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72편 녹취록-정의로운 재판

조회 수 1324 추천 수 0 2009.12.24 01:42:41

시편 72편 강해-정의로운 재판

시편 72편입니다. 제가 천천히 읽겠습니다 이 시편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2.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4.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 으리로다

5.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6.그는 벤 풀 위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내리리니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8.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9.광야에 사는 자는 그 앞에 굽히며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10.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11.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12.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13.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14.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15.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16.산 꼭대기의 땅에도 곡식이 풍성하고 그것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

17.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18.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19.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20.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

 

아멘! 네, 이 시편 72편의 표제가 솔로몬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의 시라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20절에 보면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가 서로 상충되네요. 만약에 72편이 솔로몬의 시라고 한다면 20절은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아니라, 이새의 손자 솔로몬이라고 하던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기도라고 해야 되지 않습니까, 예, 여기의 이런 문제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뭐, 그렇게 복잡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어쨌든 겉으로 간단한 문제로 보입니다. 이 표제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나중에 누가 갖다 붙인 거거든요? 이게 아마 70인역으로 번역될 때 붙인 걸로 기억되는 데요. 그러니까 히브리어 성서에는 솔로몬의 시라고 하는 표제라고 없을 겁니다. 어쨌든 솔로몬의 시, 다윗의 기도 어느 쪽 이었던지요, 이 시편의 근본적인 의미, 이런 것들은 별로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예, 다시한번 앞으로 돌아가서 솔로몬의 시와 다윗의 기도라고 하는 것이 서로 상충되는 사태를 빚었느냐 질문을 한 번 더 드려야 하겠네요.

 

말씀을 하다 보니까 이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나서 그렇습니다. 이 72편이 부분적으로는 이 솔로몬에게 닿아 있고, 부분적으로는 다윗에 닿아 있기 때문에, 서로 양쪽 다 두 사람의 이름이 여기 기록된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시편이라고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오랫동안 세월을 걸쳐서 이스라엘 민족 안에 구전 되었고 그것이 또한 문서화 되는 과정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에 여러 사람들의 기도문들, 혹은 민족적인 어떤 배경을 둔 기도문들이 같이 뒤 섞일 수가 있는 거지요. 그러기에 이러한 시편을 볼 때 솔로몬이다, 다윗이다 이런 왕들의 이름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런 대상이 되기도 하고 그들이 시편을 노래한 장본인들로 나오기도 합니다만, 그것이 그렇게 역사적 근거는 없다고 봐야지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오늘 이 72편이 왕을 위한 기도처럼 보이거든요? 그러나 이것은 한 두 사람, 역사에 실제 했던 왕들을 위한 기도였다 라기보다는 제의, 제사 드릴 때 부르는 시편, 찬송가의 의미가 큰 거예요. 왕을 위한 형식을 가졌지만, 다윗이나 솔로몬, 역사적인 인물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형식을 빌려서 이스라엘 신앙을 담아냈다고 하는 점이 중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예요. 왕으로 된 묘사된 그 인물은 그 역사적인 인물 이라기보다도 하나님, 혹은 메시아 이런 신앙적인 차원의 어떤 이들로 생각하는 게 옳은 거지요.

 

