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66편 녹취록-주님으로 인한 기쁨

조회 수 1816 추천 수 0 2009.09.19 01:53:22

시편 66편 강해-주님으로 인한 기쁨

시편 66편입니다. 조금 길군요. 1절부터 20절까지 있군요. 읽겠습니다.

 

1.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2.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3.하나님께 아뢰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말미암아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4.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 (셀라)

5.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6.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 우리가 거 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7.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 거역하는 자들 은 교만하지 말지어다 (셀라)

8.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9.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10.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11.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12.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 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13.내가 번제물을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으리니

14.이는 내 입술이 낸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

15.내가 숫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 (셀라)

16.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 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17.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18.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19.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

20.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 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아멘! 66편 이 시편 내용이 참 평화스럽습니다. 간혹 보면 어떤 시편에는 처절한 몸부림 같은 것들이 느껴지는데요. 오늘 여기에는 그런 것하고는 성격을 좀 다르게 하는 내용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평화롭지요. 1절부터 12절까지 하고요. 13절에서 20절까지 이게 둘로 구분됩니다. 두 개의 노래가 하나로 엮여진 것 같아요. 뭐,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고요. 그렇게 엮여야 서로 각각의 내용들이 살아나게 되지요. 그냥 우리가 쭉 읽어 가면서는 이 두 개의 내용, 혹은 단락이 어떻게 다른지는 쉽게 찾아보기 힘듭니다. 꼼꼼히, 그리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읽다보면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죠. 일단 큰 틀로 두 가지의 특징을 이야기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1절에서 12절은 하나님의 통치, 그리고 그의 구원행위에서 나타남, 혹은 거기서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위엄을 찬양하는 축제, 의식문의 모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제 표현이 딱딱하지요? 이 66편을 주석한 학자의 말을 제가 따라 가다보니까 그렇습니다. 풀어서 이야기 하면 이런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행위, 그 분의 세계와 역사에 대한 통치,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알 수 있거든요? 그것을 깊이 경험한 사람이 바로 이 시편 66편 기자거든요?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히브리어로 카보드라고 합니다. 그런 것들을 찬양하는 여러 싯구들을, 시구요, 문장들을 모아 놓은 거지요.

 

