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63편 녹취록- 영혼의 갈망, 영혼의 만족

조회 수 1943 추천 수 0 2009.08.08 22:28:14

시편 63편 강해-영혼의 갈망, 영혼의 만족

 

1절부터 11절까지 말씀을 제가 읽겠습니다.

 

1.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 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3.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5.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 니

7.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8.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9.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10.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11.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아멘! 네, 이 시편기자의 마음이 절절합니다. 하나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 대상을 향한, 그 간절함이 구절구절마다 녹아 있어요. 이러한 전적인 신뢰에 전적인 찬양, 이런 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말은 그렇게 합니다만 이러한 경지에 들어가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상대적인 그러한 차원이 아니라, 절대적인 신뢰인 거지요.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이런 절대적인 신뢰보다는 있으면 더 좋은 상태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인들에게는 다른 것들이 더 중요한 거지요. 하나님은 본인들에게 중요한 것들을 채워주는, 그러한 대상정도에 머뭅니다. 물론 하나님만을 절실하게 믿고 따른다고 말을 할 수 있어요. 네, 그렇게 말하는 거하고 하나님을 그렇게 실제로 신뢰하는 거하고는 차이가 있습니다. 차이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거지요. 하나님에게 이런 절대적인 신뢰심을 갖고 살려면 그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아야 되는 거겠지요. 그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알아야 되겠지요. 막연하게 나를 도와주시는 분으로 아는 게 아니라 아주 실질적으로 내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 속으로 들어가야 되는 거거든요. 그 맥락이 간단하다고 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걸 분간하기도 좀 힘들구요. 분간하기 힘들다고 하는 이 말은 많은 경우에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하는 자기 자신을 대한 자기 열정이 강하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뢰가 아니라 믿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거하고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뢰하고는 차이가 있는 거 거든요?

 

하나님에게 우리 모든 존재 근거를 두기 위해서는 앞서 간단하게 언급한 대로 그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더 정확하게 이해해야 되는 거겠지요. 그런 것들이 없을 경우에는 미신과 비슷해지는 겁니다. 일반 무속신앙이라고 할까요? 거기에도 신앙심이 있긴 있잖아요? 그리고 절절한 어떤 마음도 있지 않습니까 새벽마다 정한수를 떠 놓고 기도하던 간절히 간구하던 우리 조상들이라던지, 또 지금도 그러한 방식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런데서 우리가 확인 할 수 있는 거하고 비슷합니다. 그 대상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자기가 간구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서는 모르는 거예요. 그 대상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에 매달려 있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는 참된 신뢰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건 어떤 순식간에 관계가 끊어질 수 있는 거지요. 오늘 여기 63편에 나오는 이 시, 신앙시는 아주 놀라울 정도로 신앙의 깊이, 이런 것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그런 걸 드러내고 있어요.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1.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요 첫 문장만 잘 생각해도 예, 우리가 성서의 신앙을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바르트의 표현으로 바꾸자면, 칼 바르트요. 이렇게 말할 수 있겠군요.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Gott ist Gott”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아주 간단한 명제인데 여기에서 하나님이 누구인가 어떠해야 되는가 하는 그러한 내용들이 다 들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편 63편 1절이 말하는 거하고 칼 바르트가 말하는 그 명제하고 일맥상통하는 게 있어요.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이거를 그냥 헛튼 소리로 내면 안 되겠지요? 하나님이시라, 나의 모든 것이라 하는 것이지요. 그 분만이 창조주라고 하는 이야기이겠지요. 그 분만이 우리 생명의 힘이라고 하는 거겠지요. 그 분만이 바로 우리가 숨을 쉬어야만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듯이 그런 숨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런 분이라 하는 뜻이겠지요. 그러니까 그 분이 없으면 모든 것이 다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해 지는 겁니다. 네, 그런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거든요. 예, 방금 말씀 드린 그 분이 아니면 우리의 모든 것들이 허물어지는 그러한 분을 어떻게 우리가 인식할 수 있을까요. 이게 한 두 마디로 끝나버릴 그러한 질문이 아닙니다. 그런 분이 어떤 분이냐 하는 거지요. 그 다음이요.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여기서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이라고 하는 표현은 이 사람이 처한 어려운 형편을 이야기 합니다. 물이 없고 황폐한 땅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생존의 조건들이 열악하다는 그런 뜻이겠지요. 여기서 주를 갈망하고 앙망한다고 했습니다. 앙모한다고 그랬어요.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고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했어요. 영혼과 육체가, 이거는 이원론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예요. 그러니까 그 시편기자의 인격전체가 하나님을 갈망한다고 하는 거지요. 예, 이 사람이 놓여 있는 조건은 나쁩니다. 물이 없고 황폐해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갈망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더 갈망했던 것이었을까요? 아주 나쁜 환경과 하나님을 갈망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네, 팔복에 나오는 그런 말씀에 따르면 나쁜 환경, 생존에 열악한 환경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울고, 고난 받고, 배고픈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했거든요. 이 사람도 그런 경우인지는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그런 나쁜 조건 가운데서도,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이 하나님을 더 갈망하게 되었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고게 앞에 팔복에 나와 있는 말씀에 대한 설명과 바로 이것하고 이렇게 딱 구분되는 건 아니군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으로 제가 생각하고 말씀을 드렸는데, 말씀을 드리고 놓고 보니까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 아주 작은 차이를 제가 정확하게 찾아서 설명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네, 1절은 그렇게 넘어 가지요. 2절 이렇습니다.

