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게시판

74편 녹취록- 성소 파괴와 하나님의 능력

조회 수 1648 추천 수 0 2010.01.26 22:51:27

시편강해 74편-성소 파괴와 하나님의 능력

 

예, 오늘 시편 74편 공부하겠습니다. 성경 가져 오셨지요? 74편 이것도 “아삽의 시”로 되어 있네요? 지난주에 공부한 73편도 “아삽의 시”였어요. 여기 74편은 마스길이라고 하는 표제가 더 달렸군요? 난외주(欄外註)에 보면 마스길이“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아삽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저희들이 본문을 읽겠습니다. 이렇게 시계 방향 거꾸로 해 갖고 돌아가면서 쭉 한절씩 읽겠습니다.

 

〚아삽의 마스길〛

1.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

2.옛적부터 얻으시고 속량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께서 계시던 시온 산도 생각하소서

3.영구히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 나이다

4.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 가운데에서 떠들며 자기들의 깃발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으니

5.그들은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6.이제 그들이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7.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8.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리가 그들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9.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 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10.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비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11.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주의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손을 빼내시어 그 들을 멸하소서

12.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13.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14.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으며

15.주께서 바위를 쪼개어 큰 물을 내시며 주께서 늘 흐르는 강들을 마르게 하셨나이다

16.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17.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18.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 나이다

19.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원히 잊지 마소서

20.그 언약을 눈여겨 보소서 무릇 땅의 어두운 곳에 포악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나이다

21.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

22.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 소서

23.주의 대적들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께 항거하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

 

아멘! 예, 74편 쭉 함께 읽었습니다. 오늘 이 74편의 내용은 아주 명확합니다. 그래서 읽으면서 대충 어떤 뜻인가 하는 것들이 들어왔을 것 같아요. 제목을“성서파괴와 하나님의 능력”그렇게 정했습니다. 뭐, 그렇게 특별하게 잡은 게 아니고 있는 그대로예요. 성소, 예루살렘 성전이겠지요? 허물어지는, 파괴되는 이야기하고 좀 이제 대립적인데, 하나님의 능력을 여기서 찬양한다고 할까요? 그걸 확인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가 서로 대립된다고 하는 말은 서로 이해가 되시지요? 성소가 허물어졌다고 하는 것은 그건 하나님이 무능력하다고 하는 그런 실증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믿는 자들이 더 힘들어진다고, 하여튼 하나님이 모욕당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는 궁극적인 힘의 원천이다, 하는 얘기 아닐까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이 74편 안에서 서로 이렇게 날줄과 씨줄이라고 할까? 그러면서 어떤 사실을 이야기 해 나가려고 합니다. 성소의 파괴는 하나님의 무능력을 말하고, 또 중간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어떤 창조능력 이런 것들이 서로 시편기자의 고백을 통해서 새로운 영성을 우리들에게 열어 주고 있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제 짧막한 강의 초안에 처음에 그렇게 썼습니다마는 이 첫 구절이 참 막막한 거예요, 어떻게 보면 까마득하고,. 어떤 말문이 막힌다, 그렇게 이야기 할 수 도 있겠어요.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주께서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아주 구체적인 상황가운데서 나오는 어떤 토로라고 할 수 있고요. 외침이예요. 아주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그러한 상황에서 나오는 외침이거든요? 오죽했으면 이렇게 얘기했을까요? 그러니까 저도 이 공부를 위해서 뒤 늦게 읽고 준비를 하면서 첫 마디부터 좀 이 시편기자의 심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이게 서로 말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버리는 분이 아닌데, 어디나 계신 분이고요. 하나님이 어떻게 버릴 수 있습니까, 그 하나님의 백성들을? 안 되는 건데, 그렇다고 말 할 수 밖에 없는 이 시인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것들을 아, 좀 어려움이 있구나 아, 그러니까 이렇게 기도하지, 뭐 그런 정도로 생각하면 참 우리가 이러한 시편의 기도로 들어가기가 힘듭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셔야 되요. 마치 우리가 일반 시를 읽을 때도 그 시인이 그 단어를 쓰면서 어떤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이 시편시인도 어떤 게 있는 거예요. 어떤 상황가운데 빠져 있는 겁니다.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 그 세 가지로 일단 제가 그 시편시인의 마음을 좀 정리해 봤습니다. 첫 번째는 이 시인은 절망적인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겠지요. 이건 뭐 그렇게 새로운 어떤 그 이야기는 아니고요. 이미 그대로 제가 말씀 드린 겁니다. 아주 이 사람은 절망적이다, 하는 거지요. 우리는 그런 절망적인 것을 많이 경험하진 못합니다. 물론 할 수도 있는데, 쉽지가 않아요. 그냥 자기연민 이런 것은 가능하지만, 그러나 이 시인과 같은 절망 이런 것을 따라가기가 쉽진 않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자기 개인의 문제로 이런 건 아니예요. 다른 데서는 개인의 문제도 있긴 있지만, 이 사람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민족, 사회 공동체 자기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주 견딜 수 없는 그러한 상황을 보고 있는 거죠.

