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67편 녹취록-하나님의 빛에 휩싸임

조회 수 1713 추천 수 0 2009.09.29 20:28:35

시편 67편 강해-하나님의 빛에 휩싸임

시편 67편입니다. 1절부터 7절까지 읽겠습니다.

 

1.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2.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3.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4.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

5.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6.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7.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아멘! 이 67편의 특징이 몇 가지가 있는데요. 우선 다른 시편에서도 발견하는 것이지만, 똑같은 구절이 반복되서 나오고 있습니다. 3절과 5절이에요.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똑 같지요? 그렇다면 이 3절과 5절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 67편의 주제일까요?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게 하나의 특징이구요. 그게 주제인가 하는 것도 천천히 우리가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게 주제라고 한다면 그 근거가 무엇인지 아니면 또 다른 속사정이 있는지 그런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또 하나의 특징은 앞부분에서는 그 하나님에 대한 찬송, 이런 것들이 주로 나오고 있는데, 5절까지 지요. 6절부터 조금 내용이 다른 거예요. 물론 다르다고 말하기는, 그렇게 정확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형식적으로 혹은 그 본문이 우리들에게 주는 뉘앙스가 좀 다른 거지요. 6절은 어떤 추수, 농사짓고 난 뒤에 얻어진 그런 결과에 대한 것을 배경으로 놓고 하는 거 거든요.여기 67편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같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우주론적인 찬양이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는 농사를 짓고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는 그러한 삶의 과정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찾으려고 하는 것들이죠. 예, 그 두 가지가 구별된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제가 이것을 딱 부러지게 구별되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두 가지, 조금 다른 색깔들이, 신앙적 경향들이, 혹은 다른 신앙적 동기들이 있기 때문에 말씀 드린 거예요. 그걸 조금 더 설명을 하고 넘어 가야 되겠습니다.

 

구약성서 기자들은 두 가지 신앙의 흐름 안에서 그 신앙을 표현해 보려고 했습니다. 하나는 자기들의 조상과 맺으신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약속의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조상과 이스라엘 민족전체를 구원하신다고 하는 그러한 약속입니다. 그게 기본적으로 뿌리에 있는 거구요. 다른 하나는 가나안 땅에서 얻게 되는 그 농경적인 그러한 삶에서 습득된 하나님에 대한 신앙입니다. 이러한 농경적인 그러한 삶에서 얻어지는 신앙은 나중에 오는 거지요. 처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조상들과 맺으신 약속이라고 하는, 거기에 있습니다. 예, 설명이 충분하지 않은 거 같은데, 그래도 어떤 걸 전하려고 하는 지 전달되었다고 보고요. 1절부터 7절까지 별로 길지 않은 말씀인데, 바로 여기에는 지금 말씀드린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두 가지 요소들을 안고 있으면서 그러한 것들을 정확한 신앙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어요. 중요한 그리고,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가에 의해서 기록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부터 천천히 보겠습니다.

 