그리고 제가 또 잊어버리기 전에 짚고 넘어 갈 것은 이겁니다. 여기에 왕을 위한 기도라고 많이 이야기하곤 있지만, 이게 잘못하면 용비어천가로 들릴 수 있거든요? 그게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이 이스라엘 신앙에 아주 근본이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시죠?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그리고 그 여호와 하나님 관심이라고 하는 것은 왕이 잘된다거나 그가 공의로운 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그에게 복을 준다고 하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백성이거든요? 모든 사람들이거든요? 여기에 용비어천가 비슷한 표현이 있다고 해서 구체적인 왕을 위한 것이라고 해서는 곤란한 거지요. 그가 위대했기 때문에 축복했다고 하면 곤란한 겁니다. 오히려 왕이 어떤 일을 해야 되느냐, 하는 어떤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게 핵심인 거예요. 제가 앞에서 이 72편이 제의적 성격이 강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 부르는 찬송가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찬송을 왕과 귀족과 군중들이 함께 드리면서 과연 왕이 무슨 일을 해야 되느냐에 대한 어떤 사명감 그런 것들을 고취할 수 있는 거지요. 새롭게 성찰할 수 있는 거지요. 그게 중요한 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읽으면서 다 나온 이야기지만 억울한 사람 없게 하고 정의로운 이 세계를 펼쳐나가는 일인 거지요. 네, 이 구절을 천천히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2.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1절과 2절의 키워드는 공의예요. 정의예요. 이게 지난 주 제가 설교한 내용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그러한 내용입니다. 미쉬파트라고 하는 단어인데요. 공의, 정의라고 번역이 되고 그것은 심판, 그렇게도 번역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의와 심판 이것을 똑 같은 단어로 생각했어요. 예, 그게 여기 1절과 2절에도 키워드입니다. 하나님이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기를 바란다 라고 이렇게 기도를 하고 있는데, 판단력,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주의 공의, 주의 판단력을 주의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예, 판단력과 공의, 이제 그렇게 해야만 2절에서 말한대로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고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한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미쉬파트가 정의와 심판 재판인 거예요. 그러니까 정의로운 심판 정의로운 재판이 구약성서에서 아주 중요한 신앙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만큼 그 시대가 정의롭지 못하다, 불의한 재판이 횡횡하고 있다고 하는 의미겠지요. 뭐 그 시대만이겠습니까?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는 불의, 혹은 불의의 재판이 끊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사실은 사회과학에 속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제가 지금 자세하게 말씀 드릴 수 없겠군요. 아는 것도 없기 때문에 그렇기도 합니다. 상식적으로만 보면 몇 가지 이렇습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결국은 인간들의 행위라고 하는 것이 악할 수 밖 에 없지 않느냐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어요. 그것이 성서가 이야기 하는 인간론이고요, 죄론 이기도 하고, 그것에 근거한 구원이 새로운 차원에서 일어나야 될 구원의 요청?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 말을 다시 좀 정리해야 되겠군요. 표현이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스스로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정의롭게 살기가 참 힘든 거죠. 그게 이제 성서가 말하는 인간이 악하다 하는 사실에 근거한 겁니다. 인간이 정말 악 하냐 선 하냐, 성선설, 성악설 이라고 하는 논쟁이 계속 되기 때문에 그걸 한 쪽으로 딱 끊어서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느 한편으로 보면 인간에게도 선한 부분이 있어요.

 

성서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선함을 무조건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시겠지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그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 완전하게 악하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물론 여기서 선하게 지음 받은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악으로 기울어졌다고 말 할 수 있는 겁니다. 여기서 더 복잡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한 그 하나님 형상의 파괴가 어느 정도냐 하는 질문이지요. 모든 것이 파괴 됬다, 토탈 카타스트로프(total catastrophe)라고 할까요? 카타스트로프, 발음이 정확한가요? 모든 것들이 파괴되는 상태거든요? 모든 것들이 파괴되는, 절대적인 악, 절대적인 파괴, 완전파괴, 완전 타락이라고 하는 거지요? 이게 기본적으로 기독교신앙의 뿌리를 박고 있긴 합니다. 여기서 펠라기우스(Pelagius, 354~418?)논쟁과 어거스틴(Sanctus Aurelius Augustinus, 354~430)의 논쟁도 있구요. 어거스틴은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보고 펠라기우스는 그렇지 않다고 보거든요? 그런 논쟁이 교리사를 통해서 지금까지 1500,600년까지 계속 내려 오고 있습니다. 이런 신학자들의 논의를 여러분들이 그냥 간단하게 어거스틴은 전적인 타락을 이야기했고 펠라기우스는 부분적인 타락을 이야기 했다 이렇게만 말하면 좀 곤란한 겁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이 이야기 할 때도 전적인 타락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부정으로 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적인 타락의 근거에서만 하나님의 은총이 절대적이라고 하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은총을 드러내기 위하 해석학적 토대로써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전적인 타락도 또 이유도 근거도 충분한 거구요. 이런 문제를 너무 간단하게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신학자들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예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이 무조건 악하냐 아니면 어떤 가능성이 있느냐 하는 것들을 맞대놓고 비교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건 관점, 퍼스펙티브(perspective)의 차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어떤 관점으로, 어떤 전망(展望)을 갖고 볼 때에 거기엔 전적인 타락이 분명한 거죠. 인간 스스로에게서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기 때문 이예요. 지금까지 2000년동안 인간이 새로워 지려는 많은 노력을 하긴 했습니다만 별로 나아진 구석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교육이나 교양으로 인간이 선해지지 않는다고 할 때 그런 것을 전제하게 된다면, 그런 관점으로 보게 된다면, 인간은 전적인 타락인 거지요. 그러나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영성이 새로워지거나 굳이 성령이라고 하는 말을 붙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측은지심이라고 하는 것 같은 마음이 동한다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선한 흔적이 남아 있는 거 거 든요? 그런 전망에 따라서 이렇게도 말 할 수도 있고 저렇게도 말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사회학적인 차원에서 풀어 가야될 질문이죠. 이 문제와 연관해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악이라고 하는 것이 혹은 죄라고 할 수 있고요. 문명하고 좀 깊숙이 연관된 거 아니냐 하는 겁니다. 문명이 이렇게 많이 발달되지 않은 곳에서는 오히려 악과 죄도 없을 수 있는 거거든요? 그게 약하거든요? 이렇게 보면 되죠. 태어난 어린아이들, 유아들 그 아이들에게는 악과 죄라는 말을 붙일 수 없는 거 잖아요? 내것, 네것도 없어서 소유의 경계선도 모르기 때문에 남의 것을 그냥 자기가 독차지 한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악하다 뭐다 이야기 할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문명이 없는 그런 곳에서는 오히려 악도, 악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지요. 이기심이 거기서 발동 할 테니까요. 그건 아주 약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옛날 농어촌지역에서는 이웃들이 서로 같이 어울려서 먹고 살잖아요? 힘들면 힘든 대로 서로 그렇게 같이 사는 모습들이 있었잖습니까? 그런데, 이제 사회화가 되고 구조적인 악한 질서들이 문명의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게 되니까 우리 악한 생각들이 더 극대화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네, 제 이야기가 너무 옆으로 나갔습니다. 왕에게 주의 판단력과 공의를 주십사하고 기도합니다. 그래야만 공의로 재판하고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한다고 말이죠. 예, 이건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지난 일 년 동안도 한국사회에서도 어려운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여기 왕은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혹은 법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 검찰 판사 이런 사람들이 법을 정의롭게 사용해야 하는데 예, 그렇지 않을 경우에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게 되는 거지요. 예, 이건 우리가 참 풀기가 힘든 문제입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고 하는 말들이 그렇게 허튼게 아니니까요. 그건 아주 절실하게 경험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미쉬파트, 정의와 심판, 정의로운 심판, 이것은 인간이 행할 수 있다기보다도 하나님의 선물로만 가능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예요. 우리도 그런 기도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바르게 판단해서 행동하기는 정말 어렵지요. 우리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면 오히려 불의한 쪽으로 나갈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자연주의 교육학자나 그러한 철학자들은 다르게 보겠지요. 자연 있는 그대로 두면 사람은 정말 선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부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 더 인간의 속 중심을 들여다보게 된다면 자연적으로 내버려 둔다고 해서 정의로운 그러한 생각과 행동을 하겠냐 하는 거지요.