 

두 번째는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이러한 진술 속에 이런 것들을 생각 할 수 있는 거예요. 두 번째요. 이 시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순간적으로나마 불신한다, 이런 것도 우리는 경험 할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우리는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을 만나니까 아, 이거 하나님이 살아계시냐 아니냐, 그러한 데까지 가는 거죠, 이미 제가 앞에서 한 번 말씀 드린 것 같은데요. 이 하나님은 정말 전능하신 분이신데, 능력 있으신 분이신데, 자기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들 이 세계를 보면 아주 무능력한 것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그럼 하나님은 도대체 뭐냐, 그런 질문할 수 밖에 없는 거죠. 예, 세 번째는 이런 호소를 통해서 이 시인은 하나님의 행위를 촉구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세 가지로 정리를 했어요. 이게 꼭 뭐 정답은 아닙니다. 예, 우리가 앞으로 쭉 시편을 공부하게 될텐데, 이 시편이 끝나면 다른 걸 하겠죠?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는 것이 꼭 정답은 아니예요. 제가 이해하고 있는 어떤 기독교, 성서, 세계관, 그러한 데서 가능한대로 가까이 대답을 찾아보려고 하는 노력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 여러분들은 이런 공부를 통해서 꼭 내가 정답을 딱 찾으려고 하는 생각보다도 이 성서본문에 접근하는 방식을 배우는 게 나을 겁니다. 물론 어떤 답도 배울 수는 있겠지요. 좋은 선생은 학생들에게 딱 정답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답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는 거잖아요? 학생이 스스로 나중에 답을 찾아 가도록 해 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지금 제가 세 가지 말씀 드렸지만 이게 꼭 정답이라고 드린 것은 아니고요. 저의 영적 시각으로 한 이 문장이 아마 이러한 뜻을 내포하지 않느냐, 그런 차원에서 말씀 드린 겁니다. 과히 그리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예, 제가 여기 이 시인이 첫 마디가 너무 저의 가슴에 울림이라고 할까? 그래서 서론적으로 그렇게 말씀 드린 거예요. 왜 우리를 영원히 버리십니까? 라고 하는 그 절박한 상황, 그걸 저도 이 시인과 더불어서 나누고 싶은 거였지요. 예, 그런 걸 서론적으로 말씀을 드리고요. 오늘 본문을 교과서식으로 세 문단으로 나누었습니다. 전체가 1절부터 23절까지 있는데, 세 문단으로 나눠서요. 첫 문단은 1절에서 11절, 이거는 성소가, 성전이죠? 파괴당하는 일이었구요? 두 번째는 12절에서 17절까지, 창조자에 대한 신뢰, 혹은 찬양, 세 번째는 18절에서 23절까지, 하나님을 향한 탄원입니다. 이 셋으로 나눈 문단으로 나눈 각각의 제목만 보더라도, 이 시인이 무엇을 얘기하려고 하는 지는 대충 감이 오지요? 일단 그가 처한 상황은 그 유대인들이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그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고, 모멸 당하고 있고요. 어떻게 희망이 도저히 보이지 않는 상황에 처한 거구요. 그 때 이 사람은 절망해서, 완전히 절망에 완전히 빠지는 것이 아니라 딱 희망을 붙들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는 거예요. 조금 있다가 다시 자세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소파괴는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라 뭐라고 그랬지요? 오히려 반대로 무능력을 나타내는 그러한 상황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냐, 아니냐 이런 정말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다가 이제는 거기서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권능을 확인하는 거죠? 그게 확인된다면 하나님께 정말 마음 놓고 마음속에서 탄원할 수 있는 거죠, 그런 구도로 이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내용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첫 문단 1절에서 3절, 성소파괴입니다. 뭐, 시편기자가 이건 자세하게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뭐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정도예요. 3절만 보더라도 정확하게 아주 구체적으로 나오죠? 아주 명시적으로 나온다고 그래요. 아주 그냥 문자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이 원수는 어떤 이방인들이죠, 성소에 들어오면 안 될 그런 사람들이죠? 그래서 성전을 모독하는 사람들이죠? 그들이 들어와서, 그 다음에 음.. 뒤로 가면, 6절에 보면요, 그러니까 다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6.이제 그들이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7.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그림이 그려지죠? 이방인들이 들어와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와 이제 닥치는 대로 다 없애는 거죠. 어떤 것들을, 이게 종교개혁시대에도 그런 일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 성당에서도 좀 일어났습니다. 이게 사람이 참 어리석어서 같은 교회인데요, 그래도 그때 독일이죠, 종교개혁이 주로 독일에서 일어났으니까, 그런데 개혁파들도 서로 성격이 여러 가지입니다. 아주 과격한 사람들이 있었고, 좀 원만한 사람들이 있고 그랬어요. 마틴 루터 같은 사람은 종교개혁자 중에서도 어느 쪽에 속하겠어요? 좀 과격했겠어요? 원만했겠어요? 이 사람은 원만한 사람이에요. 이건 아주 보수적인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카톨릭에서 정말 많은 걸 바꾸지 않았어요. 신학적인, 정말 중요한 문제들, 이런 걸 짚었어요. 대개 다 그대로 했습니다. 과격한 사람은 뮌쩌((Thomas Münzer 1490~1525)라고 있어요. 뮌쩌, 이 사람은 카톨릭에 있는 건 모든 걸 다 파괴하고요, 그러니까, 재세례파(再洗禮派,Anabaptists)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성상들, 그림들을 다 불살라 버렸습니다. 농민전쟁을 일으키고 말이죠? 체제전복하려고 했었구요. 그래서 나중에는 루터하고 뮌쩌하고 싸웠어요. 이런 일들이, 그러니까 그 종교개혁시대 때에도 그렇게 로마 카톨릭 성당에 들어가서 다 쳐부수던 그러한 그림이 그려 질수 있는데, 이 당시 시편기자가 이야기 하고 있는 이거야 뭐 오죽했겠습니까? 이방인들이 뭐 알아보겠어요? 들어와서 다 닥치는대로 다 없애구요? 그런 걸 지금 목도하고 있는 거예요.

