 두고 하나님을 향해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의식시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전쟁 이후에 다시 분발하려고 사람들이 다 모였을 때에 행하는 하나의 의식적인 차원에서 부르는 찬송시라고 하는 겁니다. 이 배경은 전쟁이에요. 전쟁에는 늘 승자와 패자가 있습니다. 적절하게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고 중간 쯤에서 하나의 평화로 나가는 경우는 있긴 있지만 그건 드믑니다. 이 전쟁은 결국 이기는 자와 지는 자가 있는데 이기고 진다고 하는 이것이 거기에 속한 사람들의 운명을 완전히 바꾼다고 하는 점에서 너무 처절한 일들이지요. 그냥 스포츠 시합에서 누가 좀 이기고 져서 기분이 좀 우쭐되고 조금 사기가 떨어진다고 하는 차원이 아니지요. 상금을 많이 받는다거나 적게 받는다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요. sum 아니면 zero냐는 겁니다. 이기면 모든 걸 취하고 지면 모든 걸 잃게 되는 거거든요? 여기에 모든 거라고 하는 거는 재물 정도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까지 후손의 운명까지 다 포함되는 겁니다. 전쟁치고 좋은 전쟁이 어디 있겠습니까 독립전쟁? 뭐 그런 것들은 명분은 있죠. 그러나 명분이 있더라도 전쟁은 결국은 파괴적인 거거든요? 그런데 그게 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악한 세력이 자기들을 파괴하려고 할 때에 무조건적인 평화, 절대적인 평화주의로 대체해야 되느냐 아니면 적절하게 무력투쟁을 해야 되느냐는 하는 것을 한 두 마디로 옳다 그르다 말하기는 힘듭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전쟁이 고 문제, 반(反)폭력이라고 하는 거거든요? 큰 폭력을 막기 위한 반대 폭력 이러한 것에 정당성 여부는 또 윤리적인 차원에서 더 생각해야 할 문제구요. 오늘 우리가 그러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전쟁은 명분이 어떻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파괴적인 행위인 것은 분명합니다.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것으로 인해서 양쪽 다 피해가 가구요. 설령 우리의 피해가 적고 상대방의 피해가 많다고 한다고 하더라도 전쟁을 합리화 하기는 좀 힘듭니다.

 

이스라엘 나라도 그러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오랫동안 쌓여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보다 더 심하게 이런 전쟁의 회오리 속에 빠져 들었다고 볼 수 있어요. 아마 그들의 시작 자체가 그렇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갈대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에 이주 하면서도 크고 작은 다툼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때야 아주 고대 이니까 땅이 넓기도 하고요. 또 인구수가 너무 적어서 이주 했다고 해서 결정적으로 그 원주민들하고 갈등의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다툼은 있었어요. 본격적인 다툼은 이집트를 탈출한 다음에 광야를 거쳐서 아주 큰 무리로 가나안을 정복하던 그러한 시절이었습니다. 가나안 영토분쟁이죠. 하나님께서 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를 탈출하여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거친 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어요. 만약 그들이 원주민들하고 평화협정 비슷한 것을 맺어서 같이 거기서 살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여러 가지 이유로 거기서 같이 살기는 힘들었습니다. 종교도 다르고 문화 풍습 이런 것들이 다르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타적인 민족성들도 있고요. 원주민들하고 많이 싸웠습니다. 그 원주민들을 완전히 다 정복하고 다윗이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실 모든 원주민들을 일소 시킬 수는 없었어요. 예, 원주민들과의 투쟁도 그랬고, 그 뒤로 인근의 제국들과의 투쟁도 계속되었습니다. 싸움이 많았어요. 우리가 구약성서를 읽으면서 경험하게 되는 어려운 점은 바로 그런 거죠.

