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73편 녹취록-하나님의 성소에서

조회 수 1703 추천 수 0 2010.01.10 08:03:56

시편73편 강해-하나님의 성소에서

예, 시편 73편입니다. 좀 길지요. 28절까지 있습니다. 그 앞에 있는 72편은 20절까지 있구요, 좀 긴데, 오른쪽 방향으로 가 볼까요? 한 절씩 돌아가면서 읽겠습니다. 가능하면 내용을 생각하시면서, 집중 하시면서 다른 것 생각하지 말고, 요 말씀 요게 한글로 씌여져 있죠? 물론 구약은 히브리어인데 그게 번역되어서 이렇게 왔어요. 그래도 이게 원어는 아니지만, 한국 사람이라고 한다면 요러한 글자 하나하나, 요 방식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요런 글자, 언어, 소리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거예요. 요런데 집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 우리 훈련이라고 생각하면서 잘 읽어 보겠습니다. 제가 1절 읽겠습니다.

 

1.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4.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5.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6.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7.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8.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9.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12.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13.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15.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16.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17.하나님 성소에 들어 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20.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1.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22.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23.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아멘! 네, 여기 마지막 절 보세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는다가 두 번째고,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가 세 번째입니다. 요 28절에도 세 가지 문장이 나온다고 볼 수 있는 거예요, 세 가지 신앙의 태도입니다. 어때요? 이게 느껴지시나요? 어떤 뜻일까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뭐, 이 낱말 뜻 이야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진짜 그러냐 말이죠, 예,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이해 하려면 성서가 말하는 복이 뭐냐를 전제해야 됩니다. 여기서 이 시편을 쓰는 사람은 정말 힘들었어요. 인생살이가요. 다른 사람이 볼 때 저 친구가 정말 인생을 왜 저렇게 사나, 고생바가지, 예를 들자면요. 실제로 자기도 그렇게 생각했구요. 그런 사람을 복이 있다고 전혀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른 차원에서 복이 있다고 하잖아요? 요런 맥락으로 우리가 들어가야 되는데, 요건 쉽지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은 합니다마는 그게 이제 이런 거죠?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 자체가 복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건 들었던 이야기일겁니다. 이걸 아주 실질적으로 느끼는 거하고, 아, 그걸 이제 그냥, 사전, 아니면 네, 그렇죠, 한글사전 이런데서 찾을 수 있는 것, 그런 정보로 아는 것하고는 차이가 있는 거거든요?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이 참된 복이라고 하는 세계 속으로 이 사람이 들어 간 거예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들어가지 못했으면서도, 좋은 말이니까 그렇게 따라 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게 뭐예요? 이게 어렴풋이 굉장히, 우리 손에 딱 잡히지가 않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도 오해가 많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앞으로 시편을 하나하나 쭉 공부하면서 나가겠습니다마는 여러분들은, 저도 똑같이요, 인류역사에서 가장 영적으로 경지가 높았던 사람들의 글을 읽는 거예요. 예, 이건 제가 충분하게 설명을 못하는 게 문제이지, 이들이 경험했던 어떤 하나님의 존재신비? 하나님과의 일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 이런 것들은 현대 그 어떤 철학자들보다 뛰어난 그런 세계입니다. 우리가 그 세계 속으로 가능한 대로 천천히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편을 공부하는 게 한 절 한 절 설명할 수도 있는데요? 그렇게 되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요.

 

