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62편 녹취록-영혼의 침묵

조회 수 2028 추천 수 0 2009.08.08 13:52:18

시편 62편 강해-영혼의 침묵

 

시편 62편입니다. 1절부터 12절 까지 제가 읽겠습니다.

 

1.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2.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 하리로다

3.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 지 하려느냐

4.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 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

5.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6.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 로다

7.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8.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9.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 로다

10.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11.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12.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아멘! 62편을 쓴 이 사람도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어요. 공격을 받고 있는 거지요. 그 공격이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는 이 본문에서 알 수는 없는데 공격 받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큰 공격이나 작은 공격이나 사람은 공격 받을 때 움추려 들게 되고 또 반대로는 공격적으로 나오게 되고 그래서 이러한 일들이 악순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이 공격을 받은 이 사람, 구체적으로는 이 3절에 내용이 나오는데요. 이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그 공격에 반응하느냐 이게 62편의 핵심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읽으면서 다른 시편과 연관되는 대목을 많이 가지고 있기는 하긴 하지만 특별한 요소가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 특별하다고 하는 게 다른 시편에 전혀 없는 건지는 제가 자신 있게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 기억으로 지금까지 본 그 내용 중에서는 분명히 특별히 말할 정도의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게 이겁니다. 잠잠하다, 침묵이라고 하는 거지요. 공격 받았을 때 일반적으로 무조건 도망가거나 다시 그에 상응하는 공격으로 대하거나 저주한다거나 등등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는데 이 사람은 다른 방식으로 대한 겁니다. 침묵 이예요. 침묵, 1절과 5절 여기에 이 시편기자의 태도가 잘 나와 있습니다.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1.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5절 읽겠습니다. 5.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이 문장 구조가 양쪽이 비슷합니다. 둘 다 영혼아 잠잠하라 혹은 영혼이 잠잠히 이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영혼이 잠잠하다 영혼의 침묵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소란스럽지 않다고 하는 거지요.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핵심적으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침묵, 오늘 이 62편의 제목을 “영혼의 침묵”이라고 하면 되겠어요.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거나 혹은 5절이 이야기 한 대로 명령형이 나오네요.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두 가지 똑 같은 내용입니다. 문장의 형식만 다른 거지요. 1절은 일반 문장으로 나오고 5절은 명령형으로 나오는데 양쪽 다 영혼이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란다고 하는 겁니다. 네, 그 근거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가 1절은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 거로 되어 있구요. 5절에서는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 구원과 소망,1절은 구원이라고 했고 5절은 소망이라고 했는데, 비슷한 이야기지요. 구원과 소망 희망은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게 하나님에게서만 나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을 하지 않고 침묵 할 수 있는 거지요. 이 두 관계를 잘 이해해야 됩니다. 두 관계요. 우리 영혼이 잠잠 한다고 하는 거하고 구원 혹은 소망이 하나님에게서만 나온다고 하는 사실 말입니다. 영혼의 침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러한 영성이 가장 깊이가 있는 영성이 아닐까 그런 생각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제가 앞서 이 시가 공격을 받은 사람의 시라고 말씀 드렸는데 그렇게 공격을 받으면 참을 수 없거든요. 아주 작은 문제만 갖고도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요동을 칩니까, 공격을 받을 때도 그렇고 칭찬을 얻을 때도 그렇고 양쪽 다 우리의 영혼이 요동을 칩니다. 전자의 문제 로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고요. 후자의 경우라면 하늘에 올라가는 거와 같은 그러한 기분이 들 수 있지요. 이 양쪽 다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뭐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요동치는 것을 완전히 벗어나긴 힘든데 그게 너무 습관이 되 버리면 힘든 문제거든요? 다시 좀 생각을 해 보시지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만 잠잠한 영혼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거지요. 그 말 안에 이미 답이 있긴 있을 텐데요. 하나님을 아는 것 그리고 1절과 5절이 이야기 하듯이 구원과 소망이 다른 데서가 아니라 왜 하나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그 이외의 것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일들에 일희일비 하지 않을 수 있는 거지요. 