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68편 녹취록- 신앙의 세 가지 토대

조회 수 1973 추천 수 0 2009.10.01 05:03:49

시편 68편 강해- 신앙의 세 가지 토대

시편 68편입니다. 시편 68편은 깁니다. 바로 앞의 67편에 비해서 상당히 길죠. 67편은 7절까지 밖에 없어요. 68편은 35절까지 있습니다. 그리고 이 68편은 내용이 아주 복잡합니다. 구약 성서학자들도 이 68편에 대해서는 어떤 일관된 입장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요. 여기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게 서로 다르게 전개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가 많이 있겠지요. 그 만큼 많은 것을 담았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또 그만큼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말도 되겠지요. 여기는 여러 가지 문학적인 양식들이 포함되어 있고 또 유대인들의 여러 상황에서 고백된 그런 기도문들이 총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집(選集)이라는 말도 붙인다고 그래요. 묶은 집이라고 하는 뜻의 선집 말이지요. 시 선집 이런 말도 있잖습니까? 이거는 고대만, 영적인 스승들의 혹은 전승들의 찬양과 기도선 문집, 이렇게 말을 붙일 수 있는 거지요. 35절까지 이 긴 시편인데, 일단 제가 읽겠습니다.

 

1.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2.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3.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4.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 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5.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6.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 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7.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서 행진하셨을 때에 (셀라)

8.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 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 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9.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

10.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11.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들은 큰 무리라

12.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있던 여자들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13.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

14.전능하신 이가 왕들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15.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16.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계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냐 진실로 여호와 께서 이 산에 영원히 계시리로다

17.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18.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 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

19.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20.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벗어남은 주 여호와로 말미암거니와

21.그의 원수들의 머리 곧 죄를 짓고 다니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뜨리시리로다

22.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을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 곳에서 도로 나오 게 하고

23.네가 그들을 심히 치고 그들의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집의 개의 혀로 네 원수들 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

24.하나님이여 그들이 주께서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로 행차 하시는 것이라

25.소고 치는 처녀들 중에서 노래 부르는 자들은 앞서고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은 뒤따르나 이다

26.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지어다

27.거기에는 그들을 주관하는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고관과 그들의 무리와 스불론의 고관과 납달리의 고관이 있도다

28.네 하나님이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하게 하소서

29.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30.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은 조각을 발 아래에 밟으 소서 그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31.고관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32.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셀라)

33.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34.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의 능력이 구름 속에 있도다