 

이스라엘 백성 전쟁도 하나님을 믿는 백성에게 기대할 만한 그런 것이 아니라 순전히 전쟁논리에 의해서 수행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여리고성, 아이성을 정복할 때 어린아이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이라고 하는 그 명령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저들이 받아 드리고 해석하고 그렇게 또 실천했거든요. 우리의 입장에서 그게 곤혹스러운 거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격한 그 행위는 하나님의 뜻이고 저들이 공격 받은 것은 하나님께는 또 어긋난 것이고 이렇게 우리가 말할 수 있겠냐 하는 거지요. 이스라엘은 늘 억울한 일만 당하고 그래서 그들이 행하는 모든 전쟁은 거룩한 거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냐는 거지요. 성서는 물론 그러한 방식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좀 더 성서를 객관적으로 읽으면서 동시에 그 객관적인 역사를 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배워야 되는 거지요. 그건 차이가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전인수로 역사를 해석했지만, 그러한 경우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고유한 신앙이 살아 있다고 하는 것 그 두 사이를 우리가 구분 할 수 있어야 되는 거지요. 오늘 여기 우리가 읽은 시편 60편에도 바로 앞서 제가 말씀 드린 두 가지를 구분해서 보는 그런 관점이 해당됩니다. 그 두 가지를 구분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넘어 갈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파괴적인 행위를 옳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비판해야지요. 앞서 예로든 여리고성과 아이성 공격사건에서 일어난 일들도 그렇습니다. 모든 가축과 남녀노소 모든 사람을 멸절하라고 하는 그리고 그렇게 실천한 그들의 모든 행위들은 비판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멸절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명령인 것처럼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모세나, 여호수아나 받아 드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뜻을 오해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전쟁 행위로 그들이 제국처럼 아주 공격적으로 어떤 나라를 파괴하거나 그런 일을 많이 한 것은 아니겠지요. 나라가 원래 작으니까 그러한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도 큰 제국에 대해서는 방어 전쟁을 했지만 가나안 원주민들을 향해서, 거긴 더 약하니까요. 점점 힘을 발휘하면서 가나안 원주민들은 더 약해 졌으니까요. 그들을 향한 공격은 그것은 잘못 된 거지요. 우리가 그러한 이스라엘 민족들의 전쟁에 동의하진 않지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부분은 그러한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뜻을 잘 못 이해한 적도 있지만 결국 그들의 모든 역사 행위가 하나님의 손에서 진행 된다고 하는 그 사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중한 거지요.

 

우리가 배워야 될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하면 우리는 성서, 특별히 구약성서를 이스라엘 민족의 배타적 민족사관 그것에, 뭐라고 할까요? 치우치는 해석을 하게 됩니다. 네, 그건 좀 어려운 문제라서 설명이 좀 쉽지 않았습니다. 이 60편이 전쟁에 관한 이야기라서 성서를 이해하는 데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거예요. 지금 시편 기자는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1절, 2절, 3절, 여기서 우리는 그걸 다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지요?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자기들이 전쟁에서 크게 져서 어려움을 당하고 하는 그런 상태를 하나님이 버렸다고 하는, 그리고 흩으셨다고 하는 그러한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예, 문학적인 표현이지요? 전쟁에서 땅이 진동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3.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를 우리에게 마시게 하셨나이다 다 연관되는 문제, 표현들입니다. 하나님이 버렸고 흩으셨고 분노 하셨고 땅을 진동시키셨고 갈라 지게 하셨고 어려움을 주시고 비틀거리는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 시편 기자들의 아주 독특한 문학적 표현들입니다. 비록 전쟁은 다른 적군이 일으키고 그들에 의해서 크게 위협을 받고 있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생각한 거지요. 이게 좀 놀랍지 않습니까 놀라운 신앙이지 않습니까 상식적으로 보면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 되겠지요. 이렇게 고난 받고 우리가 힘들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어떤 악한 신이다 저 원수들의 신이다 적군들이 섬기는 신이 우리를 이렇게 했다 그 적군의 신들을 멸하소서 뭐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시편기자는 구약성서 전체의 관점들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거예요. 자기들이 당하는 어려움까지도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는 거지요.