그럴 때만 우리 영혼이 잠잠할 수 있습니다. 이 잠잠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평화를 얘기 할 수 있는 거죠? 영혼의 평화 좀 익숙한 말로 바꾸면 안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이지요. 이런 말들은 우리가 흔하게 들어서 그런 가 보다 이렇게 생각 할 수가 있는데요. 그런데 이거는 우리가 좀 진지하게 생각해야 될 성서가 가르쳐 주는 영적인 경지, 이런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이 대게 이게 다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이 되요. 그래서 이것 갖고 더 길게 말씀 드리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그래도 한 두 마디는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영적으로 안식과 평화들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들을 잘 생각해 보세요. 대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것들이지요. 혹은 사람들이 생산해 내는 어떤 업적이나 경제적인 활동이나 이런 것들로 인한 것이지요. 기분 나쁜 말 들으면 하루 종일 맘이 이렇게 울적해 진다거나 기분 좋은 말 한마디 들었다고 해서 기분이, 마음이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그런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작은 일에서도 그렇고 큰일에서도 말이지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런 것들이 다 지나가는 것들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도 맞습니다. 사람들은 속에 마음이 없으면서도 거짓말로 칭찬이나 뭐라고 할까요 계산에 따라서 말을 할 수 있거든요? 뭐 그런 것으로 내 기분이 우쭐하게 된다면 참 어린아이 같은 거 아니겠어요? 물질적인 손해를 좀 보았다고 해서 그걸로 인해서 우리 영혼이 곤두박질치게 된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대게 그런 방식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결국은 구원이 그런 것들에 의해서 지배 받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이 그러한 방식,그런 차원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계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의 소꿉장난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어린아이들은 그 소꿉장난을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거든요. 뭐, 땅따먹기를 한다거나 등등 이런저런 놀이에서도 그들은 진지합니다. 그런 것들은 지나가 버리는 거 아니겠어요? 만약 어른이라고 한다면 어린이들과 같이 놀아 주면서 조금 놀이에서 손해를 본다거나 소꿉놀이에서 좀 억울한 일을 당한다거나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걸로 기분이 전혀 상하지 않는 거잖아요? 그 구원이 하나님에게만 있다고 하는 사실, 소망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아주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 삶들은 그런 놀이 그러한 소꿉놀이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들이 너무 추상적이거나 이상적이여서 우리 구체적인 삶하고는 좀 떨어져 있는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사실 여기서 벌어지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그 갈등이라고 하는 것은 심각하거든요. 그냥 이건 어린아이들의 소꿉놀이니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그냥 손해 보자 이런 방식으로 실제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내기는 쉽지 않은 거잖아요? 그건 제가 압니다. 현실이 그런 거지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린다면 억울하게 직장을 짤렸다거나 가정이 파탄 되었다거나 등등 어려운 일들이 가능하지요. 이런 걸 갖다 초탈(超脫)하면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건 맞는 이야기이지요. 그것은 우리가 안고 살아가야 될 삶의 내용들입니다. 현실들입니다. 그것을 별거 아닌 것처럼 사소한 것처럼 쉽게 이렇게 넘어 갈수 있을 것처럼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그런 차원에서 말씀 드린 것은 아니구요. 그런 걸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영적인 길이라고 하는 것, 이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것을 끊임없이 상대화 하는데서만 주어집니다. 소중한 삶이긴 하지만 거기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인간들의 아귀다툼과 같은 일들을 상대화 하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이 여기 해당 된다고 볼 수 있어요. 각각의 삶들이 다 십자가인거지요. 십자가는 손해 아니겠어요? 실패 아니겠어요? 그런 것들을 내가 전혀 당하지 않겠다고 생각을 확고하게 갖고서 신앙생활 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건 십자가를 지지 않는 거니까요. 이거는 신앙의 근본자리로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문제는 그렇게 서로 이해타산 경쟁 조금 더 손해 보지 않겠다고 하는 이기심 뭐, 이런 현실에서 벌어지는 삶의 여러 가지 모습들 이런 것에서 우리가 아무리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도 우리가 구원과 희망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건 분명하잖아요? 두 집이 비슷한 지역에서 식당을 하는데 서로 경쟁을 해 갖고 한 쪽이 망하고 한 쪽이 잘 되었다고 합시다 그럼 잘 된 집이 그렇게 즐거울까요? 이겼다고 하는 것 때문에 그렇게 즐거울까요? 뭐 그런 것으로 즐거워한다면 그건 완전히 세상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무조건 즐거워 할 수는 없습니다. 망한 집은 망한 걸로 인해서 자녀들이 더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요. 거기서 벌어지는 문제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 까지 우리가 다 생각하며 우리가 공동으로 살아가는 삶을 생각해야 될 기독교인으로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그렇게 세상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넘어 갈수는 없는 거지요.