 

이 이야기가 바로 앞에서 말씀 드린 것 하고 조금 충돌하는 느낌이 드는 군요. 그러니까 문명이 우리를 악으로 끌어갔다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 문명과 자연 쪽으로 내 버려두는 것 하곤 다른 건데요. 제가 앞서서 문명이 원인이라고 했고요. 지금에는 자연적으로 내버려두는 것에 한계들을 이야기 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 충돌이 있는데, 사실은 충돌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문명이 우리를 악한 쪽을 더 개발 시킨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거죠. 자연적인 상태로 내버려 두어도 사람이 옳게 살 수 없다고 말씀 드렸는데, 그렇다고 해서 문명의 힘을 어떻게 하겠다고 드린 말씀은 아닌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주어진다고 하는 거지요. 이렇게 보시면 좋겠네요. 가장 그 깊은 차원에서 공의와 심판을 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있는 것이고요. 조금 더 덜 깊이 들어가서 그래도 어느 정도 나쁜 쪽을 줄여 나가는 쪽으로는 문명이 아니라 자연 상태 속에 넣는 것이 그나마 나을 것이고요. 문명의 이러한 구조적인 힘들 속에서 소용돌이치면 그러면 우리들에게는 가장 나쁜 상황인 거지요. 네,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는 왕이 이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고 하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 내용을 3절부터 계속 설명하고 있어요.

 

좀 더 구체적으로 12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2.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왕이죠. 참된 왕이죠. 이런 점에서 보면 왕은 메시아라고도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설 할 수 있습니다.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를 건진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13절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13.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14.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네, 여기 두 종류의 사람이 반복해서 나왔습니다. 궁핍한자, 가난한자,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 그들을 돕고 그들을 건지고,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고, 하는 그런 일들이 필요하다고 하는 거지요. 참 중요한 말씀들이죠. 예, 이 시편 72편 기자가 기도하고 있는 그러한 내용은 정말 오늘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15절에 계속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5.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송하리로다 생존, 생존을 보장 하는 거죠. 예, 쭉 그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게 정말 중요한 관점이죠.

 

18절입니다. 18.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다 하고 겁니다. 기이한 일들은, 가난한 자 궁핍한 자 이러한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되는 일들이거든요? 인간의 역사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걸 행하는, 오직 그것을 홀로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분을 찬송하며, 예, 결국 이 시편기자가 말할려고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왕을 칭송하는 것은 아니예요. 용비어천가는 결코 아닙니다. 그 왕에 대한 기도라고 한다면 혹은 왕을 위한 기도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왕이 무슨 일을 해야 되느냐 그러한 데에 초점을 두는 거구요. 더 바르게 우리가 말씀을 이해한다면 구체적인 역사에 나타났던 어떤 왕이 아니라 구원자에 대한 희망이고요,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오직 그 하나님만이 행하 실 수 있는 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찬송하자고 하지요. 19.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아멘이 두 번이나 연속되어 있어요. 이런 표현들은 참 드문데요. 제가 지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멘을 반복한 구절이 여기 말고 또 어디 있을까요. 있을 가능성이 있긴 한데 제가 그걸 딱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다 그렇다 그러한 후렴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 지어다, 이게 이러한 찬양을 부를 수 있는 마음을 가지려면 가난한 자 궁핍한 자에 대한 연민이 얼마나 깊어야 되는지 알아야만 되는 거지요.

