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65편 녹취록-영혼이 안식할 토대

조회 수 1429 추천 수 0 2009.09.01 22:30:08

시편 65편 강해-영혼이 안식할 토대

시편 65편을 읽겠습니다.

 

1.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2.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3.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4.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 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5.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6.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7.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8.땅 끝에 사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9.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 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10.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11.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12.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13.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아멘! 65편은 앞에 잠시 나와 있는 일련의 시편하고 좀 성격이 다르지요. 앞의 있는 것들은 주로 억울한 일을 당한 하소연들이 중심이 된다고 볼 수 있어요. 시편기자들이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 앞에서 견딜 수 없는 모습들 이러한 상황을 돌파 할 수 없도록 도움을 달라고 하는 하소연들이 중심이었습니다. 이 65편은 완전히 성격이 달라져요. 찬양시라고 합니다. 찬양, 찬양이라고 하더라도 무조건 좋은 게 좋다 그런 식은 아니지요. 이 찬양이라고 하는 것도 어떤 삶의 수렁들, 그러한 아픔들, 불안과 허무들을 알고 있을 때 가능한 겁니다. 그럴 때만이 그것을 넘어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찬양할 마음이 생기거든요.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심리적인 감정적인 자기도취가 아니라, 우리 삶에 만연하고 있는 여러 가지 불안한 모습들을 뚫어 보면서 그것을 넘어서 혹은 그것을 상대화 시키면서 우리에게 오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영적인 통찰력에서 가능한 거죠. 이 65편은 전반적으로 편안하게 와 닿습니다. 찬양시니까 그렇겠죠. 네, 쉽게 얘기해서 아주 은혜로운 그러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부터 13절까지 있는데 이것을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한 3연으로 나뉠 수 있어요. 1절부터 4절까지가 한 연입니다. 한 연이라고 얘기해도 좋고 한 문단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1절에서 4절까지예요. 여기에는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이죠?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오는 은혜의 선물에 대한 찬양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5절에서 8절까지는 온 세계의 하나님과 그리고 그의 창조, 그리고 역사를 통한 구원을 찬양하고 있어요. 예, 5절에서 8절에는 그러한 찬양이 나오고 있습니다. 1절에서 4절과 5절에서 8절, 책에 있죠? 첫 번째는 하나님 집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 두 번째는 창조, 구원 이런 것에 대한 찬양입니다. 세 번째 이게 마지막이죠. 9절에서 13절까지는 지난해, 한해가 지났죠? 추수를 하게 되겠죠? 지난해의 풍요의 축복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세 단계로 나눠져 있어요. 다시 한 번 정리합니다. 첫 번째는 1절에서 4절인데,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오는 은혜의 선물에 대한 찬양, 두 번째는 5절에서 8절인데, 온 세계, 창조, 그리고 구원에 대한 찬양 세 번째는 9절에서 13절인데, 한 해가 지나면서 주신 그 풍요로운 결실에 대한 감사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눠 보지요.1절 이렇게 시작합니다.

 

1.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시온은 예루살렘에 있는 어떤 언덕을 가리킨다고 하죠.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원한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온, 시온 산, 시온주의, 예루살렘의 한 언덕을 지칭하는 말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든 민족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고향과 같은 그런 지역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거기서 주를 기다리고 그리고 주님과 나누었던, 서원 약속을 이행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예, 그 다음 2절, 1절을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다시 읽어만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찬송이 주를 기다린다고 했어요.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겠지요. 찬송하면서, 찬송과 더불어 찬송가운데서 주를 기다린다고 하는 거지요. 주님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찬양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기다림 ,찬양, 예, 그렇습니다. 서원은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이거든요. 하나님과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되겠지요. 물론 이것이 너무 기계적인 차원에서 이해되면 좀 곤란하긴 합니다. 이건 유대인들의 고유한 종교형식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한 해를 시작하면서 내가 금년안에 어떤 서원 기도를 드리겠다 해서 그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 이런 방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무조건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나쁘다고 하는 뜻도 아니구요. 서원은 특별한 경우에 있어야 되는 것이지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한 것 같진 않습니다. 어쨋던 하나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이 시편 기자는 이행하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하고 있어요.

