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11편 녹취록 -야훼는 우리의 피난처

조회 수 1507 추천 수 0 2010.01.20 22:11:03

시편11편 강해-야훼는 우리의 피난처

 

시편 11편 1절부터 11절까지입니다. 오늘은 짧은 구절이군요, 제가 먼저 눈으로 읽겠습니다. 여러분 눈으로 따라 읽어 보십시오.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부른 다윗의 노래〛

1. 나 야훼께 피신하거늘 너희 어찌 나더러 이런 소리 하느냐?

   "새처럼 산으로 도망쳐라.

2. 보라, 악인들이 활을 당겨

    시위에 살을 먹여

    어두운 곳에서 의인을 쏘려 하지 않느냐?

3. 기초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이 마당에,

    의롭다는 게 무슨 소용이냐?"

4. 그러나 야훼께서는 당신 성전에서

    하늘 높이 옥좌에 앉으시어

    세상을 두루 살피시고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계신다.

5. 죄 있는 사람, 죄 없는 사람을 가려내시며

   폭력 쓰는 자를 몹시 미워하신다.

6. 숯불과 유황을 악인 위에 쏟으시며

    불바람을 그들 몫으로 안겨주신다.

7. 야훼, 공정하시어 옳은 일 좋아하시니,

   올바른 자 그 얼굴 뵙게 되리라.

<공동번역>

 

<참고> 개역개정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 인가

2.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 다

3.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4.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 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 하시도다

5.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6.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7.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네, 그러면 이제 우리 같은 목소리로 한 번 더 읽겠습니다.

 

1. 나 야훼께 피신하거늘 너희 어찌 나더러 이런 소리 하느냐?

   "새처럼 산으로 도망쳐라.

2. 보라, 악인들이 활을 당겨

   시위에 살을 먹여

   어두운 곳에서 의인을 쏘려 하지 않느냐?

3. 기초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이 마당에,

   의롭다는 게 무슨 소용이냐?"

4. 그러나 야훼께서는 당신 성전에서

   하늘 높이 옥좌에 앉으시어

   세상을 두루 살피시고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계신다.

5. 죄 있는 사람, 죄 없는 사람을 가려내시며

   폭력 쓰는 자를 몹시 미워하신다.

6. 숯불과 유황을 악인 위에 쏟으시며

   불바람을 그들 몫으로 안겨주신다.

7. 야훼, 공정하시어 옳은 일 좋아하시니,

   올바른 자 그 얼굴 뵙게 되리라.

 

아멘! 오늘 이 시편 11편을 기록한 시인이 처한 형편이 어떤지,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 어느 정도 나와 있어서 알 수 있을 겁니다. 마치 자세하게 알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윤곽은 알 수 있어요. 이 사람은 지금 상당히 큰 위험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그 위험이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오늘 이 시편이 말하고 있지 않지만, 어쨌든 목숨의 큰 위험까지 당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대적하고 있는 거지요. 악인, 죄 있는 사람, 악, 뭐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요, 그리고 이 의인을 심하게 박해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제적으로는 이런 상황 앞에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어려움 상황 가운데 있는데요. 그게 친구들 관계예요. 이것은 흡사 욥이 박해를 받았는데, 그때 하나님을 향한 기도도 합니다마는 욥의 친구들이 와서 욥에게 따지고 들었지 않습니까, 네가 이렇게 된 것은 분명히 뭔가 죄가 있기 때문이 아니냐,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그렇게 좀 새로운 사람이 되라,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다음에 욥의 친구, 욥이 있어서 서로 옥신각신 말이 많이 오고 가는 거예요. 욥기에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욥이 처한 형편처럼 오늘 이 시편기자도 그렇습니다. 아, 지금 상당히 어려운 형편인데, 이 친구들은 아주 도망가라, 여기 있다가는 큰일 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시편기자는 아니다, 내가 어디를 도망가냐, 하나님이 바로 야훼 하나님이 내가 피신할 피난처인데, 내가 어디로 가느냐 그렇게 서로 친구하고의 사이에 논란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예, 그런 것이 오늘 여기 본문의 배경이어예요. 친구들이 하는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면서 계속 나오겠습니다만, 왜 일리가 있냐면, 악인들이 순순히 말을 해서 듣지 않는 거거든요? 같이 부딪혀 봐야 그런 이건 피를 보고 마는 그런 상태에서 아주 정말 악랄한 그런 사람이라서 이 친구들이 시편기자를 향해서 좀 일단 피해라, 그건 일리가 있는 말이죠, 이러한 시편기자가 처한 형편이 오늘 우리들에게 그렇게 확 와 닿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당장 피하지 않으면 죽을 거와 같은 그러한 위험은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며, 우리도 언젠가는 그런 형편을, 조금 종류는 다르지만은 그런 형편을 당하리라고 하는 것을 전제해야 되고요. 또 하나는 좀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우리는 늘 그런 위기를 사실을 맞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그러한 위기, 내가 타협을 해? 아니면 도전해? 이런 것 말이죠?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까지 그런 일들이 우리들에게 늘 있어요. 그게 선택의 문제이죠, 이 시편기자는 친구들이 공연히 부닥쳐서 힘들지 말고, 조금 이렇게 물러서라고 하는 타협적인 그런 방향을 제시했을 때, 이 사람은 거절하고 다른 걸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게 뭔가를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배워 볼려고 합니다.

