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70편 녹취록-지체하지 마소서

조회 수 1561 추천 수 1 2009.11.01 02:45:52

시편 70편 강해- 지체하지 마소서 

시편 70편입니다. 1절에서 5절까지 있습니다. 읽겠습니다.

 

1.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 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

3.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

4.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5.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 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시편 70편 1절에서 5절은 앞에 나오는 시편 40편 13절에서 17절과 똑같습니다. 거의 똑같습니다. 40편에 나오는 그 내용이 몇 단어가 추가된 정도지 거의 내용도 그렇고, 운율도 그렇고, 문장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네, 똑 같은 이야기가 이렇게 40편에 일부로 들어가 있고 또 따로 70편으로 독립 되어서 나왔을까요? 그 이유는 시편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의 고유한 신앙문헌이 오랫동안 전승 되어 온 것들을 편집해 나가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편을 어떤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쓴 것은 아니지요. 각각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마는 그래서 모든 것을 뭉뜽 거려서 다 말하기는 힘듭니다만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어떤 내용들은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일들이 벌어진 거예요. 첨삭이 있게 된 거지요. 그래서 우리가 오늘 읽은 70편 1절에서 5절이 40편의 일부로 들어가게 된 겁니다. 이게 또 독립적으로 나온 이유는 아마 그 40편에 있다고 하는 것을 몰랐기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거는 좀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더 구약성서, 특히 시편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될 것 같아요. 그래도 그냥 상식선인 선에서 한 마디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70편이 독립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알려 진 거지요. 그게 40편에서는 일부러 그렇게 들어 가 버린 거구요.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각각 발전, 전승 되어 온 겁니다. 그것을 언젠가 이것을 시편이라고 하는 큰 묶음으로 묶을 때, 각각 들어오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누가 이 편집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하게 세밀하게 정밀하게 다 정리해서 시편 묶음집을 만들었다고 볼 수는 없지요. 두서없이 했다고 하는 뜻은 아니고요. 각각 전승되어온 것들을 그런 과정에서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그대로 다 받아 드린다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오늘 미리 앞에서 우리가 40편을 공부할 때, 요 부분을 한번 짚기는 했겠지만, 거기에는 40편 1절에서 12절까지 다른 내용도 있어요. 그러니까 충분하게 다뤘다고는 볼 수 없구요. 일부를 다뤘다고 하더라도 그때는 제가 설명하는 관점에 따라서 하나의 설명이 되었을 것이구요. 오늘 똑같이 설명 드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절에서 5절까지 천천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 다음과 같습니다. 1.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예, 하나님에게 도움을 청한다고 하는 점에서 이 사람의 상태가 어떤지를 우리가 간접적으로 알 수 있지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상황을 일일이 몇 가지 원칙에 따라서 구체적으로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문학적인 차원에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시편기자의 모든 형편들을 우리가 다 잡아 내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그 형편이라고 하는 것이 즉,이 시편이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좀 약화되기도 하고요, 조금 강조되기도 하고, 그냥 변형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시편 원래기자의 형편을 완전하게 복원한다고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시편이 모두가 다 그렇게 전승의 과정에서 다 변형이 됬다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이 있긴 있어도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거든요? 문서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 나온 그대로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대 문서들은 다 그런거죠. 대게 다 구전이 많았구요. 문서화로 자리를 잡았다고 하더라도 그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고 하면 다 복원도 어렵구요, 상당히 오랜 시간을 걸쳐서 이렇게 편집의 과정이 있는 겁니다. 비록 시편의 과정에 그러한 일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중심의 의미 이런 것들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거지요. 그러니까 이 유대인들이 어떤 역사과정속에서 자기 편리에 따라서 놓고 빼고 한 것은 아니라고 한 겁니다. 그들에게 공통의 영적인 경험들이 서로 나눠지고요. 서로 공명되고요. 그러한 과정에서 울림이 큰 그러한 내용들이 역사 안에 살아남게 된 거구요. 그것이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된 겁니다. 나를 건지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 도움이 필요했다고 하는 것만은 우리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거죠.