1.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신다 예, 그러한 하나님, 그러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끌어내신 바로 그 분이시지요. 이 시편기자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 그런 경험을 갖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은혜를 베푼다고 할 때에 그 은혜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우리가 더 많이 생각해 봐야만 되는 거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간단하게 은혜라고 하는 낱말로 이러한 시편기자의 이러한 신앙을 다 이해 할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가 어떤 관점에서 은혜를 이야기 했느냐 하는 것을 촘촘히 따져 봐야 되겠지요. 그것이 여기에는 기록되지는 않았어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제하는 거지요. 어떤 걸까요? 애굽을 탈출하는 그 이야기일까요? 바벨론 포로로부터 돌아온 것일까요? 어떤 것일까요? 아니면 개인적으로 인생을 살면서 경험 하게 된 어떤 근원적인 생명에 대한 체험일까요? 그런 것들을 우리가 더 많이 더 따라가 봐야 되겠지요. 이렇게 가을날에 내리 쬐이는 햇살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 할 수 있는 통로가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다고 하는 거예요. 이러한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려면 개인의 삶과 민족의 삶과 그리고 인류전체의 삶의 어떤 진면목을 뚫어 볼 수 있어야 되겠지요? 겉으로는 은혜라고 말할 수 없는 것들도 많이 있잖습니까? 오늘 저는, 우리 교우 중에 한 분이 상을 당해서, 대구샘터교회요. 상을 당해서 장례 예배를 드리고 또 장지까지 갔다가 모든 과정을 마치고 돌아 왔습니다. 이게 참 딱한 일이었어요. 젊은 여자 분인데, 중학교 일학년과 초등학교 고학년 되는 두 아들을 두었구요. 남편이 뺑소니 차에 의해서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할 말은 없죠. 어떻게 위로 할 수 있겠어요. 은혜라고 하는 말은 붙일 수 없는 거지요.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삶에는 도저히 우리가 받아 드리기 힘든 그러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야기 할 수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거든요. 어쨌던 우리는 오늘 여기의 시편기자의 영적인 깊이를 따라 가려고 하면서 그 의미를 좀 찾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러한 어려움들이 있는 거예요. 성경말씀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바로 그런 어려운 점이죠. 여기에는 어떠한 신앙인의 높은 신앙의 경지가 담겨 있는데, 그러나 현실적인 우리의 삶에서는 직접 연결이 힘들 때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 두 개를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문제에요. 어떻게 보면 이러한 성서가 말하고 있는 신앙은 이상적이고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거예요. 그런 것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해야 된다고 도덕군자처럼 말 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러한 틈, 그 차이를 메꾸는 작업이 성서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되요. 이것은 참 특별히 학문적으로 성서를 해석하고 마는 게 아니라 설교라든지 뭐 그런 차원까지 가기 위해서는 이건 참 어려운 작업인 것 같습니다. 억지로 그것을 풀어내기 보다도 억지로, 우리 삶에 적용 시키려고 하기 보다는 청중들, 혹은 대상되는 사람이 성서세계를 맛 볼수 있도록 작은 문을 열어 주는 것으로 끝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 너무나도 교과서적이고 당위론적인 진술인데, 이것이 우리들의 삶을 역동적으로 끌어 갈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 와야 되거든요. 이게 우리들의 숙제입니다.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시사, 이렇게 기도하고 있어요. 요 1절만 갖고도 우리가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3가지 단어가 핵심적으로 나오지 않습니까? 은혜, 복, 하나님의 얼굴빛이에요. 그리고 그것에 따르는 동사들도 조금 다르네요. 은혜는 베풀어 주는 거고, 복은 주시는 거고 얼굴빛은 비춰주는 거예요. 세 가지 서로 다른 용어들이 여기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신앙에 대한 중심이 뭐냐 하는 것이 들어 있는 거죠. 여러 각도로 볼 수 있습니다마는 여기서는 한 가지만 말씀드릴께요. 복을 받는 다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얼굴빛을 만나는 거다 할 수 있어요. 바로 앞에 나와 있는 은혜도 똑 같구요. 은혜를 받고 복을 받는 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빛에 비추임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적인 표현은 아니지요. 하나님의 얼굴의 빛이 있겠어요. 그건 메타포여요. 그런 어떤 형상으로 만들 수 없는 존재를 빛이라고 하는 용어를 통해서 은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거지요. 결국 하나님의 빛, 진리의 빛, 생명의 빛, 이 빛 속에 들어가는 것이 은혜이고 복이다 라고 하는 거지요. 놀라운 시각이죠? 우리가 물론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정말 소중한 것이기도 하지요?