 

크게 보면 두 가지예요. 1절에서 3절이 한 paragraph가 되겠고, 4절에서 11절이 또 하나의 paragraph가 되겠습니다. 1절에서 3절 이것은, 친구들의 태도예요. 친구들은 이 시편기자를 위해서 하는 말 같지만, 이 시편기자의 눈으로 볼 때 이 사람들은 아주 소심한 사람들입니다. 이 현실의 어려움들이 너무 커서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한 사람들이죠, 친구들의 소심한 태도에 대해서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세요, 나, 나는 이제 시편기자를 이야기 합니다. 야훼를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시편기자예요. 내가 지금 야훼께 피신하고 있는데, 너희, 너희들은 친구들입니다. 너희들은 나 더러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 인용부호로 되어 있는 것이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이런 문학적 표현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꼭 친구가 아니라 이런 삶의 태도가 있다고 하는 그런 걸 이야기 하겠지요. 아, 그러니까 두 가지 삶의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혹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 전체는 어떤 어려운 일이 왔을 때 두 가지 태도를 보이는 거죠, 그 전자의 태도가 바로 1절에서 3절까지 나와 있는 바로 친구들의 소심한 태도입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애요. 새처럼 산으로 도망쳐라,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음, 새처럼 산으로 도망쳐라, 아무도 따라 올 수 없는 거죠, 산으로 도망친다면 말이죠, 어떤 사람은 꿈속에서 맨 날 난다고 하는데, 도망친다고 하는데, 누가 쫒아 오고 도망가고, 참새처럼 도망가고 참 좋겠습니다. 예, 이것도 비슷한 거예요. 정말 이 상황이 나쁘니까, 다 모른 척 하고 그냥 다 내버려두고, 산 속으로 새처럼 도망가라, 아주 간단한 해결 방법이죠, 현실로부터 도피예요. 이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잖겠습니까, 도피적인 그런 신앙 말이죠?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마는 지금 촛불집회, 쇠고기 파동 이런 것들이 있는데요? 한국 대표적인 목사님들이 이런 것들 외면하고 있거든요? 이게 한국 전체 국민들이 80%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걸 반대하고 재협상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아,이런 것에 대해서 아주 무책임하게 발언 한다거나, 아예 외면한다거나 그런 일들이 참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손쉽게 일종의 탈역사주의(脫歷史主義)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허무주의(歷史虛無主義)인거죠, 역사가 사라져 버리는 거예요. 새처럼 숲속으로 그냥 도망가면 되는 현실도피적인 그런 신앙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들일수록 이런 모습들을 우리가 많이 발견할 수 있어요. 친구들 제시해 주는 것이 이겁니다. 지금 악이 보통 악이 아닌데, 도망가라 이 얘기죠,

 