 

예 ,구원이, 그리고 희망이 하나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을 우리가 얼마나 충분하게 그리고 바르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이 문제가 달라 질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일단 정리 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리 세상에서의 아귀다툼과 같은 삶으로부터 영적인 삶으로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자들에게 자꾸만 어떻게 살아라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말해 줘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건 가능하지 않은 거예요. 그거 보다는 하나님을 바르게 더 이해하는 게 지름길이죠. 그러니까 구원이 뭐냐 구원이 왜 하나님에게로부터 나오는 것이냐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리고 그것을 신뢰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 야만 이제는 이 세계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이해타산에 의한, 그러한 어려운 일들로 인해서 영혼이 요동하지 않고 잠잠할 수 있는 겁니다. 네, 1절과 5절이 바로 그 부분이 이 이야기를 한 거예요. 1절 뒷부분 5절 뒷부분은 아마 그 사실을 부연해서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2.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구원이 그에게만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부연 설명입니다. 6절도 그래요. 6.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똑 같은 이야기군요. 2절과 6절 그러니까 이 시는 1절에서 4절까지가 한 연이고 5절부터 8절부터 까지가 한 연이라고 나눌 수 있겠어요. 하나의 주제를 두 번 나눠서 설명한 겁니다. 이 주제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 영혼이 잠잠한다 즉, 안식을 누린다 그 이유는 구원 혹은 소망이 하나님으로부터만 오기 때문이다 예, 그거지요. 9절부터 12절까지는 또 다른 연입니다. 이 시편기자가 사람에게 공격을 받았잖아요? 친구이기도 한 거예요. 예, 그 친구들의 진면목을 어떤 건지를 알았을 때에 이 시편기자가 느끼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그런 것들이 9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친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공격한, 친구였다가 나중에 원수가 되는지 뭐, 그런 건 정확한 건 모르겠습니다. 4절에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어요. 4.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네, 이게 바로 사람의 모습이라고 하는 거죠? 구원이 사람에게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거지요? 그러한 사람에 대한 경험이 시편기자로 하여금 9절과 같은 기도를 하게 합니다. 이렇습니다. 9.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입김? 네, 입김보다 가볍다고 하네요. 인생은 속임수다 그런 말도 나오고요. 정확한 지적이겠지요. 네, 인생의 허무를 이야기 하는 걸까요? 인간 존재의 가벼움을 이야기 하는 걸까요? 네, 그런 것들이 다 포함되겠지요? 입으로는 축복이고 속으로는 저주를 행하고 있는 그런 인간의 위선을 이야기 할 수도 있고요. 그런 것들은 아무리 요란스럽다고 하더라고 입김에 불과하다고 하는 겁니다. 다 가라지 처럼 다 불에 살라져야 될 그러한 것에 불과한 거지요. 이러한 사람을 우리가 의지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러한 사람에게서 구원이 나올 수 없지요. 그런 사람에게 희망을 걸 수가 없지요.