 

6절, 앞에서 말씀드렸는데, 추수 농산물, 먹을거리 이런 것들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정말 복된 거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긴 있어요. 그러나 일종의 자연 종교거든요? 그런 것들은 자연종교라고 합니다. 자연이 바로 신처럼 되는 거지요. 그러한 요소들이 자연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이런 것들이 앞서 말씀 드렸던 대로 가나안땅 원주민들과의 관계에서 이 유대인들이 영향을 받은 요소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끊임없이 극복해 보려고 했어요. 그러한 요소들은 고대인들에게 정말 중요한 요소였었구요.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식투자해서 많이 얻는 것, 그리고 연봉 많은 회사에 직원으로 가는 것, 그리고 기업을 해서 장사를 잘 해서 얻어 내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풍부하게 해서 소출을 많이 얻는 것과 똑 같거든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지금 우리들이나 사실은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라든지 그것에 대한 이해는 거의 다를 게 없습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풍부하게 얻으려고 하는 그러한 생각들이 있는 거지요. 이런 것에서 인간이 어떻게 벗어 날수가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에게도 계속 그것이 있었던 거고요.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끊임없이 우상숭배 했고 말이죠.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생필품, 필요한 것들, 소유 이러한 것들을 아주 확실하게 보증해 준다는 신앙에서 출발한 것들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나쁜 게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정말 생존의 필요한 것들을 준다고 하는 거니까 이건 뭐 옳다 그르다의 차원보다도 이건 필수적인 요소였어요. 우리나라에 지금도 민간신앙에 많이 나타나고 있듯이 기업체를 시작하면서도 돼지 머리 삶아서 올려놓고 어떤 축원을 바란다거나 고사를 지낸다거나 그런 것들이 다 이 땅에서 풍부하게 먹고 살자고 하는 그러한 인간의 가장 자유스러운 본능을 충족시키는 거 아니겠습니까? 성서기자들은 끊임없이 극복하려고 했었던 거예요. 그걸 무시할 수는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가 일용할 양식 먹고 살아야 될 것 하고 아무 상관없는 분이라고 말하진 않았어요.

 

그러나 거기에 묶이는 것을 넘어서는 거예요. 여기에 긴장이 있습니다. 그 긴장감을 유지하지 못하면, 기독교 신앙은 순식간에 우상숭배로 떨어지고 되는 거죠.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끊임없이, 끊임없이 우상 섬기게 된 것이 바로 이 긴장감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긴장감을 놓친다고 하는 것은 한 쪽으로 치우쳐 버린다고 하는 거거든요? 특별히 이런 소유, 생산, 생필품 이런 것들은 매력적이고, 매혹적이고요? 아주 강력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긴장감을 놓치면 금방 거기에 휩쓸리고 맙니다. 기복주의 신앙이라고 흔히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결과인 거예요. 인간의 일반적인 삶에서도 마찬가지구요. 이스라엘의 구약 예언자들, 성서기자들은 하나님들이 그런 것들을 책임져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또 끊임없이 그것을 넘어서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 하나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그것이 복이다, 그것이 은혜다 그것이 우리가 구원 받는 길이다, 그거죠. 1절이 바로 그러한 고대 유대인예언자들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2.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이 시편기자의 신앙의 차원은 개인의 복과 화 의롭고 불의한 것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렇게 확장되어 있어요. 모든 나라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닌 모든 나라에 하나님이 참된 복이시고 은혜를 주시고 그리고 그 분의 빛을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이제 알려 주소서,이렇게 기도하고 있잖아요? 개인과 자기 민족 신앙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적인, 우주론적인 그러한 신앙으로 나가고 있죠. 이런 신앙들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시면 안되요. 다른 나라에 가서도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로구나, 그렇게 소박하게 받아 드릴 수도 있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차원에 머물러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이 사람의 영적인 경지는 하나님은 자기 이스라엘 민족들이 섬기는 방식으로만 경험되는 분이 아니라 훨씬 더 다른 민족에게 임하는 방식으로도 경험되는 그러한 분이다라는 데까지 나가는 거지요. 3절도 그 이야기를 그대로 하는 겁니다.