2절에 보면 그 시인을 힘들게 하는 악에 대해서 이 친구들이 이렇게 문학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악인들이 활을 당겨서, 활 나오죠? 시위에 살을 먹여 활, 살 이런 것들이 다 사람을 죽이는 것들이죠? 그리고 어두운 곳에서 의인을 쏘려고 한다, 활, 살, 쏘려고 하는 이 쏘는 것, 이런 것들이, 상황이 아주 어려운 거예요. 예, 가만히 있다가는 뼈도 못 추리는 그런 상태입니다. 아주 설명이 재미있죠? 산으로 도망쳐라, 그 얘기를 한 다음에 그 도망쳐야 될 이유가 그런 거예요. 너무 어렵다 그 상황이, 활을 당기고 있고, 살에 힘을 주고 있고, 어두운 곳에서 너를 쏘려고 하는 것 아니냐, 악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버텨낼 수 있냐, 어두운데서 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 거죠, 그런 상황이 어려운 겁니다. 또 하나의 이유를 3절에서 이야기하는데, 이게 사실은 더 실제적인 이유가 될 겁니다. 2절에 나와 있는 그 이유, 아주 어려운 상황이라고 하는 것을 문학적 수사를 통해서 설명한 것뿐이죠, 활, 살, 어두움, 쏜다, 어두움 이런 것들은요,

 

3절에는 아주 구체적인 겁니다. 이렇게 얘기하죠, 기초가 송두리째 무너진다고 하는 이 마당에 의롭다 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 예, 정말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논리가 있는 거예요. 현실적인 거죠, 기초가 송두리째 무너진다, 아예 생명의 토대가 위험할 정도로 모든 근거가 다 허물어진다면, 그럼 더 직접적으로 얘기하면, 네가 죽는데, 죽음 다음에 의롭다고 하면 무슨 의미가 있냐, 의롭다고 하는 것도 일단 살아 있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그럴 듯 한 거죠? 교회 개혁이나, 올바른 삶도 우리가 거기에 투명하게 항거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옳고 그른 것을 잘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게 무조건 좋은 게 아니지 않느냐 네가 일단 거기서, 뭐라고 그럴까요? 버텨내야, 살아있어야, 좋은 일도 할 수 있지 않느냐, 뭐 그런 타협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이런 경구가 이런데 해당될 것 같습니다. “실존(實存)이 본질(本質)에 앞선다”고 하는 거죠? 실존은 일단,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거거든요? 본질, 이것은 옳으냐, 그르냐 그런 것들이거든요? 아, 그러니까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는 일단 거기서 견뎌내는 것, 이게 중요하다고 하는 철학자들의 논리인데, 저는 이걸 꼭 철학자들의 말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데, 비교해서 그냥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친구들이 이 시편기자에게 뭐, 그렇게 옳은 것, 결벽증적으로 옳은 것을 찾다 보면 너 다 망가진다, 도대체 이 사회에서 견뎌내지 못한다 그 다음에 네가 추구하던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러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의 논리가 어때요? 여러분, 굉장히 현실적이죠, 지금도 많이 이야기하죠? 예, 교회 이런저런 문제들, 자꾸 그거 고민해 봐야 뭐하냐, 그거 접어 두고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풀어 나가도록 이렇게 타협적인, 주장들도 많이 있습니다. 친구들의 논리가 바로 그와 같았어요. 아, 우리가 살다보면 그러한 이야기도 들어야 할 때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이 문제는 옳다 그르다 말하기는 좀 힘들구요.

 