이 73편 이 하나만 갖고도 한 절 한 절 다 하려면 한 달 정도 해도 뭐, 시간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28절 마지막 읽은 구절에서 세 문장 나온다고 했으면서 뭐, 복이 뭐냐, 하나님과 일치가 뭐냐, 이런 얘기를 하잖습니까? 이런 식으로 나가려면 끝이 없는 거죠. 이제 우리는 그래도 모든 것을 다 짚고 나갈 수는 없구요. 어느 정도 진도가 필요하니까 한 절 한 절 하는 것 보다는 전체를 요약하는 방식으로 공부하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제가 미리 요약한 글을 복사해서 드렸어요. A4용지로 딱 한 매입니다. 한 장이니까 원고지로 한 9장정도 될까요? 이 73편을 제가 나름대로 정리한 겁니다. 이건 물론 제가 쓴 글입니다마는 시편주석을 제가 조금 참고로 했어요. <국제성서주석>이라고, 그 시리즈의 한 부분인데, 그 시편 주석을 누가 했는지, 아직은 제가 알아갖고 오지 못했네요. 다음 주에 올 때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국제성서주석>이라고 성경을 주석한 시리즈인데,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있습니다. 예, 그걸 제가 참고로 하고 제 입장에서 이것을 좀 설명한 내용입니다. 강의초안이죠? 이걸 중심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먼저 그 73편의 표제가, 제목이죠? 말하자면, “아삽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표제가 안 달려 있는 것도 있지만, 달려 있는 것도 많고요. 안 달려 있는 게 없죠? 제가 말을 실수 했나요? 제목이 안 달려 있는 시편, 없나요?** “다윗의 시”이게 제일 많구요. 거의 다 달려 있네요.

 

**제목 없는 시편:(1,2,43,71,91,93,94,95,96,97,99,104,105,106,107,111,112,113,114,

115,116,117,118,119,135,136,137,146,147,148,149,150편)

 

예, 주로 많이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이다, 솔로몬이다, 아삽이다, 얘기를 하지만, 이게 바로 그 사람이 썼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옛날의 어떤 글쓰기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위대한 사람의 이름을 빌려서 쓰거든요? 이 시편도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삽이라고 하는 이 사람, 이 사람이 활동하던 때는 뭐, 다윗시기(時期)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아주 오랜 전이죠, 이 시편은 대개 기원전 바벨론 포로 이후니까 시간이 천년정도 차이가 납니다. 실제로 아삽이 활동 할 때하고 실제로 시편이 기록될 때하고 차이는 그 정도 나요. 어쨌든 그래도 이 표제, 제목이 “아삽이 쓴 시”다 이렇게 달려 있으니까 그 아삽이라고 하는 사람의 활동이라고 하는 것을 잠깐 다른 데서 참고를 해서 적었습니다.*** 뭐,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까 지나가시기 바랍니다.

 

***시편 73편은 ‘아삽의 시’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이런 표제가 붙은 시편은 50편, 73편-83편이다. 아삽은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져 왔을 때 헤만, 에단과 함께 찬송하는 직무를 맡았던 레위인으로(대상 6:39;15:19) 언약궤가 적절한 처소에 놓이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과 감사를 드리도록 임명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대상 16:4-6) 다윗 통치 때에 아삽의 아들들은 음악을 통해 예언을 하였으며(대상 25:1,2), 후에 계속해서 그의 자손들이 왕궁에서 음악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의 이름으로 전승되었다고 해서 그가 이 시편의 원래 저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73편의 주제는 크게 보면, 욥기하고 비슷한데요? 욥기서 아시죠? 대개 아시죠? 욥기이야기는요, 욥기는 사실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의 신앙적인 단편소설? 그렇게 보시면 될 거예요. 구약성서는 39권이 있는데, 거기에는 역사도 있고, 시, 노래도 있고, 또 잠언처럼 경구들을 모은 문서들도 있고요. 그렇게 단편소설, 에세이, 여러 종류의 문학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그런 글들이 있습니다. 예, 욥기는 여기 73편과 똑 같은 주제인데, 신학적인 용어로 신정론이라고 합니다. 거기 귀신 신(神)자에다가 바를 (正)자 그리고 논할 논(論)자, 그래서 신정론((神正論, Theodizee)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테오디쩨, 이것은 제가 독일어로 쓴 것이고요, 영어로 테오디시(theodicy=theos+dikē)라고 합니다. 신정론, 아마 들어 보신 분들이 있겠습니다마는 내용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이러한 질문을 피할 수 없어요. 지금도 계속되는 거구요. 다음과 같은 겁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정말 사랑이시고, 그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한다면, 왜 이 세상에 부조리(不條理)한 일들이 벌어지느냐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렇잖아요? 무죄한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요, 그리고 못된 사람들이 잘 되고,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나, 하나님이 정말 사랑이 있다면, 무죄한 자가 이유도 없이 고난 받고 하는 것을 내버려 두시는가, 사랑이 있지만 대신 능력이 없으신 분 아니냐, 이런 질문이 가능한 거죠, 능력도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충만하신 분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것들이 이게 어떻게 해명될 수 있느냐 그러한 질문입니다. 이 73편이 그런 주제거든요? 그런 것에 대한 설명을 여러 가지로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다른 때 이미 했기 때문에, 앞에서 시편 공부하는 중에 나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다시 반복하지 않겠고, 앞으로 또 나올 예정이니까, 그때 마다 또 조금씩 더 하겠습니다. 네, 이것에 대해서 우리 기독교가 완전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아직은 비밀이에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해명 할 수 있다고 하면 조금 착각입니다. “어? 그러면 기독교가 불완전한 거네?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더 정직한 것이구요?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자세입니다.

