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71편 녹취록- 주는 나의 소망

조회 수 1885 추천 수 0 2009.12.23 16:24:03

시편 71편 강해-주는 나의 소망

시편 71편입니다. 읽겠습니다.

 

1.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2.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3.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 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 이심이니이다

4.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

5.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6.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 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7.나는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 같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8.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9.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10.내 원수들이 내게 대하여 말하며 내 영혼을 엿보는 자들이 서로 꾀하여

11.이르기를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하오니

12.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13.내 영혼을 대적하는 자들이 수치와 멸망을 당하게 하시며 나를 모해하려 하는 자들에게 는 욕과 수욕이 덮이게 하소서

14.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15.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16.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공의만 전하겠나이다

17.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 나이다

18.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 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19.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큰 일을 행하셨사 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20.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21.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22.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23.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 이다

24.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 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아멘! 1절에서 24절까지 읽었습니다. 이 시의 특징이 몇 가지 있는데요. 하나는 외부적인 거고 다른 하나는 내부적인 겁니다. 먼저 외부적인 것은 이것을 쓴 사람이 늙은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시 전반에 그 늙은 사람의 그러한 모습이 그려 있습니다. 예를 들면 9절에서요. 이렇게 나오지요. 9.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늙는다는 이야기가 나오고요. 또 18절에도 보면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이 몇 가지 단어만으로 이 시편기자가 늙은 사람이라고 단정하기는 물론 쉽지는 않지요. 젊어서도 여전히 늙음을 내다보면서 그 때를 생각하면서 기도를 드릴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학자들의 전반적인 연구에 의하면 이 시는 늙은 사람이 쓴 거라고 하는 게 확실합니다. 이렇게 되면 좋은 점이 자기 삶을 관조할 수 있잖아요? 늙는다고 해서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요? 반대로 나가게 되면 노욕(老慾)으로 똘똘 뭉칠 수도 있습니다. 방향이 잘 못 되면, 세월이 갈수록 세월의 무게가 더 무거워 질수록 인간적인 욕심에 사로잡힐 수가 있습니다.

 

신앙적인 차원에서도 그렇지요. 젊었을 때는 그래도 대화가 되는데, 완고하게 신앙적으로 늙게 되면 완전히 대화가 안 되는 그러한 그렇게 변하게 되지요. 그러나 그렇게 완고한 쪽으로만 가지 않는다면 일반적으로 보면 늙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넉넉하게 만들구요. 이미 지나온 삶을 다 뒤돌아보면서 이야기 하니까 인생이 뭔가를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요. 어디 매달리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늙음의 과정이 순조롭고 또 진지하고 또 바르게 가야만 우리가 죽음도 잘 받아드릴 수 있지 않겠어요? 예, 그런 점에서 이 늙는다고 하는 것은 젊었을 때 가졌던 모든 열망을 줄여 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건 아주 생리학적으로 옳은 이야기 같아요. 모든 관심들이 줄어드는 거지요. 무엇을 먹고 싶다고 하는 것도 나이가 들면서 떨어지게 되지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성욕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겠구요. 사회적인 어떤 지위를 얻어 보겠다고 하는 그러한 것들도 당연히 줄어들죠. 그게 이제 허무한 것, 별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게 노욕으로 뭉치게 되면 어떤 욕망, 욕심이 강해질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 일반적인 경우에 본다면 생리학적으로도 모든 열망들이 줄어드는 겁니다. 시력도 마찬가지잖아요? 이제 점점 가까운 데 것이 안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참 잘 만든 거다 생각이 드네요. 늙을수록 자세하게 볼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냥 윤곽만 보고 살면 되는 거지요. 젊었을 때야 작은 것을 세밀하게 봐야 하고 그런 것들에게 예민하게 작용을 하는데, 나이 들면 생리학적으로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죽음을 순순히 받아 드릴 수 있는 거지요. 숨이 끊어질 때까지 더 살고 싶다, 더 먹고 싶다 더 마시고 싶다 이런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면 참 불행한 삶이고 참 불행한 죽음인 것 같애요.