1절에서 12절까지 각 구절구절마다 그러한 내용들이 하나님의 카보드를 높이는 찬양이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읽으면서 어떤 사람들은 거리가 있다 그렇게 생각 할수도 있을 거예요. 내용들이 우리들에게 너무 익숙해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너무 똑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듣다보면 그 내용의 깊이를 놓치는 경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성서읽기도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질 위험성이 있는 거 같아요. 그게 성서읽기도 그렇고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이제 이런 말들을 생각 없이 툭툭 내 쏟다보면 그런 신앙언어가 주는 영적인 다이나믹 이런 것들을 놓치게 되는 거죠. 여기에 어떤 긴장감이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적인 언어들을 우리가 익숙하게 잘 내는 것은 또 중요한 문제들이에요. 사도신경을 우리가 주일 공동예배 때 마다 암송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공동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 안으로 들어 갈 수 있거든요. 함께 모여서 찬양도 하고 말씀을 같이 읽기도 하고 그러한 성찬예식도 하고요. 그러한 신앙적인 언어, 신앙적인 행위 이런 것들을 나누는 것은 반복적으로 지속하는 것은 매우 중요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신앙적 언어의 세계로 들어 갈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게 습관적으로 반복되어 버리면, 오히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게 참 어려운 문제에요. 그 경계가 뭐냐, 겉으로 보면 비슷한 거지요. 현상적으로 보면 비슷합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하는 이러한 반복적인 신앙형식은 똑 같은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우리들의 신앙의 본질로 들어 갈 수 있는 통로가 될 수도 있고, 혹은 그것을 막는 담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성서읽기에서도 우리가 까딱 잘못하면, 말씀들이 오히려 그러한 성서읽기가 말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방해거리가 될 수 있는 거지요. 예, 그걸 어떻게 우리가 방해 받는 쪽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과 일치될 수 있는 그 길로 갈수 있는 길인가 하는 질문이 가능하지요. 그것을 제가 정확하게 말씀 드리기는 힘듭니다. 각각 다르기 때문에요. 그러나 일반적인 그러한 차원에서 말씀 드린다면, 생각 없이 하는 습관을 버려야죠. 생각을 해야 지요. 사도신경을 같이 암송하면서도 그 내용을 같이 생각하고 같이 목소리를 내는 청중들의 소리도 듣고요. 그렇게 해야 되지요. 집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중력이죠. 뭘 하더라도 집중력을 가지고 해야 됩니다. 운동에서도 마찬가지잖아요. 똑같은 연습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거기 집중력을 가지고 하는 거하고 형식적으로 하는 거하곤 조금 세월이 가면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납니다. 모든 것들이 그런 메카니즘(mechanism)이라고 할까, 그러한 성격이라고 할까요? 그런 게 있지요. 예, 여기에 경배, 영광 찬양 뭐 기뻐하라, 송축 한다 이런 말들이 반복해서 나오거든요? 그런 것들을 우리가 집중해서 이해하고 공부하고 또 그것을 밖으로 드러낼 때마다 그 언어와의 만남을 경험하게 되면 이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거죠. 그게 없이 지속되면, 그건 완전히 의미 없는 말들, 장광설(長廣舌) 그런 것으로 떨어 질 염려가 있죠. 예,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잘 못된 길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단어, 문장 이런 것의 깊이로 들어가는 훈련이죠. 네, 그게 1절부터 12절까지 정말 가장 중요한 신앙생활 태도에 대한 설명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절에서 20절은 그러한 것을 전제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밖에 없는 이 시편기자의 심정을 여기에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았다 하는 신앙고백도 하고 있고요. 네, 오늘 어느 구절부터 말씀을 볼까요? 뭐 일반적으로 본다면, 1절부터 쭉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거꾸로 보는 방법도 있고요. 중간부터 시작하는 방법도 있고요. 그거 뭐 자유롭습니다. 어느 쪽을 통해서 가거나 우리 시편 66편이 얘기 하려고 하는 그 중심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그거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은 조금 다른 때와 구분해서 중간에서 시작해 보죠. 말씀을 읽다가 확 와 닿았기 때문에 개인에게 말이죠? 그 말씀부터 시작할까 합니다. 6절이에요. 읽어 보겠습니다.

 

6.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기뻐하였도다 라고 하는 말에 강조점이 있는 거죠. 시편기자가 거기다 강조점을 두었다기 보다도 읽는 제가 그러한 강조가 되는 것으로 받아 드렸다고 하는 겁니다.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이게 찬양이잖아요? 찬양은 기쁨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주로 말미암아, 주, 하나님이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다. 우리가 많이 듣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신앙의 단계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참 좋겠지요? 그리고 당연히 그래야만 되겠죠? 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하는 말은 낱말 뜻이야 알 수 있지요. 쉽죠. 하나님으로 우리가 늘 기뻐한다 우리가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지 않습니까?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이런 말들도 더 복합적인 관계 속에서 더 깊이 이해를 해야 되는 거에요. 이게 그러니까 모든 신앙적인 문장이라고 하는 것이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포괄적이구요.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걸 우리가 이해해야 되는데, 좀 어려운 점이 시편기자 글 쓴 사람이 어떤 의미로 그것을 썼는지를 정확하게 이해를 해야 하는데요. 그게 어렵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다 말로만 나타내는 데는 한계가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말을 할 때, 말을 하기 위한 성서기자의 앞서의 경험이 있는 거에요. 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말로 다 풀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건 우리들의 일상의 경험에서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둘이 사랑의 마음을 편지나 시로 표현한다고 해 봅시다. 얼마나 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그걸 제 3자가 읽는다고 해 봅시다. 제3자가 그 마음을 어느 정도나 따라 갈수 있겠어요. 하나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 보다 더 근원적인 거기 때문에 성서기자들이 아무리 정확히 표현해 내려고 했다 하더라도 제 3자가 그대로 이해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 시편이 얼마나 오래 되었어요? 신약의 편지들도 마찬가지구요. 2천년,3천 년 전 시대의 그들의 어떤 삶 자리에서 자기들의 언어로 표현한 거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 이렇게 시간적으로도 큰 차이가 있고 지역적으로도 전혀 다른 문명권에 사는 우리가 이해한다는 게 쉽지 않은 거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성서 말씀을 우리가 전혀 따라 갈수 없는 뜻이란 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어요. 그리고 바르게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조금 더 가깝게 갈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성서 말씀을 너무 지나치게 도구적으로 사용해서 정말 말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제가 지적할 뿐입니다.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주가 누군지를 우리가 따라 가야 되겠지요. 주, 주님, 하나님 아닙니다. 시편기자가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거지요. 하나님이야 구약성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냐, 생각할 수 있겠죠?