 

네, 여기서 한마디 짚고 넘어 가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뒤에 좀 나가면서 우리가 더 짚어야 하겠지만 실제적으로 어떤 물질, 어떤 권력 이런 것들에 집중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방식으로도 기도가 되긴 하는데요. 하나님을 향해서 그런 도움을 원하기도 하는데요.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자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도움을 원하는 거죠. 그 말이 정확하게 전달이 되지 않을 것 같군요. 쉽게 표현하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 지금 내 병이 아파 죽게 되었으니 내 병을 고쳐 주십시오. 도움을 원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 그런 것들이 있긴 있지만 그러나 결국은 그 병이 낫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는 거 요 사실에 초점이 있는 거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러한 병, 그리고 원수들이 박해하는 그러한 상황 이런 것들도 극복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한 차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1절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또 한가지는요. 하나님을 도움을 청한다고 하는 것이 전혀 그런 도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아, 이건 이 사람이 전혀 어렵기 때문에 그렇구나, 그리 생각할 수 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바란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영적인 깊이가 있다고 하는 거거든요? 이렇게 좀 구체적인 예를 통해서 설명을 해야 되겠네요.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살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현대 문명가운데서 풍족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영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갈구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냥 현재의 삶에 자족해 버리고 이것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 필요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런 것으로는 충분히 영적인 만족이 안 돼서 다른 차원의 안식, 다른 차원의 기쁨 그런 것들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그게 이제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근본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편기자들의 이 기도를 통해서 바로 그것을 배워야 되는 거죠.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구원이다 할 때 과연 오늘 우리의 삶과 어떤 관련가운데서 그런 걸 생각하느냐 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는 거지요. 2절요, 다음과 같습니다.

 

2.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누구일까요?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생명이라고 할 수도 있고요. 네, 삶의 근거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나를 유혹하는 사람이 있다면 결국 유혹당한다고 하는 것은 영혼이 거기 빠져 버리는 것이니까요. 우리 삶의 근거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이 사람은 그러한 깊은 영적인 고뇌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3절 다음과 같습니다. 3.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 아하, 아하라고 하는 게 재미있는 표현이죠. 제가 히브리어로 다 찾아 보지는 못했습니다. 앞서 40편에 나와 있는 거하고 이게 비슷하다고 말씀 드렸는데, 거기에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보겠습니다. 40편 15절입니다. 다음과 같아요. 나를 향하여 하아, 하아 하며 조소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놀라게 하소서 40편에는 하하, 하하 이렇게 되있구요. 70편에는 아하, 아하 라고 되어 있네요. 히브리어로 차이가 있는지 없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두 개 다 의미는 통하는 거지요. 둘 다 비웃음이지요? 조롱이지요? 모욕입니다. 예, 이런 모욕당하는 자의 영적인 실존이 어떤지 우리가 이것을 추상적으로만 생각하면 참 곤란할 것 같습니다. 우선 이 말씀, 조롱과 모욕이라고 하는 아하, 아하, 이런 표현이요, 요즘 제가 준비하고 있는 <마가복음 묵상>, 마가복음 큐티요, 여기 장면하고 비슷하네요. 잠깐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9절에서 32절까지입니다. 여기 보면 지나가는 자들이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했다고 그래요. 머리를 좌우로 절래 절래 흔드는 거지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겠다고 하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구원자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자 아니냐 이러한 모욕입니다. 31절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똑 같이 희롱했다고 그래요. 그렇게 서로 수근수근 대는 거지요.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예, 예수님이 조롱당하고 모욕당하는 장면을 염두에 두시면서 오늘 여기 70편 시편기자의 영적인 실존도 생각해 보시면 좋겠어요. 이런 거지요. 실질적으로 모욕당하는 것, 조롱당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향한 것은 구원자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그러한 조롱인 거지요.

 