 

우리 어떤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늘 이 테두리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제가 가끔 예로 든, 우리는 질그릇이거든요? 하나님은 토기장이이기 때문에 토기장이 뜻을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거죠, 이런 질문들은 주일학교 아이들도 할 수 있는 거구요? 뭐, 창세기 나와 있는, 하나님이 그 선악과, 왜 아담이 따 먹게 해 갖고 죄를 짓게 하고 그걸로 인간이 죽음에 이르게 까지 하고 왜 이러냐, 하나님이 세상을 지어 놓고서 아름답다고 말씀 하셨고 인간을 만드시고는 더 감탄하셨는데, 하나님의 창조능력이 불완전 한 것 아니냐, 그러한 질문하고도 연관되는 겁니다. 예, 이런 것들은 답이 없는 게 아니라 간접적으로 주어지는 건데요? 오늘 우리가 이 시간에 진도를 더 나가야 하기 때문에 일일이 이것을 다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는 것이구요, 기회가 되는대로 오늘 천천히 이야기 하도록 합시다. 여러분들이 같이 공부해야 될 것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좀 생각을 해야 되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될 책임이 있는 거죠,

 

예, 신정론에 대한 주제가 여기 이 73편의 주제입니다. 의로운 자가 고난 받고 악인이 잘 되는 이유가 뭔가 하는 질문이 계속 되고 있는 거예요. 이 시편기자가 굉장히 솔직합니다. 참, 성서를 기록한 개인이나, 혹은 공동체 전체는 이렇게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는 게 없어요, 대단히, 뭐라고 할까요? 정곡을 찌른다고 할까요? 피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하죠,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는 미궁에 빠지는 게 아니라, 거기서 어떤 대답을 얻어요, 그런데 문제의식은 굉장히 심각합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우리 일반 신자들은 문제의식이 너무 없죠, 전혀 없죠, 예, 성서기자들이 얘기하는 영적인 세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내가 여기에서 기독교나 성서를 이용해서 얼마나 편안하게 사냐, 자기위로, 자기위안 삼는 것, 이런 정도로 떨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해 갖고는 백날이 가도 성서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기 힘들겠죠? 성서기자는 솔직하게 그러한, 당신 믿지 못하겠다, 그런 말들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만한 자들이 다 잘되요, 계속 나오죠?

 