 

하나님으로부터만 구원과 희망이 나온다고 하는 이 시편기자의 지적이 바로 이런 인간이해와도 맞물려 있습니다. 여기서 오해는 하지 마세요. 시편기자가 인간론의 비관론에 아주 빠져 있다 그런 방식으로만 보면 좀 곤란합니다. 성서가 인간의 죄를 많이 이야기 하고 있지만 인간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없는 거예요. 기본적으로는 긍정적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입김에 불과하다고 하는 이야기의 해당되는 것은 그 사람자체보다도 사람이 행하는 일들 거짓된 일들, 속임수 입으로는 축복 속으로는 저주를 생각하는 그러한 행동, 생각 그런 것들을 이야기 하는 거지요. 그건 바로 앞서 말씀 드린 대로 구원이 인간에게서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네, 10절이요. 10.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예,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말씀이지요? 이런 것들은 다 바람이 불면 휙 하고 없어질 입김과 같은 것들입니다. 실체가 그런대도 우리가 그런 것에 많이 좌우되는 것은 아직까지 우리들에게 구원의 실체가 무엇인지가 잘 확 와 닿지 않고 있다고 하는 말씀이겠지요. 재물을 늘리는 것에 마음을 두게 되는 이유도 결국 그 재물이 나의 구원을 보장한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나는 안 그래 하나님을 믿지, 재물이 날 구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렇게 말은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재물에 대한 의존성이 인간에게 얼마나 절실하고 숙명적인지 모릅니다. 네, 11절에서 이 시편기자가 그러한, 10절에서 이야기 한 대로 포악, 탈취물, 재물, 이런 것들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우리를 구원 할 수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는 능력이 바로 구원의 능력이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하지요? 예, 권능이 하나님께 속했다 이러한 진술의 깊이에 우리가 완전히 뛰어 들어 갈 수 있는 날이 올까요? 그리고 그렇게 되셨습니까 이런 말씀들을 이해하려면 권능이 뭐냐에 대해서 생각을 하셔야 되요. 그것을 알아야만, 권능이 하나님에게만 속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지 그런 거 생각 하나도 없이 문장만 달달 외운다고 해서 성서 텍스트의 능력이 우리들에게 와 닿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는 성서를 읽는 사람들에게 인문학적 훈련은 필수적입니다. 능력 생명, 존재, 시간, 인간, 역사, 이런 것에 대한 인문학적인 이해가 이런 성서에 있는 내용들을 정확히 이해 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는 거예요.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할 때 어떤 정치적인 권능, 어떤 힘 말이지요? 그걸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건 정치가들에게 있는 거지요. 우린 보통 그걸 힘이라고 이야기 하잖습니까 사람의 그 어떤 처지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그러한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러한 권능이 있다고 보통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그런 일들이 보이긴 하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힘을 가진 사람들을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하면 그들도 입김하고 비슷합니다. 그 권력이라고 하는 것도 쉽게 사라질 수 있고요. 그 권력으로 인간을 죽이고 살리지는 아주 못합니다. 혹은 전쟁을 일으켜서 혹은 전쟁을 막아서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긴 있습니다만 그것도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이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역사가 지나면서 그것은 다시 판단 받고요. 그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신앙에서 볼 때는 우리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여기에서 몸을 갖고 살고 있는 이러한 것에만 한정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하잖아요? 정말 참된 권능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영혼의 문제예요. 영혼이라고 할 때 이 영혼도 영육 이원론적인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생명의 가장 깊이에 있는 그러한 생명 현상을 이야기 하는 거지요. 네,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으니까 다른 재물 포악 탈취 이런 것으로 마음을 허비하지 말아라 그 얘기입니다.