 

2.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예, 이런 말씀도 상투적으로 들으면 안 되죠. 기도를 들으시는 주라고 했습니다. 이게 기계적으로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다른 때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우리는 주님께 구하면서도 이것이 나에게 유익한지 아닌지 잘 판단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막무가내로 매달리기만 하는 거죠. 하나님께서 선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당장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그것이 결국 합해서 선을 이룬다고 하는 그런 신앙에서 우리가 살아야겠지요. 그런 신앙으로 들어가야만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거예요. 3.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서원을 이행하겠다고 하는 이 사람, 그리고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 이렇게 외치는 이 사람 그리고 모든 육체가 주께 나온다고 하는 이런 놀라운 영적인 시각, 혹은 상상력을 가졌던 이 사람은 정말 중요한 문제를 여기서 짚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이 아무리 고상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죄를 넘어서기는 힘들거든요? 이게 우리의 실존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죄를 극복할 수가 없어요. 여기서 말한 죄는 단순히 그런 파렴치한 일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인 모든 생각들과 행동들을 가리키죠. 우리는 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에서 살기도 하고 또, 습관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만, 습관이기도 하고 아주 그것이 우리 운명과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죄는 우리를 존재론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거죠. 존재론적이라고 하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아시겠죠?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 수 없는 그런 차원에서 죄와 악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거죠. 여기서 조금 모순을 느낄 분들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들어갔는데, 어떻게 죄와 악이 존재론적으로 지배하고 있느냐 그런 생각 말입니다. 예, 우리가 의로움으로 인정을 받았고 그리고 세례 받고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의 세례가 반복되고 주님의 십자가와 더불어서 죽고 주님의 부활로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사실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우리가 죄의 지배를 받는 건 아니죠. 그러나 거기서 미묘한 긴장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지만, 그리고 예수님을 닮아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래서 우리는 성도라고 불리기에 합당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완전히 벗어 날 수는 없는 거예요.

 

종교개혁자들이 그렇게 이미 얘기 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정확하게 미리 짚었죠. 우리 기독교인은 죄인이면서 의인이고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 이 두 가지 실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어떤 때는 황홀하게 영적인 경험 누미노제(Numinose)의 그런 경험들, 성령에 충만한 가득 차는 경험들을 한다고 하더라도 늘 그렇게 지속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죄와 악이 순식간에 우리의 실존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고 의인이면서 죄인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 실존의 어떤 긴장, 경계선에서 살고 있는 거죠. 그런 점에서 이 시인이 죄악이 나를 이겼다고 하는 이 고백은 옳은 거지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뭐냐 하는 의롭다고 하는 자족감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용서를 받는 거죠. 이게 기독교의 특성이면서 동시에 세상사람 들이 기독교를 못 마땅하게 여기는 관점이기도 합니다. 용서를 받긴 뭘 받아 자기가 잘 못 했으면 자기책임을 지고 사람에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앞으로 똑 바로 살면 되지 않느냐 무슨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냐, 이런 이야기를 어떤 쪽에서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게 그럴 듯한 말이긴 해요. 특별히 계몽주의 이후로 지성과 이성적인 인식이 분명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용서하심 이런 것들은 아예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들이 아주 그럴 듯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나온 것은 아니예요. 인간에 대한 추상적인 이해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죄와 악에 존재론적으로 지배받고 있는 지를 명확하게 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개혁을 통해, 새로움을 통해서 윤리적인 어떤 책임감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으려니 생각을 하거나 예, 그렇게 생각을 하겠죠? 도덕적으로 좀 새로워지고요. 교육을 받고 그러면 되지 않느냐, 그런 정도로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게 완전히 틀렸다고 말을 할 수는 없어요. 우리들에게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 인격적인 그러한 사람이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중한 관점은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심층적인 관점은 아닌 거죠.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대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죄의 존재론적인 힘을 스스로는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고요. 용서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곧, 죄와 악은 하나님만이 제압할 수가 있다고 하는 인식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죄와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기시는 것이구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죄와 악에 빠질 때에 그건 우리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구요. 그렇다고 우리의 죄와 악을 어쩔 수 없다 합리화 하자 잘 못 되도 괜찮다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용서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거죠. 예, 그 방식으로만 우리는 죄의 운명으로부터 벗어 날수 있는 겁니다. 이 시편기자는 찬양시를 노래하면서 정확하게 인간실존을 읽고 있습니다.