1절부터 쭉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2절 보세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거는 시험에 들릴 뻔 했다는 겁니다, 무슨 시험요, 아, 교만한 자가 잘 되고 말이지? 의로운 자들이 저렇게 힘들어 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도대체 있냐, 없냐, 당신을 믿을 필요가 있냐, 없냐 그런 것으로부터 자기는 완전히 멀어 질뻔 했다라고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게 역설적인 얘기지만, 하나님이 없는 거 아니냐, 하는 그러한 상태까지 들어가지 못하면, 그럼 하나님 믿을 수 없습니다. 예, 근원적인 상태에까지 갈 수 있어야 되요, 성서기자들은 늘 거기 끝까지 갔습니다. 끝까지, 그리고 위대한 종교적 작품들은 다 그런 질문을 붙들고 있는 거지요, 제가 설교시간에도 한번 비유로 든 이야기입니다만, 백척간두(百尺竿頭)라고 하는 말이 있잖아요? 백척간두, 불교용어입니다마는 장대 꼭대기에 올라가서, 깜깜하죠, 한 발만 잘 못 디디면 낭떨어지로 떨어지는데,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거기서 한 걸음 나가야 시방세계(十方世界=온 세계),세계전체가 보인다, 이런 불교의 독특한 깨달음의 세계를 설명한 건데, 그런 것들이 기독교신앙에서도 그렇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어떤 절대적인 것 앞에 선다는 것은 정말 어지럼증을 느끼는 거고, 하나님 없는 것 아니냐 내가 정말 돌아가는 것 아니냐, 그런 데 까지 나가는 경험인거죠, 그러니까 이 시편기자가 도저히 하나님을 믿기 힘든 현실을 본 거예요. 이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 말이죠, 그래서 미끄러질 뻔 했다,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그 뒤로 쭉 그런 얘기를 합니다. 참 표현을 문학적으로 잘 하고 있어요. 6절,7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7.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다 교만하고 악한 사람들인데, 뭐 존경받고 다 잘되고 있다, 얘기지요, 13절에 그래서 결국 그가 빠질 뻔 한 시험은 뭐냐 하면, 거기 나오는 거죠,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말짱 헛일 아니냐, 내가 하나님 뜻대로 바르고 정직하게 살고 열심히 그렇게 한 것,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 그런데 까지 이 사람이 빠져 들었습니다. 그럴 만한 거죠, 진지하게 세상을 바라 볼 때는, 뭐 하나님 믿고 바르게 사는 것 보다 그냥 수단 가리지 않고, 용케 그러면서도 존경 받고 배고픈 것도 없고 평안하게 사는 그런 현실이라고 한다면, 내가 이렇게 한 일들이 좀 우스운 게 아니냐, 그런데 까지 빠졌습니다.

 

14절, 15절은 그가 당한 어려움들이구요, 그런데, 거기서 방향을 못 잡고, 완전히 이상한 데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17절에 보면 그가 무얼 깨달았어요, 하나님 성소에 들어 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그들은 교만한자, 아주 평화롭게 사는 것과 같이 자족하고, 사람들이 볼 때에 인정할 만한 그러한 삶을 살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굉장히 악한 그리고 아주 교만한, 거만한 그러한 사람들이 끝장이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거죠, 성소라고 하는 것은 예배드리는 거죠, 성소에 들어와서 예배드리는 것,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다음에 그렇게 잘 난 척하는 그러한 사람들이 별거 아니다, 끝이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겁니다. 전혀 새롭게 세계를 보게 된 겁니다. 그 설명을 더 18절에 합니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음, 읽다 보니 아까 읽은 2절하고 대비 되네요. 그렇죠?

 

18절 다시 봅니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렇게 되어있죠? 2절은 아까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그러니까 2절에 미끄러질 뻔한 사람은 나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미끄러질 뻔한 사람은 내가 질투하던, 배 아파하던 그런 교만한 사람들이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무얼까요? 정말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교만한 사람들은 신세를 망친다고 하는 그런 얘기일까요? 사업도 망하고 모든 게 다 이상하게 헝클어진다고 하는 얘길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여전히 그들은 잘 됩니다. 이 시편기자는 전혀 다른 차원을 얘기하는 거예요. 고것을 우리가 포착하지 못하면,우리는 쓸데없이 세상에서 경쟁을 하고, 쓸데없이 우리가 교만하게도 되고, 또 낙심하게도 되거든요? 여긴 그들이 미끄러운 곳에 가고 파멸되고, 19절에도 보면, 더 강조되고 있죠, 갑자기 황폐되었고, 아주 전멸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 말이죠? 그들은 여전히 그대로 부자이고, 뭐, 예를 들자면 그런 방식으로 살아 가는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눈으로 볼 때에는 이미 끝장이더라, 그 얘기입니다.

 

그 표현을 20절에 그렇게 이야기해요, 꿈으로 얘기해요, 꿈, 아, 그 꿈 이야기 하기 전에 제 강의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걸 좀 설명하고 넘어 가야 되겠네요, 아, 꿈 얘기하고? 아, 예, 꿈과 같다, 그 얘기군요. 꿈, 아,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예, 번역이 싹 들어오지는 않습니다마는 의미는 우리가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교만하고 속으로 악하고 그러면서도 존경 받는 것처럼 그렇게 사는 삶, 악한 자들이 잘 되는 그러한 삶들은 마치 하나님의 꿈과 같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현실이 아니라고 하는 거지요, 우리가 꿈을 깬 다음에는 꿈을 무시하는 것처럼, 그 모든 삶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멸시 당한다, 의미가 없다 그 얘기죠, 예, 그 얘기를 여러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게 가능할까요? 그리고 옳을까요?