 

12절 마지막 절이예요. 12.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11절에서는 권능을 이야기 했구요. 12절에서는 인자함을 이야기 했습니다. 권능과 인자가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권능있는 분이고 인자하신 분입니다. 인자하시면서 권능있는 분입니다. 권능이 있기 때문에 인자하심을 실현할 수 있는 거고요. 그의 권능이 옳은 이유는 그 분이 바로 인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분에게만 구원과 희망이 가능한 거지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일들로 인해서 요동하지 않고 잠잠할 수 있습니다. 안식할 수 있습니다. 이거는 그냥 설교조로 제가 말씀 드리는 거 아니고요. 실질적이 이야기입니다. 물론 설교가 실질적인 이야기이지요? 제가, 여러분들이 이런 것들을 식상한 언어로 생각하지 마시라 하는 그런 뜻으로 드린 코멘트예요. 권능이 있는 분이 인자하시니까 그 인자하심이 실현 될 수 있는, 그런 분만이 하나님이신 거지요? 그런 하나님에게만 구원이 나오고 또 거기에서만 참된 희망이 가능한 거지요. 12절 마지막 구절, 마지막 문장이 조금 생각해야 될 꺼리입니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하나님만이 그런 일 하실 수 있는 거거든요? 권능과 인자하심으로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는다, 그러니까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이 있고,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이 있잖아요? 그거는 사람들은 밝힐 수가 없어서 그거를 판단할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행한 대로 갚는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거예요. 판사가 그걸 하겠습니까? 검사가 하겠어요? 변호사가 하겠어요?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는다는 말을 단순히 권선징악 뭐,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시면 곤란합니다. 이건 윤리적인 차원의 말이 아니라 신앙적인 차원의 말씀 이예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이 혹은 그런 사람만이, 아뢸 수 있는 기도지요.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 이 사람이 이제 침묵 가운데서 안식을 얻고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거지요.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아니라 속에 있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는, 그러한 인간의 행위를 정확하게 하나님만이 판단하신다고 하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 분에게만 호소 할 수 있는 거지요. 신자들은 그렇습니다. 그러한 호소할 수 있는 분이 계시기에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억울한 일 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요동하지는 않습니다. 굳이 나를 이해해 달라고 그렇게 발버둥치지도 않습니다. 네, 오늘 62편 여기까지입니다. 제목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영혼의 침묵 즉 영혼의 안식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47 70편 녹취록-지체하지 마소서 file [1] 박은옥 2009-11-01 1555
46 69편 녹취록-천지가 찬송하리라 file 박은옥 2009-10-27 1642
45 68편 녹취록- 신앙의 세 가지 토대 file [1] [11] 박은옥 2009-10-01 1972
44 67편 녹취록-하나님의 빛에 휩싸임 file [5] 박은옥 2009-09-29 1712
43 66편 녹취록-주님으로 인한 기쁨 file [2] 박은옥 2009-09-19 1813
42 65편 녹취록-영혼이 안식할 토대 file 박은옥 2009-09-01 1423
41 64편 녹취록-여호와로 인한 즐거움 file 박은옥 2009-08-25 1536
40 63편 녹취록- 영혼의 갈망, 영혼의 만족 file [3] [1] 박은옥 2009-08-08 1940
» 62편 녹취록-영혼의 침묵 file 박은옥 2009-08-08 2028
38 61편 녹취록-땅 끝에서의 부르짖음 file 박은옥 2009-08-08 1402
37 60편 녹취록-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file 박은옥 2009-08-07 1512
36 59편 녹취록-주는 나의 요새 file [16] 박은옥 2009-08-07 1834
35 58편 녹취록-하나님이 계시다 file [4] 박은옥 2009-07-07 1274
34 57편 녹취록 -지존하신 하나님 file [2] 박은옥 2009-07-07 1260
33 56편 녹취록-사람이 내게 어찌하랴 file 박은옥 2009-06-13 1435
32 55편 녹취록-탄원의 영성 file [4] [16] 박은옥 2009-06-09 1716
31 54편 녹취록-주의 이름으로 file [2] 박은옥 2009-05-28 1280
30 53편 녹취록 -어리석은자 file 박은옥 2009-05-28 1683
29 52편 녹취록-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file [4] 박은옥 2009-05-01 1953
28 51편 녹취록-원죄와 구원 file 박은옥 2009-04-30 131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