 

4.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예,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사는 그러한 삶이 아니라 주님의 집에 거하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하는 거지요. 이 비슷한 고백은 구약의 다른 데 있는 거 같던데요. 성전의 문지기로 사는 어떻다, 훨씬 더 낫다고 하는 그러한 고백 말입니다. 제가 그 구절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네요.(주:시편84편10절) 예, 그 구절은 오늘 여기 우리가 본 4절 후반절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 하리이다. 예, 우리 기독교인들은 주의 성전이 예루살렘 성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성전인 거죠? 이 신앙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하는 것으로 만족 한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이 교회와 세상이 이원론적으로 완전히 구별 되어 있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러한 관계들을 우리가 잘 파악해야 될 것 같아요. 교회를, 믿는 자들의 공동체를 세상에 완전히 관계가 없는 유별난 방주와 같은 공동체로 보는 것도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거와 같은 하나의 기구와 조직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여기에는 세상 어떤 기구가 담지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구원론적 사건이 아주 고유한 방식으로 담지 되어 있거든요. 그건 비교 될 수 없는 거죠. 교회 공동체에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케리그마적 사건과 일치에서 구원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이 성전의 아름다움이구요. 그것으로 우리가 영적인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 1절부터 4절까지 보았어요.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5절에서 8절은 온 세계의 하나님과 창조와 구원을 찬양합니다. 이제 앞부분에 비해서 여기서는 훨씬 더 차원이 넓어지죠. 우주론적으로 나가게 되죠. 세계 전체 창조 구원 역사 다 포함되니까요.

 

5.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 하시리이다 구원의 하나님이여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이여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시죠. 이런 말을 이해하려면 구원이 뭐냐 대해서도 생각이 깊어져야 합니다. 구원의 하나님, 그를 부르고 있어요. 땅의 끝과 먼 바다 그러니까 온 세계 전체를 이야기 하고 있죠. 이 시편기자가 살던 당시에는 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바다 끝에 뭔가 떨어지고 지구 끝, 땅의 끝, 그 전체 세계를 편편하다고 생각했을 텐데요. 온 세계 사람들이 주를 의지해야 되는 거죠. 하고 있는 거죠. 주를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 갈 수 없죠. 물론 자기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할진 모르지만, 그러나 인정하든 안 하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지구가 우주에 둥둥 떠 있으면서 자전하잖아요? 공전도 하고 그러면서 여기서 생명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런 모든 것의 힘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거지요. 그 주님, 그 하나님이 의, 의로움을 따라 아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 하시리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어요. 여기에 세 가지 단어가 나오고 있지요. 의, 엄위, 응답, 네 어떤 뜻인지는 여러분에게 전달되었으리라 보고 넘어 갑시다. 6절은, 우리에게 응답하시리라고 하는 해명이 뒤로 나오는 거예요. 의를 따라 위엄하신 일로, 엄위하신 일로, 엄청난 일로 두려운 일로 응답하신다고 하는 겁니다.

 

6.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그렇게 되어 있죠? 힘으로,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라고 해요. 그러니까 산은 주님의 힘이다. 그 얘기인 거죠. 주의 힘, 주의 권능, 그것이 산을 만들고 띠를 띤다고 그랬는데요. 이게 뭘까요? 산맥을 이야기 하는 걸까요? 산과 산을 이어진다고 볼 수 있죠? 허리띠를 이야기하는 건 아닐 겁니다. 이건 서로 연관되지 않게 되죠. 예, 산과 산의 연결, 이게 다 주의 힘으로 된 것이구요. 7절에는 바다를 이야기 하고 있어요. 산은 땅을 이야기 하는 거겠죠. 땅이 불쑥 올라오게 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누구냐, 주님이시다, 주님의 힘으로 그것이 가능했다고 하는 거구요. 바다, 이게 고대인들의 시선으로 폭풍, 파도,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도저히 그들은 어마어마한 힘 앞에서 큰 충격을 받지 않았겠어요?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그 모든 것들을 다 진정시킨다. 조용하게 한다. 예, 이런 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거죠. 어떤 정치적인, 어떤 물리적인 인간의 힘을 통해서 가능하진 않습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그렇게 될 때가 있는 거 같기도 해요. 어떤 때는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사람이 그렇게 하잖아요?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그런 힘들이 왕이나 정치 경제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조용해질 힘을 잃을 수 있는 거죠. 그러한 시각이 있는 겁니다. 이 시편기자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실이 이것입니다.