우리의 신앙적인 삶과 연관시켜서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매일 이야기하는 기독교인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구원과는 거리가 먼 것 아니냐 그런 핀잔을 세상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겁니다. 사는 것도 별 볼일 없구요. 사업도 실패할 수 있고 자식교육도 잘 안되기도 하고요. 뭐 그러한 일들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조롱과 모욕 이런 것들을 이제 오늘 신앙의 중심에서 배제하려고 하는 그런 노력들이 많습니다. 이게 <긍정인 힘> 이러한 류의 신앙이거든요? 다 잘된다고 하는 그런 가르침들이거든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다 그렇게 잘 된다 그런 경향의 가르침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참 듣기가 좋은 거죠. 목회적인 차원에서는 그것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당장 일이 안될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될 수 있습니다, 됩니다, 합격합니다, 어떻게 됩니다, 이렇게 해 주는 걸 좋아 하거든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겁니다. 그걸 또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기는 힘든 거죠. 이해합니다. 그냥 소시민으로, 뭐 위대한 기독교인들이 사상가이겠어요? 영성가이겠습니까,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잖아요? 한 끼 안 먹으면 배고프고 말이지요. 연봉 좀 올라가면 기분이 좋고 말이지요.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자기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말이지요? 그러한 소시민으로 사는데요. 그러한 잘된다고 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어요. 예, 그런 것을 나쁘다 말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그런 쪽으로만 나가게 된다면 여기서 일방적이라고 하는 것은 맨 날 그 말만 한다는 게 아니라 모든 것들이 결국은 그러한 쪽으로 가는 가르침인데요, 그렇게 되면 결국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놓치는 게 아니냐 하는 거죠. 그렇게 되면 뭔가 삶의 현실을 못 보고 어떤 추상적인 것에 머물러 있게 되는 거죠. 망상에 사로잡히게 되는 거죠. 이 말을 잘 기억하십시오. 이게 그냥 하는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많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거든요? 본인들은 그걸 모르지요. 그게 옳다고 말이지요. 그게 믿음으로 된다고 말이지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얘기하면 그건 믿음이 없다고 얘기하구요. 계속 그렇습니다.

 