 

아, 영적으로 예민한 이 시인의 마음속에 이 눈에 이게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정말 이거는 참기 힘든 그러한 상황인거죠, 예, 그게 구체적으로 언제일까요?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인들에게 함락당한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최초로 당한 건 기원전 587년 바벨론에 의한 멸망이거든요? 587년은 꼭 외워 두세요. 제가 여러 번 설교 때도 했을텐데, 기원 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한 그런 해입니다. 예, 이게 왜 중요하냐면 구약성서는 모든 것이 이때를 기점으로 해서 기록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근원으로 돌아가게 되거든요? 이 바벨론 포로 사건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아, 도대체 우리가 누구냐, 하나님이 누구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이 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느냐에 하는 아주 근원적인 신앙에 대한 질문하게 된 사건입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예언자들이 이 바벨론 포로기간에서 활동했어요. 물론 앞서 있는 엘리아나 몇몇 예언자들이 있습니다마는 가장 많은 위대한 예언자들이 이사야, 예레미아 뭐 호세아 이런 사람들 거의 다 이 때 있었던 거죠, 이제 그때를 이야기 하는지 아니면 기원전 168년 로마의 안티오크스 4세에 의해서 또 한 번 이렇게 당한 그 때를 이야기 한 것인지 아니면 그 사이에 있었던 조금 더 작은 이런 저런 예루살렘 침탈 사건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일들이 물론 그 후에도 좀 있었지요. 그리고 가장 예수님 이후에, 기원후 70년에 있었죠? 예루살렘 멸망이, 로마에 의해서 그 때는 완전히 초토화 됬습니다. 기원 후 70년이요, 그러니까 여러 번에 걸쳐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또 세워지고, 또 복구되고, 헤롯이 다시 만들기도 하고 예루살렘 당시에 있었던 성전은 솔로몬성전이 아니라 헤롯대왕인가 누군가가 재건한 그런 성전이었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 성전이 혹시 어느 정도 되어 있나요? 저는 가보지 못해서, 가보신 분 계세요? 예루살렘 성지 순례 안 해 봤어요? 사진은 어디 있을텐데.. 어쨌든 지금 시인은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고 있는 그 장면을 경험한 겁니다. 그러니 어떻겠어요? 그 마음을 9절에 그렇게 표현하죠?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얘길 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한다고 했잖아요? 뭐, 확실한 증거들이 있어야 되는데, 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적이 안 보이고, 그리고 선지자도 없고, 말씀을 선포해 줄 사람도 없고 그리고 그 뒤의 일도 사실은 선지자가 하는 일일텐데, 이런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오래갈지 아는 사람, 지혜자라고 할 수 있겠네요, 표적도 없고, 선지자가 하는 일은? 그러니까 말씀도 없고, 아는 자도 없다고 했으니까, 지혜도 없고,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겠네요. 표적, 말씀, 지혜도 없다,

 