 

이스라엘 백성들, 구약성서의 어떤 신관이라고 할까 그것은 이원론적인 게 아니예요. 악한 신이 있고 선한 신이 있어서 따로 싸운다 그런 거는 이방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성서에 약간 그런 흔적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거의 미미하구요. 근본적으로는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오직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거예요. 자기에게 벌어지는 어려운 일들도 결국 하나님이 치신 걸로 생각하거든요? 아버지가 혹은 어머니가 자식들 잘 되라고 회초리를 들어서 체벌을 가하듯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한 어려움을 주신다고 그들이 믿었습니다. 이들의 신앙이 얼마나 확고한지 알 수 있는 거지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분명한지를 알 수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들이 하나님에게 대한 희망을 어떤 상황에서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어려움 가운데에 빠질수록 그들은 더욱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거지요.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서 지켜 달라, 그리고 붙들어 달라고 하는 기도를 4절과 5절에서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6절부터 이렇게 하나님이 시편기자에게 말씀하십니다. 6절 중반절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표현되고 있어요. 하나님이 시편기자에게 말을 하심으로 시편기자가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거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시편기자에게 말했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들에 말을 하듯이 이러한 음성학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 것 아니예요. 아니겠지요. 시편기자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것처럼 이렇게 말하는 걸까요? 예,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 하나님은 우리처럼 입이 있어서 우리처럼 말씀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시편기자 성서기자 예언자 이런 사람들은 고유한 영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 거예요. 이걸 신탁이라고 합니다. oracle 이라고 하는 단어지요? 신탁, 이러한 신탁경험에 의해서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런 식으로 선포 하실 수 있었던 거지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6절 중반절 부터예요.내가 뛰놀리라 재미있는 표현이지요. 내가 뛰놀리라 하나님이 뛰놀리라고 합니다. 참 문학적인 표현이예요.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열고 뛰노는 것처럼 표현된 겁니다. 하나님이 뛰놀리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되리라 하는 뜻이겠지요. 다시 봅니다.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예, 가나안 땅의 지명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횡단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가나안 땅을 열 두 지파에게 나눠 줬잖아요? 선을 그어서 나눴지 않습니까. 정복해야 될 지역을 분할 한 거지요. 그걸 지금 여기 이러한 말로 그러한 사실을 다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열 두 지파에게 할당하는 기쁨 그런 즐거움 그런 것들을 다시 맛보게 되리라고 하는 그 뜻이지요. 다시 읽습니다.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7.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며 8.모압은 나의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나의 신발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로 말미암아 외치라 하셨도다

 

재미있는 표현들입니다. 6절에 나오는 그 고유명사들은 지명이었어요. 세겜 숙곳 열두지파에게 가나안 땅을 분할 하던 그 어떤 때의 기쁨들을 표현하는 겁니다. 7절에 나와 있는 고유명사들은 열두 지파의 한 사람들입니다. 길르앗, 므낫세, 에브라임, 유다 이러한 지파, 열두 지파 중에서 네 지파만 나왔네요. 하나님이 그 지파를 확실하게 붙들고 땅을 나눠주고 거기에 백성들의 나라를 세우는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난 과거의 역사와 희망들을 이러한 말로 표현한 겁니다. 여기서 특별히 에브라임과 유다가 강조되고 있어요. 에브라임은 내 머리에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며, 규는 홀, 또는 지팡이입니다. 투구는 싸울 때 쓰는 모자인데 머리를 보호하는 거죠, 가장 중요하죠? 내 머리의 투구요, 하나님 머리의 투구다 하나님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유다는 지팡이 인데 지팡이라고 하면 방향을 찾는 거 아니겠어요? 위험한 적이 나왔을 때 그걸 막는 무기로도 사용되지 않겠습니까? 두 지파 모두 이스라엘 열 주 지파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이구요. 유다는 남 유다입니다. 에브라임은 원래 야곱의 열 두 아들의 한 사람은 아니고요. 요셉의 둘째 아들입니다. 그 위에 나오는 므낫세는 첫째 아들이구요. 열두 지파가 땅을 나눌 때 이렇게 했어요. 열 두 지파 중에서 레위지파는 땅을 분할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성전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예외예요. 열 한명만 남지요? 그런데 이 요셉지파를 두 지파로 나눴습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예요. 요셉이 빠지고, 대신 그러니까 요셉이 두 몫을 차지한 거지요.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에브라임이 지역적으로 북쪽의 땅을 차지했고 유다는 남쪽입니다. 유다지역에 예루살렘이 있구요. 다윗 왕조의 핵심이구요. 어쨋든 남북을 다 아우르는 그러한 지파들의 목록입니다. 8절은 이방 민족들이네요. 모압 에돔 블레셋 그러니까 시편기자의 어떤 신앙적 전망은 하나님이 단순히 이스라엘 지파만이 아니라 이방민족까지 다 아우르는 그러한 분으로 설명되는 거지요. 예, 전쟁에 져서 비통에 빠져있는 이 사람들이 이렇게 이방민족까지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 와 있다고 하는 놀라운 신앙을 보이고 있습니다. 9.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까 예, 요기까지가 6절부터 9절까지가 하나님이 시편기자에게 주신 말씀으로 나왔습니다. 앞부분 1절에서 4절 까지는 전쟁의 결과로 크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고통과 시련과 어려움도 결국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하는 고백을 한 것이구요. 5절 부터는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가나안 땅의 전역, 그리고 여러 지파들 전체, 남북 전체, 그리고 이방인에게 까지 이른다고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10절부터 12절까지 이 말씀들을 정리하게 되는 거지요.