 

2.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예, 이 사람은 바로 성소 안에 있군요. 성소라고 했어요. 이게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걸까요? 그건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 남유다 이렇게 구분되어 있어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이게 북이스라엘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남 유다까지 포함한 그런 통칭인지 이게 좀 혼란스러워 질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구별하지 않고 쓰는 거예요. 유대 전체, 이스라엘 전체에는 성전은 예루살렘 한 군데에 있지만 성소는 몇 군데로 나뉘어져 있었어요. 이건 구분해서 쓰는 거예요. 북이스라엘의 세겜 이라든지 몇 군데에 성소가 있었지요. 오늘 여기 2절에 나와 있는 성소가 어떤 것을 가리키는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던 거룩한 곳 어떤 한 장소를 택해서 하나님이 인간과 만나주시는 그러한 곳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을 했는데 바로 그중에 하나이겠지요. 네, 이러한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보이나요? 주님이 보이진 않죠? 또 권능과 영광이 보이나요? 그것이 가시적으로 보이는 건 아니겠죠? 그래도 이 시편기자를 비롯해서 성서에는 그런 표현들이 많단 말입니다. 주를 본다.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본다고 말 이지요 이건 거짓말은 아닌 거예요. 보지 않고도 보았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들이 분명히 무언가를 보았는데 그래서 이렇게 쓰고 있는데, 그게 뭐냐는 거지요. 어떤 형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형상이 되 버리면 그건 우상 숭배인 거구요. 그럼 어떤 걸까요? 네, 그런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영성가들 에게 가능한 거지요. 성서기자들에게 가능한 거지요. 예언자들에게 가능했던 것들이지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잘 포착되지 않지만 이런 특별한 사람들에게는 가능한 거지요.

 

정말 이게 중요한 문제이면서도 까다로운 문제인데 제가 더 정확하게 설명하기가 어렵군요. 그래도 한 번 더 시도해 보겠습니다. 한번 함께 예배를 드리는 장면을 그려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무미건조하게 예배를 드릴 거예요. 하나의 형식에 빠져 있다거나 정신의 산만한 상태에서 그렇게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똑같은 예배 장소에 있는데 어떤 거룩한 경험을 하게 되는 거지요. 그건 권능이나 영광으로 말 할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 마치 베에토벤이나 모차르트 같은 사람들이 놀라운 음악적인 경험을 해서 그거를 악보에 적어 내는 거 하고 비슷합니다. 그런 작곡가들에게는 음악경험이 권능과 영광이거든요? 절대적인 것 이구요.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들인데 그들에게는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얘기하는 영광, 권능, 주를 보았다고 하는 것도 그런 경험을 한 것 하고 비슷한 거지요.3.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고 했군요. 여기에서 말하는 생명은 이 시편기자의 육체적인 생명을 가리키겠지요? 지금 살아 있다고 하는 이걸 이야기 하겠지요? 이것 보다 주의 인자하심이 더 커서 주를 찬양할 수 밖 에 없다고 노래합니다. 참 놀라운 영적인 진술 이예요. 주의 인자하심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생명 이런 것 들이 눈에 보입니다. 내가 밥을 먹고 사람들을 만나고 숨을 쉬고 하기 때문에 이건 확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의 인자하심은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 생명보다 주의 인자하심이 더 낫다, 앞섰다, 그를 찬양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정도의 영적인 경지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얼마나 여기서 오래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신앙 고백들이 그렇게 추상적인 것은 아니예요. 사람들이 자꾸만 성서에 나와 있는 신앙 진술들을 자기들이 미처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저건 그냥 그럴 듯하게 하기 위한 말이다 나하고는 거리가 멀다 너무 추상적이다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편기자는 주의 인자하심을 아주 놀랍도록 현실로 경험한 거예요. 이러한 경험이 있어야만 우리는 오늘의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과정에서 여기 묶이지 않고 초월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통치에 우리가 들어 갈수 있는 거지요. 4.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평생에 주를 송축한다고 말합니다. 주를 찬양한다, 손을 들고 주를 찬양 한다 그 얘기죠? 예, 이러한 영적인 깊이에 들어간 사람은 행복한 겁니다. 앞서 예로 든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같은 작곡가들이 음악에, 놀라운 경지에 들어 가 있잖아요? 그들도 행복한 거예요. 음악적으로 그들은 무한한 희열을 느꼈을 테니까요 그래서 다른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찬양 송축한다고 하는 것은 그 이외의 것으로는 우리가 기뻐하지 않겠다 그러한 뜻이기도 합니다. 찬양 송축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려 질 거니까요. 그 다음의 표현이 아주 문학적이고요.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5절 이예요.