 

8.땅 끝에 사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예, 징조를 두려워한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하심 그 모든 것들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거죠. 공포는 아니에요.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해명해 낼 수 없는 사건들이기 때문에 참 사람이 그 앞에서 거룩한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요? 지금은 모든 것들이 과학적으로 해명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의 징조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에요. 아주 얄팍한 과학적 지식이나 인간의 이해에 근거해서에만 볼 때 그런 말들이 가능하지 심층적으로 볼 때는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 왜 그러냐 하는 것들을 일일이 제가 다 설명하지는 않겠어요. 이 자연이 얼마나 위대하냐, 그런 식으로, 그런 설명은 가능하지요. 그건 여러분들이 아실테니까 더 말씀드릴 필요가 없구요.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겁니다. 역사, 이 세계, 자연 모든 것들이 우연한 사건의 개입으로 진행된다고 하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 우연성이죠. 우연성, 네, 그 다음 요.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8절에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어요. 하나는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즐거움이에요.

 

그러니까 그 하나님은 무조건 두려움의 대상, 공포의 대상 공포와 두려움은 다른 건데, 아까 제가 설명했죠? 예, 두려움으로써만이 아니라 즐거움도 주시는 분으로 묘사 되요. 아침이 되고, 다시 저녁이 되고 그리되는, 그러한 하루하루가 지나는 것, 새로운 날이 되는 것, 이런 것들을 즐거워하게 하신다고 하네요. 우리의 어떤 일상에서 벌어지는 그러한 하나님의 손길을 절감하게 하는 거지요. 두 가지 개념이 여기 동시에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두려움과 즐거움 놀람과 기쁨, 절망과 희망이 서로 반대되는 것 같은 어떤 것들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 분 안에서 일치되고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느끼기도 하면서 동시에 즐거움으로 느끼는 거죠. 이 두 가지가 동시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경험하는 신앙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절부터 13절까지가 지난해의 풍요, 축복에 대한 감사에요. 그건 완전히 농사일에 많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후기에 나온 것들이죠. 고대로 올라가게 되면 다 농경생활이라기 보다 목축생활로 가 있어요. 시편에도 뭐, 목축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이스라엘은 원래 유목민들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농사짓는 전통하고는 직접 연관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안한 거에요. 나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거기 원주민으로부터 농사짓는 걸 배우면서, 하나님을 농사와 연관해서 많이 이해하기 시작한 겁니다.

 

9절부터 10절 보면 물이라고 하는 단어가 계속 반복해서 나오고 있어요. 물을 대 주신다. 땅에 물을 대 주시고, 하나님의 강에 물을 가득하게 하시고, 그래서 곡식을 주신다. 이건 자연현상에 나타나는 일들을 묘사한 겁니다. 그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하는 거지요. 맞는 이야기지요. 지금 우리들에게도 똑 같은 신앙이 가능한 겁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이시구요. 성령은 생명의 능력, 힘이니까요. 땅에 물이 적셔져서 곡식이 나오는 이 모든 것들이 생명의 과정들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이거는 농사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일인 거지요. 그러한 농사일에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이 시편기자가 하고 있는 거지요. 10절에도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시고 쭉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싹에 복을 주신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다 농사짓는 일들이죠. 농사일들이죠. 그런데 여기에 인제 물과 단비 이런 것을 통해서 먹을거리를 주신다고 하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신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글쎄 놀랍다고 하는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아주 깊은 신앙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참된 신앙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거는 늘 이 방식으로 농사가 잘 되면 이런 노래는 아닌 거에요. 이런 노래는 나 올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이런 노래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이런 거하고 다른 방식으로 어려운 일들이 있었기 때문인 거에요. 배고팠던 사람만이 한 끼의 식사가 소중함을 알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이 없어서 농사짓기 힘들고 기근이 들고, 그런 일들을 많이 경험한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한 해에 비가 적절하게 와서 풍요롭게 농사를 짓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찬양 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러한 삶의 수렁에서 나오는 깊은 믿음의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절, 점점 문학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요.