 

결국 죽으면 모든 것들과의 단절인데, 실제적으로 죽음에 이르기 전에 모든 것들로 단절을 순순하게 받아 드리는 그러한 준비가 필요 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되면 살 맛이 안난다 그렇게들 말을 하잖아요? 늙는 것을 그렇게 좋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랍니다. 그건 조금 오해가 있을 수 있어요. 그게 인간의 일반적인 마음이긴 합니다. 옛날에는 젊었을 때 술이 막 당기고 그걸 취하고 즐겁게 살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늙으면서 맛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살 맛이 없어진다 문제거든요? 이렇게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되겠습니다. 어린아이 였을때는 아침서부터 저녁까지 그냥 놀고 싶잖아요? 놀면서 친구들하고 그냥 밤 늦게까지 있고 집에 들어오고 싶지 않습니다. 놀이라고 하는 것이 아이들의 전체를 사로잡는 거예요. 큰 능력입니다. 그의 생명의 에너지이기도 하고요. 나이가 들면 그런 것들을 놓친다고 해서, 친구들하고 놀지 못한다고 해서 삶이 무료하거나 이렇게 재미 없어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다른 세계가 더 넓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세계라고 하는 것이 우리 신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세계인데요. 그거는 우리의 육신이 늙어가더라도 혹은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더 풍요로워 질 수 있는 세계입니다. 이 늙은 사람의 기도입니다. 그게 이제 외적인 특징이구요. 다른 내적인 특징은 이 시편에 버리지 마소서 라고 하는 표현이 반복해서 많이 나온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 군데 나와요. 이게 뭐 71편만 그렇지 않고 시편 전체의 특징이기도 합니다만 제가 읽으면서 그런 느낌이 더 강해 왔거든요? 9절에도 보면 끝 부분에 나를 떠나니 마소서 12절 첫 부분에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그러구요. 18절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또 반복되어요. 버리지 마소서 계속 그렇습니다. 예 도와 달라고 하는 내용들이 그 사이사이에 들어와 있구요.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는 이 71편의 제목을 저는 5절에 나오는 내용으로 정했습니다.

 

5절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5.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늙을 때까지 신뢰하던 분이라는 거지요.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찬송가에 나오는 구절이지요? 이 71편은 독일 찬송가에도, 이것을 다루고 있는 유명한 찬송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주는 나의 소망, 주는 나의 희망 이게 시편도 그렇고 구약 성서 전체이기도 하고 어쩌면 신약성서 전체, 모든 성서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한 구절로 이야기 하라고 한다면 이거로 이야기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주는 나의 소망 주는 나의 희망 예, 이러한 구절들이 우리에게 익숙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 맞장구 치고요. 그려러니 맞아 하나님이 주님이 나의 희망이지 이렇게 그냥 건성건성 하고 그냥 지나갈 수 있습니다. 예 우리가 이 시편기자의 이런 영적인 상태를 깊이 이해를 해야 되요. 이 사람이 지금 처한 상황은 희망, 혹은 소망을 말할 만한 상황은 아닙니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처한 형편은 조금 어렵지요. 궁핍하지요. 그리고 주변으로부터 어려운 점들을 많이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힘든 거지요. 실제 상황은 소망이 아니라 조금 절망, 어려움 이런 것들이 많은데 그런데 이 시편 기자는 주는 나의 소망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게 뭐예요. 잘못하면 열광주의자의 헛소리처럼 들리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그런 신앙으로 떨어진 사람들이 제법 있거든요? 전후 사정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맹목적으로 구원 받습니다. 믿습니다. 그런 얘기를 하는 거지요. 열광적으로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그러한 말들을 하는 거지요. 결국 그러면서 말만 그렇게 하니까 내용이 없는 거예요.

 

내용이 없으면 그 신앙은 유지되기 힘듭니다. 순간적으로는 몇 마디 말을 하고 뜨겁게 정말 거기에 사로잡혀서 뭔가 신앙적인 역동성이 일어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용이 없을 경우에는 그건 결국은 시들해 질 수 밖에 없지요. 능력이 나타날 수 없는 거죠.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고 하는데요. 능력은 당장 뜨거웠다가 푹 식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꾸준하게 생명의 영과 결합되어 있어야 하는 거거 든요. 주는 나의 소망 이라고 얘기 하고 있어요. 무슨 뜻일까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 소망은 지금 자기가 처해 있는 형편이 펴진다 하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른 거겠지요. 제가 아까 늙는 다는 거 하고 젊었을 때 열망이 사라지는 것, 그리고 새로운 세계가 풍요로와 지는 것, 등등을 말씀 드렸는데, 뭐 그거 하고 연관시켜서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군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희망하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거죠. 차원이 다른 거죠. 어린아이들이 바깥에서 늦은 시간까지 친구들하고 그냥 정신없이 뛰어 노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희망인데, 어른이 되면 그런 희망은 안 하잖아요? 다른 거잖습니까? 