망상이라고 하는 게 뭔지 아세요? 망상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높은 것을 기대한다. 주제 파악도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의 중심을 하나님에게 놓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놓는 걸 이야기 하는 거죠. 자기 확신에 근거한 신앙인 거죠. 물론 거기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 할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이야기 하는 거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무조건 잘 된 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인거죠. 자기만족인거죠. 이게 왜 망상이냐 이게 왜 기독교 영성을 훼손 하느냐 그런 것을 제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게 왜 현실적이지 않느냐 망상이냐 하는 가장 단적인 증거들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모두가 다 잘될 수는 없는 거예요. 누구나 다 배부르게 살 수는 없습니다. 물론 다 공통으로 다 가난하게 살면 어떤 정의가 이뤄질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는 결국은 좀 넉넉한 사람이 있고 부족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물질적인 것만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예요. 건강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건강하지 못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인 사람도 있고요. 아무리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일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람이죠. 일반이다 뭐다 구분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가난, 병, 불행 이런 것들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똑 같이 우리가 당하고, 안고 살아야 되거든요? 그게 이제 현실이거든요? 모든 것이 다 잘 된다, 고난이 없다, 물론 고난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죠. 고난이 곧 지나가고 즐거움이 온다 그렇게 가르치는데, 그것도 현실을 정확하게 보는 게 아닌 거죠. 죽을 때까지 고난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주 무의미하게 죽는 사람들도 있어요. 사고 나서 갑자기 죽는 사람들도 있고요. 그는 인간의 고난의 문제는 결코 우리가 이러한 육신을 갖고 사는 한 벗어 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벗어 날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면 그건 이제 비현실적인 것이고 망상적인 거죠. 그래도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하고 싶기 때문에 그러한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겁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입니다마는 이러한 고난의 문제를 그렇게 손쉽게 넘어 갈 수 없는 이유 그리고 이 고난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놓여 있다고 하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죄한 자의 고난을 말하는 하나의 전형이거든요, 조롱당함에 극치거든요. 아주 무기력한 자의 표본으로 거기 드러나 있거든요, 그래서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이 십자가의 죽음을 아주 거리끼고, 아주 부끄럽고, 거부해야 될 그러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부터 인류 구원이 시작된다고 하는 기독교 신앙을 우리가 받아 드린다고 한다면 이 고난과 시련, 불행 이런 문제를 믿음으로 다 해결할 수 있다, 이런 걸 극복하고 다 부자가 될 수 있다, 건강하게 될 수 있다, 출세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말할 수는 없는 거지요. 오해는 하지 마세요. 기독교 신앙이 비관주의라거나 또 금욕주의 비슷한 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한 문제들은 이 세상에 우리가 사람으로 살아 갈 경우에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 드리자고 하는 거지요. 그러면서 우리가 한 걸음 더 나가서 이렇게 아하, 아하 하고 조롱하는 그러한 사람들, 그러한 시대정신과 맞서서 기독교 신앙의 고유한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복음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가장 정확하게 대변하고 변증할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그것을 경험했고 또 전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여기 시편기자는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나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도드리는 것 당연하지요. 이건 원수를 증오하겠다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고러한 부분들을 여러분들이 놓치지 마셔야 되는데요. 겉으로는 언뜻 원수와 싸워서 원수를 물리치고 없애자 그런 것처럼 들릴 수 도 있지만 성서기자들은 훨씬 깊은 차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수치로 말미암아 물러간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빈정대는 사람, 조롱하던 사람, 모욕을 주던 사람이 오히려 수치를 느끼게 되는 경우가 어떤 때일까요? 예, 그러한 차원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진리가 들어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얼마나 부끄러웠는가를 알게 되는 경우가 아닐까요? 언제 알게 됩니까? 이렇게 싸워서 졌을 때 그런 것을 깨닫지 않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조롱했는데, 상대방이 또 나를 더 조롱했을 때에, 먼저 조롱한 사람이 수치를 느낄까요? 맞습니다. 내가 더 큰 조롱을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이런 전혀 다른 차원에서 어떤 일들이 발생해야만 조롱하던 사람들이 자기가 조롱하던 행위들이 수치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사건으로 비교하자면 부활 사건을 통해서만 그 세상 사람들, 제사장을 비롯하여 그런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예, 이러한 설명이 우리의 삶에서 딱 드러나지는 않을 겁니다. 드러나지 않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런 상황 안으로 들어가는 게 쉽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즉흥적으로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들이거든요? 한 대 맞았으면 또 때릴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때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힘이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참으면서 이를 간다고 할까요? 자꾸 갚아 줄 생각을 하거든요? 저 놈들은 나쁜 놈들이야 나쁜 놈들은 없애야 돼, 박멸해야 돼, 그래야 하나님의 정의가 살아 이런 쪽으로 생각을 하거든요?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뭐 남북관계도 그렇고 좀 많이 그렇습니다.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들도 대게 그런 방식이거든요? 그것으로는 상대방이 굴복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물러가게 되는 경험을 하는 게 쉽지 않은 거죠. 우리 스스로에게는 그런 능력은 사실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래도 우리가 그런 쪽으로 기도를 해야 되겠지요? 하나님의 그런 섭리, 하나님의 통치 그런 것에 우리가 순종할 수 있도록 그런 쪽으로 우리가 맘의 문을 열어야 되지 않을까요? 이제 그게 쉽지 않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쉽지 않은 거예요. 결국 그것마저도 성령이 하셔야 되겠는데요. 끊임없이 우리는 그러니까 이 세계에 일어나는 일들이요. 일상적으로 우리가 얽혀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삶 말입니다. 상대방을 내가 잘 이해해 가지고 또 설득할 것은 설득하고 또 대화 할 것은 대화 하면서 풀어 가야지 우리가 그렇게 좀 하잖아요? 건전하고 원만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가상하지요. 특별히 신앙인으로서 그런 쪽으로 물꼬를 열고 서로 충분하게 이해를 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당연히 하고요, 그렇게 가야 되겠지요. 문제는 그것도 한계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대화를 통해서 해결이 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안 되기도 합니다. 이거 생각하는 거 자체가 이렇게 다른데 대화를 하게 되면 조금 이해는 할 수도 있고, 혹은 또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고요. 그 자리에서 우리가 원만한 인격이라고 한다면 이해한다, 당신을 이해한다, 서로 푸는 것 같잖아요? 그러나 속으로는 잘 풀리지 않을걸요? 임시방편으로, 미봉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관계를 두고 넘어가는 것 뿐이지 아하, 하는 사람들의 수치를 느끼는 그런 상태까지 우리가 만들어갈 능력은 우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냐, 계속 싸워야 하냐 그 얘기는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최선이죠, 대화하고 이해하고 충분하게 설득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또 앞으로 나가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그러면서 점점 앞으로 나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거는 우리 현실에서 우리가 감수해야 될 문제에요. 부부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완전히 하나가 되서 살기는 불가능한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러한 부부관계를 이 세상을 살아 나가야 되죠. 그건 우리가 현실로서 우리가 해야 될 일들이구요.