 

11.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금년을 관 씌우시니 한 해를 관 씌웠다고 하네요. 참 문학적으로 빼어나죠? 관을 씌웠다고 하는 것은 임금이 되게 했다. 영광을 씌웠다. 뭐, 그런 뜻들이 있을 텐데요. 한 해 동안 정말 왕처럼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도해 주셨다고 하는 뜻이겠죠. 예, 12절 13절도 그런 이야기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13절만 읽고 조금만 설명해 보지요. 초장은 양떼로 옷 입었고 옷을 입었다고 표현하네요. 이 사람들은 그러한 표현들이 많네요. 그들에게는요. 양떼로 옷 입었다고 하네요.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예, 사실 고대인들은 생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지금 이렇게 양떼로 옷 입고 곡식으로 골짜기를 뒤덮었다고 말하고 있긴 하지만, 이건 문학적인 과장법이 될 수 있어요. 한 해 동안 정말 굶지 않고 정말 배부르게 먹고 사는 사람들이 전체 백성들 중에서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특별하게 귀족출신들 이외에는 먹을거리로 고생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도 없을 겁니다. 우리나라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초근목피 한다고 하지 않아요? 예, 보릿고개도 있고요. 보리가 나올 때쯤 되면, 이미 양식이 다 떨어져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백성들은 굶기를 밥 먹듯이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지요. 이러한 시편노래만 놓고 본다면 이들이 굉장히 배부르고 기름지게 먹고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너무 궁핍했기 때문에 나오는 희망을 담은 찬양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최소한의 먹을거리를 허락하신 하나님 앞에서 감격스러워서 부르는 찬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실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살기 때문에 시편기자들의 찬양시가 그렇게 와 닿지 않을 겁니다. 욕심이 너무 많고요. 필요한 것도 더 많아 지지요. 참 인간이 이상한 거에요.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가지고 싶거든요? 우리가 성서를 통해서 전혀 다른 영적인 깊이를 배워야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우리의 영혼이 안식을 누릴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주 작은 먹을거리만 갖고도 상다리가 부러지게 늘 먹고 사람보다 훨씬 더 영혼의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영혼의 안식은 두 번째 치고 나는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예수 잘 믿고 물질적으로도 풍요롭게 살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글쎄요. 솔직하다고 할까요? 어리석다고 할까요? 그렇습니다. 영혼의 안식이라고 하는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65편 시편기자는 그러한 곡식, 양떼, 자연의 창조, 구원 이런 것 들을 찬양하면서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우리들에게 참된 안식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게 바로 4절 후 반절에 나와 있는 구절에 들어있지요. 그 말씀만 읽고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47 70편 녹취록-지체하지 마소서 file [1] 박은옥 2009-11-01 1560
46 69편 녹취록-천지가 찬송하리라 file 박은옥 2009-10-27 1677
45 68편 녹취록- 신앙의 세 가지 토대 file [1] [11] 박은옥 2009-10-01 1973
44 67편 녹취록-하나님의 빛에 휩싸임 file [5] 박은옥 2009-09-29 1714
43 66편 녹취록-주님으로 인한 기쁨 file [2] 박은옥 2009-09-19 1816
» 65편 녹취록-영혼이 안식할 토대 file 박은옥 2009-09-01 1429
41 64편 녹취록-여호와로 인한 즐거움 file 박은옥 2009-08-25 1537
40 63편 녹취록- 영혼의 갈망, 영혼의 만족 file [3] [1] 박은옥 2009-08-08 1942
39 62편 녹취록-영혼의 침묵 file 박은옥 2009-08-08 2057
38 61편 녹취록-땅 끝에서의 부르짖음 file 박은옥 2009-08-08 1402
37 60편 녹취록-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file 박은옥 2009-08-07 1512
36 59편 녹취록-주는 나의 요새 file [16] 박은옥 2009-08-07 1835
35 58편 녹취록-하나님이 계시다 file [4] 박은옥 2009-07-07 1306
34 57편 녹취록 -지존하신 하나님 file [2] 박은옥 2009-07-07 1262
33 56편 녹취록-사람이 내게 어찌하랴 file 박은옥 2009-06-13 1438
32 55편 녹취록-탄원의 영성 file [4] [16] 박은옥 2009-06-09 1716
31 54편 녹취록-주의 이름으로 file [2] 박은옥 2009-05-28 1284
30 53편 녹취록 -어리석은자 file 박은옥 2009-05-28 1720
29 52편 녹취록-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file [4] 박은옥 2009-05-01 1986
28 51편 녹취록-원죄와 구원 file 박은옥 2009-04-30 131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