 

제 강의안에서 그게 좀 중요하다 싶어서 설명을 더 해 봤습니다. 고 부분을 제가 읽어 보겠어요, 위와 같은 시편 기자의 판단은 옳은가? 이런 시편 기자의 영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것만이 그게 정말 현실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아닌 것들은 꿈이다, 꿈, 다시 좀더 가요, 아니,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다. 예, 이건 시편기자의 영성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이제 다른 걸 믿는 거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시편 기자의 이런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출세하고 건강하고 부자가 되도록 우리를 돕는 분이 아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러면 우리를 뭐, 아주 불치병에 걸리게 하고 우리 인생을 허물어뜨리는 분이냐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다른 방식으로 해결 되는 거예요. 그거는 하나님을 잘 믿지 않아도 건강할 수 있고, 믿어도 몸이 약할 수 있고요, 그걸 갖고 태어나면, 평생 골골 하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여튼 우리의 살아가는 삶은 그런 거예요, 그런데, 그런 조건들, 추수를 많이 거둬들이는, 그런 조건을 채우는 신은 우상이다. 그게 바로 우상인 거예요.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서 아는 이야기지요.

 

하나님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명의 근원입니다. 요게 어쩌면 제가 말씀 드리려고 하는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명의 근원이다. 이게 좀 막연하게 들리실지도 모르겠어요. 너무 관념적으로요, 이걸 어떻게 더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제 능력으로는 좀 안될 것 같애요, 그러나 앞으로 차츰 차츰 이런 방식, 저런 방식으로 좀 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명의 근원이다, 고거는 좀 여러분의 머릿속에 입력시켜 놓으면 좋겠습니다. 아, 어떻게 할까요? 그래도 예를 들어서 요거는 설명하고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어릴 때 우리는 동네 나가서 아이들하고 재미있게 놀지 않습니까? 그 때는 그게 현실인거예요, 그래서 딱지치기하고 많이 따고, 구슬치기하고, 심지어는 싸우고 말이죠, 그리고 동네 힘 쌘 아이들은 빼앗기도 하고, 그렇게 하지요, 아, 그런데 그 아이들은 놀이가 끝나면 다 돌아가야 되거든요? 정말 그 아이들의 현실은 그게 아니라 가정, 부모들과의 관계가 현실인 거예요, 그 놀이는 그 시간에만 꿈꾸듯이 놀고 있는 거고 말이죠, 그러니까 놀고 있을 때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녀들과의 관계라고 하는 현실, 그 알맹이 그런 것들은 그거는 보이지가 않습니다. 완전히 정신을 놓기 때문에, 애들은 정신을 놓고 놀잖아요? 애들 놀이는 참 중요한 겁니다. 놀이 자체를 제가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비유적으로 설명을 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여기서 노는 식으로 살고 있잖습니까, 이게 전부로, 이것만 우리 눈에 보이는 거죠, 그런데 보이지 않는 현실성, 이것을 봐야만,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것이 조금씩 들어오게 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가 이렇게 실질적으로 사는 삶 가운데 어떻게 경험이 될까요? 어떤 방식으로요, 여러분들이 실제적으로 어때요? 하나님의 경험을 사람들이 많이 한다고 그러니까,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 경험은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맘에 좀 맺힌 게 있더니 막 기도했더니, 확 풀어지더라, 그래서 하나님 경험했다, 그런 사람들도 있을 거구요, 등등.. 여러 가지이겠지요, 한국교회 신앙의 특징 중 하나가 예수 영접이라고 하는 거거든요? 탕자가 문제가 있다 돌아와서 아버지 만나듯이 말이죠,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는 하나의 사실에 아주 몰입하고 있습니다. 아, 조금 신앙생활 하다가 약간 느슨해지면, 다시 예수 영접 했던 그 순간을 기억해야 되고, 계속 그런 쪽으로만 가게 됩니다. 그게 하나님의 경험일까요? 그건 자기감정, 자기 확신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어떨까요?