 

3.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모든 민족들을 다 유대교인으로 만들자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셔야 되요. 그 이방민족들은 잘 모르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들에게 참된 하나님이 드러나고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4절을 마저 보세요. 4.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온 백성이라고 하셨어요.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 하나님을 찬양해야 될 그 이유 중 하나가 여기서 설명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민족들을 공평이 심판하신다. 무슨 뜻일까요? 공평하게 심판하신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기쁘게 노래할 이유가 된다고 하는 거지요. 하나님이 정의롭게 옳고 그른 것을 잘 판단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억울하지 않게 하고, 뭐 그러한 일들 정의를 일으켜 세우는 거, 그런 심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런 것 하고 완전히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차원하고는 좀 다른 겁니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는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자꾸만 내 입장에서 내 생각대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을 정의롭다고 생각하잖아요?

 

좀 직접적으로 얘기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만 딱 옳게 받아서 구원시키시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정의다 생각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는 그러한 하나님의 배타적인 능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후반부에서도 마지막 때에 일어날 묵시적인 심판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잖아요? 오른편으로 가야될 양과 왼편에 가야될 염소처럼요. 사람들이 이제 심판을 받게 되는데 당연히 오른편으로 가야 될 거라고 기대한 사람이 왼편으로 가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 오른편으로 가지 않습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반론을 피잖아요? 그것이 말하려고 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이 우리의 기대와 전혀 다르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이에요. 그럼 지 맘대로 하겠다는 거냐, 하나님이 독재자냐,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참 곤란합니다. 사람은 참 자기 주제만큼 생각한다고요? 약해요. 생각하는 틀이 고정되어 있어가지고 그런 방식으로는 도저히 우리가 하나님을 혹은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을 따라 갈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우리 인간의 인식을 뛰어 넘어 생명이 중심이 되는 그런 심판을 하신다. 이것으로 온 백성이 기쁘고 즐겁게 노래하게 된다, 그러한 기대를 안고 이 시편기자가 노래하고 있습니다.

 

5절은 3절의 반복이에요. 모든 민족들이 주님을 찬송하게 하소서 라고 합니다. 우리도 그런 기도를 드려야 마땅하지요. 이걸 좀 다른 말로 바꾸면 이렇게도 할 수 있겠지요? 모든 타 종교인들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소서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 기독교인들과 다른 방식으로 종교생활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찬송을 받아야 된다, 그래야 마땅하다고 하는 기도겠지요.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제가 종교다원주의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그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론적 범주 안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분이라는 사실에 대한 근원적인 신앙고백인 거에요. 이걸 전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독선으로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십자가와 부활이 단지 교회 나오는 사람들만 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허무하고 협소합니까? 네, 그러한 우주론적인 신앙을 바탕에 두면서도 성서적 전통에서 우리가 배운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 그것도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교회 나오는 사람만이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에게까지도 구원론적인 힘으로 작용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교회 다닐 필요도 없고 기독교적인 영성에 심취할 필요도 없지 않느냐고 얘기 한다면 참 어리석은 사람인 거에요.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이렇게 노래하는 시편기자의 신앙을 따라 갈수가 없습니다. 모든 민족 다른 종교인들까지 주를 찬송하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 이런 신앙고백은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약화(弱化)가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심화(深化)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어떻게 그 신앙이 심화 될 수 있겠습니까? 이거는 이제 기독교적 신앙, 성서적 신앙을 잘 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 깊이로 들어 갈수록 배타적으로 되고 독선적으로 되잖아요? 예수구원 불신지옥이라고 하는 그런 슬로건만 무조건 내 걸고 거기에 열광적으로 매달리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아닌 거예요. 그건 바로 우리 길은 아닌 거지요. 성서가 말하는 고유한 신앙의 깊이로 들어감으로써 온 인류의 구원을 향한 영적시각이 열린다고 하는 겁니다. 네, 그 다음 6절은 67편의 배경이 됩니다. 추수를 마치고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는 그 상황이 바로 67편의 배경이에요.