 

예, 구약성서가 말하는 주님이 하나의 색깔로 되어 있진 않습니다. 각양각색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전쟁 신처럼 묘사도 되잖아요? 원수를 증오하고 다 박멸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하나님을 오늘 우리가 오늘 우리가 그대로 받아 드리긴 힘든 거 아니겠습니까? 특별히 신약시대에서 전혀 다른 하나님 경험이 가능한 거예요. 예, 이 말은 좀 교정해야 하겠네요. 전혀 다른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제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려고 하다가 말의 실수가 있은 거 같아요. 구약시대에는 아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경험을 한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미 그 이후를 살고 있단 말이예요. 율법시대가 아니라 복음시대잖아요? 약속의 시대를 넘어서 약속의 성취를 보는 사람들 아니잖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구약성서의 하나님 이해와 신약시대에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이해 사이에는 완전한 단절은 아니지만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도다 할 때 도대체 주가 누구냐 하는 거죠. 원수를 다 때려 없애고 가나안을 정복하게 해 주셨기 때문에 그 때문에 기뻐한다고 만일 그렇게 생각을 했다면 오늘 우리가 그걸 받아드리기가 좀 곤란한 거거든요. 예, 우리가 다른 때도 말씀 드렸습니다마는 성서구절을 이해할 때 그 한 구절만 갖고만 이해하면 한계가 있습니다. 부분과 전체의 해석학적 순환이 필요한 거죠. 해석학적순환요. 이 한구절한구절은 성서 전체 그리고 기독교 신학 전체 안에서 해석되어야 되는 거지요. 그리고 이 문장은 전체 한구절한구절에 의해서 또 토대가 잡혀져야 하구요. 예, 그렇습니다. 예,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하는 이 한 구절을 우리가 이해하려고 하더라도 신론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거죠. 성서론에 대한 공부도 필요하고요. 옆으로 많이 나가지 않고 본문을 좀 잘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참 귀한 말씀이죠. 이 말은 주님 아닌 것으로는 기뻐 할 수 없다 그것이 전제되는 겁니다. 그럴 때만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만 믿는다는 말은 곧 하나님 이외의 것들은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말로만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구요. 아주 실질적으로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만 믿는다고 맨 날 자랑스럽게 쏟아내지만, 의식의 세계에서 혹은 무의식적으로 사실은 이 세상의 물질을 더 믿는 경우가 많지요.