 

10.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한번 현실에 대한 진단이 나옵니다. 11.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네, 10절과 11절이 어떻게 연결 되는 걸까요? 다시 두 절을 묶어서 읽어 보겠어요. 10.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반어법 같지요? 네, 11.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네, 하나님이 지키시고 함께 나가서 대적을 치게 하실 때만 구원이 가능하다 그러한 고백이지요. 특별히 11절 후반절에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그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참 이런 게 이스라엘 백성의 놀라운 신앙인 거예요. 우리가 노력을 해서 어떻게 하자 그렇게 다들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하셔야 된다고 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두 손 놓고 딱 기다리는 것은 아니겠지요? 여기서 핵심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역사를 마음대로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이 뭐 할 것 아무것도 없고 두 손 딱 놓고 그 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만 하면 된다는 거냐 이렇게 질문이 가능한데 그것은 또 아니거든요. 이 구약성서 전체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앞에서 전쟁의 실패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하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역사가 진행된다는 것을 말하는 거지요. 아무리 완벽한 준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말짱 헛일이 될 때가 많은 거지요.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참 중요한 시편기자의 신앙이고 또 우리들에게도 여전하다고 봅니다. 사실은 신약성서로 넘어 오면 더 분명하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런 구원론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볼 때 사람의 구원이 더 헛되다고 하는 것이 더 분명해집니다. 이미 바울의 칭의론도 그걸 이야기 하고 있는 거구요. 12.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예, 요게 사실은 결론입니다. 여기에 서로 모순되는 것 같으면서도 일치하는 이스라엘의 고유한 신앙과 또 한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그러잖아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뢰를 갖는 거예요.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하는 거지요. 하나님을 의지할 때만 용감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용감하게 행한다고 하는 것은 적군과 싸운다는 얘기이지요. 지금은 전쟁에서 졌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싸우겠다는 겁니다. 용감하게 싸우겠다는 자체를 이것을 신앙적인 것으로 우리가 보기에는 힘들지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신앙인 거지요. 전쟁을 택할 것이냐 아니냐는 또 다른 차원입니다.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더불어서 여전히 전쟁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생각이 함께 묶여 있네요. 이것들을 잘 분석해서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뢰심을 우리가 배워야 되고 자기들 중심으로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하는 일종의 호전성 이런 것들은 우리가 배울 필요는 없지요. 지금 이스라엘 역사도, 현대사에서도 반복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팔레스틴 원주민들과의 그 갈등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의 행위에 대해서 무조건 옹호할 수는 없잖아요? 잘 못 된 것은 분명히 잘 못 됬거든요? 그러나 그들이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하는 그 신앙을 유지한다고 하는 사실 그것도 우리는 인정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오늘 우리 기독교와 이런 점에서 충돌하기도 하고 또 연결되기도 합니다. 네, 60편 1절부터 12절 까지였어요. 다시 정리하면 전쟁에서 크게 실패한 다음에 겪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과 더불어서 그 시련과 고통마저 하나님의 행위였다고 하는 놀라운 신앙을 여기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 전쟁을 비롯한 모든 인간의 역사가 인간의 여러 가지 노력만으로 바르게 해결 될수 없다는 사실도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어요. 네, 말씀을 여러분들이 각자 더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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