35.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아멘! 마지막 35절을 결론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다시 35절만 읽겠습니다 35a.하나님이여 위엄(威嚴)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번역이 매끄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여 이렇게 불렀잖아요? 호격이라고 하는데요. 불렀으면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라기 보다도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소서 해야 옳을 텐데요. 혹은 그 주어를 바꾸어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든지요. 어떻게 하든지 지금 의미는 통하지요? 하나님이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고 계시다 이러한 내용의 기도는 시편에 많이 나옵니다. 구약성서 전체에도 이러한 기도 찬송은 기본에 깔려 있다고 봐야지요. 하나님이 위엄을 성소에 나타내십니다.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위엄, 하나님의 위엄 하나님은 위엄한 분이시다, 그러한 신앙 고백이지요? 위엄이라고 하면 뭘까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습니까, 설명을 할 수 있지요. 다만 그것을 어떤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하는 거예요. 위엄, 우리가 보통 사람에게서도 그런 위엄을 이야기 하는데요. 옛날 같으면 왕에게 위엄이 있고요. 지금도 집행관들에게는 그런 위엄이 있어야 합니다. 각자가 맡은 직책에 따르는 권위 이런 것을 위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권위하고 위엄하고는 좀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영어단어로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권위라고 하면 authority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위엄 그런 것들은 authority하고 좀 다르죠? majesty 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맞나요? 스펠링하고 발음이 맞나요? 네, 그러니까 하나님의 위엄이 성소에 나타나신다, 이런 신앙고백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늘 일상적으로 고백되어야 될 그러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소는 물론 예루살렘의 성전이죠? 예, 그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거예요. 그 단락에서 사실 생각할 거리가 많이 있습니다. 구약성서가 예루살렘 성전을 아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거기를 절대화 하지 않아요. 굉장히 중요하다도 생각을 하면서도 절대화하지는 않습니다. 고대인들은 신에 대한 경험을 일정한 장소 주로 한 거예요. 출애굽기에 나오는 호렙산이나 시내산 이것도 한 장소잖아요? 하나님을 경험한 그런 장소구요. 그게 모세가 소명을 받을 때도 그 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했고 출애굽 이후 무리들을 끌고 가면서 필요했었던 율법과 십계명을 받은 곳도 바로 시내산, 혹은 호렙산이라고 부르는 그 곳입니다. 거룩한 산이죠? 그 산은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가 주로 자기들의 신을 섬겼던 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헬라신화 이런 데는 주로 올림프스 산이 중요한 산이죠? 제우스가 거하는 산이구요. 아마 고대의 모든 종교들은 그러한 성소 일정한 구체적인 신과의 접속하는 장소하는 생각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예, 어쩔 수 없는 표현이 정확한 것은 아닌데요. 고대인들에게 나타나는 종교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구약성서는 그러한 지역에 한정되지 않았어요. 그러한 것을 늘 넘어서려고 했습니다. 이게 구약성서가 이야기하는 하나님 경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른 고대종교들은 대게 일정한 장소, 어떤 형상 어떤 모습, 어떤 범주들 그것으로 규정되었어요. 뭐 태양을 섬긴다거나, 뭐 독수리를 섬긴다거나 이런 방식인거죠. 보통 우리가 우상이라고 말하는 형식의 신앙형태입니다. 그런데 이 구약성서는 그거를 위험시 한 거예요. 신을 절대자를 이 범주화하려고 하는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고 뭐 본성이기도 한데 그런 것들을 넘어 서려고 하는 거죠. 예,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그렇게 소중한 장소였지만 그것을 넘어 서려고 하는 노력이 끊임없이 있었다 그러니까 두 가지가 구약성서에서 다투었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위엄이 성전에 가득하다, 나타내신다 이런 신앙은 개인들에게 아주 중요했어요. 35b.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예, 두 가지가 서로 연결 됩니다. 아니죠. 세 가지가 연결되네요.

 

35절만 해석해도 오늘 충분하겠군요. 마지막 절이고 이 시편 68편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세 가지가 뭡니까? 하나님의 위엄이 성소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신다, 세 번째는 하나님을 찬송하라, 이 얘기입니다. 그렇지요? 저도 35절 이것을 설명하다 보니까 고런 윤곽이 눈에 들어오네요. 그러니까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하는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제가 그렇게 뛰어난 선생은 아닙니다만 꾸준하게 시편을 읽으면서 나름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그러면서 점점 더 제가 배우는 게 많은 거 같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강의를 들으시는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면 다행이구요. 더 좋은 것은 제가 배운다, 그거죠. 그러니까 여러분은 저에게 크게 뭐 고맙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세 가지예요. 하나님이여 위엄을 나타내시나이다, 하나님의 위엄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 찬송하자 이겁니다. 이 세 가지가 구약성서의 신앙에서 핵심을 이룬다고 하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이거는 구약성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까지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의 위엄을, 성소에서 경험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 경험이거든요? 그리고 이것은 신비의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는 거거든요. 구약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여러 가지 종교적인 상징물들, 연기가 나고 여러 가지 등등이 어떻게 하나님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위엄을 경험하는 거거든요?

 