 

가나안 땅의 신들은 다 그러한 요구에 대한 반대급부에서 나온 신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이러한 우상들 말입니다. 회개망측하게 생겨서 우상이 아니에요. 오히려 매혹적인 거예요. 그들은 적절하게 농사를 잘 지어서 풍년이 들고 그리고 자식들을 많이 낳고 그러한 삶을 보장해 주웠던 신이었던 겁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자본주의 이게 바알과 아세라하고 틀린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럴듯한 거예요.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혼합주의 그들과 많은 영향 받지 않습니까? 예언자들은 가나안 사람들과 결혼도 하지 말고 상대하지 말라고 엄금,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만 믿는 믿음을 혼란스럽게 만들 염려가 가나안에 우상숭배였기 때문인 거지요.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는 기뻐하지 않는다, 기뻐할 수 없다 그 이야기를 전제하는 겁니다. 이게 쉽지는 않는거죠. 그러나 이게 바로 구원받는 길입니다. 왜 그런지 제가 이 자리에서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는거죠. 한 마디만 하면 그렇습니다. 그 이외의 것들은 다 유한하기 때문에 그리고 절대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결국은 거기서 기뻐 할 수 없는 거예요. 지속적인 기쁨을 발견할 수 없는 겁니다. 때에 따라서 계속 뒤바뀌는 겁니다. 기쁨이 컸다면 실망도 크게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다 그렇습니다. 우리 자식이 공부를 잘한다거나, 사회에서 출세한다거나 사회적인 어떤 업적을 남겼다고 하는 그런 것은 기쁜 일들이죠? 그렇습니다. 그런 것 마저 우리가 나 몰라라 하고 살수는 없지 않습니까 인간 삶이 그 안에서 즐거움을 갖는 거죠? 그러나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우리들에게 참된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식들을 또 실망시킬 수도 있고 사회적인 업적을 얻어서 명예를 얻게 되면 금방 땅에 떨어질 수도 있고요. 뭐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늙어 죽음으로써 그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지게 되거든요? 그런데에 애착이 많을수록 죽음을 받아 드릴 수 없습니다. 어쩌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과도한 애착, 혹은 애착 이런 것들은 최소화하는 삶의 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거를 나이가 들면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이가 들수록 노역이 생깁니다. 그러면 죽음을 바로 맞지 못하는 거지요. 모든 것들을 가능한대로 손에서 놓고 그 욕망 좋은 뜻이든, 아니든, 그러한 욕망, 그건 나쁜 뜻으로만 쓴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그걸 꼭 이해하셔야 해요.

 

이건 애로스적인 거거든요? 이 문명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거든요? 그런 것 때문에 이 문명이 발달해 왔습니다. 정신적인 물질적인 그러한 문명이 다 그러한 욕망이죠. 말하자면요. 애로스적인 욕망입니다. 예, 그러한 것들을 세월이 가면서 하나하나 접어 놓는거죠. 나중에는 모든 이 세계 있는 것들을 홀가분하게 떨쳐 버리는 순간 그게 죽음의 순간이죠. 아, 그 순간까지 내가 무엇을 못했는데, 무엇을 더 하고 싶은데, 죽음의 문턱에서 말이죠. 아,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데, 뭐, 이런 것에 빠져 있다면, 그건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살아 있을 때, 이미 죽음의 순간, 죽음과 죽음 이후의 순간 거기에 들어간 자세로 살아 가야할 필요가 있는 거지요. 사실은 그게 기독교 영성이기도 합니다.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이러한 단계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의 영적인 안목이 피조물 안에서 일어나는 그러한 것들을 넘어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통치에 가 닿아 있는 거지요. 이런 표현들이 얼마나 여러분들에게 확 와 닿는지 모르겠습니다. 예, 오늘 여기 6절에서 이 사람은 그 자기 기쁨의 이유가 하나님의 구원통치에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했어요. 바다가 육지가 되고 걸어서 강을 건넜다, 나오죠? 이건 홍해사건하고 요단강 건너는 사건입니다. 모세에 의해서 홍해가 갈라지고 여호수아에 의해서 요단강이 갈라졌잖아요? 예, 그러한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에게 이 시편기자가 자신의 영혼의 포커스를 맞춘 거지요. 그것을 생각하니까 그거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 그래서 1절에서 12절까지 계속해서 그러한 기쁨 찬양, 그런 것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이렇죠?

