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69편 녹취록-천지가 찬송하리라

조회 수 1643 추천 수 0 2009.10.27 00:47:41

시편 69편 강해-천지가 찬송하리라.

 

1.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2.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3.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 이다

4.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 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5.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6.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 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7.내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나의 얼굴에 덮였나이다

8.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

9.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10.내가 곡하고 금식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11.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그들의 말 거리가 되었나이다

12.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비난하며 독주에 취한 무리가 나를 두고 노래하나이다

13.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 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14.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 소서

15.큰 물이 나를 휩쓸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가 내 위에 덮쳐 그것 의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16.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17.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 서

18.내 영혼에게 가까이하사 구원하시며 내 원수로 말미암아 나를 속량하소서

19.주께서 나의 비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나의 대적자들이 다 주님 앞에 있나이다

20.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불쌍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21.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22.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23.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24.주의 분노를 그들의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가 그들에게 미치게 하소서

25.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26.무릇 그들이 주께서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하게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27.그들의 죄악에 죄악을 더하사 주의 공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28.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29.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30.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31.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32.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 어다

33.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 니

34.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35.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에 살며 소유를 삼 으리로다

36.그의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살리로다

 

시편 69편도 68편 못지않게 기네요. 못지않은 게 아니라 구절 수로 말한다면 한 구절이 더 많습니다. 보통 시편의 2배 또는 3배정도 되는군요. 그 다음에 나오는 70편은 5절까지 밖에 없어요. 그러면 7배나 되는 길이의 시이고, 기도이고, 찬양이고, 탄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69편은 좀 특징이 있는데요.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론적인 의미가 많이 담겨있는 시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보통 22편이 그런 면에서는 대표적입니다. 22편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잠깐 보여드릴께요. 1절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시며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나를 버리셨냐 하는 그러한 구절이 나오지요?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하는 예수님의 가상칠언중의 한 마디가 거기 있습니다. 이 22편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한 고난, 의로운 자의 고난, 시련 이러한 것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 그러한 고난 그런 것을 설명하는 구약의 중요한 증거자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69편도 전반적으로 그러한 내용들입니다.

 

 네, 먼저 1절에서 4절을 보면요. 그러한 고난의 문제가 처절하게 표현되어 있어요. 물이 중요한 메타포(metaphor)로 사용되고 있어요.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다고 얘기하지요. 1절에서도 그러고 2절에서도 깊은 수렁에 빠진다고 그랬습니다. 수렁은 물이 있는 곳이지요. 깊은 물에 들어가서 물이 내게 넘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4절과 15절도 그 비슷한 내용들이 반복되고 있어요. 큰물이 나를 휩쓴다, 수렁에 빠지지 말게 해 달라, 물에서 건져 달라 그러한 내용들이예요. 네 물에 빠진 사람의 절박감이 어느 정도 인지는 우리가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숨을 못 쉬는 거죠? 바로 죽느냐 사냐 하는 그 경계선에 빠져 들어 가는 거죠? 혹시 바다나 강 이런데서 물에 빠져 보신 적이 있나요? 수영도 잘 못하고 수영을 잘 한다 하더라도 지치게 된다면 아무 소용이 없죠? 그러한 사고들이 매년마다 나고 있어요. 물에 빠져 죽을 때 그러한 상황이 어떨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 시편 기자의 영적인 상태가 바로 그와 같은 거지요. 물이 내 코를 넘어서는 상태, 더 이상 숨을 쉬기 힘든 그러한 상태예요. 이러한 문제는 즉 무죄한 자의 고난 이러한 문제들은 성서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요. 사실 오늘도 우리가 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입니다. 예, 해결하지 못했다고 말하긴 힘들고, 나름대로 해명을 하는데, 그게 아직 결판난 문제는 아닌 거죠. 왜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받고 불의한 자가 별로 심판도 받지 않은 것처럼 떵떵 거리고 사는가 하는 문제예요. 뭐 세상이 다 그런 건 아니죠.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경우도 있고요. 못된 일을 하다가 망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도 많이 있으니까요. 참 이러한 우리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 실증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무죄한 자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성서의 처음부터 끝까지 중심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그 예를 들어야 될까요? 뭐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거의 모든 것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그랬으니까 뭐 두말 할 나위가 없는 거지요. 구약의 중요한 사건인 출애굽도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고난 받는 사건으로부터 시작한 거 아니겠습니까? 학대받는 그러한 사람들의 문제였어요. 그런 문제의식에서 그런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이 모세 이야기도 나오고 출애굽사건 이후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카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도 마찬가지이죠? 아벨이 그럴 죽을 만한 이유 없이 형에게 돌을 맞아 죽은 거 아니겠어요? 그게 인간 삶의 현실이라고 하는 겁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아벨은 그렇게 맞아 죽고 아무 말도 못하고, 말도 없구요. 카인이 당장 징벌을 받은 것도 아니고요. 그렇습니다. 이러한 의로운 자의 고난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 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결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런 쪽으로 말씀 드린 거죠? 그 답, 그러니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라고 하는 것은 이거라는데, 이미 답이라고 하는 것은 설명이 안 된 거지요? 그거는 오늘 공부 마지막 단락에서 정리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정말 견딜 수 없는, 그러한 억울한 일 힘든 일을 당한 거예요. 이 사람의 힘든 일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그렇게 박해를 당한 것, 원수들로부터 당한 것 그런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어리석음이 드러났다고 하는 것 그런 것들이 더 힘든 거지요. 사실은 그렇습니다.