음.. 그러니까 9절만 갖고도 한 편의 설교가 되겠네요, 예, 표적, 말씀, 지혜, 이것이 없는 시대, 그런 방식으로 말이지요? 어쨌든 이 시인은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 세 가지, 이런 것을 찾을 수 없다는 막막한 심정에 빠져 있는 거예요. 예, 어떻습니까? 이런 심정이 와 닿나요? 아, 그때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런 정도는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오늘 우리들에게는 어떨까요? 우리가 그런 경험들이 있을까요? 물론 사업이 망했다거나 혹은 뭐 갑자기 건강진단을 받았는데, 위급한 병으로 진단이 났다거나 이런 경험들로 절망적인 상황에 빠질 수도 있긴 있습니다, 오늘 이 시편기자는 그런 차원은 아니구요, 자기 민족에서, 자기 민족이 당한 문제들,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묵살당하는 그런 상황에 대한 절망감이라고 하는 겁니다. 요즘에야 그런 일들이 없다, 뭐 평안하다, 나름대로 먹고 살만 하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시인들의 이런 마음을 우리가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걸 뭐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 삶이 이제 안이하다고 할까요? 나이브라고 좀 얘기하죠? 그냥, 뭐 따뜻하게 잠자고, 배불리 먹고, 내 몸 건사하나 잘 하고, 가족을 잘 돌보고, 사실 그런 일들만 하더라도 쉽지는 않은 거예요. 그게 아주 중요한 건데요? 그러한 것으로 다 자족하는 그러한 이 세대가 됬습니다. 일종의 사회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부르조아(bourgeoisie)적인 생각이거든요? 부르조아가 나쁜 뜻은 아닙니다. 어떤 시민이라고 하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걸 일종의 시민종교라고 합니다. 시민들, 그러니까 건전한 시민들, 그런 걸 목표로 하는 종교로 빠질 수 있는 거죠, 미국의 복음주의 신앙들이 다 그렇습니다. 릭 웨렌 목사라든지, 이런 분들의 말씀들이 건전하잖아요? 그러니까 미국의 중산층, 시민들에게 맞는 그러한 신앙인 거죠, 그걸 제가 뭐 나쁘다 매도하는 뜻으로 말씀 드리는 건 아니구요, 이제 그건 성서에 눈을 뜨는 건 아니다, 특별히 십자가 신앙이라고 하는 이 사회의 걸림돌로 작용하는 영적인 상태까지 들어가지 못한 일종의 자족적인 그러한 신앙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뭐 우리가 이 세상의 고통을 우리들이 다 안고 살아야 되느냐, 그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서로 다르겠습니다마는 그래도, 최소한도 개방적이어야 하죠, 나와 내 가족이라고 하는 울타리를 넘어서 어떻게 세계와 특별히 이제 약자들과 우리가 어떻게 연대하고 사느냐, 실제적으로 얼마만큼 거기에 깊이로 들어가느냐는 건 그 누구도 말 할 수 없습니다. 용산문제가 작년 말에 해결 되서 다행입니다마는 일년 가까이 그런 일들이 벌어 졌구요. 아, 그게 이제 도시를 깨끗하게 하고 재개발 이런 거 하고 연결되어 있는 문제인데 말이죠, 그런 것들을, 뭐 그 놈들이 법을 어겼으니까 그렇게 됬지 뭐 그런 걸 어떻게 하느냐, 이런 식으로 접근하게 되면 뭐, 더 긴말은 필요 없는 거죠, 그러나 기독교 신앙, 세계를 창조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누가 법을 지켰냐, 안 지켰냐 하는 것은 사실 두 번째의 문제입니다. 인간다운 삶을 이 사회구조가 그걸 만들어 가고 있느냐 아니냐의 그런 관점까지 좀 나가와야 되겠지요. 오늘 이야기가 옆으로 많이 나갔습니다, 뭐 아예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시인의 아픔, 이런 절망적인 마음, 표적도 없고, 말씀도 없고, 지혜도 없는 거와 같은 그래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이런 영적인 고뇌, 그래서 하나님까지도 없느냐 이런 정도까지도 나가는 그러한 절박한 심정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이 시인과 같은 똑 같은 경지까지야 갈 수 없겠지만, 그렇지만은 자극을 받아야 되지 않냐, 우리 스스로, 그 뜻입니다. 예, 두 번째 단락은 12절에서 17절인데요?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시편기자가 그렇게 절망적인 가운데서 이제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참 중요합니다. 어떤 기억을 하는 거예요, 신앙은 기억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기억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떤 어떤 일을 하셨다고 하는 기억하는 거죠, 성만찬, 이것도 기억입니다. 예수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을 기억하는 거죠, 예언자들은 그것을 백성들에게, 민중들에게 그들이 까먹고 있을 때 어떤 사건을 기억하도록 얘기를 한 거거든요? 어쩌면 목사의 일도 아마 그게 아닐까 싶습니다. 절망하고 있을 때는 어떤 희망에 대한 것을 기억하게 하고 또 지나치게 자족하는 삶에 빠져 있을 때는 각성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기억하도록 하는 작업들 말이죠?

 