우리로 말하자면 예배에서 말씀을 읽고 듣고 설교를 하고 듣고 성만찬을 나누고 하는 이러한 일련의 예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 예배에 그 위엄을 나타낸다고 하는 신비한 경험을 하는 거지요. 이건 정말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그냥 막연하고 추상적인 존재로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힘과 능력을 주신다고 하는 거지요. 여기서 힘과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군사력이나 경제력이라든지 그런 걸 통해서 어떤 모든 것들을 다 때려 부수고 이길 수 있다는 차원의 어떤 승리주의 이런 쪽으로만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아마 그러한 생각들도 이 시편기자나 구약성서기자들에게는 있을 거예요.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앞서 제가 구약성서에는 그 예루살렘 성전이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이 강조하는 대목과 또 그것을 넘어 서려고 하는 아주 보편적인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생각들이 다툰 부분들이 있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게 옳은 이야기입니다. 구약성서, 신약도 마찬가지인데, 하나의 색깔로만 딱 요렇게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예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다투고 대화하고 그렇게 역사적으로 발전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대목도 바로 그와 같은 거지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신다고 하는 이 구절도 그것을 아주 사실적으로 받아 드릴려고 하는 또 그것을 그렇게 경험하는 신앙의 흐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하고는 좀 다른 방식의 신앙경험도 있는 거지요. 힘과 능력이 그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가시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무능력한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있는 거지요. 남은 자 사상도 그렇겠구요. 네, 이러한 생각은 신약에 들어와서 더 확대되죠. 특히 십자가 사건이후로 그렇게 되죠. 초기 기독교인들이 신앙 속에서 이제는 구약이 얘기하는 좀 구약에서 주로 크게 자리 잡았던 승리주의적인 그러한 신앙이 그 패라다임을 바꾸게 되죠. 네, 어쨌든 이런 방식이든 저런 방식이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신다고 하는 것은 분명 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유효한 거지요. 아주 구체적인 생명의 능력을, 폴 틸리히의 말을 빌리자면 ‘존재의 용기’를 주시는 거지요. 카르지 투 비( The) Courage to be 네, 그런 것들이야말로 힘과 능력이 아닐까요? 종말론적 희망을 안고 이 고난의 세월을 버텨내고 그러한 희망이 지금 여기서 삶의 능력으로 심화되고 또 확대 되는 그러한 신자들의 삶이야말로 힘과 능력을 가진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시거든요? 그게 두 번째고, 세 번째로는 그러니 결국 우리 믿는 자 들이 해야 될 일을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지요. 이것에 대해서는 제가 길게 설명하진 않겠습니다. 뭐 다른 시편에서도 이런 대목들은 많이 나왔지요. 찬송할 지어다. 결국 예배도 찬송이고 우리기독교인의 삶 자체도 결국은 찬송이다, 우리의 삶 전체가 송영이다, 독솔로지(doxology)라고도 할 수 있어요. 송영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이러한 세 가지 관점으로 정리되고 있는 이 68편, 앞 부분을 우리가 시간이 되는 대로 좀 더 보겠습니다. 다 보기 힘 들구요. 이것을 큰 문단으로 나눠 놓고 요약하는 것, 그것도 바람직한 공부는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앞 절부터 일단 결론을 이미 공부했으니까 앞 구절부터 조금씩 읽으면서 생각을 따라 가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1절 이렇게 시작합니다. 1.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네, 설명할 필요가 없지요. 2.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1절,2절 이런 구절들이, 원수에 대한 일종의 저주와 같은 내용이에요. 이러한 것들이 시편에 종종 나오는데, 읽을 때 마다 조금 당혹스럽긴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뭐 원수진 일들이 많아가지고 원수 갚아달라고 하는 하소연을 많이 하냐 하는 거죠. 이러한 문제들은 그 당시 그들이 처해 있던 어떤 경험들, 그 상황들 그런 것들을 전제하지 않으면 좀 이해 되기 힘듭니다. 이렇게 바꿔 놓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팔레스틴에서 최근에는 조금 조용하지만, 몇 년 전 까지만 하더라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원주민사이에서 무력충돌이 많이 벌어 지지 않았습니까? 대게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짓누르고 있는 형편인데요.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되요. 그 팔레스틴 원주민의 어떤 어린 아들이, 열 댓 살 된 애가 완전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을 향해서 돌을 던졌어요.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것을 인제 혼내 준다고 하다가 싸움이 붙어가지고 결국은 열 댓 살 되는 아이가 죽었다고 합시다, 총에 맞았다고 죽었다고 합시다. 그 부모들의 심정이 어떻겠어요. 자기들이 믿는 신을 향해서 원수를 갚아 달라 그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러한 경험이 많았던 거거든요? 자신들의 생존이 다 허물어지고 방금 예로 든 것처럼 자식들이 죽어 나가는 그러한 상황 그리고 정말 억울한 모든 재산을 뺏긴 다거나 그러한 일들을 당했을 때 원수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것은 힘든 겁니다. 이것은 막 터져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나 다른 때도 설명했습니다만, 이 시편 기자들은 그러한 증오, 분노, 적개심 이런 것들을 조금 원색적으로 표현할 때가 있지만 그래도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호소거든요? 직접 원수를 갚는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이 하시라는 기도예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이러한 기도는 이러한 영성은 인간들 사이에 끊임없이 부딪히는 폭력에 폭력을 부르는 악순환을 끊어내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무기력할 수도 있지요. 직접 가서 원수가서 또 총을 사서라도 원수를 갚아야 자기들이 사는 건데, 기도를 몽땅해서 되느냐 그렇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복잡하니까 접어 두죠. 어쨌든 시편기자들은 인간이 당하는 고난과 시련을 그냥 살짝 넘어서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그냥 힘든 것을 토로 했어요. 그러나 결국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시각 이것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하더라도 뛰어난 일이겠습니까? 3.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네, 이 원수들이 도망가고 그들이 망하는 것 때문에 즐거워한다면 참 야비하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그런데, 고런 쪽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해석을 완전히 배제할 수 는 없지요. 앞서 예로든 자기 아들을 죽인 그 군사들이 정말 순식간에 쫓겨 가고 했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부분들은 인간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겪고 있는 거지요.