 

저는 여기서 시각을 조금 바꾸자 하는 이야기입니다. 시편 공부를 하면서 계속 이야기 했고 사실은 다른 설교라든지 성경공부에서도 누차 드렸던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거든요?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시각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사람들끼리만 서로 쳐다 봐 가지고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긍휼 이러한 것들 안으로 깊이 들어 갈 때 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을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거구요. 그러한 시각으로 주변의 사람들과의 문제를 풀어 갈 수 있습니다. 예, 4절에서는 좀 방향을 바꾸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절과 3절은 자기를 힘들게 한 사람들에게 한 이야기 였구요. 4절에서는 오히려 반대되는 사람들에 대해서요. 4.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이거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겠지요? 제가 앞에서 이야기한 그 내용에 대한 성서적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핵심이라고 하였잖아요? 주로 말미암아 기뻐 한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과의 화해를 통해서 기뻐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해야 되지만 임시방편이고, 늘 임시방편이에요.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게 될 때에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문제들을 아주 근원적으로 풀어 갈 수 있는 거죠. 그렇게 좀 해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예,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데에 놀라는 그러한 영성에서 우리는 원수들, 나를 괴롭히던 사람들을 향해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겠지요.

 

마지막 5절 다음과 같습니다. 5.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1절에서 나를 건지소서, 도우소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지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다 가난하고 궁핍한 거예요.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그러면 가난하고 궁핍한 겁니다. 가난하고 궁핍하고 뭔가 계속 갈구하거든요?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이 계속 먹을 것 마실 것을 찾는 것처럼 우리는 계속 밖을 향해서 그걸 무엇을 원하고 있는데요? 그런 상태는 결국 가난하고 궁핍한 거죠.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하나님이 임하실 때 우리가 참된 영적인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거죠. 이런 말씀들을 조금 실질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1절에 나와 있는 구절이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나의 도움이시여 나를 건지지는 이오시니 자기가 아프던 게 갑자기 나았다거나, 사업이 다시 좋아졌다거나 나를 괴롭히던 사람들이 일시에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하심으로, 그는 이제 참된 만족, 참된 도움, 참된 구원을 경험하게 된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이 사람의 영적 기다림과 긴장이 얼마나 절절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이렇게 끝 맺음 해야 될 것 같군요.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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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09.11.02 05:28:01
*.163.108.39

시각의 변화..

자연과 삶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여호와의 광대하심에 눈을 뜨고

티끌만큼도 못한 자신으로 인하여 자신의 모든 것이 사정없이 무너집니다.

세상 그 어디에서도

심지어 내 속에서도 

아하 아하 하는 소리만 울려납니다.


그때 나를 도우시는 자

나를 아시는 자는

나의 눈을 뜨게 하시고

멸시받은 자, 조롱받은자의 자리에 서신

예수의 모습을 통해 삶의 환희를 선사하십니다. 

허나 그 환희마저도

간단없이 아침처럼 다가오는 삶의 현실에

반복되는 하아, 아하, 하하에

아침이슬처럼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나는 이 땅에서의 마지막 그날 까지

가난하고 궁핍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체하지 마소서 지체하지 마소서

땅끝에서 울부짖을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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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집사님 녹취 수고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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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64편 녹취록-여호와로 인한 즐거움 file 박은옥 2009-08-25 1538
40 63편 녹취록- 영혼의 갈망, 영혼의 만족 file [3] [1] 박은옥 2009-08-08 1943
39 62편 녹취록-영혼의 침묵 file 박은옥 2009-08-08 2059
38 61편 녹취록-땅 끝에서의 부르짖음 file 박은옥 2009-08-08 1402
37 60편 녹취록-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file 박은옥 2009-08-07 1513
36 59편 녹취록-주는 나의 요새 file [16] 박은옥 2009-08-07 1836
35 58편 녹취록-하나님이 계시다 file [4] 박은옥 2009-07-07 1310
34 57편 녹취록 -지존하신 하나님 file [2] 박은옥 2009-07-07 1262
33 56편 녹취록-사람이 내게 어찌하랴 file 박은옥 2009-06-13 1438
32 55편 녹취록-탄원의 영성 file [4] [16] 박은옥 2009-06-09 1716
31 54편 녹취록-주의 이름으로 file [2] 박은옥 2009-05-28 1285
30 53편 녹취록 -어리석은자 file 박은옥 2009-05-28 1725
29 52편 녹취록-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file [4] 박은옥 2009-05-01 1990
28 51편 녹취록-원죄와 구원 file 박은옥 2009-04-30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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