 

이 사람이 1절에서부터 4절까지 자기의 어려운 형편을 하나님께 아뢴 다음에 조금 방향을 바꿔서 5절에 보면 그렇게 얘기하잖아요? 5.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갑자기 왜 자기 어리석음과 자기 죄에 대해서 얘기 하고 있는 걸까요? 아마 이런 생각일 겁니다. 만약에 내가 전혀 잘못한 것이 없고 어리석은 일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면 그런 시련과 어려운 일들이 일어 날수 없다,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 난 거 보니까 어리석음이고 죄가 있는 거 아니냐, 그런 깨달음이 도달한 거 아닐까요? 혹은 비슷한 이야기이긴 한데 자기의 이런 시련과 어려움들을 극복하게 해 달라고, 해결하게 해 달라고 아무리 기도해도 이것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 앞에서 자기 자신의 한계, 혹은 하나님은 멀리 있다고 하는 생각, 이런 것들이 이 사람의 영혼 속에서 아주 복잡하게 움직인 건 아닐까요?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힘든 일은 실제적으로 어려운 일이 일어나는 것도 힘들긴 하지만,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지 않겠어요.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거죠. 고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냐면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건지 모르고 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 경험이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에게서 멀리 있다 가까이 있다의 관계가 긴밀하다 아니다 하는 그런 것들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나와서 맘이 뜨거워지고 뭐 그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가까이 있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그건 아니거든요? 네 5절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고런 정도로 그 부분은 넘어 가겠습니다. 69편의 이 글을 쓴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향해서 탄원하는, 그런 상황 앞에서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69편이 그리스도론 적으로 자주 인용되는 말씀이라고 아까 언급했지요? 21절에 보면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이런 구절들도 거기에 해당되는 겁니다. 네, 이 긴 구절을 우리가 하나하나 볼 수는 없어요. 고 중간을 그냥 넘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것을 조금 더 확인하고 가겠어요. 이 사람이 정말 어려워하는 것은, 힘들어 하는 것은 자기가 당한 실제적인 시련도 시련이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실존이 대단히 허약하다고 하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런 쪽으로 제가 설명을 했어요. 5절을 통해서 그렇게 설명을 했는데요. 예 그것이 뒤로 나오는 말씀 중에서 29절이 여기 같이 해당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어요.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원수를 갚아 달라고 정말 견딜 수 없다고 그렇게 탄원을 하고 있는 사람이 결국은 자기 자신의 실존에서 더 힘들어 하는 것이거든요. 나는 가난하고 슬프다고 하는 거지요. 이거는 앞서 얘기한 그대로요. 다른 사람에게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기 때문에 가난하고 슬프다 그런 뜻은 아니죠.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실존적 상태를 이야기 하는 거지요.