 

이 사람이 말하는, 주는 나의 소망이라고 하는 말은 지금 그가 처해 있는 어려운 형편들이 다 잘 풀린다하는 것 하고는 다른 차원이다 그렇게 생각해야지요. 네, 그게 뭘까요? 지금 제가 어떤 윤곽만 말씀 드렸는데, 아주 실질적으로 그게 뭘까요?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나이가 들면서 주는 나의 소망이라고 하는 이러한 인식 혹은 이런 고백이 더 깊어지고 있을까요? 그 이야기를 제가 좀더 길게 하기는 힘들겠네요. 여러 가지 문제하고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 71편 공부하는 자리에서 더 말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다만 이렇게만 한 마디 하고 지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이 사람이 늙고 있다 그러한 것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예요. 이겁니다. 이 사람은 지금 어떤 것이 하나님의 구원 혹은 희망의 내용인지 구체적인 것을 말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이 사람만이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이것은 곧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는 것인데요.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한다, 혹은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그걸 어떤 구체적인 것으로 결정해 놓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구요. 하나님과 일치됨으로써 들어가는 생명의 세계를 실증적인 어떤 사실로 우리가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건 이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 차원에 들어 있는 거구요. 여기서 확실성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 확실성 말입니다.

 

주는 나의 소망이라고 하는 확실성은 우리에게 정말 참된 생명을 허락하시는 그 분이 곧 하나님이다, 그 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죠. 제 말 표현이 좀 어렵군요. 예, 저도 이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정확하게 전달되는 지를 좀,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우선 이 문제가 저에게 명확하게 또렷하게 정리되지 않은 탓도 있겠지요? 고건 아닌데요. 어느 정도 명확하기는 한데, 그래서 지금 제가 말로 풀기가 힘들어서 그렇습니다. 이제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냐면 우리는 자꾸만 이 땅의 사물, 생명의 형식 이런 것으로만 우리가 생각을 해 갖고 하나님과의 경험도 그런 쪽으로 연결시키고 있어요. 일단 그것을 단절해야 되요. 그것을 딱 접어 둬야 되요. 이 땅에서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존재는 우리가 과거에 경험했던 일들로 인해서 추정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일을 일으키시는 분이거든요? 전혀 새로운 분에 대해서 우리가 그 어떤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 분이 우리 혹은 나를 위해서 구원의 새로운 세계를 준비하고 있다는 그 사실 말고 우리들이 더 이상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조금 더 극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우리가 다 죽은 다음에 흙이 된다 한들 그것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의 생명의 새로운 형식이라고 한다면 그걸 우리는 당연히 기쁨으로 받아 드리는 거죠. 그럴 때만 우리는 참된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거든요? 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주는 나의 소망이다 희망이다 그 이외의 것들은 희망이 아니다 그러한 세계에 들어 간 겁니다. 이러면 이제 영적으로 풍요로 와지는 거지요. 자유로 와지는 거지요. 이제 그것을, 노파심으로 한 말씀 드린다면 자기 혼자, 주관적으로 상상력을 발휘해서, 자족하는 그러한 거라고 한다면 그것도 문제가 있는 거지요. 이 사람은 혼자 그렇게 제멋대로 개인적이고 주관적이 그러한 자기 확신이나 심리적 자기 위로 이런데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전체 역사 흐름 속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본 거거든요? 네 이 사람은 참 멋있게 늙어 가는 사람이지요? 참된 영성가지요?

 