오늘 여기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합니다. 핵심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창조와 또 하나는 출애굽, 이 두가지 구약의 두 기둥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창조와 출애굽이에요. 창조는 이 세계가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는 거구요, 이 놀라운 이러한 생명사건을 보는 거구요? 출애굽은 악한 권력, 이집트라고 하는 제국의 권력에 억압당하는 아주 소수 민족을 하나님이 강압적으로 해방시킨다고 하는, 인간해방이죠, 예, 이겁니다. 이 두 가지가 굉장히 많이 연결 되어있습니다. 참고적으로도 이런 점에서도 연관되었어요.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구약의 가장 중요한 명령 중의 하나인 안식일을 지켜라 라고 하는 안식의 개념이 이 창조와 출애굽하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로 안식일 하면 주로 창조사건하고 연관된 것으로 알고 있죠? 6일 동안 뭐 만드시고 7일에 쉬셨으니까 안식일 지키는 거라고 하는 거죠? 그러나 이 안식일 뿌리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하고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레위기서에 보면 나와 있어요. 안식일을 지켜라 얘기 하면서, 십계명 가운데 있는 거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집트에서 어떻게 이렇게 해 냈는지를 기억하라 그 얘기죠, 그러니까 안식일을 우리가 지킨다고 하는 것은 성서주일이라고 합니다마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거죠, 지금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두 가지 관점에서 그렇습니다. 어떤 걸까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 이걸 기억하는 거죠, 창조사건, 하나님의 창조는 이건 어떤 누구에 의해서도 어떤 구조나 어떤 물질에 의해서도 대상화 될 수 없는 인간의 어떤 생명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거구요? 또 하나는 출애굽에서 나오는 그 존엄성이 해방이라고 하는 것, 인간의 자유와 해방 이 두 가지가 안식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뭐 그렇게 율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따지고 들어가 보게 되면, 굉장히 인간을 근본적으로 해방시키는, 구원시키는 놀라운 그런 개념인거죠, 그런 것이 자꾸만 주술 되고, 율법화 되고, 이런 쪽으로 왜곡 되서 문제이지 구약성서, 신약성서가 말하는 모든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놀라운 에너지, 다이나믹, 역동성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 이 부분 12절에서 17절에 창조와 출애굽이 서로 연관되면서 이야기가 되어 가고 있어요. 뭐, 조금 더 볼까요? 예, 13절에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이것은 홍해가 갈라진 사건을 벌써 이야기 하고 있잖습니까, 용들이 나오고 리워야단이 나오잖아요? 이건 가장 막강한 제국적인 힘들을 이야기하는 거죠, 이런 것을 다 깨부셨다 하는 거죠, 사막에 사는 자들에게 음식물을 주셨다, 이것도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것에 대한 표현들입니다. 그 후에도 다 물을 준다거나 그런 것들이죠, 16절, 17절 창조 예입니다. 낮도 주의 것, 밤도 주의 것, 빛과 해를 마련했구요. 땅이 경계를 정하시고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다, 이 부분에서 창조와 출애굽이 다시 강조되고 있습니다. 참 놀랍지요. 오늘 뭐 우리들에게 정말 필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되는 거죠, 어느 한 순간에도요. 이건 아,그냥 그러려니 하는 그런 도덕군자 연(道德君子 然)하는 설교조의 말이 아니라 이걸 실질적으로 그렇게 이해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출애굽, 해방 자유, 구원,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죄로부터의 구원, 이것은 또한 죄로부터의 구원은 뭐로부터의 구원일까요?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거든요? 기독교에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말이죠? 예, 이런 것들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은 이것을 기억하고 거기에 내 운명을 걸고 실제적으로 그렇게 있다면 그렇다면, 오늘 시인이 이야기 하려고 했던 그런 절망적인 상황으로부터, 그런 상황이 그렇게 우리를 절망시킬 수 없는 거죠,

 