 

그래서 결국 그는 주의 구원을 베풀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한 겁니다. 29절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다시 읽어 보겠어요 29.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네, 이 시편기자가 자기 어려운 신세를 하나님에게 탄원하고 있지만 결국은 누가 어떻다 어떻다 고자질하는 그러한 차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적실존으로 돌아오는 거지요. 거기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는 거지요. 이게 바로 제가 앞에서 대답을 나중에 있는 거 하고 설명하겠다는 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거는 좀 더 천천히 이야기 하고요. 왜 자기 자신의 영적실존이 왜 중요하냐면, 또한 그것이 왜 의로운 자의 고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냐 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 바깥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그 시련 어려움 혹은 즐거움도 좋고요, 이런 것들은 좀 다른 메카니즘(mechanism)에 의해서 돌아가는 겁니다. 여기서 다르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적인 삶, 신앙적인 흐름 이런 거 하고 다르다는 하는 그런 뜻이지요. 쉽게 말씀 드리면 뭐 돈 버는 거는, 뭐 사람에 따라서 다른 거예요. 사람에 따라서 라기 보다 경우에 따라서 다 달라 지게 됩니다. 착하게 살아도 돈 벌수 있고요. 못 되게 살아도 돈 벌수 있구요. 또 반대로요. 착하게 살아도 가난할 수 있고 못 되기 살기 때문에 가난할 수 있고요. 사람의 인격이나 그런 것 하고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거예요. 여러 가지 운도 많이 따르게 되겠고 말이지요. 물론 성실하게 공부해서 좋은 학교 다니구요. 해서 졸업한 다음에 좋은 직장 다니면서 그렇게 열심히 해서 중산층으로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지요? 하나의 일반 보편적인 하나의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어떤 틀 안에서 일반적인 것으로는 그렇게 가능합니다. 그러나 늘 그런 것은 아니예요. 또 돈만이 아니라 건강문제도 마찬가지예요.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늘 건강한 사람도 아니고 못 되고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늘 건강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요. 이거는 다른 메카니즘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으로, 아니 더 정확하게 얘기해서 우리의 영혼이 그런 것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면 뭐 그렇게 될 리도 없겠지만 그러나 보통사람들이 그러한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요, 결국 우리들의 영적인 구원은 불가능한 거지요. 날씨가 맑을 수도 있고 흐릴 수도 있고요. 비가 올수도 있고 개일 수도 있고요. 더울 수도 있고 추울 수도 있고, 이거를 어떻게 합니까, 그거는 다 어떤 다른 메카니즘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는 거지요.

 

예, 그런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 방식으로 자기가 따라서 잘 살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의 삶의 상황이 어떻다 하더라도 결국은 자기의 영적 실존으로 돌아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건강하게 되면,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하나님하고 가깝다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거지요.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다룰 수 밖 에 없고 돌아 갈수 없는 겁니다. 고 두 개 차이가 전달이 되나요? 제가 지금 말을 하면서도 정확하게 전달이 되는가 아닌가 그게 조금 확실하지 않아요. 그런데 제 스스로 정확하게 정리된 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 보세요. 저는 어쨌든 이 두 가지가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이것은 이 세상 삶과 우리의 영적인 삶이 이원론적으로 구분되어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어떤 삶들, 상황들 이런 것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고 그 안에 우리의 영적인 삶이 있다고 하는 거지요. 결국 우리는 바깥에서 돌아가고 있는 우리 상황, 우리 형편들 이런 것들은 억지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좋은 목회자들이라고 해서 목회가 늘 소위 말해서 성공적인 것은 아니고요. 또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성실하게 잘 하고 그래서 성공적으로 목회를 잘 할 수 있다고 말 하는 것은 가능하지요. 그러나 늘 그런 건 아닌 거예요.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성실한 사람이 시련을 받은 것처럼 그런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거거든요? 그건 우리 어떤 산 사람의 생활조건, 여러 가지 조건, 그런 것들은 늘 하나의 방식으로만 되는 게 아니고 전혀 다른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결국은 그것은 우리가 맘대로 할 수 없다, 어떻게 할 수 없다 이 이야기입니다. 장애를 갖고 사는 사람들은 늘 장애를 갖고 살아야 되듯이 말이죠, 결국 우리들은 주님의 구원, 하나님의 구원, 여기로 집중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것은 아주 고유한, 우리 영혼에서 일어나는 삶의 충만감이거든요? 이게 가능한 거지요. 그게 가능하기 때문에 무죄한 자의 고난 문제도 이해가 되는 거예요. 무죄한 고난, 시련들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 이건 정말 비참하기 때문에 견디기 힘든 문제들이예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 지를 우리는 정말 이해 할 수가 없고 속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으로도 훼손되지 않는 우리 영적인 삶이 있는 거거든요? 여러분들이 다 인정하시지요?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러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충 세태에 따라서 맞게 살면 되지요. 고요한 영적인 삶, 혹은 영적인 생명 그게 확보된다면, 당연히 확보되어야 하고요. 그럼 어떠한 고난 시련 이런 것 들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는 행복한 사람인 겁니다. 그러니까 무죄한 자의 고난이 겉으로 보면 고난이지만 오히려 복일 수 있는 거지요. 이런 말들을 하면서도 조금 조심스럽기는 합니다. 선천적인 장애인들 보고 그게 복이라고 할 수 있냐, 부모 잘 못 만나서 학대받는 그런 아이들을 보고 그걸 복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러한 주장 앞에서 제가 그게 쉽게 복이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게 어려운 문제인거예요.