 

하나님 경험, 생명의 근원의 하나님 경험을 어떤 때에 경험할까요? 이건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 개인적인 입장만 말씀 드리면 이렇습니다. 각자 다를 텐데요, 저를 말씀 드린다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성서를 읽거나, 신학책을 읽거나, 그리고 세계를 보거나, 그 외의 다른 책을 보거나, 등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생명의 신비가 나한테 이렇게 열릴 때, 그게 하나님 경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게 인제 어떤 때는 길을 가다가 하늘을 볼 때가 있는데요? 아니면, 어느 집 담 밑을 걸어가는데, 저녁 밥 냄새가 난다든지, 그런 경험들이 생명의 어떤 신비를 그런 것들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요, 그리고 또 지금 이런 시간에 이런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한다고 하는 사실이 저에게는 아주 신비롭습니다. 이렇게 살아 있다고 하는 사실 말이죠, 그래서 무얼 본다고 하는 것, 색깔을 본다고 하는 것, 냄새를 맡는다고 하는 것, 그리고 이런 공간적으로 무얼 어떤 것들을 지각한다고 하는 것, 느낀다고 하는 모든 것들이 아주 신비롭습니다. 예, 그런 걸로만 머무르지 않는 거구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과 이런 것들이 신학적인 영성 안에서 풍요로워질 때 저는 하나님의 경험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신비에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다. 우상을 섬기면서도 그걸 하나님인양 착각 할 수 있는 거지요. 네, 고기까지만 공부해도 시간이 많이 갔네요. 다 충분히 했는데 거기까지가 핵심적으로 중요한 거였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문제로 시험에 빠졌었는지는 아까 설명해 드렸지요? 현실을 보니까 이거는 도대체 말이 안 돼, 이거 갖고는 하나님 믿을 수 없다고 하는 데까지 들어갔었는데, 미끄러질 뻔 했는데, 성소에 들어가서 사람들이 자랑하고 있는 것이 한 갖 꿈이구나, 알게 되고 하나님과의 일치에서만 어떤 생명의 현실들, 알맹이들을 확실히 붙들 수 있었습니다. 아주 놀라운 경험을 한 거죠, 거기까지만 하면 오늘 73편의 중요한 내용은 다 한 건데요? 그래도 뒤의 정리한 부분들이 있어서, 한 번 지적하겠습니다. 다 하지는 않구요,

 

핵심적으로 중요한 구절, 25절, 이 사람이 하나님과의 일치라고 하는 경험을 하니까, 어떤 신앙에 도달하게 되었냐면 이렇습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그토록 악한 사람들은 저렇게 잘 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 모양 이 꼴이고,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제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니까요? 하늘과 땅에서 더 이상 자기는 더 요구할 게 없다, 이렇게 그런 상태로 들어 갔어요, 마틴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 그것을 제가 직역해 왔는데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문구를 보면 이렇습니다. 나가 아니라, 내가, 내가 오직 당신을 소유한다면, 벤 이히 누어 디히 하베(Wenn ich nur dich habe)요렇게 되어 있어요, 벤 이히 누어 디히 하베, 내가 당신을 소유한다면, 하나님을 소유할 수는 없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과 일치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하늘과 땅에 대해서 질문할 게 하나도 없다, 조 후라게 이히 니히츠 나흐 힘멜 운트 에르데(so frage ich nichts nach Himmel und Erde.)이라고 되어 있더라구요, 후라게 이히 니히츠, 나는 물을 게 하나도 없다, 힘멜 운트 에르데, 하늘과 땅에 대해서, 더 이상 이제 나는 물을 게 없다, 요구할 게 없다, 그런 상태에 들어 가게 된 거예요. 놀랍죠? 이 시편이, 허망한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성경을 잘 모르시는 겁니다.