시편기자 오늘 11편을 쓰고 있는 시편기자의 입장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1절에서 3절까지가 바로 친구들의 소심한 태도였구요. 이것에 대해 시편기자가 추구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뭐냐 소심한 상태에 떨어지지 않고 정말 하나님에게 온전히 자기 삶을 맡기는 그런 신앙이 뭐냐 그것에 대해서 4절에서 11절까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웬만하면, 아마 저 같았으면 이 친구들의 충고를 들었을지 몰라요. 그래서 임시 적절하게, 지금 현재 위험하니까 잠시 피했다가 다시 와서 무얼 한다거나 할텐데, 이 시편기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이었구요. 또 확고한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을 겁니다. 마틴루터 같은 사람도 그와 같은 경우가 아닐까요? 교황청에서 종교재판 하겠다고 부르고 있는데, 그 당시 종교재판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이것은 자기 목숨을 담보하는 일입니다. 가장 권위가 있었던 것이 교황이기 때문예요. 역사학자들이 이미 그렇게 이야기를 하죠, 인류역사상 가장 용감한 사람이 바로 마틴루터 였다고 말이지요. 교황청하고, 우리는 지금 별거 아닌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거는 사람이 죽고 살고의 차원이 아니라 파면 당하게 되면, 이건 우리 영혼까지 저주받는다고 하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마틴 루터가 대적했었던 그 교황청의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겁니다. 웬만하면, 교황 말대로 자기가 쓴 책들 파기하고, 대충 좀 원만하게 지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예, 루터는 전혀 그렇지 않고 과도할 정도로 투쟁했습니다. 오늘 시편기자의 이러한 영적인 상태하고 비슷할 것 같습니다. 예, 그런데 잘 보셔야 되요. 이건 무조건 막무가내로 용기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용기라고 하는 것은 실지로 겉으로 나타난 행위라고 하는 것은, 이 사유가 밑받침 안 되면 기분에 따라서 막 나가다가 물러서고 하는 거거든요? 중요한 것은 우리 의식의 변화입니다. 일종의 존재의 변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모든 역사의 혁명가들은 무조건 현장에 나가서 싸우지 않았어요. 모든 혁명은 기본적으로는 책상에서 나오는 거예요. 이 책상은 사유의 문제니까, 의식의 변화니까, 존재의 문제니까, 그걸 바탕으로 한 행위여야지 흔들림 없이 좌고우면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지, 그게 없으면 상황에 따라서 쉽게 뒤 바뀌게 됩니다.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하는 얘기 잘 보세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그런 용기가, 그럴 만한 근거가 여기 있어요.

 

4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야훼께서는 당신 성전에서 하늘 높이 옥좌에 앉으시어 두 가지가 서로 병렬 되어 있지요? 성전, 예, 성전과 하늘 높이 앉으시어 그러니까 이 눈에 보이는 성전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옥좌 이런 것이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성전이 지상의 구체적인 장소라고 한다면, 하늘 높은 곳의 옥좌는 그런 구체적인 장소가 닮아낼 수 없는 하나님의 심층적 세계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겁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러나 이 시편기자에게는 정말로 하나님이 성전과 하늘 높이 옥좌에 앉아 계시다고 하는 그 사실에 명백했던 거예요. 이게 어떻게 명백할 수 있을까요. 사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인데 말입니다. 예, 그게 정말 우리가 살아가는데, 영적인 에너지라고 할 수 있어요. 여러분들은 어때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고 하는 것을 어떤 때 경험하나요? 아니 그런 것을 의식이라도 하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들은 풍월로 주먹구구식으로가 아니라 아주 실질적으로 하나님이 지금 함께 하신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여기 보이지 않잖아요? 어디 있어요. 찬송 부르면 무조건 우리와 함께 하시나요? 어떤 걸까요? 성전, 교회당에 들어가면 바로 그 곳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온 세계가 사실은 하나님의 보좌와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우리는 그런 것을 경험 할 수 있을까요? 이런 것들을 일반 신자, 일반사람들은 많이 놓치고 삽니다. 예민하게 느끼지 못해요. 다른 것만 우리들에게 크게 와 닿지요. 당장 해야 될 것, 누구하고 싸운 이야기, 드라마 봐야 될 것, 일상에서 처리할 문제들, 이런 것들이 우리 영혼을 다 지배하고 있지, 하나님이 리얼하게 우리의 삶에 들어 와 있고, 또 동행한다고 하는 사실을 찬송가도 그렇게 부르고, 기도도 그렇게 하잖아요? 그런 것을 입술로만 아니라 말 재주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인식하고 그 안에 들어가 있느냐,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건 여러분, 그냥 지나가면 못해요. 자꾸 그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음악이라고 하는 것도 금방 이해 못 하잖아요. 클래식 음악 같은 것은 좀 더 그렇구요. 팝송도 마찬가지고, 록도 마찬가지예요. 음악이라고 하는 것은 듣고 지나가 버리면 아무것도 아니죠. 그러나 그것이 반복 되어 가지고 음악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세계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전체를 늘 끌어가면 성령이 충만하다고 하는 거구요. 성령이 하나님 경험이거든요? 영성가들, 신비주의자들은 그 24시간 호흡하는 거예요. 아침 일어나서부터 계속 모든 삶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한다고 하는 인식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수영선수가 물속에서 살듯이 어쩌면 잠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도, 그런 거라 할까요? 베토벤 같은 사람이 귀가 막 먹었으면서도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 있었던 것처럼, 예술가의 그런 경험들, 시인들의 그런 경험들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끼나요? 내가 기분이 좋을 때 느끼나요? 그냥, 이거는 오늘 성경본문과 직접 연관 되는 건 아닌데, 답을 말씀 드린다면 이겁니다. 생명에 대한 인식이예요. 내가 얼마나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을 리얼하게 경험하는 겁니다. 밥을 먹을 때도 이것이 생명의 문제 아니겠어요? 이 밥알 하나가 우주의 태양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이 대기의 탄소, 물, 우주론적인 어떤 사건을 통해서 되어 진 것을 오늘 우리가 먹고 살았어요. 생명들이고, 우리가 숨 쉬는 것도 생명입니다. 이러한 생명의 창조주는 하나님이고 말입니다, 그러한 것을 우리가 매 순간순간 마다 정말 호흡하듯이 얼마나 느끼느냐 하는 겁니다. 여기 보이는 성전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높은 옥좌의 그 하나님을 경험하는 거예요. 성전은, 사람들은 아, 우리끼리 모이니까 즐겁다, 종교적으로 체험하는, 코이노니아를 한다고 할까요? 그런 것에만 머물러 있을 수 있는데, 시편기자는 더 심층적이지요? 참 놀랍습니다. 그런 게 있으니까 다른게 두렵지 않은 거예요. 그 하나님, 하늘 높은 옥좌에 계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뚫어 보는 거예요. 사람들 눈여겨보고 있다, 예, 어른이 동네 아이들 노는 것 보고 있는 거처럼 말이예요. 좀 비교하자면, 못된 꼬마들도 있고 그렇잖아요? 자기들끼리는 서로 그러는데, 어른들 눈에는 다 보이듯이 하나님은 하늘 공동체 옥좌에서 사람들을 뚫어 보신다. 만약 그걸 우리가 명확하게 인식하고만 있다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불의한 힘 앞에서 쉽게 타협하지는 않겠지요.