 

그러나 이 3절 이하에 나오는 이 기쁨, 뭐 노래 이런 것들은 단순히 그런 것에만 떨어지지 않고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라고 하는 점이 중요한 거예요. 이 말은 곧 자신들의 상황이 결국 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거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렇게 계시니까요. 그렇게 존재하시니까요. 하나님 앞이라고 하는 사실, 이것이 무의미해지는 때는 없습니다. 그러한 장소도 없어요. 좀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지옥에도 하나님 앞이라고 할수 있어요. 거기도 하나님이라고 앞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모든 것 비극, 슬픔, 고통 이 모든 것들이 모든 것들에서도 우리는 하나님 앞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놓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결국은 우리는 언제나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거지요. 시편기자가 보는 영적인 경지는 바로 그러한 데까지 나갑니다. 4.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네, 3절 4절 계속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찬양하고 노래하고 그리고 뛰놀자 이러한 표현들이 나오고 있어요. 예, 참 중요한 이야기들입니다. 하나님앞에서는 우리가 다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살아야지요. 그러한 어떤 삶의 기쁨이 있어야지요. 어린아이 놀이 이런 것들 아시지 않습니까? 거기에 빠지게 되면 그 어떤 일들도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거든요?

 

요즘 제가 강의하느라고 판넨베르크의 책을 좀 읽고 있는데, 제목은 『인간학』입니다. 판넨베르크의 인간(학)론요. 그 책 뭐, 그 원제는 이렇습니다. 『Anthroplogie in theologischer Perspektive』예요. ‘신학적 전망에서 본 인간론’인 거예요. 거기에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놀이라고 하는 말씀 드리면서 기억이 나서 그 대목을 말씀 드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전제(前提)줄거리는 이겁니다. 인간의 문화라고 하는 것은 놀이로부터 시작했다고 보는 그러한 그 사회학자들, 인간학자들, 인문학자들이 지금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하면서요. 예배도 사실은 거룩한 놀이다 라고 하는 거지요. 그 놀이는 탈아적(脫我的)이고 몰아적(沒我的)인 어떤 성격이 있는 거거든요? 그러한 경험들이지요. 그렇지만 여기서 그 몰아적이라고 하는 그러한 자기 초월적인 어떤 경험으로서의 거룩한 놀이인 예배에서, 조금 또 오해할 부분들이 있어요. 아, 그렇다면 뭐 열광주의적인 그러한 방식도 괜찮지 않냐 그런 말입니다. 제가 예배문제 대해서 얘기 할 때마다 열린 예배라든지 그런 방식 말이죠? 그러한 것들에 대한 문제점을 많이 제기 했는데, 다시 어떤 그 놀이, 거룩한 놀이 차원의 예배라고 하는 것 하고는 좀 모순되는 것은 아니냐, 그러한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그게 조금 설명하기가 쉽지 않겠네요. 흑인들의 예배를 보면 완전히 그런 째즈 부르는 식이잖아요? 설교할 때도 몇 마디 하면 회중석에서 할렐루야, 아멘, 뭐 그런것들로 화답해 나오고요. 그런 방식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그래요. 그런게 인제 유럽중심의 예전예배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거란 말입니다.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를 딱 끊어서 말하기는 힘들어요. 흑인들이 드리는 그러한 열광적인 예배와 지금 한국교회의 일종의 트랜드가 되 있는 경배와 찬양식의 그러한 예배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 부분은 조금 내려놓겠습니다. 여기에서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이게 설명이 한 두 마디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어요.