 

6.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다 요런 표현은 가나안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거지요. 딱 그렇다고 지금 끊어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열어 두는 거지요. 왜 제가 그렇게 말씀 드리냐 하면 이 성서적 신앙은 자연, 땅이라고 그랬잖아요? 자연 강산, 이런 자연 이러한 것들의 놀라운 힘들을 알고 있어요. 가나안 땅에 원주민들이 섬기던 그러한 자연 종교의 신들은 바로 그것 안에 파묻혀 있습니다. 참 놀라운 능력들이니까요. 자연이 주는 능력은 참 그렇습니다. 그러한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신앙이 바로 구약성서가 이야기 하려고 하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인 거지요. 아, 그런 것들이 이 6절에 섞여 있어요. 땅이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까 그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 거다, 결국 관심은 하나님인거죠. 이게 우리 신앙훈련, 혹은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어떤 것을 시사해 주고 있어요. 땅이 내는 소산, 이건 아주 구체적인, 실증적인 거에요. 아주 확실한 거지요. 이것에 비해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는 것은 조금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들립니다. 입에 붙어서 말은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복이다, 복이다, 하나님은 복을 주셨다고 말은 하지만 그 말하는 그 순간에 혹은 그 내면에는 땅이 내어준 소산 여기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작용할 수 있는 거예요. 땅이 소산을 내 주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셨다고 실질적으로 고백할 수 있을 때 이러한 신앙이 가능한 거지요.

 

그런데 과연 그런가 우리들의 신앙이 과연 그런가, 그건 정말 되돌아 봐야 됩니다. 반성해야 됩니다. 사람은 참 약삭빠르거든요? 이 언어의 기교 속에 숨어서, 종교적 신앙적 언어 속에 숨어서 자기를 합리화 하고 자기의 욕망을 감출 수 있는 거예요. 신앙의 어떤 경지라고 하는 것은 결국 땅의 소산이 이익 주는 어떤 매력적인 것 혹은 조금 반대로 그것이 불러내는 어떤 두려움들 그런 것을 넘어서서, 인간의 모든 운명과 세계 인류 그리고 우주 전체를 통치하시는 그 분의 방식으로 생명의 세계를 끌어가시는 하나님에게 주목해야 되는 거지요. 그 하나님의 얼굴의 빛에 비추임을 당하는 것이 복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주 real하게 인식하고 그 안에서 사는 거지요. 그래서 이 7절에서 이 시편기자가 마지막으로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이 복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지요? 단지 땅의 소산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건 하나의 통로일 뿐입니다.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경외하리로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이죠. 예, 그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들에게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완전하게 계시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종말에 가서 그 분은 자기의 모든 실체를 드러내시게 되겠지요. 전체를 통해서만 계시가 가능한 분이십니다. 다만 2천년전의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주의 역사에서 유일회적으로 나타나신 거죠.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시죠. 네, 그 예수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은 종말까지 계속해서 증명되어야 될 구원의 사건들을 은폐 방식으로 안고 있는 거죠. 예, 그러한 신앙의 깊이 안으로 우리가 천천히 들어가고 그러한 신앙의 현실들을 내 삶과 일치시켜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영성적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 복이 무엇인지 그걸 아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그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일치이기도 하고 하나님만을 향한 우리 영혼의 집중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마치겠습니다.


profile

[레벨:38]클라라

2009.09.29 22:05:47
*.234.41.70

"하나님의 빛에 휩싸임"

제목이 참 좋았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생명의 광휘에 휩싸이게 하소서! "라는 기도와

연결하면서 묵상해 봤습니다. 

하나님의 빛, 영광, 거룩,

제가 맨처음 이런 단어를 접했을때,

<블랙>의 미첼의 기분같았어요.

딱 단어가 손에 잡히는 기분요.

 

우주론적으로 통치하는 하나님,

나와 내 가족, 내 교회, 내 민족을 넘어넘어,

온 우주 전체로 뻗어 가는 기운 같은 것이 언릉 느껴지더라구요.