 

5절에 그 야훼 하나님은 죄 있는 사람, 죄 없는 사람을 가려내시고, 폭력 쓰는 자를 몹시 싫어한다, 미워하신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시편기자가 명명백백하게 인식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죄와 타협할 수 있겠어요? 못하지요. 6절에, 하나님이 그 악, 죄를 어떻게 판단하시는가 대한 문학적인 서술입니다. 숯불과 유황을 악인 위에 쏟으시며 불 바람을 그들 몫으로 안겨 주신다, 이건 소돔과 고모라성에 임했던 숯불과 유황, 그러한 표현들입니다. 이것이 쏟아진다고 하는 거지요. 그런데 악한 사람이라고 해서 이 세상에 늘 그렇게 인과응보식으로 그렇게 당하는 건 아닙니다. 그건 전혀 다른 차원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되요. 그냥 겉으로는 잘 되는 것 같더라도 숯불과 유황 이런 것들, 정신적인 것이라고 할까요? 영적인 차원이라고 할까요? 하나님의 심판이 그에게 임합니다. 겉으로는 떵떵 거리는 것 같아도, 사실 가장 큰 심판이 뭐겠어요? 하나님의 가장 큰 심판이 뭘까요? 뭐, 여러 가지로 표현 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을 용납해 두는 것,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을 그냥 내 버려두는 것, 이게 사실 가장 큰 심판이예요.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지가 거의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공허한 것을 더 채우기 위해서 더 많은 것들을 더 자극적인 것으로 신경쓰며 살게 되죠. 이게 얼마나 큰 불행이예요. 이런 것들이 유황과 숯불 같은 게 아닐까요? 네, 마지막으로 7절에 참, 이 시편기자의 말이 참 놀랍습니다. 그 야훼 하나님은 공정하시어서 옳은 일을 좋아하시는데, 그 옳은 사람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되리라 고 하고 있습니다. 참 놀랍지요? 하나님 얼굴을 어떻게 직접 보겠어요? 이것도 문학적 수사(修辭)입니다. 구약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제의적(祭儀的)표현이라고 그래요. 제사드릴 때 의식에서 나오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제사 여러 행위 중에서 하나님이 임재하고 그를 뵙고 하는 그러한 거라고 하는데요? 하나님의 얼굴을 우리가 뵌다고 하는 것은 뭘까요? 예? 하나님을 본 자는 죽습니다. 직접 보지 못해요. 그러나 이런 시적인 표현을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뭘까요?