 

오늘 이 사회는 정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 궁핍한 자에 대한 연민보다도 잘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생각이 득세하고 있지요. 그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는 없습니다. 네, 한국교회에 그렇게 많은 찬송이 많고, 예배가 있지만 과연 가난한 자, 궁핍한 자가 살아가야 할 희망 혹은 그러한 믿음, 어떤 결단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19절에서 한 가지 더 짚을 것은요. 영화로운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를 여러분들이 잘 아셔야 되요. 영화롭다고 하는 표현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만 홀로 그 구원을 하실 수 있는 능력자이기 때문에 영화롭다고 하는 단어가 붙는 겁니다. 그 이외의 피조물이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영화롭다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이 19절이 참 찬송가 가사로 우리가 자주 들을 만한 내용인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 지어다 예, 빈 말이 아니잖아요?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고 하는 것이 어떤 상태일까요? 구원이 이 땅에 실현되는 세계를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일들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 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정의로운 재판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행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 그럼 마지막 질문이 그렇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거냐 하는 거지요. 우리 인간은 정의로운 재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돈, 뇌물을 받고 억울하게 재판한다, 크고 작은 그러한 불의한 일들을 만행한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근본적으로 없다고 한다면, 거꾸로 하나님만이 홀로 그러한 일들을 행하 실 수 있다고 할 때 ,그러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행해야 된다고 해야 하느냐는 거지요. 우리는 근본적으로 능력이 없으니까 가만히 하나님이 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거기에 긴장이 있는 거예요. 지금이 대림절 기간인데요. 궁극적으로는 기다림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생명의 완성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활 생명을 이뤄 낼 수는 없는 거잖아요? 유전 공학을 아무리 발달시킨다고 해도 그것으로 부활 생명이 가능할까요? 우리가 유전공학의 도움을 받아서 앞으로 천년정도 수명을 늘인다고 하면 그게 정말 영원한 생명, 부활 생명일까요? 아닙니다. 지금 칠,팔십년 사는데, 오백년 산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더 피나요? 더 생명의 본질을 우리가 경험하게 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는 생명은 하나님의 은총, 선물이라고 말 할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신앙이 역사패배주의에 빠지면 안 되는 거지요. 모르겠다, 그냥 기다리기만 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재림 심판에서 일어날 그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혹은 그러한 세계가 오늘 우리의 삶 안에 선취 방식으로 개입했다고 하는 그러한 사실에 눈을 떠야 되는 거지요.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오늘 어떤 방식으로 투쟁하고 살아가야 될지 답이 나옵니다. 그래도 여전히 조금 확실하지 않은 건가요? 아니, 그러면 우리가 정의, 민주화 정의, 경제 쟁의, 이러한 것들을 위해서 운동가가 되어야 되느냐 질문이 가능합니다. 예, 그렇게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면 좋구요.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예, 말을 더 하기는 좀 힘들겠군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레벨:11]질그릇

2009.12.31 19:47:13
*.138.121.195

라라 집사님!

얼마동안 집사님의 흔적이 없어서 궁금했습니다.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셨는지요.

시편을 녹취해 주셔서 면목없이 잘 읽고 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님에도 끈임없이 임하시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2010년 새해에도 주님의 은총으로

더 깊은 영성의 심화를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추위에 건강 유의하세요.

profile

[레벨:38]클라라

2009.12.31 22:28:01
*.229.151.223

박목사님,

그동안 평안하셨지요? 제가 다비아에서 잠깐 잠수한 것도 아시는 것을 보면

목사님께서는 자주 들어 오시는 거네요?^^ 그렇지요?

별다른 일은 없었구요. 좀 나대는 것 같아서 자중을 할라고 했어요.ㅋㅋ

 

목사님, 시편녹취 말씀하시니 제가 오히려 더 면목이 없어요.

지금 2편부터 40여편이 밀려 있는데,게으름만 피우고 있네요.

정신차려서 언릉 마무리 해야겠어요^^

목사님께서도 내년에도 더욱 건강하시고,

주님의 은총 듬뿍 받으시기를 기도 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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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2편 녹취록- 야훼 하나님의 주권 file [1] 박은옥 2010-01-04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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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71편 녹취록- 주는 나의 소망 file [1] [13] 박은옥 2009-12-23 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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