 

5.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절까지 마저 읽을까요? 6.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7절까지 더 보겠습니다. 7.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네, 5,6,7절을 쭉 읽었습니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듯이, 그걸 먹은 것처럼 영혼이 만족한다고 얘기하네요. 지금이야 소고기 돼지고기를 간단하게 사다 먹을 수 있으니까요. 뭐, 이러한 기름진 것을 먹으면서 황홀해 하지 않죠. 그러나 옛날 사람들 생각해 보세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한 달에 한번 소고기 국 먹을까요? 그것도 힘들거든요? 뭐, 특별한 명절 때만 겨우 먹을 수 있었는데요. 참 맛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고대인들은 어땠겠습니까, 물론 민족의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서 좀 차이가 있겠지요. 그래도 어쨋던 먹는 것이 별로 풍족하지 못하고 생존의 위기 이런 것들이 늘 느끼고 있을 때에 기름진 것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아주 놀라운 경험입니다. 아주 즐겁고 흡족한 거지요. 나의 영혼이 그런 것처럼 만족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영혼의 만족감 이건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일치됨으로서만, 우리영혼이 진정한 의미에서 만족할 수 있는 거지요. 그 이외의 것들로는 우리가 참된 만족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우리가 여기서 모든 원하는 일들을 다 성취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내 영혼을 만족시키지 못하니까요. 계속해서 무언가가 내 속에서 채워지지 않는 경험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건 틀림없는 것이예요. 아니다 나는 원하는 것들이 다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정말 만족해서 살거다 그렇게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요. 그런데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거는 속임수,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그 실체를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그러한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는 만족감의 상태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을 거예요. 마약에 완전히 취해 있는 상태 말이지요? 그러면 다른 게 아쉬울 거 없지 않습니까? 정말 그 상태가 영적으로 만족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늘 마약에 취해 있을 수는 없잖아요? 마약이 깨면서는 더 심각한 불안에 떨어지기 때문에 이 마약을 통한 영적인 만족은 이거는 살리는 만족이 아니라 죽이는 만족, 착각 속임수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그 이외 그 어떤 것들도 우리를 만족하게 하지 못합니다. 아, 그렇다면 세상일들은 다 무의미하니까 다 때려치우고 기도만 하자 그 얘기냐 그 뜻은 아닙니다. 실체를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된다는 거지요. 영혼이 참 된 만족에 들어가려면 그거는 하나님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그 사실이 중요합니다. 8절이요.

 

8.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네, 이 8절도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영혼이 주를 따른다고 얘기하네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영혼이 주를 따른다고 하다니요. 예배 빠지지 않고 잘 나와서 예배드리는 거 일까요? 아니면 교회가 요구하고 있는 여러 가지 경건생활을 정확하게 하는 걸까요? 내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른다는 이 말도 조금 더 실질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끌어가는 분이라고 하는 생생한 경험, 그런 확신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다고들 말들을 많이 하지요. 예,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말도 그렇게, 처음에 공부하는 앞 부분에서, 서론적으로 말씀 드렸듯이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감, 이런 것에 떨어질 수도 있는 거예요. 그 두 개를 좀 구분해야 되는데 이게 자꾸 혼란스러워 집니다. 예, 이게 차이가 분명히 있는데 그거를 딱 말로 끊어서 어디서 어디까지가 차이가 있다 그렇게 말하기는 참 힘든 거거든요? 그것은 그 개인의 은밀한 깊이에서 움직이는 영적인 작용이기 때문에 제 3자가 그걸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자기 자신이 판단하기도 힘든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어떻게 이런 경험을 하고 말을 했는지 귀를 기울이면서 그러한 신앙을 배우도록 노력하는 것이 최선 이겠지요.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이러한 문장이 말하려고 하는 영적인 상태가 뭔가를 생각해야 되겠지요.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이게 뭐 확 드러난 것은 아니잖아요? 따랐다는 하는 순간에 또 우리는 걸려서 넘어지고요. 생명의 힘이, 부활의 주님이, 심판의 주님이 내 삶을 끌어간다고 하는 믿음이 생긴 거와 동시에 이렇게 저렇게 나자빠지잖아요? 금방 실망하기도 하고요. 분노하기도 하고 계속 그렇습니다. 그러니 내 영혼이 주를 따른 다고 하는 말에서 우리는 책임적이지 못할 때가 많은 거지요.