온 우주와 내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아, 교감요. 그것이 가장 크게 다가 왔어요.

아, 생명의 광휘에 휩싸이는 거,

이것은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9.09.29 23:04:31
*.120.170.243

라라 님,

대단한 내용도 없는 강의 녹취를 받아쓰기 하느라

또 수고가 많았습니다.

나는 아마추어에요.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거나

전공했다고 하더라도 게을렀던 분들보다

신학적인 영성을 조금 더 맛본 정도랍니다.

그래도 그 강의에서 성서의 깊은 세계를 느끼실 수 있다니,

그건 순전히 성령의 도우심이겠지요.

시편 공부에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군요.

서두르지 말고 게으름 피우지 말고

진도를 잘 나가봅시다.

행복한 밤, 되소서.

[레벨:11]질그릇

2009.09.30 14:41:19
*.211.11.41

라라 님,

수고하시는 손길에 많은 사람들이 영성의 기쁨을 누리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집사님의 내면의 깊은 세계를 보는 듯 합니다.

즐겁고 행복한 명절 보내세요.

 

정용섭 목사님!

목사님의 겸손하심에 언제나 고개가 숙여집니다.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인사 한 번 드리지 못하고 있답니다.

명절에 온 가족과 교우들의 즐거운 만남이 기쁨이 되시기를...

건강하세요. ㅊㅊㅊ 

 

profile

[레벨:38]클라라

2009.09.30 15:05:52
*.234.41.70

질그릇 목사님,

목사님께 위로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깊은 세계라는 말씀은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시편을 녹취하면서, 묵상한 말씀을 다듬지 않고

저녁에 올려 놨었는데, 밝은 대낮에 다시 읽으니 너무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주님이 주신 은혜이거니 하고,

내비 둘랍니다.^^

목사님께서도 행복한 명절 보내세요~~!emoticon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9.09.30 23:37:44
*.120.170.243

예, 박옥진 목사님,

즐거운 추석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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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70편 녹취록-지체하지 마소서 file [1] 박은옥 2009-11-01 1559
46 69편 녹취록-천지가 찬송하리라 file 박은옥 2009-10-27 1668
45 68편 녹취록- 신앙의 세 가지 토대 file [1] [11] 박은옥 2009-10-01 1972
» 67편 녹취록-하나님의 빛에 휩싸임 file [5] 박은옥 2009-09-29 1713
43 66편 녹취록-주님으로 인한 기쁨 file [2] 박은옥 2009-09-19 1815
42 65편 녹취록-영혼이 안식할 토대 file 박은옥 2009-09-01 1427
41 64편 녹취록-여호와로 인한 즐거움 file 박은옥 2009-08-25 1537
40 63편 녹취록- 영혼의 갈망, 영혼의 만족 file [3] [1] 박은옥 2009-08-08 1941
39 62편 녹취록-영혼의 침묵 file 박은옥 2009-08-08 2051
38 61편 녹취록-땅 끝에서의 부르짖음 file 박은옥 2009-08-08 1402
37 60편 녹취록-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file 박은옥 2009-08-07 1512
36 59편 녹취록-주는 나의 요새 file [16] 박은옥 2009-08-07 1835
35 58편 녹취록-하나님이 계시다 file [4] 박은옥 2009-07-07 1301
34 57편 녹취록 -지존하신 하나님 file [2] 박은옥 2009-07-07 1262
33 56편 녹취록-사람이 내게 어찌하랴 file 박은옥 2009-06-13 1436
32 55편 녹취록-탄원의 영성 file [4] [16] 박은옥 2009-06-09 1716
31 54편 녹취록-주의 이름으로 file [2] 박은옥 2009-05-28 1281
30 53편 녹취록 -어리석은자 file 박은옥 2009-05-28 1710
29 52편 녹취록-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file [4] 박은옥 2009-05-01 1978
28 51편 녹취록-원죄와 구원 file 박은옥 2009-04-3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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