 

네, 마지막 패라그래프, 이제 이 사람은 불의한 자들과 교만한 자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 불안해하거나 속상해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28절) 그래서 그는 여호와를 피난처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시편에는 피난처라고 하는 단어가 많이 나오죠, 그냥 나온 얘기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만이 우리 영혼의 피난처라고 하는 거예요,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세상에는 피난처가 없습니다. 이건 아주 명명백백(明明白白)한 사실인 거예요, 애들이 철부지 였을 때는 모르죠, 군것질하면 재미있게 사는데, 우리가 군것질하는 식으로 세상을 살 수는 없잖아요? 예, 군것질 몇 개 먹고 만족하고 그런 것 아니잖습니까? 정말 그런 쪽으로 우리의 시야가 넓어지게 되면, 하나님만이 피난처고, 그만을 찾게 되고, 그를 전하며 살겠다 그렇게 이야기 하게 됩니다. 우리가 같이 모여서 공부하는 첫 시간이었어요, 제 얘기가 두서없는 부분들도 있긴 있었을텐데요? 그래도 전체적으로 시편 73편이 말하려고 하는 내용은 대충 전했다고 봅니다. 저도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전하려고 따로 준비를 하다 보니까 말씀이 저에게 더 새로워지네요? 여기까지 일단 하고요, 질문 있으면 질문 받도록 하겠습니다. 


[레벨:18]눈꽃

2010.01.12 14:53:07
*.187.19.193

라라님! 시편강의 녹취록을 작성하면서 감격하고 행복해 하실
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명의 근원이다, 고거는 좀 여러분의 머릿속에 입력시켜 놓으면 좋겠습니다."


성서를 읽거나 신앙서적의 글들을 읽을때 요거는 꼭기억해야지 하며 언더라인에 형광펜에 별표까지 해놓으면서 거기다 어떤때는 여백에 "중요함 기억할것 "이라고 써놓고 거기다 이런 기도까지 주님! 저요 이거 아주 중요한 것 같은데 제가 기억력이 부족한거 주님도 아시잖아요 그러니 꼭 기억나게 해주세요 꼭이요 라고까지 하는데도 이게 영~다 기억을 못하지요  그런데 그런데요 정말 중요한 시기에 기억나는거 있지요 ㅎ ㅎ ㅎ

라라님!
녹취록 올려주시느라 수고많았습니다
감사드리며 주안에서 행복하시길......

profile

[레벨:38]클라라

2010.01.12 16:50:40
*.229.151.223

집사님, 이 라라의 과부심정을 홀애비 눈꽃집사님께서 딱 알아 맞춰주시는구만요^^

그렇슴다. 집사님, 저는 시편을 녹취하면서, 요것이 바로 "미야자키의 색깔단추"구낭...싶습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안 보셨음 꼭 보셔용^^)

정말이지 "하나님의 광활한 세계" 요 세계를 이미 3000년전에 훤히 발견하신 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로서)자신의 겸비함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정말 감탄 밖에 안 나온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는 "겸비함"이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는군요.

 

제가 유독히 시편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깊은 의미를 모르다 보니 엉뚱한 해석을 남발하기 일쑤였지요.

"왜 이 사람들은 맨날 고달프기만 한가, 시대적으로 그랬나? 그래도 그렇지 너무 침체된 신앙아닌가?"

뭐 이런 망발이었지요.

그런데,

이 시편이 제게 새롭게 열리기 시작했어요.

제작년 3월부터군요.

저는 귀를 쫑긋 세우고 시편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이 시편녹취록이랍니다.

 

집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이 강해를 들으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을 누린답니다.

오늘 새벽엔 막 시편 8편을 녹취중에 있었습니다.

창문을 여니 찬 바람이 콧등을 스치더군요.

아, 살아있음!! 그렇습니다. 매 순간, 내가 "생명"이라는 것이

늘 감격스럽습니다.

아둔한 제가 이 시편기도, 찬양에서 깨달은 참 보배랍니다.

목사님께서 요새 "부활생명"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제게는 유난히 집중적으로 들려오네요)

그 옛날 시편의 영성가들은, 엠마오의 제자들과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그 부활의 예고를 이미 알리셨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게 되는군요.

이것이 거룩한 두려움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분에게 사로잡히는 것 외에 우리가 바랄 것은 더 이상 없겠지요.

"내가 오직 당신을 소유한다면, 그러면 나는 하늘과 땅에 대해서 질문할게 하나도 없다."

 

집사님, 우리 함께 이 길을 걸어가 보아요!!

알 라뷰.. 집사님!!