 

그렇지만 성서가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어야 되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고요. 쉽게 예를 들자면 사업을 하다가 망하잖아요? 정말 그것은 잘못을 저질러서 망한 게 아니라 어떻게 누구에게 사기를 당했다거나 하여튼 뭐 등등, 무죄한 고난과 같은 일을 당해서 망했다고 합시다, 정말 그거는 억울한 일이고 분통터지는 그런 일인데요, 그러나 가난해졌기 때문에 거기에서 새로운 생명의 깊이를 발견할 수 있거든요? 그건 우리가 일단 인정할걸요? 기독교인들은 최소한 그것을 인정할 걸요? 그거 없이는 신앙이 성립되지 않으니까요. 예수 십자가가 바로 인류구원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전제하고 신앙생활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고난 시련 이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가 더 풍성해 질수 있느냐 하는 거지요. 결국 그것을 확보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게 관건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그게 잘 안되요. 평소에 영적으로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구도적인 수행의 태도로 신앙생활 해야 되는 거지요.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좋은 조건들이 다 없어진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고 신앙생활 하는 거죠. 그걸 점점 다 제거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거죠. 그러니까 모든 것이 없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긴밀해 질수 있는 길로 들어서는 게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 있죠. 이거는 그냥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결국 우리가 죽게 되는데, 모든 것을 놓는 게 아니겠어요? 죽는 것 보다 더 큰 고난과 시련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죽음이 오히려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오늘 여기서 30절부터 36절까지 오늘 시편기자가 앞에선 탄원을 하다가 이제 이 부분에서는 감사 노래를 부릅니다. 탄원으로부터 감사로 변하는 거예요. 얼마나 놀랍습니까, 30절에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그렇게 하면서 쭉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요 부분에서 강조하는 그 주제와 연관된 것으로는 32, 33절에 나오는 것과 연관해서 생각해야 되요. 33.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러니까 곤고한 자가 기뻐하고 궁핍한 자의 소리를 여호와가 들으시고 그리고 하나님은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신다, 곤고한 자, 궁핍한자, 갇힌 자 이런 사람들이 기뻐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그러한 이야기잖아요? 무죄한 자의 고난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훼손시키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의 행복, 기쁨, 자유, 구원,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니까 결국 우리는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면에서요, 하나님을 향해서 찬양 할 수 있는 거죠. 34절에 그렇게 이야기해요.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천지가, 모든 것이, 고난 받는 것도 찬송할 수 있는 상태니까요. 그러면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은 더 찬양해야 되겠지요? 천지가 찬송 한다, 모든 것들이 그렇다, 심지어 바다 그중의 생물들도 그렇게 한다, 네, 오늘 시편 69편이었습니다. 22편과 더불어서 기독론 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편이었습니다. 이러한 시편기자의 영성으로 매일 매일 한 걸음씩 깊이 들어갔으면 합니다. 시련, 고난, 하나님을 향해서 탄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결국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구원을 바람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고 하는 늘 놀라운 사실을 기억합시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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