 

9.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예, 요 구절에서 시편의 분위기가 좀 바뀝니다. 앞에서는, 네, 8절까지는 하나님, 주님을 갈망하고 찬송하는 거였는데, 이제 9절에서는 원수들의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그러니까 결국 그런 거군요. 그러니까 시편기자도 그렇게 절실하게 또 생생하게 하나님 경험을 하고 찬양하는 삶을 사는데도 풀리지 않는 숙제가 있는 거예요. 원수들과의 관계이거든요. 하나님과의 관계는 잘 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자기의 그 어떤 것도 앞에 나서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 삶 전체의 주인으로 이해가 되고 그렇게 경험되는 것은 분명한 거예요. 거기서는 정말 영혼이 만족해서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경지에 올라간 시편기자도 원수들에 대한 것은 해결하기가 어려운 거지요. 이런 거는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우리 영성이 예민해지고 심화 되어 가는데도 아주 구체적으로 나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있잖아요? 같이 있기 싫은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그건 문제들을 풀기 힘들어요. 아무리 믿음 있어도 싫은 사람은 싫게 되니까요. 이게 우리 영혼에 한계에, 우리 영혼에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고 이건 좀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시편기자도 이러한 골치 아픈 문제를 안고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식의 노래를 합니다. 9.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10.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요것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신앙 있는 사람의 말이라고 하기엔 힘들지요. 특히 신약이 이야기하는 원수 사랑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본다면 원수 증오에요. 이러한 시는 시편기자가 처한 삶의 자리를 염두에 두고 해석을 해야 할 겁니다. 네, 거기까지는 우리가 들어가지 말도록 하겠습니다. 네, 11절 마지막 절입니다.

 

11.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이 시가 성소에서 부른 노래잖아요? 그러니까 그 성소에 왕도 있고 고관대작들도 있고 대중들이, 청중들이 많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거기서 부르는 찬송이니까요. 앞부분 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뒤로 가서 악한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하는 것들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이 말도 그러한 것을 배경을 놓고 하는 겁니다. 결국 이러한 대중, 청중들이 많이 모여 있을 때는 정의 옳고 그름 이런 것들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개인적으로는 용서할 수 있더라도 이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악한 사람들의 멸망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그렇게 말 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일종의 재판관이 개인적으로는 악과 행한 사람을 용서한다고 하더라도 사회를 세워나가기 위해서 그에게 일정한 양의 징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네, 오늘 63편을 함께 읽고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 갈망이 얼마나 놀라운지 저도 개인적으로 부럽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러한 영적인 경지에 들어 갈수 있도록 구도적인 삶을 열심히 살아 봅시다 예,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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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2009.08.10 02:31:17
*.234.35.112

긴 대장정을 마무리 했습니다.^^

장장 한달을 쉬었더니(강의도 요새야 들었어요) 많이 밀려 있었네요.

 

이틀동안 참 행복했었습니다.

뭐 그게 행복이냐, 그런 사람이 있겠지만요.

하기사 더운날 컴터 앞에 죽치고 앉아 있는게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을 것 같네요.

더구나 밥이 되는 것도 아니고.. ㅋㅋ

그런데, 저는 이번에야 말로 '정용섭목사님의 신학'이 뭔지 확실하게 감을 잡았습니다.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만 저는 그냥 쉽게 남들에게 '정용섭 목사님 신학'이라고 하네요.)

바로  '땅끝에서 들려오는 영혼의 소리에 천착하는 신학,' 이라고요.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제가 서핑하다가 건져낸 이야기 하나가 떠오릅니다.