 

모든 인간의 중심을 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이 이 세상의 그 어떤 두려움과 유혹을 벗어났을 때 경험하게 되는 궁극적인 평화, 네, 그러한 상태를 이야기 하겠지요. 하나님을 본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모든 불안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절대적인 평화, 절대적인 자유, 하나님이 주신 그런 선물 안에 온전히 들어가게 되는 그러한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말할 수 있습니다. 네, 오늘 이 시편기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예요. 이 세상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거예요. 그건 악으로부터 오는 구체적인 그러한 두려움입니다. 그건 교회 안에도 교회 밖에도 있고요. 실제적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또 유혹을 벗어 나는 거예요. 유혹은 어떤 걸까요? 여기 시편이야기에 따르면, 친구들로부터 오는 유혹이예요. 친구들로부터, 적당하게 타협해라, 피했다가 다시 해야지 네 안전을 보장해야 되지 않느냐, 그러한 유혹들입니다. 이런 두 가지 두려움과 유혹, 우리들에게 계속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억지로는 극복 못해요. 우리는 간사하기 때문에 늘 늘 우리 자신을 보존하려고 하는 생각이 예민하게 움직여서 조금이라도 나한테 불리한 것은 아주 거기 예민하게 작용합니다. 불리한 것은 멀리하고 조금이라도 유익한 것, 계속 거기 민감하게 반응해서요. 우리가 늘 거기 흔들리듯이 살거든요? 우리 생각과 우리 경험에만 의지하면 그렇게 됩니다. 더 중요한 건 하나님에 대한 우리 관계가 어떻냐에 따라서 우리는 이런 두려움과 이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바른 길을 용감하게 갈 수 있고, 그렇게 간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리라고 하는 시편기자의 마지막 결론처럼 놀라운 평화, 그런 기쁨, 자유, 그러한 세계 속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2500년도 더 된 아주 옛날, 옛날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었던 어떤 신앙의 선배가 기록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구체적인 위협 앞에서 또한 그 위협을 좀 피해서 멀리 떠나라고 그래서 신상의 안전을 보존하라고 하는 친구들의 유혹 앞에서, 이 시편기자는 그 모든 것들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자신의 모든 안전을 의지한 그런 모습을 저희들이 읽었습니다. 우리와 전혀 다른 시대에, 전혀 다른 상황 가운데서 살았던, 그 사람이었지만, 그의 신앙이 바로 우리 신앙이 되도록 그리고 그의 삶의 고민들이, 그리고 그런 결단들이 바로 우리 것들이 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그냥 스쳐 지나가듯이 세상을 살지 않고, 오늘 우리가 직면해야 될 이 삶에 내용들을 잘 파악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들이 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이런 일을 감당하기에는 저희들이 너무 어리석습니다. 생각도 짧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오니 저희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허락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rofile

[레벨:38]클라라

2010.01.20 22:20:48
*.229.151.223

내 영혼의 집을 넓혀 주소서

 

오 주님,

내 영혼의 집은

주님이 들어오시기에 너무 비좁으니 넓혀주소서.

폐허가 된 집이니 수리하여주소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것이

너무 많이 있음을 알고 고백하옵니다.

 

그러나 누가 내 영혼의 집을

깨끗이 청소해주겠습니까?

주님 외에 누구에게

"주여,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

"남들이 지은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님의 종을 건져수소서."라고 부르짖겠습니까?

내가 믿는 고로 주님께 아뢰옵니다.

 

주님, 주님께 내 지은 죄를 고백할 때

마음의 죄악을 사하여주셨던 것을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지금, 진리 자체이신 주님과 논쟁하려 함이 아닙니다.

내 죄악이 스스로 거짓증거함으로써

나 자신을 속이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과 논쟁을 하려 하지 앟습니다.

오 주님,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누가 설 수 있으리이까?(시 130:3)

아멘.(1.5.6)

 

어거스틴 『고백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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