[레벨:18]눈꽃

2010.01.12 18:35:02
*.187.19.193

패러디 ㅡ"내가 오직 당신을 소유한다면, 그러면 나는 아무 것도 바랄 것이없다"

20년전 어느날 시어머니가 책정리하시느라고 책을 한더미 내놓으신거야요 그런데 그책더미에서 조그만 소 책자를 발견했는데  제목이 <기도>였어요저자도 기억을 했었는데 이렇게 잘 까먹어요 제가 그책을 얼마나 열심히 봤는지 정말 너덜너덜 해질대까지 그즈음에 보던 어떤 책보다 신선 했습니다 (20년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그책중에 요15장 7절(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캬 ~~ㅎ너무 강렬하게 다가오는데 .....
 그때 부터 이귀절을 제나름으로 백지수표라 이름붙였답니다
그런데 그책 저자는 .....면 즉 조건을 강조하더라구요 그리고 말씀을 풀어가는데
참 순진하죠 그래 맞다 !이거야 이거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내말이 너희안에 거하면 이라 했것다   거기다가 예수님께서 친히.......
좋다! 그이후 쭉 내말이 너희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너희가 내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거기에 매달렸습니다 쭉~쭉~~~


20년후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백지수표를 사용했을까요?
아니 그구절이 정말 백지수표였을까요?
.
.
.
기냥 ~~그 구절이 무엇을 의미 하는가를 깨달았을 뿐!..........

"기도의 응답은 깨달음이다"ㅡ 눈꽃

[레벨:9]김용남형제

2010.01.12 18:46:07
*.11.250.52

라라 집사님의 홍보 댓글과 눈꽃 집사님의 '강추'를 듣고,

넘 방대해서 어지러워보이지만, 차근차근 시편공부 녹취록을 읽어가기로 맘 먹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종말이 닥쳐오니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지금은 교회가 '잠든 예수'를 흔들어 깨워가는 여정에 놓여있지 않나하고 생각했었는데,

시편 기자가 이미 '주께서 깨신 후'라는 표현을 사용했었군요.

어찌보면, '이경규의 몰래카메라'라는 옛날 코미디 프로그램처럼, 지금의 코미디 같은 한국교회 상황을 포함해서,

교회와 세상은 다함께 '예수의 몰래카메라'에 속고 있는 게 아닐런지.

예수께서 나타나셨을 때, 그 분의 기나긴 유머를 깨닫고 폭소를 터뜨리는 사건이 곧 '종말론적 생명 완성'은 아닐런지.

그런 점에서 교회는 보편사적인 해석학의 확보 이전에 신학적인 사유와 성찰을 게을리해선 안되겠지요?

한동안 철학과 신학 중에 무엇을 우위에 두고 공부할까로 많이 고민했었는데,

세계를 읽되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영적인 리얼리티의 끈을 놓치지 않도록,

인문학적인 지평으로 나아가기 전에 신학적으로 철저한 수행을 해나가라는 결론이 나왔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신비'에 영적인 눈을 뜰 때, 인류에게 진정한 '길'을 제시할 '신학적 철학'의 길이 열리겠죠.

요즘엔 가끔씩 집 근처 성당의 새벽미사에 참석하는데,

회중을 싹 무시하듯이 진행되는 철저한 예전 집행에다가, 매일 미사 때마다 성찬식(영성체)을 거행하더군요.

가톨릭의 한계를 알고 있지만, 온전히 하나님의 존재신비와 통치하심에 몰입하는 그 영성만큼은 너무 부러웠습니다.

지난 청소년 시절 동안 꾸준히 은혜 받으러 다녔던 '찬양집회'와 뜻깊은 이별을 한지 두어달이 채 안 되었는데,

어제도 하나님의 지평으로부터 개인적인 감수성의 지평으로 떨어지게 만드려는 시험이 계속 찾아왔습니다.

그래선지, 여러모로 요즘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십사'하는 기도가 진심으로 우러나오는데요,

그래도 마치 '온라인 수도원' 같은 다비아가 영적인 정신줄을 꽉 잡게 만들어주기에, 참 감사하답니다.

다비아를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그런 고백이 나옵니다. ㅎㅎ

놀랍도록 수고하시는 라라 집사님, 감사드리고요, 전부터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목소리 넘 이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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