예, 몇 구절만 보겠습니다. 1절부터 4절까지 볼까요? 1.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1절인데요. 이 한 구절만 우리가 잘 이해하더라도 성서의 세계로 깊이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설명 하려면 또 사실은 또 시간도 많이 필요한 겁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주께 피한다 주께 피한다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이런 것들을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상투적으로 생각을 해요. 그래서 굉장히 추상적으로 떨어질 경우가 있습니다. 더 실질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내가 주께 피하오니 피하오니, 그 주님이 누구예요? 앞에서 말씀 드린 주는 나의 소망이시니하고 연관되는 겁니다. 그 분이 나의 소망, 희망이기 때문에 피하는 것 아니겠어요? 여기서 주라고 하는 게 누군가, 물론 여호와, 나의 주와 연관되고 있어요. 그 분이 우리들에게 완전히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았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 분에게 피할 수 있는가, 하는 거지요. 여기에는 어쩌면 소극적인 방식이 필요하겠습니다. 주가 아닌 것을 자꾸만 우리 삶에서 제거하는 거지요. 주가 아닌 것들이 뭐가 있을까요? 세상은 오히려 거짓 주가 많지 않습니까? 그것이 왜 거짓인지를 잘 파악을 하고 그런 것으로부터 점점 우리가 멀리 함으로써 우리가 주님께 피할 수 있는 거지요.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그렇잖습니까? 그 주님께 피할 때만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겁니다. 이 늙은 시편기자는 그 사실을 이미 자기 인생경험을 통해서 때달은 것 같아요. 단순한 자기 경험만이 아니라 유대의 전체적인 신앙전승에서 그것을 깨달은 거 겠지요? 주님께 피 할 때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는가, 그거는 이미 그 말에 대답이 다 들어 있으니까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주님만이 구원자이시니까요. 구원의 현실 속에 들어 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이외의 것들은 놓친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울 게 하나도 없는 거지요. 예, 이게 말은 이렇게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신앙의 세계 속에 풍덩하고 물속에 들어가듯이 빠져 들어 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2절입니다. 2.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주라는 말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네요. 주의 의 주의 귀 예,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이 시편기자가 주를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데, 과연 그의 영혼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주라고 하는 표상이 어떤 걸까요? 예, 그런 것들이 우리가 성서를 읽으면서 생각해야 될 질문들입니다. 3.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 이심이니이다 여기서도 주라고 하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나의 반석이고 요새이시다 라고 합니다. 예, 우리가 이러한 영적인 경지에 도달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께서 나의 반석이고 요새시라고 하는 영적 경지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것들은 다 툴툴 털어 버린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걱정이 없을 수가 없겠지요. 바로 그 주님이 누군가? 주님이 어떻게 우리의 영적 생명을 지켜 주시는가에 대한 인식과 그런 경험들이 축적되어야 될 것 같습니다. 좀 넘어 가서요. 제가 이 사람이 늙었다는 기자라고 하면서 인용한 그 구절을 좀 보겠습니다, 두 군데가 있었는데, 뒷부분을 보지요.

 

18절입니다. 18.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네, 요건 뭐 됬습니다. 늙은 기자라고 인용한 앞서의 구절을 보겠습니다. 9절이예요. 9.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늙을 때 쇠약할 때, 그 때도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으시는 주님에 대한 희망을 이 사람이 갖고 있는 거죠. 늙고 힘이 약해지면 외롭죠. 그럼 사람들은 대게 다 떠나지요. 힘이 없어지고 정신도 약간 희미해지니까 점점 더 자기 생명에 대한 생각들도 불분명해 질수 있겠지요? 하여튼 모든 것들이, 여태껏 살아오면서 쌓아왔던 모든 것들이 서서히 허물어지는 때입니다. 그러한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 떠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 이것도 그냥 말 몇 마디로 그렇게 지나 갈 부분은 아니예요. 정말 주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인식이 없으면 이런 말들은 정말 상투적으로 떨어 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늙는다는 것 그리고 힘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 이것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약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고 오히려 정 반대일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 우리들은 보통 너무 젊기 때문에, 너무 팔팔하기 때문에, 너무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홀 해 질수 있거든요? 이거는 기도를 좀 더 많이 한다, 적게 한다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예,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인 거지요.

 

예, 저도 개인적으로 그런 상상을 합니다. 제가 지금도 나이를 먹을 만치 먹었지만 앞으로 2,30년 푹 지나서요, 한번 30년 후면 그러면 거의 기운이 없겠지요. 할 일도 하나도 없겠지요? 그냥 숨 쉬고 아주 특별하게 아프지 않는 한 그 때까지 살아 있다면, 밥 먹고 아주 최소한의 생리적인 작용만 하면서 살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풍요로와 지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합니다. 그때가 더 빨리 왔으면 하는 생각도 합니다. 지금은 다른 일들이 너무 많거든요? 글을 써야 될 것도 많고 이런 저런 교회일 등등 여러 가지 말입니다. 그런 일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 들어가는데 크게 도움이 되진 않습니다. 주변에 있는 것들이 축소될수록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 질 수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서가 늘 이야기 하는 거구요. 가난한 자, 그리고 외로운 자가 오히려 복이 있다고 하는 산상수훈의 팔복에 나오는 말씀도 결국은 그거고요. 오늘 우리는 시편 71편을 읽으며 나눴습니다. 늙은 시인의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늙는 것을 전혀 두려할 것 없고, 오히려 더 설레 이는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살아 봅시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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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09.12.23 21:37:55
*.160.132.218

주가 아닌 것을 나의 삶에서 제거해나가는 삶.

모든 소유욕에서 하나씩 자유로와져 갈 때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주어지는 군요.


아. 시편 묵상을 통해 시편이 다시 보입니다.

늘 감사합니다.

확실히 잡히지는 않지만

이런 기회들을 통해 한걸음씩 그 세계로 들어가는

기쁨이 있어 이것이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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