예, 그 부분에서 제가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을 여러분들에게 참고적으로 말씀 드리려고 여기 적었습니다. 12절에서 17절까지 시편기자가 어떻게 하셨다, 어떻게 하셨다, 이 분을 알라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잖습니까? 이건 바로 창조자이며, 출애굽으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분의 능력에 대한 진술인데요, 이거는 곧 능력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두 말이, 그 두가지 하나는 거꾸로 이야기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구원하셨다 그 이야기를 거꾸로, 창조하고 구원한 분이 하나님이다 그 얘기입니다. 그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겁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다 아는 게 아니었어요. 그건 아주 오랫동안의 세월을 거쳐서 천천히 그 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겁니다. 그리고 사실 지금까지도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하게 아는 건 아니에요. 종말까지 그 분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아는 하나님도 다라고는 할 수가 없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설명을 안 해도 전달이 됐나요? 이심전심으로? 말하려고 했던거? 안됐나요? 아, 그러니까 창조와 해방을 가지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그 얘기입니다. 그 하나님이 다 드러나지 않은 숨어계신 분이예요. 그 분이 이제 생명과 창조의 능력을 점점 알게 된다면 바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거죠, 좀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해야 되겠네요. 지금 뭐 유전공학 이런 것도 많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아, 어떤 식물에도 있고, 어떤 동물에도 있고, 어떤 생명의 힘들이 거기서 작용한다는 말이예요? 그 생물학자들이 그런 것들을 연구를 하거든요? 좀더 직접적으로는 진화를 이야기해야 되겠네요. 모든 이름이 진화의 방식을 쭉 통해서 생명체들이 지금까지 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진화의 방식으로 아, 인간을 중심으로 많은 동식물들이 생명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 진화의 힘, 그건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이제 말하기가 좀 조심스러운 건데요? 진화가 곧 하나님이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건 아니구요. 창조와 출애굽의 권능을 가지신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런 시편기자의 고백에 따라서 그리고 아직까지 완전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그런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런 사실을 전제해 놓고 볼 때, 지금 세월이 점점 지나면서 점점 우리들에게 드러나고 있는 어떤 생명의 비밀들, 생물학적이고 유전공학적인 그런 세계까지 사실은 하나님을 우리가 이해하는데 굉장히 소중한 그러한 길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이런 것없이 그냥 머릿속으로 옛날부터 알고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어떤 산신령 비슷한 그러한 관점으로 놓고 진화론 이런 것들은 잘 못 되었고,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없애고 뭐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그건 이제 열린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그 갇힌 그런 이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를 바로 이해 할 수가 없다는 거죠, 예, 좀 어려운 문제를 괜히 제가 끄집어 내 갖고 여러분들을 골치 아프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냥 지나가는 거니까 둬 두시고요?