 

1.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2.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예, 즐거운 소리를 내고 찬송하고 예, 계속해서 3절도 계속 그러한 이야기들 심지어 원수도 주님께 복종한다 예, 4절에 이래요. 4.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 (셀라) 예,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 이런 것들은 우리 찬송에도 많이 나와서 부를만한 내용들입니다. 네, 이런 것들은 처음에 제가 말씀 드렸듯이 아주 실질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부르면 조금 우스워지는 거예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느낄려면 알아야 되잖아요? 알지 못하고 어떻게 느끼겠습니까? 그런데 보세요. 온땅이 주께 경배하고 이 말을 얼마나 알겠어요? 일반신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알고 있을까요? 온 땅이 주께 경배한다, 또 주를 노래한다 주의 이름을 노래한다 이런 식의 표현들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쉬운 예를 들어 볼까요? 매일처럼요. 우리들이 돈버는 것만 생각하고, 자기 가족들이 여기서 수능시험 봐야 되고 시집장가 보내야 되고 그래서 청첩장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런 걸 누구에게 보내야 되고 뭐, 등등 그런거 많이 있잖습니까? 그게 세상살이에요. 다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거기에만 빠져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온 땅이 주께 경배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영적인 어떤 관심이 오로지 땅을 사고 장가보내고 등등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죠? 왕이 잔치를 베풀고 초청장을 보내는데, 실제로 사자를 보내니까 이런저런 핑계대고 오지 않았다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 일상에서 벌어진 일들이 우리들에게 소중한 일이긴 하지만 거기에 뒤범벅이 되어서 말이죠. 그러한 것에 만 온통 영혼이 팔려 있는 사람들에게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이런 말들이 대체 들어 올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아침에 눈 뜨면서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에 놀랍게 감격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거든요? 아, 이 지구 안에 여전히 산소가 있어서 숨을 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것, 이것도 또한 알아야 되는 거구요, 인식해야 되는 거구요. 이런 부분들이 있는 거지요. 그냥 겉으로 봤을 때에는 돈 있는 사람이 잘 되고 힘 있는 나라가 그 힘을 행사하는 것 같고, 의로운 사람들이 고난 받는 거 같기도 하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러한 일들이 여기에서 많이 벌어지고 있잖습니까, 악이 더 많아 진다거나 그렇잖아요? 그래도 하나님의 구원통치가 그러한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세상을 뚫고 개입되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되거든요? 그런 영적인 인식이 이게 쉽냐,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그걸 얼마나 하고 있느냐, 문제입니다. 그러한 시각이 열리지 않으면 우리는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와 같은 이런 찬양을 이해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런 노래를 찬송가를 흥에 겨워서 부른다고 하더라도 그건 자기도취에 불과한 거예요. 네, 고 대목에서 한 말씀을 더 보충해야 되겠네요. 여기서 찬양하잖아요? 경배하라, 노래하라 찬양하라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이런 찬양의 참된 목적은 뭐냐하면 낭만적인 것, 자기도취 뭐 그런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통치에 대한 찬양이죠. 물론이요. 그 이야기인데요. 그런 찬양을 부르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 하나님의 구원통치가 지금 여기에 현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거죠. 요 66편을 해석한 성서학자의 표현을 제가 빌리는 겁니다.

 

이러한 찬양의 참된 목적은 하나님 통치의 영원한 현재에 있다,” 그렇게 설명하더군요. 참, 옳다고 봅니다. 정확하게 봤구요. 여기서도, 제가 다른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저도 했습니다마는 다시 한번 더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승리,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통치 이런 것들은 미래에 어떤 때 막연히 이루어 질거다 하는 그러한 게 아니라 오늘 여기에 현재 속에 영원한 현재가 지금 여기에 임하고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한 신앙이며, 송축이죠. 찬양이죠. 그래서요. 어려운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찬양할 수 있는 거예요. 왜 그런지 아시겠죠? 이런 시련과 고난도 이미 하나님 통치의 영원한 현재이니까요.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까? 이 고난과 시련, 오늘 여기 10절에서도 시험 단련, 그런 이야기를 해요. 11절에서도 그물, 짐 그런 이런 얘기를 하고요. 12절에서 불과 물을 통과했다, 이런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련과 고난 이런 것들은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숨겨있는 은혜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의 구원통치가 함께 하지 않는 때는 없는 거예요. 다만 그것이 드러나느냐 아니면 아직 감춰져 있느냐 그런 차이인 거지요. 드러나 있는 경우는 홍해나 요단강이 갈라졌다고 한다든지 그런 방식이라고 한다면 아직 숨겨 있다고 한다면, 고난 시련 이런 것들이죠. 결국은 어떤 방식이든지 모든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하나님의 구원 통치다 그 얘기죠. 시편기자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를 노래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그러한 시편기자의 영성이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보시나요? 어느 편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아, 지금 억울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아냐, 그러한 문제제기거든요?