 

어쨌든 여기서 지금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정말 참된 그러한 자유를 누려야 된다고 하는 점에서 놀이에 심취에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 억지로가 아니라가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기자가 그의 앞에서 뛰놀 지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제가 앞에서 더 이상 예배에 대해서 말씀 드리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래도 한 마디만 하고 지나가면요. 네, 하나님 앞에서 뛰 논다고 하는 것이 꼭 그러한 열정적이고 열광적인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요. 클래식 음악 연주장에 가면 그 열정적으로 뛰논다 그렇게는 아니지만, 락 페스티발에서 하는 그러한 방식은 아니지만, 거기에도 음악에 대한 깊은 열정이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러한 거지요. 예전식의 예배에도 어린아이 놀이 속에 들어가는 거와 같은 영적인 다이나믹이 살아 있어야 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일종의 정숙주의에 빠져 버리고 마는 거지요. 이건 참된 영적인 예배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5.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뭐 조금 분위기가 달라지는 이야기예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뛰논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고아와 과부를 돕는 분으로 이야기가 되고 있어요. 굳이 연결시킨다면,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뛰노는 그러한 기쁨과 자유를 만끽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어려운 사람들의 후원자가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어요. 결국 우리가 우리 인생을 슬픔, 고통, 고민 이런 걸로 생각하는 이유는 고아나 과부와 같은 형편에 빠졌을 때 정말 아무데도 도움의 손길이 없을 수 있다고 하는 절망감 그런 것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그런 것들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런 상황에 결국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거기서 하나님이 온전하게 아버지와 재판장으로 함께 하신다면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내려놓고 놀이처럼 살 수가 있는 거지요. 네, 6절도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6.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네, 그 뒤로 그러한 이야기들이 노래로 나오고 있습니다. 네, 대체적으로 고런 정도로 이 말씀을 보면 될 것 같지요? 19절 보면 이렇습니다. 19.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찬송한다는 말이 여러번 나오고 있어요. 네, 26절에서도 주를 송축할 지어다 얘기하고 있구요. 이러한 구절들이 들어가는 구절들은 대게 제의 때에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제사행위 때에 불리어진 합창대, 성가대다, 아니면 거기서 제사장에 의해서 낭독된 기도문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네, 됬습니다. 오늘 그러면 긴 시편을 다 보지 못했지요? 네, 여러분들이 시간이 있을 때 더 읽어 보시기 바라구요. 시작하면서 여러분들에게 결론되는 구절을 말씀 드렸는데, 고거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오늘 말씀을 마치겠어요. 예, 이거는 68편에서만이 아니라 시편 전체에서도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 신앙 전체에서도 아주 중요한 어떤 관점들을 제시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렇습니다. 35.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하나님의 위엄, 우리에게 주시는 힘과 능력 그리고하나님을 향한 찬송 이러한 신앙의 근거들이 여러분들에게 계속되기를 바라구요. 또 계속해서 이러한 근거들이 더 확장되기를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인간학 I,Ⅱ,Ⅲ』박일영 역, 분도출판사 1996.

Wolfhart Pannenberg, Anthroplogie in theologischer Perspektive,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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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2009.10.06 08:29:53
*.234.41.70

혹시..

이 책이 필요하시면 참고하셔요.

 

1)폴 틸리히,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 > 최성구 역,예영커뮤니케이션, 2006.

2)요한 호이징어, <호모 루덴스 Homo Ludens, a study of the play element in culture >

   김윤수 역, 까치글방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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