 

클라라 하스킬 이라는 피아니스트가 있어요. 말년에 곱추병으로 고생하신 분이시지요.

카라얀 지휘로 하스킬의 모짜르트를 들은  피아니스트 니콜라예바는

"그날, 공연이 시작되자 카라얀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 덕택에 모두는 '음악의 진실'을 접하고 있었다."라고 했다네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떤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하지 않나요?

그리고 그때 비로소 '진실'을 접하게 되고요. 우리가 최고로 쳤던 '카라얀'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최고니까요. 그리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니까요. 그것으로 인해 울고 웃고. 그리고

기쁘고 행복하고.. 그런데, 한 어떤 존재 "음악의 진실'이 나타나면서 우리의 영혼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겠지요.

내 깊은 곳에서 주를 부르며, 주님을 찬양하나이다

 

목사님 신학의 진가는,

우리를 이 '진실, 참' 앞에 세워 주신 다는 거지요.

다른 말로 옮기자면 늘 '코람데오' 의 신학을 추구하게 하신 다는 거겠지요.

그 자리로 부터 우리 신학이 시작해야 되니까요. 

저는 그 자리가 '땅끝'이라고 생각되어 지네요.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곳,

그곳은 바로 절망과 희망이 함께 있는 곳.

내가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가장 적나라하게 볼수 있다는 점에서

절망이지만, 그러나 그 곳은 영혼의 쉼터,안식의 장소이기에,

희망이라고 생각되어져서요.  

아, 정말 그런 거 같아요.

우리가  이 '땅끝'을 제대로 이해 한다면,

하나님께 날마다 기도 드릴수 있겠어요.

주님을 찬양합니다. 경배 받으소서!

나의 영혼이 주를 찬양하나이다!

 

목사님과 함께 걷는 길,

감사하고 기쁨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profile

[레벨:26]사띠아

2009.08.10 09:56:06
*.173.250.230

 애쓰셨습니다.

누가 봤으면 미쳤다고 했겠어요. ^^

그러나 녹취 도중 스쳐가는 수많은 생명의 기운들..

그것이 녹취자의 양식이지요.

다 끝난 녹취를 마무리하는 것도 그렇구요.

하여튼 라라집사님. 대단해요.

이런 욕심은 한껏 부려도 부러워 하는 사람 별로 없으니

마음껏 부리세요. 


참2절과 5절 녹취부분 중간 즈음에 어쨋든은 ... 어쨌든이 맞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5절 패러그래프 마지막 부분 .. 분면 ->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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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2009.08.10 12:12:36
*.234.35.112

선교사님, 격려 말씀 고맙습니다.

녹취자의 양식...햐!

역시 뉘 심정은 뉘가 안다고..

제 심정을 딱 알아 보시는 구만요^^

정말 그랬습니다.

중간에 몇번이나 손을 놓고 기도를 드렸었습니다.

예배,찬양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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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67편 녹취록-하나님의 빛에 휩싸임 file [5] 박은옥 2009-09-29 1714
43 66편 녹취록-주님으로 인한 기쁨 file [2] 박은옥 2009-09-19 1816
42 65편 녹취록-영혼이 안식할 토대 file 박은옥 2009-09-01 1429
41 64편 녹취록-여호와로 인한 즐거움 file 박은옥 2009-08-25 1537
» 63편 녹취록- 영혼의 갈망, 영혼의 만족 file [3] [1] 박은옥 2009-08-08 1943
39 62편 녹취록-영혼의 침묵 file 박은옥 2009-08-08 2058
38 61편 녹취록-땅 끝에서의 부르짖음 file 박은옥 2009-08-08 1402
37 60편 녹취록-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file 박은옥 2009-08-07 1513
36 59편 녹취록-주는 나의 요새 file [16] 박은옥 2009-08-07 1836
35 58편 녹취록-하나님이 계시다 file [4] 박은옥 2009-07-07 1308
34 57편 녹취록 -지존하신 하나님 file [2] 박은옥 2009-07-07 1262
33 56편 녹취록-사람이 내게 어찌하랴 file 박은옥 2009-06-13 1438
32 55편 녹취록-탄원의 영성 file [4] [16] 박은옥 2009-06-09 1716
31 54편 녹취록-주의 이름으로 file [2] 박은옥 2009-05-28 1285
30 53편 녹취록 -어리석은자 file 박은옥 2009-05-28 1722
29 52편 녹취록-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file [4] 박은옥 2009-05-01 1988
28 51편 녹취록-원죄와 구원 file 박은옥 2009-04-30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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