 

마지막으로 18절에서 23절까지 탄원입니다. 절망적인 사건? 성소가 무너지고요,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한 이 사람은 이제 하나님에게 탄원기도를 드립니다. 좀 해 주십사 라고 하는 그러한 호소죠, 막무가내로 호소하지 않는 거죠?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라고 하는 확인하면 당연하게 그런 탄원이 나올 수 있겠죠, 저는 여기서 탄원의 내용을 21절에서 나오는 두 가지로 정리 했습니다. 하나는 학대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지 말게 하소서, 두 번째 가난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 예, 여기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오죠? 학대 받은자, 가난한 자, 지금 뭐 성소가 침탈당하고 이스라엘 민족들을 이야기 하는 거겠죠? 그것만이 아니라 늘 유대세계 안에서도 학대 받은 자가 가난한 자가 있었으니까요. 어쨌든 하나님이 출애굽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해방과 자유를 허락하시는 분이구요? 그래서 하나님에게 이렇게 탄원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거지요. 학대받은 자가 부끄러워하지 않고 돌아가게 해 달라, 학대 받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거예요? 그렇잖아요? 그게 좀 부끄럽지 않도록 좀 해 달라고 하는 간절한 기도? 가난한 자는, 이것도 부끄러운 거거든요?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하거든요? 그러나 그런 사람이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탄원은 실제적인 도움을 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나길 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관점에서 우리가 학대 받는다 하더라도 혹시 가난하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관점을 창조와 출애굽의 하나님에게 영적인 시각을 맞출 수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거죠, 오히려 학대하는 사람이 부끄러워지는 거구요?

 

이럴 때 우리는 찬양할 수 있는거죠. 자기 합리화로써 찬양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참된 능력을 가지신 분이 누구냐에 대한 그런 인식 안에서 나오는 찬양입니다. 예, 이런 것들은 제가 기록했습니다만,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아주 허심탄회하게 하나님께 탄원하면서, 그러나 그 상황이 지금 당장 바뀌지 않는다 하더라도, 수치스러운 상태를 수치스럽지 않은 상태로 나가고, 가난이라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단계까지 나갈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이 있는 거죠, 예, 저도 오늘 여기 말씀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이런 시인의 영성을 좀 가지고 삶을 살아야 되지 않냐 하는 거죠, 예, 그런 것이 없으면 참, 삶이 쓸데없는 것으로 뒤범벅이 되거나 지루해지거나 둘 중에 하나가 되겠지요. 예, 여기까지 공부는 했고요, 조금 후에 질문, 응답 그런 것 좀 받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부른 찬송을 다시 한 번 불러 볼까요? 주현절을 주제로 한 찬송입니다.

 

순결한 찬송과 거룩한 노래로 그 이름 높이세 구주예수

어두운 세상에 광명을 주셨네 하나님 구원을 이루셨네,

 

순결한 찬송과 거룩한 노래도 그 이름 높이세 구주예수

어두운 세상에 광명을 주셨네 하나님 구원을 이루셨네,

 

예, 자꾸만 부를수록 좋지요, 익숙해지니까,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하고 공부를 마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가 영원히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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