 

태어나면서부터 극심한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들 앞에서도 하나님의 숨어 있는 은혜의 역사, 이런 것을 말할 수 있느냐, 그러한 질문인거죠. 예, 그렇습니다. 그게 어려운 문제지요. 그러한 경우에 쉽사리 하나님 은혜 운운하면서, 어떤 특별한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그 고난을 가볍게 처리하는 것은 잘못된 거죠. 그건 다른 관점의 문제입니다. 그런 고난과 시련을 당한 사람들과는 우리가 연대해서 그런 것들을 이겨나가도록 길을 찾아야 되는 거죠. 거기서도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니까 받아드리라 이런 식으로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차원, 궁극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그런 시련을 딛고 일어섰을 때에, 자리에서 볼 때 우리가 겪었던 모든 시련과 아픔들 이런 것들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런 신앙고백이 가능한 겁니다. 그건 아주 실제적인 것 이구요.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궁극적 섭리를 믿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특별히 신약시대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 아니겠어요? 죽음을 완전히 이긴 부활이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구원사건이 이미 역사 안에서 선취 되었고, 종말에 완전히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면, 그 과정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도 역시 궁극적 부활 생명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하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다시 말씀 드립니다. 인간의 극심한 고난과 시련을 이렇게 값싼 몇 마디 말로 포장해 버릴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건 우리가 감당해야 될 짐이죠. 예, 우리는 역사가, 인류의 전체역사와 우주 역사가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구원의 세계로, 참된 생명의 세계로 나가고 있다, 그걸 전제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 그 두 가지의 충돌되는 부분이 좀 해결 되셨나요? 실제적인 극심한 아픔과 그러나 그 것 마저 넘어서는 하나님의 궁극적 생명에 대한 희망, 기다림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신앙 안에서 아주 건강하게 연결 되야 되겠지요. 네, 오늘 66편 각 구절을 다 설명하지는 않았습니다. 핵심적으로 중요한 한 구절을 중심으로, 몇몇 구절을 거기 보충하는 정도로 끝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한 말씀 드리고 마쳐야 되겠군요. 그거는 핵심구절 바로 그겁니다.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이 말씀이에요. 이 시편기자가 말하는 이 신앙의 경지로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더 올라가 봅시다. 마치겠습니다.

 


[레벨:12]harris

2009.09.19 17:04:00
*.151.112.164

저는 인쇄버튼만 눌러도 되지만 라라님은,,,,,.

나중에 "너 뭐하다 왔니?" 물으시면 "네,저는 인쇄만 누르다가 왔습니다"잘 했느니라?,,,

라라님,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38]클라라

2009.09.19 20:57:02
*.234.41.70

안녕하세요? 해리스님,

햐~! 제 시편녹취록 팬이 계시니까 불뚝불뚝 힘이 솟는걸요?

한참 웃다가 어떤 분일까? 마구 궁금해졌어요^^

저 이러다, 필 받아서 하루에 시편 한강씩 녹취하겠다고,

목사님께 떼 쓰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헤헤.

글구, 문단은 제 임의로 문맥과 상관없이 대강 짜르는데,

읽으시다가 아니다 싶으시면, 지적해 주세요.

격려 말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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